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은 방글라데시 위기를 바라보는 인도의 시선을 보여준다. 인도에서는 강철 같은 지도자인 인디라 간디가 측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호한 군사 행동을 주문하여 파키스탄을 제압했다는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실제 인디라 간디와 인도의 입장은 신화와 맞지 않았다. 그들은 아와미 연맹의 승리를 반겼으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반기지 않았다. 벵갈 통합 운동이 부상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서벵갈에 좌파 낙살라이트 반군이 득세하고 있었기에 이 지역이 마오주의 세력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따라서 인도는 파키스탄이 벵갈 위기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했을 때도, 파키스탄의 무력 진압이 일시적일 것이며 협상으로 위기가 신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론은 인도 정부의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여론은 방글라데시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차게 되었고, 정당과 지역 의회에서는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는 울며 겨자먹기로 여론에 맞추어 비판 목소리를 내야 했다. 하지만 초기 국면에서 간디는 방글라데시 해방군이 독립전쟁에 승리하면 그 때에서야 방글라데시를 인정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디라는 무엇보다 파키스탄과 군사적 충돌을 할 것을 우려했다.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의 군사력 증강 상황은 상당한 것으로 관측되었고, 동파키스탄에 인도군이 개입되었을 때 서파키스탄 전선의 방위가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결정적으로 파키스탄의 우호국인 중국이 개입할 경우에는 인도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인도 지도부는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늪에서 허우적대며 자원을 소모하기를 바랐다. 특히 인도가 지원한 저항군이 파키스탄군에 의해 궤멸되고, 게릴라와 인민 전쟁으로 투쟁 노선을 전환하면서 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인도의 태도를 바꾼 것은 갑작스럽게 쇄도하기 시작한 엄청난 난민의 물결이었다. 파키스탄군은 방글라데시 영역에서 힌두교도를 사실상 청소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듯 했다. 5월에는 하루 평균 10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이 지역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기에 인구 압박은 심각한 수준으로 올랐다. 인도는 이 난민을 어떻게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낼지를 고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난민이 마오주의 낙살라이트 반군 성장에 너무 유용한 자양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는 여전히 신중론을 고수했고, 다른 강대국을 통해 파키스탄에 외교적 압박을 넣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