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에서는 파키스탄이 먼저 전쟁을 도발했다는 인도 측의 통설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은 왜 벌어졌는가? 인도의 패권적 야망 때문이었는가? 저자는 전쟁이 아니면 도저히 위기 해결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인도가 내키지 않게 전쟁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난민 위기가 계속되며 12월에는 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중 80%가 힌두교도였는데, 인도는 이들이 인도 사회에 녹아들면 마오주의의 양분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난민은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고, 다른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의 예산도 전부 삭감될 수밖에 없었다. 난민보다 전쟁이 훨씬 쌌던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 파키스탄편을 드는 가운데 인도편을 확실히 드는 나라가 없는 것은 인도 입장에서는 부담이었다. 인도는 대신에 인도를 지원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인도를 가로막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방글라데시 위기에 공감하는 지구적 공공 여론을 믿었다.

뉴델리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선의 고삐를 다시 쥐었다. 그 전까지는 뉴델리가 지원은 적게 하고 통제는 쥐고자 했었는데, 이제는 지원을 대폭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운동 내부에서 분열이 심해지고, 해방 운동과 인도의 관계가 계속 흐트러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해방 운동 쪽에서 인도가 신뢰할 수 없는 미국에 자꾸 접촉하면서 인도는 사태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압박을 더욱 받게 되었다. 9월부터 인도는 해방군에 대한 지원을 증대하고 파키스탄과 직접 분쟁에 나설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외적 압박 요인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인도는 소련에 접근해서 인도 측 입장을 이해해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도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는 이란의 중개로 야히야와 만나서 최종 조정을 시도했으나, 아와미 연맹과 대화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포기하고 인도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의 지원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고, 그림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서방의 지원도 필요했다. 인디라 간디는 유럽 순방하며 언론 인터뷰로 여론을 움직이고자 했다. 닉슨-키신저와 회담하며 미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서독은 사태의 전개를 기민하게 읽고 인도를 지지하거나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중순부터는 아예 인도군이 전면에 나서 방글라데시 해방군과 작전에 나서고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파키스탄 군부는 지금이라도 동부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부 전선을 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2월 3일에 파키스탄군이 인도를 공격하면서 3차 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도군의 진격로. 다카 점령은 처음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