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와 1940년대 일본 제국에서 활동했던 일군의 학자들, 소위 ‘교토학파’는 ‘근대의 초극’을 이야기하며 제2차세계대전이 서구의 지배와 근대라는 시대를 끝내고 그것을 초극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논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그를 통한 러일전쟁의 승리는 동양 국가가 서구 열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체가 아니라, 일본, 나아가 동양이 서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논해졌다.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서구 제국주의와 기술 문명이 폭주 끝에 자살 직전으로 달려간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오로지 파괴를 위해만 작동하는 전쟁 기계의 충돌은 서구가 더는 빛을 제공해줄 수 없는 살아있는 증거로 여겨졌다.

실제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서구의 지적, 정신적 혼란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대신 1920년대에 이탈리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총력전 체제와 근대 대중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실험인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발흥했다. 일본은 1931년에 이 경쟁에 적응하고자 만주를 장악했고, 본격적인 대동아공영권의 청사진을 발전시켰다. 서구 근대성의 강력한 힘에 노출되어 종속적 지위로 떨어져야만 했던 아시아는 이제 서구 근대성을 학습하고 수용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발돋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그 증거는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따라서 서구 근대성에 대한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동양 제문명이 서구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끔 경제적 권역, 군사적 힘, 새로운 사상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끔찍한 침략 전쟁과 야만적인 학살로 이어졌음은 물론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후의 많은 학자들, 그리고 근래의 서구권 학자들은 서구 근대의 파괴에 직면한, 동양의 열강 일본이 추구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전은 단순히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치부되기에는 진실성과 날카로움에도 주목하고 있다.

교토학파는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초극,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초극, 사상에 있어서 자유주의의 초극’이 근대 초극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보았다. 사실 20세기 후반이야말로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삼두마차가 절정에 이르러 ‘역사의 종언’까지 선언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오히려 조숙하게 나온 표어였다. 근대성은 아직 절정을 마주하기에는 갈 길이 먼 상태였고, 근대를 초극할 방법론도 마땅치 않았다. 그들이 지지한 대동아 공영권과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를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초근대’라고도 할 수도 있는 방법론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 예컨대 다케우치 요시미나 히로마쓰 와타루와 같은 전후 지식인들은 근대 초극론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내용으로만 가득 차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평한다. 그렇기에 현대에 있어서 근대 초극론을 참고하는 데 중요한 것은 천황과 인민이 하나가 되는 군민일체론 같은, 실패로 끝난 허황된 기획보다는 그들이 근대가 왜 초극되어야 하는지를 논한 철학적인 기초다.

니시다 기타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