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신년, 노루즈

이란의 신년, 노루즈

3월 20일, 이란에서 맞이하는 새해

임명묵

골파예간에서 머문 기간이 일주일이 조금 넘었는데 다양한 밥을 얻어 먹었다. 사실 일주일 넘는 기간 동안 특별히 어디를 둘러보거나 그러지는 않았고, 묵는 댁에서 쉬면서 책을 읽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기간에 비해서 사진은 거의 없다...

뭐 보시다시피 이 음식은 스파게티인데, 나름 이란식 향신료와 양념으로 맛을 냈다. 페르시아어로는 스파게티를 마카로니라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됨. 배 터질 때까지 맛있게 먹었다.

이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정원, 페르시아어로 바그(Bagh, 실제 발음은 벅에 가까움)다. 페르시아어에서는 단어 끝에 '-체'를 붙이면 더 작거나 귀여운 것을 부르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렇게 집 뒷편에 조그맣게 있는 뜰을 Baghche라고도 한다. 아직 새 잎이 자라 푸르러진 때가 아니라서 황량했지만 그래도 가끔 바람 쐬러 나오기는 좋았다.

저 환공포증 걸릴 것 같은 빵이 이란에서 가장 값이 싼 빵인 것 같았다. 종잇장처럼 얇은데 그래서 은근 쫄깃 바삭해서 고기랑 궁합은 매우 잘 맞았다.

신년을 앞둔 어느 날 밤에 외곽의 정원형 식당에 함께 나갔다. 왼쪽부터 친구의 어머니, 외삼촌, 아버지. 이란에서는 술을 안 먹는 대신에 남자들끼리 물담배를 피는 것이 사회적 사교 활동의 중요한 요소인데, 내가 물담배를 워낙 좋아해서 이란에서 거의 기회 될 때마다 피웠던 것 같다. 러시아만 해도 기본이 2만원은 하는데 여기서는 5천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할 수 있어서 더욱 열심히 그랬던... 내가 물담배 좋아하는 걸 잘 알아서 아버님께서 이곳저곳 데려다 주실 때가 많았다.

이곳 역시 골파예간에 있는 또 다른 물담배 가게. 낮에 가니까 라마단 기간에는 열지 않는다고. 해가 진 다음에 다시 왔다. 음료수 하나, 차 하나, 물담배만 있으면 세상 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 가는 곳이라서 그런지 호메이니, 하메네이 사진 걸어놓는 등 보수적인 분위기가 대세인 듯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아버님께서 "너 내장 먹냐?"라고 여쭤보셨다. 당연히 영어는 못하시는 분이라 페르시아어로 말씀 주셔서 친구한테 영어로 저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보니, 염통이나 간 같은 거 먹냐고 물어보셨다는 것. "없어서 못 먹죠"....를 페르시아어로 내가 할 수는 없어서 당연히 먹는다고,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니 매우 흡족해하신다. 여기도 역시 아시아답게 저런 음식들은 젊은 세대들, 특히 여자들은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부위라... 지가르(간), 델(염통), 돈베(꼬리)를 세트로 시켜서 화덕에 구워져 나온 것을 빵에 싸서 또 맛나게 먹었던 하루.

TV를 틀면 국제 뉴스가 굉장히 자주 나왔는데 절반은 푸틴과 우크라이나고 절반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다. 이란인들의 국제 정치적 관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목. 나중에 테헤란에서 정부 지지하는 보수파 친구들과 우크라이나 얘기를 열심히 나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뒷편에..

이 음식은 쿠쿠라고 하는 음식인데, 조리하는 방식을 보니 딱 한국의 전이랑 똑같다. 야채전이나 감자전처럼 재료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쿠쿠가 있는 것도 그냥 전이다. 인터넷에서 한국의 모듬전 사진을 보여주며 어머님께 한국도 쿠쿠가 있어요~라고 하며 훈훈한 문화 교류의 장을 열었다. 이 야채전(쿠쿠 삽지)은 특히 노루즈 신년 음식의 대표격이다.

신년을 위한 7개의 물품(하프트 신)을 준비한 모습. 이란의 신년은 우리들 달력으로는 3월 20일부터 시작한다. 이란에서는 세 개의 달력이 있는데, 국제적으로 쓰이는 그레고리력, 이슬람에서 쓰는 태음력, 마지막으로 페르시아 태양력이다. 외국인들하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그레고리력은 거의 얘기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는 99% 페르시아 태양력이 기본이다. 이 태양력도 역시 선지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간 사건인 히즈라로 시작해서 올해는 1403년이다.

이슬람 태음력은 라마단을 비롯하여 아랍에서 쓰는 이슬람 세계의 달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굳이 한국으로 치면 음력 따라서 명절 쇠는 거랑 마찬가지라서 양력에서는 그때그때 날짜가 바뀐다. 그래서 이번에는 노루즈랑 라마단이 겹치는 초유의 사태까지...

어쨌든 노루즈는 페르시아 달력으로 1월 1일, 우리 달력으로는 3월 20일. 해가 어둠을 이겨내고 새로운 날(now ruz, new day)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는 이란 최대 명절이다. 여러 번 설명하였 듯 거의 한달은 신년 명절 분위기가 이어진다. 또 중요한 것은 오전 6시에 무조건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신년을 기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는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새해가 진짜 시작되는 것이고, 날짜가 넘어갔더라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은 새해가 아니다.

이때 친구랑 새벽 4시 넘어서까지 얘기했는데 6시에 다들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그냥 밤을 꼴딱 세웠다. ㅋㅋ

책도 두 권 비치해 있는데, 하나는 이란인들의 신앙을 상징하는 코란이요, 다른 하나는 이란인들의 민족 문화를 상징하는 중세의 시성 하페즈의 시집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시집이라는데 이렇게 세대에 따라 집안의 물건을 전승하며 전통과 가족의 영속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신년을 보내고 집안의 각종 대소사에 따라다녔다. 여기는 내가 묵은 자번박트 집안이 소유한 조그마한 농지와 별장이다. 푸르른 계절에 반드시 다시 오라고 아버님께서 신신당부를 해주셨다..

차타고 가다가 문득 발견한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의 벽면 그림.

명절 다음날에는 하루 종일 이 집안 친척집에 방문해야 했다. 진짜 딱 우리네 90년대 명절 풍경을 생각나게 하는 행사였다. 인구 5만명 소도시 골파예간에 모여 사는 이 집안 친척들 차타고 돌아다니며 인사 드리고, 차와 다과, 과일이 나오는데 한 집만 들르면 끝나는 게 아니라 진짜 엄청나게 많은 친척집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예의상 차 한잔 정도 홀짝이는 전략적인 행보가 필요하다.

오후 4시에 친척집을 다니기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정말 많은 집들을 돌아다녔다. 어디든 가면 사촌들끼리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어른들끼리 명절 인사를 주고 받는다. 살럼(안녕), 쿠비(괜찮아?), 썰레노 훕 더쉬테 버쉬(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등..

근데 명절날에 갑자기 한국에서 누군가 와서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고 하니 이 사람들도 신기한 일이라 생각하여 어디를 가나 호구조사다. 한국에서 왔냐, 이란 왜 왔냐, 공부한다고? 무슨 공부 하냐? 등등등. 반대로 한국에서도 명절날에 이란 손님이 머물면서 인사 다니면 그것도 참 재미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집안에 걸려 있던 그림인데, 친구가 저게 바로 레일라와 마즈눈의 그림이라고 알려주었다. 레일라와 마즈눈은 중세 12세기 페르시아어로 문학 활동을 한 니자미 간자비라는 대문호의 서사시다. '중동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도 불리는데 중동 사람들은 이게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빠르니까 순서가 반대라고도 한다. 역시 사랑에 빠진 남녀와 그들을 방해하는 집안 어른들의 갈등이 이야기의 축이다.

왜 친구가 이 이야기를 알려주었는고 하니, 내가 이란에 오기 전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니자미 간자비의 이름에서 나오듯 그의 고향이 바로 아제르바이잔의 간자였다. 그는 민족적으로는 튀르크인이었는데, 언어는 당시 문화와 예술의 언어인 페르시아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사브지 폴로 바 머히. 그러니까 야채 볶음밥과 생선이라는 뜻인데... 이것 또한 이란의 신년 음식이다. 어떤 연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채 볶음밥에 생선 구이를 같이 곁들여 먹는 것이 우리네 떡국과 같은 신년의 문화라고 하는 듯. 솔직히 이때 이미 차라든가 과일이라든가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지만 안 먹으면 안 된다길래 어떻게든 먹었다. 뭐 야채 볶음밥에 생선 구이면 맛이 없을 리도 없고... 그런데 친구가 알려주기로 이란이 인구와 국토 크기에 비해서 바다는 넓지 않고, 무역도 여의치 않아서 생선이 꽤나 비싼 음식이라고. 이 또한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골파예간에서 여행의 끝까지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름 연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는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란 북서쪽의 타브리즈로 향하는 버스표를 구해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했다. 친구와는 나중에 테헤란에서 다시 보기로 했지만 가족들과는 이대로 안녕이었다. 네가 가니 슬프다, 꼭 다시 오라, 우리를 네 두 번째 부모님이라 생각하라는 말씀을 듣고 집을 떠났다. 어머님 아버님 앞에서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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