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해 (2)

1971년,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해 (2)

방글라데시 위기에서 각국은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임명묵

3장은 방글라데시 위기를 바라보는 인도의 시선을 보여준다. 인도에서는 강철 같은 지도자인 인디라 간디가 측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호한 군사 행동을 주문하여 파키스탄을 제압했다는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실제 인디라 간디와 인도의 입장은 신화와 맞지 않았다. 그들은 아와미 연맹의 승리를 반겼으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반기지 않았다. 벵갈 통합 운동이 부상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서벵갈에 좌파 낙살라이트 반군이 득세하고 있었기에 이 지역이 마오주의 세력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따라서 인도는 파키스탄이 벵갈 위기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했을 때도, 파키스탄의 무력 진압이 일시적일 것이며 협상으로 위기가 신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원조 '철의 여인', 인디라 간디.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여론은 인도 정부의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여론은 방글라데시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차게 되었고, 정당과 지역 의회에서는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는 울며 겨자먹기로 여론에 맞추어 비판 목소리를 내야 했다. 하지만 초기 국면에서 간디는 방글라데시 해방군이 독립전쟁에 승리하면 그 때에서야 방글라데시를 인정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디라는 무엇보다 파키스탄과 군사적 충돌을 할 것을 우려했다.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의 군사력 증강 상황은 상당한 것으로 관측되었고, 동파키스탄에 인도군이 개입되었을 때 서파키스탄 전선의 방위가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결정적으로 파키스탄의 우호국인 중국이 개입할 경우에는 인도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인도 지도부는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늪에서 허우적대며 자원을 소모하기를 바랐다. 특히 인도가 지원한 저항군이 파키스탄군에 의해 궤멸되고, 게릴라와 인민 전쟁으로 투쟁 노선을 전환하면서 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인도의 태도를 바꾼 것은 갑작스럽게 쇄도하기 시작한 엄청난 난민의 물결이었다. 파키스탄군은 방글라데시 영역에서 힌두교도를 사실상 청소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듯 했다. 5월에는 하루 평균 10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이 지역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기에 인구 압박은 심각한 수준으로 올랐다. 인도는 이 난민을 어떻게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낼지를 고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난민이 마오주의 낙살라이트 반군 성장에 너무 유용한 자양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는 여전히 신중론을 고수했고, 다른 강대국을 통해 파키스탄에 외교적 압박을 넣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쇄도하는 난민의 물결은 국제사회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4장에서는 이 위기의 핵심 행위자였던 미국의 대응을, 닉슨과 키신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미국은 방글라데시 위기에서 다른 국제사회 구성원과 달리 일관되게 파키스탄에 기울어서 접근했다. 이 특이한 대응은 닉슨과 키신저가 골몰하고 있었던 또 다른 외교적 성과 때문에 도출된 것이었다.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자신이 남길 최대 업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국내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 계획을 자국에서도 철저히 비밀로 붙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에 접촉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중개자가 필요했는데, 미국과 중국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파키스탄이 제격으로 낙점되었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저우언라이와 물밑 접촉을 해주는 대가로 무기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동파키스탄 위기가 발생했다는 데 있었다.

국무부 관료들이 닉슨과 키신저의 중국 접촉에 대해 전혀 모르는 가운데, 키신저는 방글라데시 문제에 불개입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이에 다카의 미국 요원과 관리들은 거대한 인도적 위기가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릴 것이라 경고했다. 하지만 키신저 최고의 우선순위는 중국 채널의 유지였다. 베트남전에 대한 트라우마로 타국 내전에 개입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이미 나이지리아의 분리주의 분쟁인 비아프라 전쟁이 나이지리아 정부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것은 방글라데시 위기를 바라보게 해주는 중요한 참조점이었다. 닉슨과 키신저에게 인권은 고려 사항도 아니었으며, 그들은 파키스탄의 질서 유지와 장악 능력을 신뢰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이런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파키스탄에 군수품 인도를 연기했고, 난민 위기와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할 필요가 있음을 보고했다. 이런 와중에 중국에서 미국과 교류를, 파키스탄의 조율을 전제로 희망한다는 답신이 도착했다.

1971년의 위기 이후, 마침내 악수를 한 닉슨과 저우언라이.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파키스탄은 중대한 위기에 미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어서 기뻐했다. 반면 닉슨과 케네디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생겼고, 야히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중국과 소통 채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히야는 미국과 중국을 믿고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신헌법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라가반은 여기서 난민 위기가 폭발하기 시작한 5월 전까지는 미국이 지렛대를 썼으면 중국 채널도 지키고 야히야를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파키스탄의 주요 수출을 책임지는 동파키스탄의 경제가 붕괴한 상태였고, 또 주요 외화 원천인 파키스탄 디아스포라의 송금도 벵갈 출신 교민들을 중심으로 중지된 상태였다. 이는 외환 보유고에 큰 압박을 가했는데, 미국이 이 상황에서 파키스탄 정부에 재정과 외화를 빌미로 압박을 가했으면 파키스탄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아와미 연맹과 협상에 나섰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경제적 경고를 했을 때 파키스탄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달자 역할을 버리고자 했을까? 저자는 중국이나 소련 등 미국의 경쟁국이 파키스탄에 미국 수준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음을 고려하면, 파키스탄이 미중 대화 채널을 폐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키신저는 채권국 컨소시엄에서 금융지원을 주저할 때도 ‘미국 혼자서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토록 했다. 파키스탄에 파산 위협이 사라지면서 야히야는 더욱 과격한 행보를 보여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키신저는 대신에 인도가 개입하여 파키스탄을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인도에 자제를 요청했다. 인도는 자국에 방문한 키신저에게 쏟아지는 난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하자고 했고, 파키스탄에 무기를 지원하는 미국의 행동에 반발을 표시했다. 인도가 보기에 난민 문제를 소강상태로 만들어주고 동파키스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입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확히는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과 협상이 진전되면서, 친파키스탄-반인도 구도로 계속해서 이끌렸다. 닉슨과 키신저는 인도가 섣부른 행동을 하여 파키스탄과 나아가 중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인도를 억제’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인도와 무력 분쟁의 와중에 중국이 미중 화해를 승낙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 채널이 만들어지고도 닉슨과 키신저가 파키스탄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키신저가 계속해서 이 문제를 중국에 비춰질 미국의 이미지로서 다룬 것과 큰 연관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에게 파키스탄이 인도보다 불리하기에 인도가 개입하면 중국은 파키스탄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이를 중국이 미국한테 시사하는 강한 메시지로 간주했다. 인도가 파키스탄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미국이 방관한다면, 중국은 미국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닉슨과 키신저는 파키스탄에게 미국이 동맹을 수호할 것이라고 계속해서 안심을 시켜야만 했다. 인도는 당연히 미국의 이런 입장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는 인도의 지정학적 불안감을 크게 키워놓았고, 남아시아 외부에서 중국을 억제할 수 있는 다른 나라를 파트너로 삼을 필요성을 더했다.

5장은 위기 중 소련 측의 대응을 다룬다. 일반적으로는 인도-소련 우호협력 조약의 존재로 소련이 적극적으로 인도에 방어막을 제공해줬고, 인도의 동파키스탄 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실제 조약 체결 이전에도, 이후에도 소련과 인도의 입장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먼저 왜 인도와 소련은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던 것인가? 소련은 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을 타슈켄트에서 중재하면서 모스크바가 남아시아 지역 질서 자체의 중재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의 접근은 별 효과가 없었고, 파키스탄에 무기를 팔았다가 인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중소 국경분쟁이 발발한 해에 모스크바는 인도에 우호 협력을 제안했다. 인디라 간디도 중국-파키스탄 협력에 대한 소련-인도 협력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무엇보다 소련 무기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국내 우익 정당들, 베트남전으로 예민해진 미국, 잠재적 위협국인 중국이 반발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이 식량 지원과 녹색혁명 지원을 걸고 넘어질 수 있었다. 인디라 간디는 비동맹 원칙을 고수하는 틀에서 조약을 만들고자 했고, 이는 소련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69년 말에 인디라 간디의 국내 정치 장악력이 약화되면서 조약 진행도 연기되고 있었다.

1981년 인도와 소련 무선통신 개통을 축하하는 기념 우표. 소련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나와 있다. 하지만 1971년 양국 관계는 외부의 관찰만큼 공고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소련은 이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줬다. 1970년 초에는 소련이 파키스탄에 군수품 원조를 중단하기도 했는데, 간디가 좌경화의 길로 가고 있다 판단하여 국내 입지 강화를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인도-파키스탄을 망라하는 지역 협력 질서에 참여하고 싶어 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대국인 인도와의 우호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물론 파키스탄에 대해서도 적대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1971년 위기에도 소련은 파키스탄의 영토 통합을 지지하며 평화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대체로 고수했다. 미국은 남아시아 문제를 냉전 강대국 경쟁의 일환으로 이해했지만, 소련은 단순한 지역 세력 균형과 안정의 맥락, 특히 중국 문제와 결부하여 이해했다. 물론 이 맥락에서도 방글라데시의 독립 지지는 요원한 일이었다. 소련은 파키스탄이 분할되면 중국의 영향력이 동파키스탄에서 커질 것이 우려되었고, 인도-파키스탄 갈등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공간 확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모스크바의 기본방침은 인도의 군사 개입을 자제시키고 야히야를 설득해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중한 태도는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불만을 사는 길이었다.

주 소련 인도 대사인 다르는 이 위기를 활용하여 인도-소련 우호협력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과 조약을 체결하면 위기 시에 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중국의 개입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소련 측도 중국의 개입으로부터 억제력을 행사해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는 동상이몽이었다. 인도는 유사시에 소련의 지원을 기대했던 반면, 소련은 자신의 존재가 인도, 중국, 파키스탄 간 갈등을 아예 억제하는 힘이 되기를 기대했다. 게다가 소련은 일단 난민을 돌려보내는 데 집중하자고 제안했고, 동파키스탄의 정치 문제에 과하게 신경을 쓸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난민과 동파키스탄 정치 문제의 분리는 소련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 이는 인도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신저가 미중 관계 개선에 따라서, 중인 국경분쟁 시 미국이 인도를 도울 수 없을 것을 명시하면서 인도는 소련과의 조약 체결로 급속하게 기울었다. 인도는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일어나면 소련이 파키스탄에 지원을 중단하고, 소련 국경에서 중국군을 묶어주기를 요구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이는 다른 나라와도 맺을 수 있는 형태의 조약이기에 비동맹 원칙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고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전쟁 가능성에 조심하며, 우호조약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위기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6장에서는 초국적인 공공 여론이 어떻게 방글라데시의 인도적 위기를 알리고 각국 정부를 압박하는 힘을 발휘했는지를 다룬다. 초국적 공공 여론은 1945년 이후 ‘양심의 세계화’라고도 불리는 현상과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조직되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난민 위기로 시작된 NGO는 계속해서 증가 추세였으며, 라디오, 텔레비전, 항공여행으로 대표되는 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의 반문화는 지구적인 청년 저항 문화를 형성했다. 특히 60년대 반문화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고 자유주의적 급진 운동으로 변모하면서 운동의 주된 방향성이 계급 투쟁이나 반제국주의 투쟁보다는 인권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 게다가 냉전의 틀에서 침묵되던 홀로코스트가 어느새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인도적 범죄에 대한 심판이 국제적인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런 흐름들이 양심의 세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국제적 현실은 인권 운동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UN 인권 선언은 시작부터 식민 제국을 유지하고 싶었던 영국이나 주권 문제에 민감했던 소련의 반발로 국제적 적용이 어렵게 고안되었다. 탈식민화라는 또 다른 흐름도 중요했다. 신생 국가들은 주권과 자결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앞세웠고, 많은 국가가 소련 영향으로 개인권보다 사회권을 선호하며 권위주의를 정당화했다. 미국은 남부 인종차별이라는 자국 내의 인권 문제가 컸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는 초국적 인도주의의 확산이라는 흐름과, 탈식민 국가들의 권위주의와 주권 절대화라는 흐름이 맞붙는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진행된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은 초국적 인도주의가 패배한 사례로 가까운 기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영국과 미국에 존재하는 벵갈 디아스포라였다. 특히 영국에서 이주민들은 투쟁 기금을 모금하고, 본국으로 향하는 송금을 중단했는데, 이는 파키스탄 정부를 압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두 국가에서 이주민들은 여론을 형성하여 정부를 압박하고자 했고, 미국에서는 의회 로비가 시도되었다. 한편 옥스팜을 비롯한 구호 단체들은 사이클론 위기 때부터 구호 활동에 진력했고, 현지에 활동가를 파견하며 현장의 참혹함을 기록했다. 이 덕택에 라틴아메리카까지도 포괄하는 전세계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1971년 락의 전설들이 방글라데시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이다. 이미지 출처: 사운드네트워크
조지 해리슨이 콘서트를 위해 쓴 곡, '방글라 데시'

60년대 반문화의 상징인 락 음악도 1971년의 위기에서 다시 부활했다. 캘리포니아의 벵갈계 음악인인 라비 샹카르는 음악을 통한 구호를 시도했다. 라비 샹카르는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에게 연락하여 공연을 조직하자고 했고, 에릭 클랩튼과 밥 딜런이 참여하는 콘서트가 열리게 되었다. 비틀즈는 해체하고, 밥 딜런도 활동을 중단한 데다가, 지미 헨드릭스 사망으로 마약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69년 롤링 스톤즈의 알타몬트 페스티벌이 추태로 끝나면서 1970년 즈음에 락 음악은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60년대 반문화의 어두운 이면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1971년 콘서트는 60년대 락을 중심으로 한 반문화의 긍정적 기억과 추억을 불러일으켰고, 25만 달러를 모금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UN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 탄트 사무총장은 UN은 내정간섭 기관이 아니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인도적 위기가 너무 심각해지면서 내부에서도 인도적 위기에 대한 발언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 간 견해 차이를 좁힐 수는 없었다. 인도는 인도적 위기에 대응을 촉구했지만, 파키스탄은 미국 남북전쟁만 보더라도 분리주의자들을 진압하는 것은 주권 사항이라고 반박했다. 인도는 계속해서 동파키스탄의 정치적 변화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키스탄 내정 문제에 유엔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질적 해결은 당분간 방치될 상태였다.

7장에서는 국제 사회의 여러 국가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인도는 UN에 실망하고, 회원국과 상임이사국도 모두 믿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하며 여러 강대국을 순회해서 설득하기로 했다. 사실 강대국들은 힘과 원칙 사이에서 길항해야만 했으나 그들이 어떤 입장을 정할지 사전에 결정된 건 없었다. 이 국가들은 모두 냉전 구도와 냉전 구도를 깨는 초국적 공공 영역의 발전이라는 상이한 지구적 맥락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일본은 벵갈과 역사적 유대가 깊은 나라였고, 자연히 벵갈의 난관을 잘 이해하는 국가였다. 게다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파키스탄에 원조를 중단하고 자체적인 목소리를 내겠다고 인도에 비밀리에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파키스탄에 영향력을 끼칠 수단도 마땅치 않았고 중국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역시나 양면적으로 행동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소련과 입장을 공유하며 인도적 위기와 동파키스탄의 정치적 문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예외 국가는 동독이었다. 동독은 인도에게서 외교적 인정을 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독립 정부를 발 빠르게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와 수교를 시도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최초로 인정하는 외교적 부담을 피하고 싶었기에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직 동독을 인정할 수는 없었는데, 서독이 문제 삼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독은 원래 파키스탄과 더 친하기도 했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 이후 인도와 관계 개선이 시작되었다. 서독 정부는 파키스탄을 자극하기를 주저했지만, 브란트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 등이 작용하여 난민 인도적 위기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파키스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파키스탄 압박에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사회가 움직이며 인도적 위기에 프랑스 정부가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압박했다. 프랑스 정부는 시민사회 여론에 대응해야만 했고, 인도가 개입해도 프랑스는 아무 대응이 없을 것이라며 인도에 암시해주고, 파키스탄에도 더는 프랑스가 묵인,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전달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는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유럽에서 예외적으로 파키스탄을 묵인한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코의 스페인이었다. 특히 프랑코는 파키스탄의 모든 처지를 이해한다며 대거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남아시아의 전통적 이해 관계자인 영국도 위기에 신속히 대응해야만 했다. 1947년 인도 독립 이후에 영국은 자국 이익과 제국적 유산의 관리라는 차원에서 이 지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국 해체 이후에 자국 이익과 제국적 유산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1971년에 영국은 EEC에 가입을 시도했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보조를 맞출 필요성을 높였다. 영국에서 영연방보다는 유럽에 집중하자는 방향으로 합의가 모아졌는데, 이는 특히 영국이 처한 경제적 곤란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은 수에즈 동쪽에서 군사력을 감축하고 지역의 현지 협력국을 물색하는 출구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국가의 크기와 상징성으로 보았을 때 현지 협력국은 당연히 인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리콴유는 영국이 인도와 협력하여 동남아시아 및 인도양에서 중국의 팽창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1년 위기가 찾아오자 영국은 파키스탄에 정치적 해결을 권고했으나 파키스탄은 오히려 분노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영국 내부에서는 여론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파키스탄에는 원조를 중단한 반면 인도에는 무기를 계속 판매했는데, 이는 양국 갈등 시 둘 다 공여를 중지했던 기존 입장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파키스탄은 이에 분노하여 영연방을 깨겠다고 위협하였으나, 영국 자체가 영연방에 관심이 적어지면서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왔다. 영국의 태도는 키신저의 짜증을 불러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영국도 전쟁으로 위기가 확대되는 것은 어떻게든 막고자 인도에 자제를 촉구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대였다.

호주는 태평양 전쟁의 경험과 중국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남아시아의 반공 전선에 적극 참여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영국의 전략적 철수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율성을 확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호주가 보기에 방글라데시는 이대로 가면 극단주의 날뛰는 불안정 지역으로 변모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파키스탄이 질서를 회복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따라서 위기의 추가적인 확대 없이 최대한 방글라데시가 빠르게 독립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호주는 이런 분석에 기초하여 전쟁 방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파키스탄 지도부의 완고함을 한 번 인식한 뒤로는 전쟁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체념하였다. 이는 정확한 분석이었다.

캐나다는 냉전기 파키스탄과 가장 많은 협력을 했던 국가로서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초기 국면에는 파키스탄을 압박하지 않고도 협상으로 회유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특히 퀘벡 분리 문제가 얽혀 있는 캐나다로서는 동파키스탄에 대해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도 여론 압력이 작용하면서 정부의 침묵을 어렵게 만들었다. 캐나다는 파키스탄 압박에 소극적으로 동참하고, 대신에 인도를 동시에 압박하기로 결정했다. 단기간에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울 것 같으니 난민들을 인도에 통합하는 걸 고려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인도 입장에서 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비서구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인도측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남아시아 인접국인 이란에서는 파키스탄의 위기가 중국이나 소련의 세력 확대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이란의 샤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 시점에서 인도는 파키스탄 내부 문제에 인도를 연관시키지 말라고 반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파키스탄에 대해서 무력 사용의 자제를 촉구했다. 하지만 인도와 우호 관계였던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민족 분규 문제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에는 반대했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 회의에서 파키스탄의 영토 보전을 지지했다.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인도-파키스탄 분쟁에서 한쪽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는 아랍-이스라엘 갈등에서 늘 아랍편을 들어 왔기에 이집트의 결정에 매우 실망했다.

의외의 태도를 보여준 국가는 인도와 줄곧 비우호적이었던 이스라엘이었다. 인도는 카슈미르 문제를 항상 의식하면서, 이슬람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고자 이스라엘에 줄곧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기 때문에, 인도는 이스라엘 무기를 받고 게릴라에게 전달해줄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최종 목표는 인도와의 수교였다. 하지만 인도는 여전히 이슬람 세계의 반발을 우려하여 수교를 해주지는 않았다.

국제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힘과 원칙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힘이 원칙을 상당 부분 압도했다. 아무리 인도에 우호적인 쪽에서도, 인도 입장에 공감은 해줄지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지원을 해주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인도는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8장에서는 남아시아 지정학의 또 다른 당사자인 중국의 입장을 설명한다. 1971년 위기에서 의외로 중국은 개입을 하지 않았는데, 기존에는 이를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 그리고 인도-소련 조약의 억지 효과로 설명하고는 했다. 하지만 저자는 중국이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더 넓은 맥락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당연하게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꺼려했다. 중국이 보기에 독립 방글라데시는 인도, 나아가 소련과 우호국이 될 수도 있었고, 이념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벵갈 민족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고, 중국에도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제3세계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은 벵갈 입장도 고려해야만 했다. 따라서 파키스탄을 지지한다고 겉으로 표방하면서도 벵골인들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파키스탄에 권고했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무력 충돌 시 중국의 지원 규모와 범위도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전략적, 이념적, 국제정치적 고려가 모두 작용한 결과였다.

1962년 중인 국경을 순찰하는 인도 병사들. 1962년 전쟁은 인도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62년에 중국은 인도에 승리를 거두었고,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 중국이 인도에 최후통첩을 보내는 등, 인도는 중파 관계에 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파키스탄이 소련에 접근했고, 인도의 위기감은 더욱 커지며 자신들도 중국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1969년에 중국에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인도와의 화해가 필요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중국에 두려움을 심어줬고, 중소 관계는 1969년 분쟁으로 최악이 되었다. 이후 신장에도 국경 분쟁이 이어지며, 중소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중국은 소련의 압박을 감쇄하고자 미국과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자 했다. 문화대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은 것도 컸다. 벵갈의 낙살라이트 반군을 문화대혁명의 에너지로 지원했었던 중국은, 자국 내의 혁명적 열기가 잠잠해지면서 관심을 잃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1967년에 이미 마오쩌둥은 인도에 화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고, 1970년까지도 꾸준히 양측의 신중한 관계 개선을 위한 탐색이 진행되었다. 중국의 1차적 목표는 뉴델리를 모스크바에 가깝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파키스탄도 잃지 않는 것에 있었다. 중국의 답은 형식적으로 인도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키신저가 이 수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중국은 파키스탄을 진심으로 지원할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 발 더 나아가 파키스탄의 안전을 미국이 어떻게 보장해주는지를 보고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가늠할 것이라 추측하였다.

1971년 인디라 간디는 중국에 서한을 작성하여 난민 위기와 방글라 위기를 같이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중국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파키스탄을 고려해야 했고, 인소 우호협력 조약도 부담되었다. 그래도 인도는 중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측이 인소 조약에 대해서 중국 언론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소 조약은 중요 요인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인도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은 정해져 있었다. 저자는 오히려 린뱌오를 둘러싼 국내의 정치적 갈등이 중국을 억제하는 데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강조한다. 마오쩌둥과 군의 긴장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중국은 위험천만한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수 없었다. 이런 제반 사항을 파악한 뉴델리는 사태가 전쟁으로 치달아도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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