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은 무엇인가 (3): 탈냉전과 의미의 위기

K-POP은 무엇인가 (3): 탈냉전과 의미의 위기

인간은 어디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임명묵

냉전 종식은 발전모델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알린 사건, 주변지대(rimland) 세력이 심장지대(heartland) 세력의 진출을 격퇴한 사건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냉전에서 미국의 승리를 돌아볼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이야기가 바로 미국식 대중문화의 승리다. 이미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간다는 인식, 사회주의가 적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존재론적 도전을 중단할 것이라는 기대는 널리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전망을 즐기는 사람들도 ‘1989년의 혁명’이라 불리는 동구권 공산주의 정권의 연쇄적 붕괴를 예측하는 데는 실패했다. 다수의 분석가는 공산당의 사회 통제력이 여전히 강력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시장 원칙을 일정 부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무엇보다, 강력한 소비에트 제국의 존재감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는 서방과 동구권 지도자들에게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현실화가 되었다. 1989년 혁명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사건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토록 급속한 체제 붕괴와 전환을 만들어낸 동력에 서구의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소련에서도 많은 사람이 단파 라디오를 통해서 미국과 영국의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고, 탈린과 레닌그라드처럼 ‘서방을 향한 창’인 발트해의 항구 도시들에서는 서독의 디스코와 미국의 헤비메탈 음반이 들어오고 있었다. 필자가 일전에 만났던 카자흐스탄 출신의 한 중년 남성은 1980년대를 ‘모던 토킹’과 ‘보니 엠’의 시대로 회고한다. 소련에서도 서방 세계와 가장 단절되어 있었다고 간주되던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에서도 서구 대중문화는 거의 실시간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냉전의 후반부에 미국, 나아가 서방 대중문화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인구 구조의 변화에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인류 사회는 양차대전의 위기에서 살아남아 그럭저럭 안정적인 지구적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제3세계의 많은 지역은 탈식민화와 냉전, 대대적인 사회 변혁을 위한 동원 체제를 겪었지만, 철의 장막 양편의 북미, 서유럽, 동유럽, 소련에서 그런 단어들은 점점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발전을 위한 대중 동원과 지정학적 투쟁과 생존을 위한 총력전 체제가 일단 걷히자, 경제는 일상적인 관리의 문제가 되었고, 발전된 소비재를 어떻게 공급할 수 있는지가 각국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우주 경쟁은 새로운 계몽주의의 비전을 상징했지만, 사실 그만큼이나 중요한 경쟁은 닉슨과 흐루시초프의 ‘부엌 논쟁’이기도 했다. 세탁기, TV, 청소기와 같이 가사 노동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도구는 물질적 풍요와 새로운 삶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닉슨과 흐루시초프의 '부엌 논쟁': 우주에서 벌어진 것만큼 격렬한 냉전이 부엌을 두고 벌어졌다.

따라서 전쟁 이후 새롭게 태어난 세대는, 비록 스푸트니크 쇼크와 쿠바 미사일 위기, 나토의 에이블 아처 합동 훈련이라는 핵전쟁의 공포와 함께 살아가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이전 세대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동원 체제에서 부분적으로 해방된 전후 세대는 더 긴 여가를 누리며 부모의 감시에서 벗어나 일상의 자유를 추구했다. 게다가 전후 세대는 무엇보다 평화의 시대에서 태어나 인구가 많았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성년으로 부상한 1960년대가 되었을 때 무언가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불러올 것은 분명했고, 그 물결은 1968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양차대전과 대공황 속에서 집단적 의제 속에서 의미를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사회, 문화적 자유화와 개인화를 외쳤던 이 세대를 우리는 68세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프랑스나 독일의 학생 운동이나 일본의 전공투, 혹은 미국의 히피 문화와 월남전 반전 운동과 공민권 운동을 통해서 68혁명을 이해하지만 사실 68혁명은 서구 세계를 넘어 지구적 규모로 펼쳐진 사건이었다. 그리고 공산당의 사회 통제와 문화적 검열이 당연했던 철의 장막 건너편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스탈린 후기 시대부터 힙스터라는 뜻의 ‘스틸랴기’라는 용어가 새로운 문화적 유행을 선도하는 청년층을 가리키는 말로서 널리 쓰이고 있었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전은 청년층이 주도하는 자유롭고 국제적인 도시로서 모스크바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1964년에 보수적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집권으로 문화적 해빙의 기세는 다소 꺾였다고는 하지만, 소련 공산당 기관원들과 문화 예술 인사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어떻게 공급할 수 있을지를 두고 계속해서 고민했다. 이렇게 후기 소비에트 시대에 나온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여전히 소비에트 권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고전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모스크바 청년학생축전을 위하여 공개된 곡인 '모스크바 근교의 저녁', 소위 'Moscow Nights'.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불운은 그런 고민을 통해 만들어낸 문화 콘텐츠들이 서방, 특히 미국에서 생산하는 콘텐츠보다 매력이 부족했던 데 있었다. 일찍이 가장 먼저 포디즘에 근거한 대중사회를 만들었던 미국에서는, 흑인 음악, 라티노 음악, 유럽 음악, 미국 각지의 정착민 음악의 전통을 창의적으로 혼합하며 매력적인 새로운 음악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등장한 재즈는 스탈린 시대 소련으로까지 침투하며 문화적 유행을 선도했다. 전후 시대가 되었을 때 그 흐름은 로큰롤의 상징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1960년대의 비틀즈와 밥 딜런으로 이어졌고, 68혁명 이후에는 더욱 급진적으로 달려나갔다. 전후의 청년 대중이 원하는 락 음악과 디스코 음악, 팝 음악 등이 우후죽선처럼 쏟아져 나와 세계인의 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68혁명이 만들어낸 문화적 자유의 분위기, 풍요를 통해 자유로운 소비를 할 수 있게 된 청년층의 경제적 조건, 기존의 사회적 관습보다도 이익을 위해 먼저 움직이는 대중음악 산업계, 전세계를 끌어들이는 서방의 경제적 활력과 제국주의 시대에 구축한 지구적 네트워크는 그 어떤 것보다 서방 대중음악을 매력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발전된 통신망에 힘입어 이 음악들은 철의 장막 건너편으로 그대로 건너가고 있었다. 따라서 동구권이 누구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무너진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서방 세계의 문화적 유행에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더는 기다리기 싫다는 조급증 때문이기도 했다. 데이빗 보위가 1987년 베를린 장벽에서 공연을 했을 때, 장벽 건너편의 동베를린 청중들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게 즐기고 있었던 서방의 대중문화를 자신들도 누리고, 또 참여하고 싶다는 목소리를 외쳤다. 이때는 이미 최초의 전후 세대가 40대가 되어 사회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농촌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혁명적 주체로 전환시켜 강철을 생산하는 노동자이자 전선의 화염에도 달려들 군인으로 만드는 데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으나, 풍요 속에 성장한 전후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1989년 혁명은 빌리 조엘, 메탈리카, 스콜피온즈의 승리였다.

볼셰비즘의 종식을 알린 가장 중요한 콘서트, 1991년 모스크바 '몬스터즈 오브 락', 혹은 'Monstry Roka'.

냉전이 끝난 뒤에 ‘세계 문화의 미국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웠다. 공산주의의 패배를 선언한 ‘역사의 종언’ 이후의 화두는 이제 ‘세계화’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계화가 곧 압도적인 문화적 매력과 유통망을 지닌 미국 문화의 지구적 확산으로 귀결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서방 세계의 중요 동맹이었던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도 대중적으로 나타난 우려였다. ‘얄팍하고 말초적인 미국 문화’가 깊이 있는 전통을 보유한 각국의 고유 문화를 모두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미국보다 더 위협스럽게 인식되었던 적인 소련 공산주의마저도 사라진 상태였다. 소련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라면 미국 문화를 그 방파제로서 용인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면 미국 문화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이 초래한 진짜 위기는 ‘잠재적 미국화의 위협’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련의 해체는 대신 그보다 더 심원한 위기를 만들어냈다.


“'역사의 종언'은 매우 슬픈 시대가 될 것이다. 인정을 위한 투쟁, 순수히 추상적 목표를 위해 목숨도 걸고자 하는 의지, 담대함, 용기, 상상력과 이상주의를 소환한 세계적 이념 투쟁은, 경제적 계산, 기술적 문제의 끝없는 해결, 환경적 우려와 세심한 소비자 요구의 만족으로 대체될 것이다. 탈역사 시기에는 예술도, 철학도 없어질 것이며, 그저 인류사 박물관의 항구적인 돌봄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와 내 주변인들이 역사가 존재하던 시대에 대한 강력한 향수를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런 향수들이 다가올 시대의 탈역사적 세계에서 경쟁과 갈등에 계속 연료를 공급할 것이다. 나는 역사의 종언의 불가피함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1945년 이래로 유럽에서 창조된 문명과 그것의 북대서양과 아시아의 파생물들에 대해서 매우 강한 양가 감정을 느낀다. 아마 역사의 종언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이 지루함의 전망이야말로 역사를 다시 한 번 시작하는 데 복무할 것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언>

냉전과 함께 찾아온 ‘역사의 종언’의 감각은 분명 진실된 것이었다. 후쿠야마의 논문이 아무리 ‘틀린 예언’이었다고 하더라도, 냉전 종식은 18세기에 탄생한 계몽주의 서사의 궁극적인 끝을 의미하는 사건임은 분명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냉전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거대한 의미 체계가 제공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의 의미는 종교적 전통과 제국, 혹은 왕국에 있었다. 유일신부터 조상신까지 다양한 초월적 실체들을 믿으며 사람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계몽주의는 그런 의미 체계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18세기와 19세기는 인간의 이성과 그에 따른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계몽주의자들과 여전히 전통을 통해 의미를 추구하고자 했던 전통주의자들의 투쟁 속에서 역사가 전개되었다. 산업화를 통해 전통이 쓸려나가고, 대중사회가 형성된 20세기에서는 ‘어떤 계몽주의가 가장 옳은가’를 둔 경쟁이 역사를 규정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개인과 집단이라는 틀을 통해서 계몽주의를 각기 달리 해석했다.

이런 싸움들은 갈등과 투쟁, 유혈 학살과 핵전쟁 위기까지 수반하고는 했지만 그래도 대다수 인간에게 일정한 역사의 감각과 의미를 제공하는 데 탁월했다. 경쟁 이념들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내세웠다. 전통주의자들이 보기에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삶을 목적 없이 공허한 것으로 만드는 철부지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전통주의자들은 몽매한 과거에 사로잡혀서 인간의 밝은 미래를 거부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들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인간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할 자유만을 보장한다고 경멸했다. 따라서 개인, 가족, 노동조합, 기업, 지역 사회, 국가, 세계 체제까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또한 경합하는 여러 이념을 통해서 정의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은 역사의 거대한 진로 속에서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존재와 사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그런 맥락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유주의는 경쟁 이념과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투쟁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자유주의는 그 자체의 목적이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탈역사 시대의 지구적 지배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는 이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상태의 완벽한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이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자유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두 기둥이 역사적 구성물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자연적 철칙으로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이제 추상적인 목표와 그것이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숙고한 채 행동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철칙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하여 시민 행동은 소비자 후생, 소득 증대, 환경 개선과 같은 중산층의 기본 욕구로 정의되었다. 물론 서구 세계 바깥에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 이야기들도 대다수는 제1세계에서 완성된 ‘역사의 종언’을 그 바깥 세계에서도 마무리 짓기 위한 후주곡으로 해석될 따름이었다.

1990년대의 전망: 세계의 미국화와 그에 대한 저항이 '후주곡'을 구성할 것인가?

문제는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허감, 무의미함과 같은 심리적 위기를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물론 개인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미를 자발적으로 창출하라며 인간에게 목적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경쟁 이념이 제거된 자유주의 하에서는 세속적 성공과 소비를 통해 달성되는 성취가 대체로 삶의 목적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목적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 성장을 통해 실질적인 생활 수준의 증대를 꾸준히 체감할 때는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화된 경제는 ‘다수 국민’이 누리는 ‘꾸준한 상승의 감각’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늘어나는 불평등과 변동성은 삶의 감각을 몹시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화 경제가 만들어낸 불안감은 자유주의 하에서 그러한 불안감을 견디게 해줄 수 있는 여러 관계망이 느슨해지거나 파괴되면서 극대화되었다. 20세기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아직은 그래도 틀을 유지하고 있던 종교적 전통, 지역 사회와 공동체의 문화, 가족 및 친족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농촌 사회나 산업 지대는 그런 각종 사회적 관계망의 기반이 되어주는 공간적 배경이었다.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1970년대가 되었을 때, 68혁명과 탈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이러한 배경 조건들이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청년 세대의 세속화와 탈종교화 경향, 생산 시설의 이전과 재배치, 피임약의 보급과 성해방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는 각종 제약들이 해체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제약의 해체가 ‘자유’를 증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업은 낙후된 생산 기지를 버리고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면서 이윤 획득의 자유를 누렸다. 개인은 종교의 도덕률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설계해나갔다. 많은 여성들이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가부장제, 원치 않는 임신, 부모의 의사로 인한 결혼 등으로 인한 커리어 단절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해 나갔다.

하지만 세기말, 특히 21세기에서는 사회적 관계망과 공동체의 해체가 새로운 아노미를 만들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공동체의 약화는 상호 부조를 중단시켜 세계 경제의 변동성에 대한 개인의 위기 대응 능력을 약화시켰다. 불평등의 가파른 상승은 대다수 사람에게서 자유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의미 원천인 물질적 조건의 개선과 소비 선택지의 다양화를 박탈했다. 직업 세계에서 ‘커리어’를 향한 상향의 감각은 자유주의가 줄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경제가 복잡해지고, 요구하는 인적 자원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커리어’는 역시나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탈냉전과 세계화는 그나마 다수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의미의 최종적 원천인 ‘국민 정체성’도 위협했다. 사실 국민 정체성은 계몽주의와 함께 진군하여 전통 사회의 여러 다양한 정체성을 녹여버린 용광로였다. 민족주의는 서로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 용모와 피부색이 확연히 다른 사람들, 소유한 부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각각의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의 틀로 통합했었다.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의 국가는, 민족 구성원들이 공동의 힘을 모아 자유주의가 되었든 사회주의가 되었든 계몽주의가 제시한 비전을 달성하는 도구였다. 특히 포디즘 사회 체제가 전통 사회를 컨베이어 벨트로 흡수하여 대중사회로 재편하면서, 국민 정체성은 새로운 산업 사회에서 개인의 자아를 정의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까지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 정체성도 두 가지 이유로 탈냉전 시기에 역시나 빠르게 해체되었다. 첫째, ‘역사의 종언’이 이루어지면서 국민 공동체가 공통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러시아 민족, 혹은 소련의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는 ‘소비에트 인민’은 사회주의 건설과 제국주의 격퇴라는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뭉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인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지키고 전체주의를 막는다는 대의를 통해 협력했다. 양대 초강대국이 거느리고 있던 제1세계와 제2세계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계몽주의의 비전을 수용하여 발전한 선진 세계를 추격하고자 했던 제3세계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발전을 향한 계몽주의 자체의 비전과, 발전의 내용에 따른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투쟁은 국가를 내부적으로 결속할 수 있게 해주었고, 국경 안의 다양한 차이와 그에 따른 긴장이 폭발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냉전의 해체와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완수’는 국가가 추상적인 목표를 위해 공동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선거를 통한 민주 정부의 집권과 관료와 기업, 소비자의 노력으로 꾸준한 국민총생산의 상승을 이루어내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정치인이 국가적 프로젝트와 그를 위한 결속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라는 경쟁 이념이 없는 한 사회의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모두 설득하고 강제할 구심력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주장은 전혀 실효성을 가질 수 없었다.

냉전의 종식, 징병제의 폐지는 벨기에에서 오랜 세월 묵혀 있었던 왈롱인과 플랑드르인의 단층선을 부활시켰다.

국가의 목적 상실과 그에 따른 결속력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분화를 불러일으켰다. 국가를 구성하는 지역이나 하위 민족 집단은 각자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특히 냉전 체제가 끝나면서 징병제를 폐지한 나라들에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고는 했다. 게다가 탈냉전과 동시에 전개된 세계화의 바람은 계층 격차와 불평등을 큰 폭으로 늘렸으며, 계층에 따른 공간적 분화를 만들어내면서 계층 격차를 묶어주던 끈이 풀려버렸다. 탈산업화에 따른 구 산업 지대의 쇠퇴와 정보화와 항공 교통의 발전에 따른 세계 도시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세계 도시는 자신을 둘러싼 배후지보다 다른 세계 도시와 더 유사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계 도시를 언제나 유동적으로 오갈 수 있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계급이 배후지와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세계 문화’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회주의의 붕괴는 고소득 계급과 지역의 부를 저소득 계급과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망선고를 내렸고, 정체성과 계층의 분리를 막을 수 있는 힘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지역, 민족, 계층 등의 단층선으로 큰 틀에서 전개되는 국민문화의 해체는 국민문화를 주조하였던 미디어 환경이 변화면서 최종적으로 붕괴했다. 바로 미디어 빅뱅이라고 해도 무방할 통신 혁명이었다. 한정된 라디오와 TV 채널을 통해서 대중사회에 선별된 문화를 공급하며, 국민을 거대한 덩어리(mass)로 만들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위성 통신의 확산에 따른 급증한 TV 채널과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증식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의하여 붕괴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보기 싫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아야만 했던 문화 콘텐츠나 정보, 뉴스를 구태여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획득했다.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문화 콘텐츠를 마음만 먹으면 수십 번 돌려볼 수도 있었고(이는 냉전 시대에 VCR과 워크맨의 보급으로 이미 예견된 현상이기도 했다), 관심사가 맞는 이들끼리 수백km의 거리를 뛰어 넘어 소통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이 모든 변화들, 냉전 후기부터 시작되어 탈냉전의 시기에 본격적으로 폭발한 변화들은 마치 쓰나미처럼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의미 원천을 쓸고 지나갔다. 목적을 상실한 국가, 불평등과 변동성의 확대로 불안해지는 삶, 자율적인 상호부조망의 붕괴, 국가와 시장에 의하여 해체되는 공동체, 제한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자아실현의 기회, 사회를 묶어주던 국민 정체성의 분화와 약화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은 마치 세계 속에 발가벗겨 던져진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소속감을 주는 공동체와 삶에 목적을 부여해주는 거대한 이야기의 상실이 ‘의미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에서 잘려나간 개체는 이제 무엇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의미를 찾아낼 것인가? 이 질문은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정치적 위기와 대안의 목소리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동력이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어질 탈냉전의 30년을 규정할 것이었다. 영혼의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제 물을 찾아 무리 지어 초원을 누비는 야생동물처럼 새로운 의미의 원천을 찾으러 떠돌아다닐 것이었다. 그리고, 전자 통신 네트워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목말라 하던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었다.

<총몽>의 만화가 키시로 유키토가 탈냉전의 여명기의 어느 날 문득 떠올렸다는 공중도시 자렘과 그 아래 고철마을의 이미지.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4건)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유료구독을 하면 마음껏 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