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를 떠나 쿠타이시로
역사 도시 쿠타이시를 향하여
어머니 그루지야 상을 보고 내려오니 러시아어로 푸근한 멘트가 써있다. "스바보두 라씨스낌 빨리찌체스낌 자끌류체님".
러시아의 정치범에게 자유를! 이라는 뜻이다. 2019년에는 이게 어떤 의미가 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으니..
전날 또 술을 거하게 먹었다. 그루지야의 전통 술 중에 하나가 와인을 증류한 스피릿인 '차차'가 있는데 이걸 아주 열심히 먹었다.. 마트에서 한 병 사가지고 갔는데 호스텔에 있는, 러시아어를 매우 잘하시는 터키 아저씨가 잠깐 보여달라고 하더니 도수를 확인. "40도? 약해..."라고 하시길래 대체 정통은 얼마냐, 라고 물어보았다. "집에서 직접 담근 건 보통 60도가 정통이다."라는 충격적인 답변.. 그리고 우리는 훗날 정통은 모르겠으나 60도를 먹게 되는데...
카메라 앵글에는 다행히 숙취에 쩌든 고통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다음으로 향할 곳은, 스탈린의 첫 부인인 카토 스바니제의 묘가 있는 수도원.
쿠키아 성 니노 성당(Kukia Saint Nino Church). 그루지야 정교회 성당이고 마르자니시빌리 지하철역에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나오는데 언덕배기가 있어서 숙취의 몸을 끌고 가기에 쉽지는 않았다..
도시 외곽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니, 그루지야 할아버지들이 나무 밑에 앉아서 햇살을 맞으며 조용조용히 수다를 떨고 계셨다. 그분들이 보기에 동양인 둘이서 갑자기 찾아온 게 좀 신기했나본지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눈치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루지야에서 러시아어를 쓰는 게 조금은 주저되었는데, 아무래도 러시아랑 전쟁도 했고 반러 정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러시아어로 우리가 먼저 말을 걸어오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니네들 러시아어 어디서 배웠냐고...
이것이 스탈린의 첫째 아내 카토 스바니제의 묘. 사실 찾기가 쉽지 않다. 묘역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고, 아무래도 유명 묘지도 아니다보니 수풀이 잘 베어져 있지도 않다. 이 넓은 묘역에서 모든 묘를 다 찾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찾다가 결국에는 포기할까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보고 가는 게 말이 되나. 결국에는 수도원 마당에 할아버지들에게 동앗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쭤보기로 했다. 근데 한 분이, 진작 물어보지라고 하면서 자기만 따라오라고.. 엄청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데 진짜 못 찾는 게 당연했다.
1906년에 혁명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스탈린)와 결혼하고, 1907년에 첫째 아들 야코프 주가시빌리를 낳았다. 하지만 스탈린이 바쿠에서 혁명 활동을 하는 동안에 티푸스에 걸려서 사망. 스탈린은 비통한 심경으로 장례에 참석하고 카토의 무덤 자리에 몸을 던져서 끌어 안기도 했다 하니 아마 여기가 그 자리였던 것 같기도?
스탈린은 하지만 카토 쪽 처가 식구들을 대숙청 기간에 많이도 억압했고, 아들은 소련군으로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으니... 어려운 시대의 불행한 가족이 되었다.
성당 내부는 전형적인 정교회 성당이었다.
와인의 나라답게 어디를 가나 포도 나무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돌고 돌아 다시 트빌리시 역으로. 이 다음에 향할 곳은 쿠타이시라는 도시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바쿠-트빌리시 철도. 원래 19세기에 지어진 바쿠-아르메니아-트빌리시의 코카서스횡단철도가 전통적인 노선인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1988년부터 끊기면서 트빌리시-바쿠를 잇는 노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를 고립시킨 채 바쿠에서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카르스까지 가는 BTK 철도가 2017년에 개통하여 운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탈 것은 이 구질구질한 철도..
대략 220km 정도 걸린다.
이번에도 모든 간이역에 다 서면서 가느라 정말 가는 길이 고역이었다. 철도가 이 사람들한테는 여전히 마을버스 같은 교통수단인 듯 했다.
코카서스의 산악을 뚫고 영차영차 가는 기차..
소련 해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티가 나는 폐기관차들이 많이들 보였다. 터키와 이란, 이라크를 잇는 교통의 요지 코카서스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쪼개졌으니..
여기도 중간에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쿠타이시가 가까워온다고 점점 규모가 커지는 느낌이?
쿠타이시 외곽에 왔음을 알려주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스타일의 아파트들.
쿠타이시 역에 드디어 도착했는데 폐기관차가 그냥 방치된 채로 뭐 이리 많이 놓여있는지. 좀 쓰렸다.
그래도 쿠타이시 역 건물은 신식으로 지었는지 깔끔하다.
오자마자 도시가 어둑어둑해졌으니 일단 숙소를 찾아갔다. 진짜 이렇게 싼 숙소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저렴했는데 가격이 0원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돈을 안 냈다. 일단 가면 무슨 방도 하나도 없고 거대한 로비이나 거실 같은 공간에 내무반처럼 침대만 주르륵 놓여있었다. 가슴에 털이 수북하게 난 그루지야 젊은이들이 거기서 묵고 있었는데.. 먼저 호스텔 주인을 찾아서 체크인을 해야하니 주인 어딨냐고 물어보는데 모른단다. 며칠 전에 나가서 계속 안 오고 있다고...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하냐, 하니 일단 묵고 있다가 주인 오면 내~ 이러는 거 아닌가. 그래 알았다, 하며 일단 짐 풀고 씻고 빨래까지 착실히 돌렸다. 빨래 말리는 곳 어딨는지를 찾는데 옆집 아저씨가 오더니 마당 어디어디에 있다고 해서 양지 바른 곳에서 뽀송뽀송하게 말렸다. ㅋㅋㅋ
잡일을 끝내고 마트에 가서 그루지야 저가 코냑과 잡다한 안주를 사서 한 잔...
쿠타이시는 기원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역사도시고, 사실 이곳에 관광을 올 때도 쿠타이시를 거점으로 두고 근교에 광활한 역사 문화 유적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련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그루지야의 제조업 거점이라서 1989년까지만 하더라도 인구가 23만 명에 달했던 그루지야 제2의 도시였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 산업체들이 가동을 중단하고 인구가 급감하여 지금은 17만 명으로 줄었다. 대신에 터키와 연결되면서 흑해의 관광지이자 항구로 각광 받게 된 바투미가 제2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도 도시의 퇴락이 눈에 그대로 들어온다. 도로 공사 현장이긴 한데, 공사가 오랜 기간 진척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이 풍경...
하지만 강을 끼고 형성된 중심부는 매우 아름답다.
쿠타이시 중심가는 역사 도시로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인근의 주택가에 펼쳐진 황량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된 모습..
맛있는 요리가 그득한 그루지야 음식 중 한국인이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역시 하르초 아닌가 싶다. 매콤한 빨간색 소고기 국에 밥을 말아주는데 해장국으로 이만한 음식을 소련을 여행하면서 본 적이 없다. 사진은 못 찍었지만 그루지야식 소시지 꾸빠띠라는 것도 진짜 맛있었다.
도시의 어느 공원에서 발견한 소련 시절의 유산. 노동에 영광을! 우리 도시의 사회주의 노력 영웅. 이라고 써있다. 밑에는 그루지야어인 것 같아서 못 읽겠다. 소련에서는 주로 무공 훈장에 쓰이는 최고 등급의 소련 영웅과, 생산, 과학, 예술 영역에 수훈하는 사회주의 노력 영웅 칭호가 존재했다. 이 칭호를 받으면 고향에 동상이 세워지고 각종 혜택을 받았다.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이후 탈공산주의에 열심이었지만 쿠타이시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 노력 영웅 기념비가 남아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치우는 건지, 아니면 소련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보존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강보다는 하천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흑해로 향하는 리오니 강을 건너서 쿠타이시 최고의 명소 중 하나인 바그라티 성당으로.
이것도 꽤 언덕배기에 있어서 올라가기 쉽지만은 않은 곳이었다. 이 성당은 11세기, 그러니까 천 년 전 그루지야 왕국에서 세운 대성전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 끝에 파괴되었고, 사실상 폐허인 상태에서 계속해서 그루지야 정교회 신앙의 상징이자 중심으로 기능했다. 소련 시절에는 폐허의 모습도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보존 작업을 했는데.. 아무래도 무신론 국가에서 종교 건물을 복원하는 것도 어려웠지 싶다. 그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 받아서 소련 해체 이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이 성당을 옛날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대로 복원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여론이 딱히 반대하지 않았나본지 삐까뻔쩍한 대성당으로 재탄생했다. 유네스코는 이 복원 작업에 반대해서 2017년에 바그라티 성당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삭제했다.
언덕 위라서 쿠타이시 시의 전경이 널찍하게 보인다.
쿠타이시는 짧게 머무르기도 했고 사실 교외 인근의 역사 유적을 잘 보지 못해서 그렇게 기억에 남는 사진이 많이 없어서 아쉽다.
그래도 여기는 깔끔하게 정비가 잘 된, 마치 조치원 역전을 떠올리게 하는 거리.
전형적인 소련식 아파트에 옆에는 소련 해체 이후 지어진 것 같은 신축 아파트, 그리고 자그마한 놀이터와 분수.
운치가 아주 좋았다. 그루지야도 꽤나 보수적인 문화권이고 가족주의 기풍이 여전히 강하다고 한다.
정말 동네 못된 비행청소년들이 모여들어서 담배라도 필 거 같은 으스스한 공터도 발견.
인근 맥주집에서 생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쿠타이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동양인 둘이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신나게 떠드는 걸 보며 두 명의 그루지야인들이 합석을 요청. 그런데 러시아어를 다들 잘 못했다. 그들의 이름이 둘 다 발레리라는 것만 확인하며 웃음과 짠으로 해결하는 웅장한 남자들의 술자리를 가졌다..
안주는 이 정체불명의, 뭔가 먹으면 탈 날 것 같은 염장 고기.. 짜기는 드럽게 짠데 맥주 안주로는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물론 맥주로 술을 끝낼 수는 없으니, 그루지야 코냑과, 아르메니아의 밧줄 모양 치즈인 '체칠'과 함께 술을 또 마신다. 체칠은 저 밧줄 같은 치즈를 죽죽 찢어서 무한대로 늘려먹을 수 있는 묘미가 있는 안주다.
일행이 먼저 골아떨어지고, 나는 호스텔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웬 수염 난 동양인 아저씨가 짐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나도 그를 보고 놀랐고 그도 여기서 동양인을 보아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웨어 아유 프롬?이라고 먼저 물어와서 코리아라고 하니 자기는 재팬이라고 한다. 오사카 출신에 나이 50세. 세계 여행이 취미. 이름이 뭐냐고 내가 물으니 나카지마 상이라고... 내 이름도 묻길래 술에 취한 김에 펜과 종이를 꺼내서 임명묵 이름 석자를 한자로 써주고, '하야시 메이모쿠'라고 읽어줬다. 하야시! ㅋㅋㅋ 하면서 웃었다.
이때가 한일 무역분쟁과 노재팬 등이 터지면서 한일관계가 곧 최악으로 치닫기 좀 전이었는데, 이역만리 타향에선 한자 문화권의 동양인 동지들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즐거운 일화였다.
다음날 아침. 파란색 지붕이 이뻐서 찍었는데 어디에 있는 무슨 성당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쿠타이시의 일정을 종료하고, 이제 흑해에 위치한 항구 도시, 바투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