관동타통(関東打通) (3) - 요코하마

관동타통(関東打通) (3) - 요코하마

빠르게 요코하마를 둘러보고 귀환

임명묵

산케이엔을 둘러본 뒤에는 슬슬 귀국 비행기 시간이 다가와 빠르게 요코하마를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 요코하마의 대표 관광지는 요코하마 중화가. 예전부터 사진으로만 많이 본 문을 실제로 보니 확실히 좋았다. 요코하마 중화가는 에도 막부의 개항 시기부터 형성된 굉장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는데, 서구 상인들이 중국인을 통역으로 많이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사실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상인 권력도 이렇게 형성된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자체적인 상업 역량과 국가 역량이 탁월했기에 중국에 잠식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식당보다는 동네 사람이 가는 좁고 허름한 식당에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매운 산마멘이라는 음식인데 이곳 가나자와 현에서 발달한 일본식 중화요리라고 한다. 볶은 야채와 녹말이 핵심이다. 그런데 매운 맛이라고만 써있고 그다지 맵지도 않은 다른 일본 요리와 달리 이건 진짜 진짜 매웠다.

요코하마 중화가의 다른 상징인 관제묘.

안에는 관우 상이 있는데 안까지 들어가려면 돈을 추가로 내야 했다. 딱히 관제묘에 참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서 이건 패스.

그 다음엔 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에 들어왔다. 여기서 발견한 사람은 필리핀의 독립 영웅 중 하나인 아르테미오 리카르테 기념비이다.

1896년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독립 투쟁이 발생했다. 필리핀 독립군은 상당한 기세로 스페인을 몰아붙였지만, 스페인군의 증원에 당해내지 못하고 일단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아르테미오 리카르테는 이 시기 필리핀 독립군에 참여한 군사 지도자로, 필리핀군에서의 계급은 장군이었다. 하지만 이후 미서전쟁으로 미국이 필리핀에 진입하자, 미군에 당해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미국은 그를 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홍콩으로 추방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리카르테는 영국령 홍콩의 인도인들과 교류하며 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을 이어갔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 정부는 리카르테를 상하이에 수감하여 여러 복잡한 독립운동/외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 때 갑자기 일본이 등장하여 리카르테를 구출했다. 이 구출에 힘을 쓴 사람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인도의 독립 운동가였던 라시 베하리 보스와 현양사의 도야마 미쓰루였다. 이후 1923년부터 리카르테는 요코하마에 살았는데 그 인연으로 요코하마시에서 이 기념비를 세워준 것이다.

물론 리카르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2년에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리카르테는 일본군과 함께 필리핀에 귀환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필리핀인들이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리카르테에게 필리핀인을 위무하라는 역할을 맡겼다. 그는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주할 때 "나는 나의 조국에서 죽겠다"라고 하며 일본으로의 탈출을 거부하였고,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일본 필리핀 주둔군을 따라 루손 섬을 계속 이동했다. 야마시타군은 6월에 최종적으로 궤멸되었고 리카르테는 이질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1945년 7월에 78세로 사망했다.

필리핀의 리카르테, 인도의 라시 베하리 보스, 일본의 도야마 미쓰루.. 아시아 근대사의 복잡한 교차를 실감하게 하는 인물들이다.

역시 항구 도시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요코하마.

일본과 미국은 전쟁을 했지만 언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냐는 듯 빠르게 우방국으로 관계를 회복했다. 1962년에 세워진 일미 걸스카웃 우애 기념비라고 한다.

요코하마-샌디에이고 자매결연 25주년 기념비. 굉장히 오래된 것 같아서 대체 언제 이 결연을 맺었지? 하고 찾아보니 1931년이라고 나온다. 이 기념비는 아마 1956년이나 1957년에 세워졌을 것이다. 자매결연을 맺자마자 31년부터 45년의 '15년 전쟁'과 10년에 걸친 GHQ의 미군정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관전기(Transwar period)의 폭풍을 뚫고 다시 세워진 일미우호기념비 아닐까 싶었다.

요코하마에 있는 "붉은 구두를 신은 소녀" 기념상이라고 하는데, 평범한 기념상 아닌가 싶었지만 의외로 나무위키에 소개가 되어 있었다.

赤い靴はいてた女の子 異人さんに連れられて行っちゃった
붉은 구두를 신은 여자아이, 이국 사람에게 끌려갔다네.

横浜の埠頭から汽船に乗って 異人さんにつれられて 行っちゃった
요코하마 부두에서 기선을 타고 이국 사람에게 끌려갔다네

今では青い目になっちゃって 異人さんのお国にいるんだろう
이제는 파란눈이 되어 버려서 이국사람 나라에서 살고 있겠지

赤い靴見るたび考える 異人さんに逢うたび考える
빨간 구두 볼 때마다 생각이 나네. 외국사람 볼 때마다 생각이 나네.

나무위키의 설명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

https://namu.wiki/w/%EB%B6%89%EC%9D%80%20%EA%B5%AC%EB%91%90%EB%A5%BC%20%EC%8B%A0%EC%9D%80%E2%80%A6

"원래는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면서 한 미국 선교사 부부에게 입양된 여자아이로, 그후 작사가가 이 아이의 엄마를 만나 그래도 미국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엄마의 희망을 담아 지은 가사라고 하지만 정작 그 여자아이는 배를 타기 전에 결핵에 걸려 미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선교사 부부가 도쿄의 고아원으로 보냈고, 1911년에 9살 때 죽었다고 한다.

1973년에야 여자아이의 이부동생이 이 사실을 NHK에 제보하며 다시금 조명 되었는데, 어머니는 평생 딸이 미국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 죽었다고. 가슴 아픈 이야기다."

1854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에 따라 에도 막부와 미국이 체결한 일미화친조약. 바로 여기가 그 무대라고 하여 이렇게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태평양을 마주보며 일본과 미국이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다.

일본의 유라시아 연구 학자가 모은 컬렉션을 소장한 사설 유라시아 박물관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요코하마에 위치 해 있었던 러시아-아시아 은행(로아 은행/Russo-Asia Bank) 지점 건물이다. 20세기 초 러불동맹이 심화되면서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에 대거 투자를 하였고, 이 은행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맞물려 태평양으로 진출해 빠르게 세계적인 은행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폐업하게 되었다.

요코하마 개항 기념관인데 이 시기에는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서 방문할 수 없었다. 오카쿠라 텐신이 태어난 곳도 이 근처라고 인터넷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개항의 언덕"이 있다. 이곳에 메이지 일본의 서양 방문 사절단인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항을 한 것을 기념하는 장소가 있다고 하여 왔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당황했었다. 구글 지도로도 뜨지도 않고...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발견했는데 의외로 세워진 지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헤이세이 30년이니까 2018년이 아닌가 싶다.

이후 나리타로 향하여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것 참 머나먼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시부야와 하라주쿠 사이의 2.26 사태 기념비를 보기로 했는데... 이게 방문하기가 그리 편한 위치는 아니었다. 일본 최고 번화가 사이에 있으니 슥 걸어갔다 오면 되겠지 했으나 걸어가서 당도하기에는 애매하게 먼 거리에, 역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도 애매하게 먼 거리라 여기 방문하는 데 시간을 꽤 많이 썼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는 비행기도 4만원 더 주고 1시간 뒤로 미뤄야만 했다...

2.26 사태에 관해서는 글을 하나 더 쓸 정도로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니, 일단은 노래 하나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2023년 두 번째 일본 방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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