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하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신여성

공산주의 하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신여성

1920년대, 혁명의 세례를 받은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의 이야기

임명묵
파란지(부르카)를 쓴 타슈켄트의 여성. 바실리 베레샤긴 그림, 1873년.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1927년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슬람 전통과 문화 관습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혁명이 개시되었다. 후줌(페르시아어로 공격)이라고 불리는 이 캠페인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여성들이 도시와 마을 광장에 모여서 자신들이 입고 있던 파란지(부르카)를 벗고, 모아놓은 파란지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에서 나왔다. 소련에서 파란지를 불태우는 것은 동방 여성이 해방되어 근대성에 진입한다는 발전의 선언이었고, 우즈벡 남성들에게는 러시아 압제자들이 여성을 꼬드겨 부정하게 만드는 폭거였다.

후줌 캠페인에 대한 서구권의 연구는 냉전 시대에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레고리 마셀은 <The Surrogate Proletariat: Moslem Women And Revolutionary Strategies In Soviet Central Asia, 1919-1929>라는 저작을 통해서, 노동계급이 없는 중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여성을 프롤레타리아트 대신에 활용할 수 있는 혁명 주체로 상상했고, 후줌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현지 관습에 대한 혁명적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구들은 냉전 시대 소련이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참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원을 받아 생산된 것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 탈식민 문화 연구와 서발턴 개념이 각광을 받으며 다른 시각의 연구가 나타난다. 더글로스 노스롭의 <Veiled Empire: Gender and Power in Stalinist Central Asia>다. 노스롭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영국이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던 식민 제국으로 바라보고, 후줌 캠페인이 제국의 식민지 문화 공격의 사례였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후줌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 물결 또한 식민지에서 근대 제국주의의 문화 캠페인에 으레 따라오는 저항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이런 연구 또한 90년대 이후 새로 등장한 중앙아시아가 미국의 전략적 시선에 포착되면서 현지 자체의 맥락에 입각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

"베일을 쓴 제국"

(위 두 저작은 직접 읽어보지는 않음)

하지만 근대 이슬람 연구 지식이 중앙아시아 연구에도 도입되고, 소련사 연구 자체에도 발전이 일어나면서 '공격자-제국-러시아와 피해자-식민지-중앙아시아'라는 이분법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흥미로운 논문이 아래 두 논문이다.

Trapped between state and society: Women's liberation and Islam in Soviet Uzbekistan, 1926-1941 - Shoshana Keller(1998)

Bolshevism, Patriarchy, and the Nation: The Soviet "Emancipation" of Muslim Women in Pan-Islamic Perspective - Adrienne Edgar(2006)

켈러의 논문은 후줌을 비롯하여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진행된 여성 해방 캠페인이 현지 남성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즉, 국가가 여성들을 근대적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했지만 현지 남성들은 그 시도에 반발하며 근대적 영역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공격했다는 것. 대표적인 예시가 후줌에 참여한 여성들에 가해진 끔찍한 린치였다. 켈러는 문화 혁명 시기 중앙아시아 여성들이 국가와 사회 양쪽의 요구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중앙아시아 현지 사회'는 하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향점을 가진 주체들이 협상하고 갈등하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장이었다.

에드거의 논문은 소련의 중앙아시아 여성 캠페인을 이슬람 세계의 맥락에서 다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논한다. 제국-식민지 관계를 대입하면 소련 중앙아시아는 영국의 아랍, 인도, 말레이시아 지배, 혹은 프랑스의 서아프리카와 알제리 지배, 아니면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비교되는 것이 그럴싸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투르크메니스탄을 연구했던 에드거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중앙아시아에서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혁명을 주도했던 점, 소련이 중앙아시아의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기 위해 사회의 반발을 억압하고 끝내는 통합해냈던 점, 그러기 위해서 여성 문제를 가시적 상징으로 활용한 점은 서구 식민제국보다 인접한 아타튀르크의 터키나 레자 샤의 이란과 훨씬 유사하다는 것이다. 서유럽 식민 제국의 당면 과제는 제국 질서의 온존이었지 문화적 혁명을 통한 무슬림 인구 근대화 촉진이 아니었다. 전통적 농촌과 근대적 식민 도시의 분리는 제국 질서에 도움이 된다면 유지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소련은 근대화와 추격, 국가 건설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던 터키, 이란이 자국민을 다루듯 중앙아시아 무슬림을 다루었다. 중앙아시아 무슬림도 소련에서는 자국민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에 출간된 마리앤느 캄프의 <우즈베키스탄의 신여성>도 위와 같은 연구 경향에서 1920년대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에서 펼쳐진 여성 정책의 기원, 실행, 영향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캄프가 출발하는 지점은 자디드(제국 말-혁명 초에 유행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근대주의 운동)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볼셰비즘이라는 혁명적 이데올로기 이외에도 자디드주의라는 토착적인 이슬람 개혁 운동이 있었고, 여기서 이미 여성의 공적 영역 참여, 새로운 남녀 관계, 조혼과 신부대, 파란지 착용에 대한 비판이 싹트고 있었다.

마셀은 <대리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공산당 여성국(Zhenotdel) 사례를 통해서 전쟁과 혁명을 거치며 사회적 세계에서 고립된 여성이 공산당을 통해 조직되었음을 보여주고,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문화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여성은 많았지만, 캄프는 20년대 우즈벡 여성 운동의 주역들이 꽤 많이 자디드 지식인 가정에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오빠나 아버지 등의 영향을 통해 근대적 학교에 다녔고, 학업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라는 집안의 명령에도 저항하며 공적 참여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접한 여성 해방 이데올로기는 볼셰비즘이 아니라 자디드주의였다.

1927년, 파란지를 불태우는 전형적인 후줌 행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공산당이 우즈벡 여성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고, 볼셰비즘의 세례를 받은 러시아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성국이 등장하면서 남성 근대주의자들이 설정한 여성 담론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자디드주의의 여성관은 근대적 세계에서 '남성 근대인'이 맺어야 하는 올바른 남녀관계의 수행자, 민족의 새로운 세대를 키워낼 올바른 어머니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디드의 개혁주의와 이슬람 전통이라는 성장배경, 볼셰비즘과 러시아인과의 교류 등으로 변화한 우즈벡 여성들은 <새로운 길>, <밝은 삶> 등 여성 계몽 잡지를 통해 활동하면서, 남성 동료들도 때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외쳤다.

1927년의 후줌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개인의 사적인 권장 사항 정도로만 간주되던 베일 벗기는 공산당의 후원 아래에서 대대적인 집단 캠페인으로 굉장히 급작스럽게 실시되었다. 사실 이 책만 보면 후줌이 왜 1927년에 실시되는지 잘 와닿지는 않는다. 이는 10년 뒤에 나온 아딥 할리드의 <우즈베키스탄 만들기>에서 잘 설명되는데, 토착적 혁명가들인 급진 자디드 대신에 혁명-내전 세대인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당내 투쟁이 심화되고 당 노선이 급진화되는 경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후줌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이 '대리 프롤레라티아트'를 통해 진행하려 한 문화 혁명도 아니고 러시아 식민주의자들이 미개한 이슬람 관습을 파괴하려고 벌인 시도도 아니었다. 자디드주의와 볼셰비즘, 중앙아시아의 근대화와 혁명, 소비에트 체제의 수립이라는 10년의 변화를 거치며 등장한 근대적 여성 주체들이 그 등장과 수행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즈벡 여성들, 특히 당원들이 후줌에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바스마치(중앙아시아 농촌의 도적단, 특히 반소비에트적 성격이 강했음) 세력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진적 문화 혁명 캠페인이 현지 소비에트 질서를 오히려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터키에서 아타튀르크가 진행하고 있는 세속주의 개혁을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무슬림 세계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문화 변동의 주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캠페인의 실시가 결정되자, 공산당 중앙의 독려와 여성 당원들의 의지가 맞물려서 파란지(베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양상은 각양각색이었다. 남성 당원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베일을 쓰고 다니는 것이 발각될 경우 민족주의자라는 딱지를 받고 출당될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여성들은 때로는 국가가 제공한다는 인센티브에 끌려서, 혹은 여성 근대화를 향한 열정을 갖고, 혹은 그냥 불놀이가 재밌어보여서 후줌에 참여했다.

부하라의 관광지에서 파란지를 써보인 여성. 이제 중앙아시아에서 파란지는 관광용 의상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후줌에 대한 반발은 격렬했다. 공산당 당중앙은 물론이고 후줌에 참여한 여성들도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 당원인 아들을 둔 중년의 시어머니들은 며느리가 결혼할 때 자신이 선물한 파란지를 불태우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남성들은 '러시아인에게 물들어 거만해진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 질서에 도전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파란지 벗기 캠페인이 진행되는 모든 곳에서 살인과 강간, 공개적인 모욕이 뒤따랐다. 통계에 따르면 이 기간 2500명의 여성들이 살해 당했다. 후줌을 주도하는 여성국 활동가들은 파란지를 공공장소에서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 제정을 청원했다. 법률이 제정되면 남성들의 반발은 국가로 향할 것이고,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파란지를 쓰지 못한다며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국가는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법률 제정에 반대했다. 오히려 농촌과 도시의 계급 질서, 경제적 구조라는 더 중요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를 경원시하고 복장에나 신경 쓰는 여성 당원들을 타박했다. 결국 폭력의 물결을 이기지 못한 우즈벡 여성들은 다시 파란지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50년대까지도 많은 여성들은 파란지를 쓰며 살았다.

투르순오이 사이다지모바. 우즈벡 여성 배우로서, 20세가 채 되기 전에 남편에 의해 살해 당한 피해자였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1920년대의 움직임이 좌절되었다 할지라도 스탈린 혁명이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꿀 것이었다. 후줌을 담당하던 공산당 여성 활동가들은 이제 농촌으로 가서 농업 집단화를 이끌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농업 집단화는 우즈벡의 전통 사회 질서에 대해서 전례가 없던 수준의 공격을 가했다. 농촌 여성들은 당장의 식량과 목화 생산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두가 밭으로 향해야 했으며, 혹독한 농업 노동을 위해서 파란지를 벗어야만 했다. '러시아인들의 국가'를 향한 토착 사회의 반발은 여성들이 아니라 집단화 활동가들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단화를 통해 농촌에 소비에트 질서가 확립되며, 학교가 세워지고 문맹 퇴치 캠페인이 대대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집단화 과정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는 이제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라는 스탈린의 부름을 받고, 총을 받아 유럽 전선에 나갔다. 우즈벡 남성들은 더 넓은 러시아 세계와 접촉하며 새로운 관념을 장착했고, 우즈벡 여성들은 남성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공적 영역에 진출했다. 1960년대가 되었을 때 젊은 세대들은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하여 확연히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되었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다 읽지 않아도 나머지 내용을 대충 알 것 같은 책"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제국-식민지 이분법을 넘어서는 다층적 접근으로 중앙아시아를 봐야 하고, 소련/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책을 터키, 이란과 비교해야 하고, 자디드의 급진화라는 전통과 1920년대 문화 혁명의 상호작용, 그 이후의 농업집단화와 대조국전쟁을 통한 통합... 이러한 서사는 소련사/이슬람사/중앙아시아사를 바라볼 때 이제 기초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같은 구도가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이 책이 그런 '이제는 상식이 된 구도'를 그대로 자신의 연구 분야에 적용한 책이 아니라, 바로 그 '상식'을 만드는 데 기여한 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보면 우즈벡 여성들이 후줌에 참여해서 공산당, 전통 사회 사이를 오가며 움직였던 이 구도가 너무 당연해보인다. 책을 안 읽어도 그랬음을 알 것만 같다. 그러나 2006년에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 당연해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입증할 때 저자가 90년대와 03년에 진행했던 인터뷰를 활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새로운 길>을 비롯한 각종 우즈벡 여성 계몽 잡지들을 분석하는 한편, 실제 후줌을 비롯한 당대 공산당 여성 사업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을 인터뷰해서 그들 삶의 이야기를 서사에 끌어온다. 저자가 인터뷰할 때에도 살아있던 80대와 90대의 노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1900년대, 1910년대 생들). 그들 삶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책의 논지가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읽기에 그렇게 어려운 책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볍게만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었다. 우즈벡은 연구가 많이 된 편인데, 개인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어땠는지는 아직도 궁금하다.. 차이가 있었다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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