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콤으로: 페르시아 전설의 밤, 그리고 라마단

테헤란에서 콤으로: 페르시아 전설의 밤, 그리고 라마단

종교 도시 콤에서 호메이니의 흔적을 찾아서

임명묵

이란도 슬슬 익숙해질 무렵, 익숙해지기 힘든 계절이 다가왔다.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이 시작된 것이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제시한 계율에 따라서 라마단 한달 동안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 종교 국가인 이란에서는 당연히 모든 식당은 영업을 하지 않고, 심지어 카페마저도 열지 않는다. 테헤란 북부에 위치한 이 카페는 무려 미국, 그것도 유대인 자본인 스타벅스를 수입해와서 팔고 있었지만 라마단 때는 테이크 아웃만 제공하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서 책이라도 읽으려 했던 내 계획은 모두 무산되었고 ㅜㅜ

이란 도로의 가장 큰 특색은 구닥다리 푸조 모델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슬람 혁명 이전인 팔레비 왕조 시절에 제조업 육성의 일환으로 이란에도 자동차 제조 기업들이 생겼는데, 푸조 라이센스 생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혁명과 그 뒤 이은 경제 제재는 이란을 국제 무역에서 배제시켰고, 해외의 다양한 신형 자동차를 수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20세기 이란 근대화 덕택에 탄생한 엔지니어와 노동자 집단은 그럭저럭 타고 다닐 수는 있는 자동차를 생산할 역량을 갖고 있었고, 경제 제재는 국내 시장에 대한 보호 장벽으로 작용하여 이란은 주요 자동차 생산국이 아님에도 국산차를 많이 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택시 등으로 타다 보면 한국의 현기차가 매우 그리워지는 품질이기는 하다..

이번 라마단의 큰 특징이라면 페르시아 신년 명절 노루즈와 겹쳤다는 것이다. 이슬람 달력은 태음력을 쓰기 때문에, 양력과 대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력 날짜는 양력 기준으로 계속 움직여서 어떤 해는 라마단(9월)이 겨울에 있을 때도 있고 여름에 있을 때도 있다. 해가 떠있을 때가 기준이기 때문에 당연히 겨울의 라마단이 훨씬 수행하기에는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가 쓰는 태양력 기준으로 3월에 라마단이 딱 걸려서 노루즈 보러 왔다가 졸지에 라마단까지 보게 된 것이다.

노루즈는 3월 20일인데, 사실 이란 달력으로는 이때부터가 1월 1일이다. 한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이 고향의 가족도 보러 가고 휴가도 떠나는 이란 최대의 명절이며, 이슬람과 구분되는 고대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엄청난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노루즈 시작 전에는 '차하르샨베 수리'라는 행사도 있다. 한 해의 마지막 수요일인데, 붉은 수요일, 축제의 수요일이라는 뜻으로 보통 해석될 수 있겠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산에 따라서 당연히 불이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고,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붙이고 그 위를 뛰어 넘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전국 각지에서 터지는 폭죽과 불꽃놀이도 큰 장관이다. 이날도 밤에 길을 지나가다가 폭죽을 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중국의 춘절과도 꽤 비슷한데 그래서 다양한 사고가 빈발하는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꼭 폭죽 가지고 사고가 나는 게 거의 연례 행사라고 한다. 내 이란 친구들도 모두 해 지고 나면 사람 많은 곳 절대 가지 말고 숙소에 박혀서 불꽃놀이나 구경하라고 신신당부 했다. 다음날 페르시아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사고 뉴스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많은 이란인들이 세속화되어 정부의 라마단 금식 권고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구내식당은 물론이고 일반 식당도 전부 문을 닫지만 사람들은 테이크아웃 매장에서 무언가를 사서 몰래 먹거나 집에서 요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라마단 금식을 따르는 종교적 인구도 상당하다.

라마단은 이슬람의 사회적 평등 압력이기도 하다. 부자들에게 낮에 굶게 하여 빈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하고, 그들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 재분배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다양한 자선 기관에서, 해가 진 뒤에 먹는 식사인 이프타르를 공짜로 나누는 부스를 길거리 곳곳에서 차린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때 바깥에서 이런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라마단을 즐긴다. 세속적인 중산층들은 대체로 식당에 가서 함께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역시 언제 보아도 멋있는 이란 지하철의 장식들.

길거리를 가다가 아파트를 발견했다. 여기는 테헤란 북부라서 꽤 잘사는 동네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아시아 중산층의 생활양식은 아파트로 완성되어야 하는 법이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는 차하르샨베 수리 풍습. 이 사진을 찍는 걸 보더니 저 사람들이 나한테 웃으면서 "중국인이야? 니하오!"라고 물어왔다. "만 아즈 코레 조누비 어마담(나는 남한에서 왔어요)"라고 하니 "퍼르씨 발라디(페르시아어 알아)????"라고 놀라면서 이란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해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인데..

"두스탐! 아락 미커이?!"

친구, 술 먹고 싶어?? 라는 뜻... 이란은 금주 국가지만 인간 사는 곳에 술이 빠질 수는 없으니 다양한 밀주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이런 밀주 잘못 받아먹었다가는 최소 끔찍한 숙취, 최악의 경우 실명에서 사망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아서 절대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고 이란 친구들이 역시 신신당부 했다. 괜찮아요를 연발하며 호텔로 사라져줬다..

숙소 근처의 정원 형식의 식당이다. 페르시아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정원인데, 분수와 물이 졸졸 흐르는 도랑, 화사한 꽃과 나무들을 꾸며놓고 카페트에 앉아서 차, 물담배, 식사를 즐기는 곳이 많다. 현대에는 저렇게 유리문으로 공간을 구획해놓고 손님을 받는 경우가 일반화된 듯 했다. 혼자서 물담배에 식사까지 야무지게 즐기고 들어갔다.

밥을 먹을 때도 폭죽 소리가 계속 들리더니 새벽까지 이어졌다. 숙소 옥상에 올라와서 예쁜 불꽃을 보며 하늘의 불멍을 즐겼다. 물론 저 밑에서는 사람들의 즐거운 아비규환도 이어지고 있겠지...

이제 슬슬 다른 도시로 떠나야할 것 같아서 테헤란 도시 남쪽에 있는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테헤란 중앙역이다. 1930년에 열려서 팔레비 왕조 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 그런데 문제는 이제 차하르샨베 수리도 지났겠다 본격적인 노루즈 시즌이라 기차표를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설날 서울역에서 대뜸 기차표 달라고 하면 우리도 구할 수 없을 걸 생각하면 내가 너무 안일했다...

설상가상으로 환전해둔 돈도 거의 떨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환전소들이 문을 워낙 일찍 닫아서, 기차역에 들른 것이 꽤 치명적인 시간낭비가 되어버린 것... 일단 대충 환전상들이 있을 것 같은 혼잡 그 자체인 테헤란 중앙 바자르로 움직여보았다. 서성거리는 외국인을 본 길거리 환전상이 다행히 나에게 접근해왔고 100유로를 바꿔서 거금을 손에 넣고 통화 기근은 일단 마무리.

이란 전통 문화로 유명한 하지 피루즈도 덕분에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이거 못 봤으면 엄청 아쉬웠을뻔... 하지 피루즈는 얼굴을 검게 칠한 광대 같은 존재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말뚝이 같은 존재랄까?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양 노예무역을 통해 중동에 유입된 흑인 노예로 종종 설명을 하고는 하는데 그래서 이란에서는 서구의 블랙페이싱 담론에 영향을 받아 소소하게 논란이 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물론 대다수는 별로 신경 안 쓰지만..

환전을 마치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일단 터미널로 이동해본다. 그리고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대라서 식당도 열기 시작했다! 주린 배를 쥐며 식당에 가서 밥부터 먼저 먹기로 했다.

메뉴판을 보니 주제 치니(Juje Chini), 중국식 치킨이라는 게 있길래 이게 대체 뭘까 하고 시켜보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가 중국식이라는 거지..? 뭐 그냥저냥 맛있는 치킨이다. 레몬즙 뿌려먹고 피클이나 장아찌 얹어서 밥이랑 먹으니 꽤 맛있었다.

이 다음부터는 너무 혼란해서 사진을 못 찍었다. 일단 내가 가려는 곳은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140km 거리에 위치한 콤이라는 도시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시아파 종교 도시이고 인구도 100만 명이 넘는다. 혹시라도 버스를 탈 수 있을까 하여 일단 남부터미널로 갔는데 그 엄청난 돗떼기 시장 분위기에서 당연히 표는 전체가 매진이었고...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하면서 길거리를 서성였다.

그런데 길에서 차를 세워놓고 "콤~ 콤~ 콤~ 콤~"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이 사람들 합승택시 호객하는구나. 이란이 대중교통 인프라가 인구와 국토 크기에 비해서 엄청 잘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기름값은 무척이나 싸기 때문에 옛 한국에도 있었던 전통 문화인 합승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저렴한 금액으로 콤으로 가는 합승택시를 하나 잡아서 2시간 반에 걸친 여정을 시작했다. 문제는 좁아터진 차에 4명이서 낑겨 타서 2시간 반을 가려니 엉덩이 아파서 진짜 죽는 줄 알았다. ㅋㅋ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난항이었는데, 이미 이란도 인터넷과 온라인 결제가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아서 현금 밖에 없고 이란 인터넷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숙소나 교통편 예약하기가 꽤 힘들었다. 보통은 여행사에서 대행을 많이 하는데 역시 나 같이 준비성 없어서 임박해서야 예약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편한 서비스는 아니다... 문제는 역시 명절이라서 숙소들도 손님으로 꽉 차 빈 방이 없을 때가 많다는 것..

구글 지도에 들어간 다음에(이란에서 구글은 허락됨) 호텔을 검색하고 그냥 닥치는 대로 전화를 돌려보았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하면 바로 어이없어하며 "Nah(no)"가 튀어나온다. 그러면 바로 페르시아어로 "쇼머 오턱 더리드(당신 방 있습니까)?"라는 초등학생 수준 페르시아어를 이어간다. 몇 번을 시도하니까 나름 싼 가격에 빈 방 있는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좋은 밥을 주는 호텔은 아니었고... 이건 숙소에서 5분 걸어가며 나오는 꽤 좋은 호텔이 저녁밥을 팔길래 가서 먹고 온 음식이다.

이란식 야채 카레라고 할만한 고르메 사브지와 치킨 케밥을 시켜서 맛있게 먹고 일단 중요한 퀘스트 하나를 넘겼다.

든든히 밥을 먹고 마음의 평온을 찾은 상태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진짜 시아파 도시인 게 티가 나는, 시아파의 구호를 적어 놓은 붉은 기나 검은 기를 집집마다 걸어 놓는 광경.

콤이 종교 도시임은 언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죽하면 세속적인 내 이란인 친구들한테 콤에 갔다왔다고 하면 진지하게 정신 나갔냐고 되물어 올 정도다. 시아파 성소 주변의 마을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중심인 테헤란과 인접했다는 특성 때문에 이곳의 성직자들은 이란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콤과 비견될 수 있는 시아파 도시는 이라크의 나자프와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정도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콤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교 대학과 종교 교육 기관이 있어서 이란 체제의 근간 중 하나인 시아파 성직자를 계속해서 길러낸다. 이들은 이란의 종교 관료제로 취직하여 법률 및 종교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도시 인구 120만 명 중에서 5만 명이 성직자고 세계 각지에서 교육 받으러 온 시아파 학생들을 생각하면 도시 인구 상당수가 직업적 종교인인 셈이다. 그래서 도시 어디를 걸어도 몰라, 아훈드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선생님....

콤에서 들려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바로 이곳.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살았던 가옥이다. 호메이니가 1900년 생이니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을 보낸 장소.

시아파 최대 종교 도시인만큼 야심가 호메이니도 콤에서 교육을 받고 또 신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당연하게도 이때부터 정치적인 발언을 매우 자주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이 곳에 모여서 호메이니의 강의와 선전을 듣고 정치적 의식을 키웠던 것이다.

1963년 샤의 백색혁명 선언에 반대한 호메이니는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테헤란으로 끌려갔고 이후 1964년에 터키로 추방된다. 터키, 이라크, 프랑스를 전전하던 호메이니는 14년만에 돌아와 이슬람 혁명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혁명은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시작되는 걸까..

젊은 날의 호메이니.

프랑스에서 이란계 망명가들에게 설법을 하는 호메이니 사진. 여러 호메이니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페르시아어와 영어는 물론이고 이런 데바나가리(인도계 알파벳), 아제르바이잔 키릴문자에 이르기까지 시아파 혁명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방명록에 남긴 메시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가옥에 상주하는 성직자들도 몇 명 보였는데, 이분 말고 다른 성직자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오며 짧은 이슬람 강의를 해주었다.

네 목의 혈관에 흐르는 피, 네가 어제 마신 물은 어디서 왔는가?

Kar-e Khodast(그것은 신께서 하신 일이다).

세속주의와 신세대 중산층들의 도전이 거세지만 저 엄숙한 노년 신학자의 묵직한 한 마디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근본 또한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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