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모스크바
1년 만에 다시 모스크바에 오다.
8월 8일 아침 10시 비행기로 인천 공항에서 출국. 7시간의 비행 끝에 타슈켄트에 도착. 3시간을 대기한 뒤 다시 4시간 반 비행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거의 15시간 넘게 쓴 것 같은데,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공항 철도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타고 파벨레츠키 역으로 도착하니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파벨레츠키역은 위치 상 모스크바의 남동쪽인데, 이번에 모스크바에 2주 가량 머물 숙소는 서울로 치면 일산이라고 할 수 있는 힘키에 위치하고 있어서 거의 50분 가량 전철을 타고 2호선 북쪽 종점 호브리노까지 이동해야 했다. 호브리노에서 일행을 만나 버스를 타고 힘키에 도착하니 거의 정신이 오락가락 할 수준이었다.
이번 모스크바 행은 순전한 여행은 아니고, 학업에 관련되어서 온 것이라 일단 이번 편은 8월 8일에서 12일까지의 일정을 담았다.
첫날 찍은 힘키의 밤..
힘키는 행정 구역 상으로는 모스크바 시는 아니지만,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약 20km 가량 떨어져 있는, 한마디로 경기도 위성도시와도 같은 곳이다. 과거 독일군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이곳까지 진출했었다고 하니 전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스탈린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모스크바 근교의 벌판이나 다를 바 없었던 이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고 노동자 주거 단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고 모스크바 도시권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힘키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치솟는 주택 수요를 채워주는 교외 거주 지역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각지에서 새로 세워지는 아파트 단지와 쇼핑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힘키의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아침에 나와서 보는 쓰레기차...인데 선명하게 써 있는 Z가 인상적이었다.
첫날 아점은 맥도날드가 전쟁으로 러시아에서 철수한 결과, 러시아 측에서 새롭게 운영하고 있는 짝퉁 맥도날드, 프쿠스노 이 토치카(맛있으면 그만)에서 먹었다.
아직 모스크바에서 맥도날드가 남아 있던 2019년에도 이걸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러시아 맥도날드에서는 햄버거 세트를 시키면 감자튀김 대신에 생당근을 고를 수 있는 옵션이 있다. 처음엔 당근 튀김인 줄 알고 시켰다가 생당근이 나와서 놀랐던 기억. 이건 역시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곳은 모스크바로 치면 은평구라고 할 수 있는 북서쪽 끝의 호브리노에 위치한 쇼핑몰인데, 안에는 이렇게 마트도 있다. 경제 제재로 상품이 부족한 러시아의 마트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냉장 코너에는 '아스트라한 캐비어'를 팔고 있었는데 가격이... 7200루블이면 사실상 저거 한 통에 10만원이라는 뜻이다. 그냥 미역으로 만든 100루블짜리 모조 캐비어를 먹었다.
트베르스카야 역으로 출근. 역 출구로 나오면 건너편에 소련 시절 언론 이즈베스치야 건물이 있다.
1954년에 세워진 모스크바의 창시자, 유리 돌고루키의 동상이다. 이 자리는 원래 러시아 제국의 장군 미하일 스코벨레프 동상이 있었는데, 소련 시절에 차르 전제정의 유산이라고 파괴하고 소비에트 헌법 기념비를 세운 곳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모스크바 시 건립 800주년을 기념하여 1947년에 유리 돌고루키 동상을 세우라는 결정이 내려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트베르스카야 거리에서 할 일을 마무리하고 레닌 도서관으로 향했다.
레닌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붉은 광장의 입구. 저 가운데의 붉은 건물이 국립 역사 박물관이고,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동상이 서 있다.
비블리오테카 이메니 레니나, 혹은 '레닌 도서관'. 정식 이름은 러시아 국립 도서관이지만 여전히 레닌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리고 있다.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다(러시아를 유럽이라 해줄 수 있다면). 건물은 1950년대에 완공되었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정문이 공사 중이어서 출입이 안 되어서 후문 같은 곳으로 들어왔는데..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가 시작부터 딱 지켜보고 있었다.
도서관 출입증을 만든 뒤에 화장실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소련 시기 여행 및 관광 포스터들을 모아놓은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발견한 1960년대의 볼가강 관광 홍보 포스터. 작년에 돌았던 볼가강 여행이 그대로 생각나는 루트여서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서는 볼가강 본류를 위주로 야로슬라블-고리키(니즈니 노브고로드)-카잔-울랴놉스크-쿠이븨셰프(사마라)-사라토프-볼고그라드-아스트라한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야로슬라블과 고리키, 울랴놉스크는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에 지류에 위치한 이젭스크, 우파. 그리고 칼미키야의 수도 엘리스타를 갔었다.
레닌카에서 나와서 도시 산책. 크렘린 앞 쪽에 2016년에 세워진 블라디미르 대공 기념상이 보였다. 크렘린 쪽은 꽤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게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찾아보니 위치 상 붉은 광장과 크렘린 인근의 풍경을 해친다는 우려가 꽤 많았다는데, 실제로 보니 근사했다.
아마 블라디미르 대공이 정교회를 러시아에(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다보니, 푸틴의 정교회 강화 정책과 맞물려서 건립된 것 같았다.
걸어 가는 길에 아파트 벽면에 그려진 르제프스키 메모리얼 그림.
이것을 실제로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기념할만한 인물이 이 집에 살았다, 이 집에서 일했다, 심지어 이 집에 방문했다까지도 이런 식으로 조형해 놓는 문화가 있다.
해당 인물은 '유리 레비탄'이라는 사람인데, 소련의 가장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였다.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라디오 진행자가 된 레비탄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부터 1945년 소련의 베를린 함락까지 전쟁의 중요 순간을 소련 국민 전체에게 알리는 '소련의 목소리', 나아가 '승리의 목소리'로 각인되게 되었다. 해당 명판은 '승리의 목소리' 유리 레비탄이 이 건물에서 일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날 길거리를 거다가 우연히 발견한.. '우리의 나라, 우리의 승리'.
키릴 세르듀코프 이병(랴도보이)은 아마 우크라이나에서 활약한 인물인 것 같다.
호브리노 쇼핑몰에는 푸드코트가 있는데, '알타이 음식'을 파는 곳이 있어서 눈 여겨 두었다가 한 번 시켜 먹어 보았다. 그냥 갈비탕인데.. 뭐 특별한 건 없었지만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맛이다.
힘키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HFC. 무려 할랄 프라이드 치킨이다.
안에 가면 중앙아시아 계통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서 강렬한 튀르크어로 무언가 열심히 떠들고 있다. 튀김도 맛있고 케밥(샤우르마)도 맛있었다.
다음엔 오징어 튀김이랑 어니언 링을 좀 도전해봐야 겠다.
트베르스카야에서 낮 시간까지 일을 보고, 줌으로 미팅을 할 게 있어서 급히 들어간 그루지야 식당 겸 카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냐고 물어보니 너무 당당하게 있다고 해서, 아 그래 러시아도 발전하는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줬다.
집게는 왜 준 거냐. 얼음 넣어 먹으라고..? 얼음컵에 그냥 커피를 부어서 마시니 그래도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았다. 다만 러시아에는 신 맛이 너무 강한 커피 밖에 없어서 그건 좀 아쉽다. 맥도날드는 대체 브랜드 만들었는데 스타벅스는 대체 왜 안 만드는 것인가?
화수목금을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보낸 다음에 본격적으로 금요일 저녁. 주말을 이용해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 호브리노에 모스크바의 북부 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심지어 무려 Mezhudnarodnyi avtovozal이다. '인터내셔널 버스 터미널'. 인터내셔널이라면 대체 어디를 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안에는 나름 세련된 모스크바 버스 터미널의 주요 노선도가 붙어 있다.
인터내셔널이라길래.. 그러면 그렇지, 역시 민스크, 브레스트, 고멜. 전부 러시아랑 한 나라나 다를 바 없는 벨라루스 도시들이다. 신기하게도 외국인은 러시아-벨라루스 육로 국경을 통과할 수가 없다고 하니 어차피 우리는 이용할 수 없는 노선이다.
그 밖에도 다른 터미널에서 운행하는 남쪽 노선들도 인상적이다. 세바스토폴, 얄타, 심페로폴... 여기서 그대로 크림까지 간다는 것 같다. 물론 지금 한국인이 크림에 들어가면 바로 법적으로 처벌 받는다. 저 노선도에 표시된 곳 중에서 벨고로드와 로스토프-나-도누도 전선에서 가깝기 때문에 한국인은 외교부에서 출입을 금하고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도 나름(?) 유명해진 곳들이다...
저기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는 직원분이 여기에 계속 앉아 계셨다가 잠시 어딘가로 가는 모습. 위에는 '계약 복무'라고 써있고, 밑에는 '우리의 직업은 조국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써있다. 주요 터미널이라서 그런지 러시아군 모병 계약소가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여행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버스 여행이다. 다른 나라 버스 여행을 그렇게 많이 해보진 않았으니 비교는 어렵다. 물론 다른 국가들도 한국의 우등버스만큼 일상적으로 쾌적한 승차감을 보여주는 곳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객관적인 기준은 차치하더라도, 버스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우겨 넣으려고 하니 좌석 자체가 좁고, 또 러시아인들이 덩치가 그렇게 작은 민족은 아니기 때문에 생각보다 더 좁게 느껴진다. 게다가 에어컨 따위는 켜주지 않아서 꿉꿉한 공기가 그대로 차 안에서 머물게 된다.
아예 작은 승합차(마르쉬룻카)라면 종종 창문을 열고 달리기 때문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큰 버스라면 오히려 작은 승합차보다 더 힘들게 가야만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 버스 여행이 힘든 것은 나라가 크다 보니 버스 타는 시간도 길다는 것인데, 그래도 이번에는 주말에 짧게 다녀오는 것이라 4시간 정도만 걸리는 가벼운 노선이다. 6시 출발하여 10시에 도착하는 계획인데... 물론 계획대로만 돌아가면 그것이 어찌 여행이겠는가.. ㅎㅎ
다음 편에서는 대조국전쟁의 주요 전적지인, 트베르 지역의 소도시 르제프를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