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해 (3)
미국은 어쩌다가 벵갈만에 항공모함까지 파견하게 되었을까?
9장에서는 파키스탄이 먼저 전쟁을 도발했다는 인도 측의 통설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은 왜 벌어졌는가? 인도의 패권적 야망 때문이었는가? 저자는 전쟁이 아니면 도저히 위기 해결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인도가 내키지 않게 전쟁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난민 위기가 계속되며 12월에는 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중 80%가 힌두교도였는데, 인도는 이들이 인도 사회에 녹아들면 마오주의의 양분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난민은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고, 다른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의 예산도 전부 삭감될 수밖에 없었다. 난민보다 전쟁이 훨씬 쌌던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 파키스탄편을 드는 가운데 인도편을 확실히 드는 나라가 없는 것은 인도 입장에서는 부담이었다. 인도는 대신에 인도를 지원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인도를 가로막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방글라데시 위기에 공감하는 지구적 공공 여론을 믿었다.
뉴델리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선의 고삐를 다시 쥐었다. 그 전까지는 뉴델리가 지원은 적게 하고 통제는 쥐고자 했었는데, 이제는 지원을 대폭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운동 내부에서 분열이 심해지고, 해방 운동과 인도의 관계가 계속 흐트러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해방 운동 쪽에서 인도가 신뢰할 수 없는 미국에 자꾸 접촉하면서 인도는 사태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압박을 더욱 받게 되었다. 9월부터 인도는 해방군에 대한 지원을 증대하고 파키스탄과 직접 분쟁에 나설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외적 압박 요인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인도는 소련에 접근해서 인도 측 입장을 이해해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도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는 이란의 중개로 야히야와 만나서 최종 조정을 시도했으나, 아와미 연맹과 대화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포기하고 인도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의 지원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고, 그림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서방의 지원도 필요했다. 인디라 간디는 유럽 순방하며 언론 인터뷰로 여론을 움직이고자 했다. 닉슨-키신저와 회담하며 미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서독은 사태의 전개를 기민하게 읽고 인도를 지지하거나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중순부터는 아예 인도군이 전면에 나서 방글라데시 해방군과 작전에 나서고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파키스탄 군부는 지금이라도 동부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부 전선을 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2월 3일에 파키스탄군이 인도를 공격하면서 3차 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장인 10장에서는 전쟁의 경과를 다룬다.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인도의 빠른 승리를 필연이라고 하지만, 사실 당시로는 다들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 이상한 승리는 전쟁이 남아시아를 넘어선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움직인 결과이자 우연과 우발의 산물이었다.
초기 인도군의 목표는 수도인 다카를 점령하는 것보다는 전략적 요충지 위주로 빠르게 전과를 올려 파키스탄을 압박하고 방글라데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인도는 장기전은 국제적 이목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안보리에서 인도 규탄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권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영국과 프랑스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들은 냉전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반면에 인도군이 주둔한 채 방글라데시의 정치적 해결을 시작하자는 결의안을 냈는데, 이는 대만을 밀어낸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통과되지 못했다. 안보리가 아닌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양측이 휴전하여 서로의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인도에 좋지 못한 신호였다. 제3세계의 주권론이 UN의 주류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키신저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 소련-인도의 압박에 미국 우방인 파키스탄이 무너졌다고 전세계가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중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중국에도 신뢰를 주지 못할 것이었다. 소련은 키신저의 이런 인식을 인지하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보기에 이 문제는 남아시아 지역 문제지 초강대국 동서 대립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닉슨과 키신저는 인디라 간디의 야심을 과대평가하며, 일단 개전이 시작된 이상 인도가 서파키스탄까지 확전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들의 시나리오에서 최악은 파키스탄 자체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인도에 경제 원조를 중단했고, 파키스탄에 제3국(이란) 통한 무기 공급을 시도했다. 중국에도 메시지를 보내 파키스탄 문제에 개입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국무부, 이란, 중국 모두 닉슨과 키신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지 않았다.
인도의 행동이 모스크바의 지원과 묵인 아래에서 벌어진다고 확신한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을 직접 겨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 USS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이 베트남에서 벵갈로 이동하며 무력 시위에 나섰다. 소련과 인도는 깜짝 놀라서 긴급 논의를 시작했고, 인도는 미국의 협박을 인지하며 다카 점령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며 진격에 박차를 가했다. 반대급부로 서부 전선에서는 군사 행동 철저히 자제하며, 영토 야심이 없음을 천명하고 파키스탄과 미국에 구실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키신저가 기대했던 중국은 반대로 모든 개입을 꺼려했다. 인도가 소련에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한 중국은 인도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했고, 린뱌오 문제 때문에 군을 아직 신뢰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벵갈 상황을 파악한 중국은 자신들의 개입으로 사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태도는 인도에게는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안보리에서는 서서히 휴전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휴전 결의안이 제시되고 있었는데, 인도는 이 상황에서 휴전하면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급해졌다. 물론 패배하고 있던 측인 파키스탄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야히야는 영국과 프랑스 결의안 대신에 폴란드 측의 휴전 결의안이라도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토는 폴란드 결의안마저도 거부했다. 이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처참한 패배를 통해서 군의 정치적 위상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노림수로 추측된다.
안보리 결의안이 부토로 인해서 모두 무산되자, 인도를 압박할 국제적 압력은 아예 사라졌다. 동파키스탄 주둔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곧이어 인도의 항복 권고에 무조건 항복했다. 닉슨과 키신저의 우려와 달리, 인도는 동파키스탄을 장악하자마자 전쟁을 신속히 종료하고 서파키스탄 진군도 하지 않았다. 독립된 방글라데시가 탄생했다.
하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자신들이 항공모함을 보내서 소련을 압박하고, 소련이 인도를 압박하여 서파키스탄이 안전해질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인도는 원래 서파키스탄에 진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방글라데시와 달리 서파키스탄에는 인도에 협조를 기대할 수 있는 협력자를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인디라 간디는 그런 야심도 없었다. 오히려 항공모함 파견의 의의는 인도군을 자극하여 다카 점령까지 쾌속 진격을 만들어낸 것에 있었다.
결론에서 저자는 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을 둘러싼 승리의 신화가 수십년 째 울려퍼지고 있지만,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논지를 반복한다. 이 전쟁은 탈식민화, 냉전, 초기 세계화라는 세 가지 글로벌 맥락 속에서 펼쳐졌다. 탈식민화는 제3세계 주권론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했고, 냉전은 진영 간 대립보다 진영 내부의 이견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편 양심의 세계화와 락음악, 60년대 반문화와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등 초기 세계화라는 흐름은 각국 정부를 효과적으로 압박했다.
저자는 대안적 시나리오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만약 68운동이 없었다면 방글라데시 자치 운동은 그렇게 거셀 수 없었을 것이다. 부토가 야히야와 협조하지 않기로 했다면 야히야가 무력 진압을 쉽게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닉슨이 초기 국면에서 파키스탄을 압박했다면 군부는 자치에 합의를 했을 것이다. 소련, 영국과 프랑스, 중국 요인도 만일 달라졌다면 사태를 어떻게 바꿨을지 알 수 없다. 미국이 항공모함을 보내지 않았다면 인도가 그렇게 빠르게 다카를 점령하도록 압박 받지 않았을 것이다. 부토가 마지막에 폴란드 측 휴전 결의안을 받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인도의 점령 하에 있는 방글라데시만 독립하는 시나리오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971년 위기는 전후 남아시아 정치에 큰 흔적을 남겼다. 인디라 간디는 승리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기억하며 부토와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했고, 카슈미르 합의안도 제시했다. 하지만 부토는 국내의 약한 정치적 입지로 인하여 초기의 우호적 제스처를 걷어버리고 반인도 노선으로 돌아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불거졌고, 포로 송환과 전범 재판 문제로 파키스탄과 마찰을 빚었다. 파키스탄은 중국을 동원하여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을 거부할 수 있었기에, 방글라데시는 전범 재판 문제 등을 파키스탄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 후의 내정은 훨씬 더 큰 문제였다. 2년에 걸친 혼란은 경제를 완전히 파괴했고, 무기를 든 민병대가 국토 전역을 배회했다. 이런 대혼란은 자연스레 군부 쿠데타로 이어졌다.
저자는 만약 파키스탄이 무력 개입을 시작했을 때 바로 인도가 맞받아쳤다면, 난민 위기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후의 혼란도 최소한도로 제한되지 않았을까 반사실적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실제 장기간에 걸친 해방투쟁과 게릴라 전쟁으로 파괴된 인프라는 방글라데시 경제의 발목을 오랜 기간 잡았으며, 사회 집단 간 심화된 반목과 갈등도 정치적 통합을 어렵게 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무지부르의 딸인 셰이크 하시나는 과거사 청산 문제를 지속하는 등 1971년의 유산은 방글라데시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 사건은 이후에 펼쳐질 여러 민족 분쟁의 전조였으며, 그 분쟁의 구체적 내용과 맥락까지도 예시하고 있었다. 주권과 이해관계 및 인권과 규범 사이의 긴장. 성급한 일방주의와 신중한 다자주의, 동서와 남북이라는 상투적 대립이 모호해지는 구도. 국제 미디어, NGO, 디아스포라, 초국적 여론의 중요성은 발칸,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냉전 한복판에 있었던 이 사건은 몹시 탈냉전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1971: A Global History of the Creation of Bangladesh는 냉전 체제의 변화 속에서, 남아시아 지역적 맥락이나 초강대국 정치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가와 락 그룹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행위자에 주목하여 1971년 위기의 지구적 맥락을 복원한 인상적 연구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방글라데시 위기를 바라보는 라가반의 접근법이다. 남아시아 위기의 당사국이나 냉전 초강대국들의 목적론적인 서사가 아니라, 세계 각국 문서고에 바탕을 둔 광범위하면서도 치밀한 연구는 방글라데시 위기가 저자가 인용한 보르헤스의 말대로 ‘갈림길의 정원’이었음을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사건과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의 난민 위기는 의사 결정자들, 특히 인도측 지도자들의 선택지를 끊임없이 압박했으며, 구조적 요인보다는 우발적 요인과 의사 결정자 개인의 특성이 사태의 진로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라가반의 시선이 인상적인 것은 그 우발적 요인의 상당수를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지구적 맥락 속에서 위치시킨 것이다. 여기서 지구적 맥락은 냉전 정치에 국한되지 않고, 탈식민 세계의 변화와 초기 세계화라는 20세기 후반의 다른 거대한 조류까지도 포괄한다. 이 거대한 조류는 갈림길을 대하는 수많은 행위자들의 선택과 행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저자 본인이 결론에서 이야기하듯, 방글라데시 위기는 이후에 벌어질 탈식민 세계의 여러 민족 분규와 인도적 위기의 향방을 예시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라가반의 접근법은 그러한 사건들에 연구자들이 접근할 때 어떤 시각과 방법론을 취해야 할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라가반의 연구에 질문을 던질 때도, 연구의 적합성이나 한계를 논하는 것보다도, 라가반의 작업을 냉전기나 남아시아 지역의 다른 사건에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1971년 위기가 숱한 강대국과 지구적 행위자들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이후의 사건들에 위기의 여파는 어떤 식으로 작용했을까? 가장 대표적인 예로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들 수 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당시에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남아시아 지역 문제를 어느 정도로 인지했는가? 인도는 우호국이 된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했는가? 특히 인도와 소련의 증진된 관계에 위협을 느낀 중국과 파키스탄, 그리고 미국은 1971년 위기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여 인식했을까? 물론 이미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구적 냉전의 맥락에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주제다. 하지만 라가반이 남아시아 지역 문제로만 인식되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지구적 맥락을 덧붙였듯이, 반대로 지구적 냉전의 장으로서 인식되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시아 지역의 맥락을 고려하는 새로운 접근법도 가능해 보인다. 그밖에 라가반의 연구에서 추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방글라데시의 인접국이기도 한 미얀마(당시 버마)의 대응이다. 버마 이야기는 책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방글라데시와 미얀마의 지리적 인접성을 비롯하여 미얀마의 무슬림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와 갖는 긴밀한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이는 다소 의아한 일이다. 난민 위기와 급변하는 남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버마의 대응은 1971년 위기가 동남아시아에 미친 여파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1971년의 위기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반응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책에서는 이란이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하고, 이집트, 말레이시아 등의 다른 이슬람 국가의 목소리가 간간이 나타나곤 한다. 실제 이 시기는 세속주의의 마지막 시기로서 이슬람 세계의 정부들이 종교보다는 냉전 정치나 민족주의적 동기로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1970년대, 특히 1973년 석유파동 이후에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는 민간 교류가 대폭 확장되었고, 대중과 지식인 차원의 정치적 이슬람, 혹은 이슬람주의 네트워크가 지역적 차원을 뛰어넘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직전의 시기로서 1971년은 이러한 민간 차원의 무슬림 네트워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방글라데시 위기는 정치적 이슬람의 출현 및 확산과 어느 정도로 유관한 사건일까?
지구적 냉전의 맥락에서 1971년 위기와 가장 공명하는 사건은 1977년의 오가덴 전쟁으로 시작된 에티오피아 위기인 것처럼 보인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그의 저서 냉전의 지구사에서 이 사건을 냉전 정치의 맥락에서 상세히 다룬 바가 있다. 에티오피아 위기에서도 우리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와 예멘까지 교차하는 복잡한 지역 정치가 한 축에 있고, 미국과 소련, 쿠바가 동원되는 동서 냉전이 다른 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련의 지원으로 에티오피아에서 멩기스투 공산 정권이 승리하고, 북부 티그레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강제 이주 정책으로 기근이 발생한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당시 영국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과 미국의 USA for Africa 앨범이 만들어진 것은 1971년 위기에 대응하여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가 조직된 것을 쉽사리 연상시킨다. 냉전의 행위자들은 에티오피아 위기와 방글라데시 위기를 겹쳐 보았을까? 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인접 지역인 홍해에서 벌어진 사건에 영향을 끼쳤을까?
방글라데시와 에티오피아의 위기는 두 사건이 모두 미소 데탕트 기간에 벌어졌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 하다. 에티오피아에서 소련이 쿠바와 함께 전개한 상당한 군사 개입은 브레진스키를 분노하게 했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부터 데탕트를 전면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데탕트 초기 국면이었던 1971년에 방글라데시 위기는 데탕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라가반의 서술에서 데탕트는 닉슨과 키신저가 소련에 권고할 때 지나가듯이 언급될 따름이다. 미소가 상호 화해를 진전시켜 나가는데 왜 남아시아에서 무모하게 인도를 지원하냐는 불만을 터트린 것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닉슨과 키신저는 데탕트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왜 그렇게 소련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행동했는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더는 아시아에서 수세에 몰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는가? 확실히 이 문제를 남아시아 지역 문제로 인지했던 소련은 데탕트 국면과 방글라데시 위기를 분리해서 바라본 것 같지만, 미국이 항공모함까지 파견하는 초강수를 두었을 때는 냉전 지정학의 맥락에서, 특히 소련 해군 전략과 관련하여 어떤 사고와 판단을 도출했을까?
한편으로 이 책에서는 냉전을 지구적 분위기를 형성한 하나의 시대보다는, 초강대국의 준전시 대치 상태와 경쟁이라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큰 듯 하다. 1971년 위기의 당사자들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국익을 최우선으로 파악하여 행동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묘사된다(의사 결정자들의 판단이 합리적인지와는 별개로). 하지만 주요 지도자들, 특히 야히야 칸이나 인디라 간디, 무지부르 라흐만의 세계관에서 냉전은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요컨대, 라가반의 책에서는 제3세계 탈식민 지역에서 발전 모델을 둘러싼 경합으로서 냉전의 모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1971년 1년의 긴박한 위기와 사건의 전개에 집중한 책에서 이런 서술까지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과하다. 다만 궁금증이 드는 것은 위기 직전 인디라 간디가 사회주의적 개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아버지인 자와할랄 네루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고, 네루는 같은 이유에서 소련에 다소 우호적인 성향을 지녔다. 반대로 미국은 녹색혁명 프로젝트를 통해서 남아시아의 만성적인 삭량 부족을 개선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국가적 개발이 여전히 탈식민 지도자들의 문제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에서, 남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지정학적 위기 국면과 국가적 개발 프로젝트의 향방을 연결시켜서 생각했을까?
끝으로 책을 읽고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저자의 주된 논지의 설득력에 있었다. 물론 이 책은 당분간에도 1971년의 위기를 묘사하고 분석한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힐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서론과 결론에서 계속 강조하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우연과 우발의 산물이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 같지는 않다. 동파키스탄을 향한 서파키스탄의 차별적인 시선과 억압은 상당한 것이었으며, 야히야 칸과 부토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와미 연맹의 단독 과반에 근거한 개헌을 서파키스탄의 정치적 지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설령 연방제로 전환했다고 하여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잠재적 갈등이 봉합될 수 있었을지도 다소 의문이 든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 연맹으로 통합되었다가 금세 갈라졌듯, 지리적으로 이격된 대규모 영토가 장기간에 걸쳐 유지되는 것을 상상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중요한 것은 라가반이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문화적 차이, 동파키스탄의 분리 의식, 서파키스탄의 차별 의식이 극복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다루는 1장에서 이 요인들은 오히려 저자의 논지를 위해서 다소 소략된 것 같다.
물론 무력 사용으로 시작된 1971년의 위기가 궁극적으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저자의 말대로 불확실성이 상당한 듯하다. 특히 린뱌오 사건이 없어서 중국이 운신의 폭이 넓었다면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 천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1년 만에 유입되어 인도가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음은 변하지 않는다.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안정화를 시행할 의지도 없었고, 게릴라전을 당장에 소탕할 능력도 없었기에 난민 위기는 전쟁이 아니고서야 단기간에 종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이런 상황을 인디라 간디가 장기간 감내할 수 없었기에, 전쟁과 인도의 승리는 몇 가지 변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로 남을 것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라가반이 유사한 조건에 처했던 다른 국제적 위기(에티오피아 위기, 유고슬라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등)와의 비교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그래서 아쉽다. 물론 이런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 책의 가치가 전혀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라가반은 오히려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남아시아와 냉전사, 국제적 위기에 관심을 두는 연구자들에게 보충할 필요가 있는 후속 연구 과제를 제시해준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명백한 장점으로 언급할 것은 마치 논픽션 르포를 떠올리게 하는 생동감 있고 흥미진진한 서술이다. 각 장이 시작할 때 해당 장을 관통하는 장면을 르포처럼 보여주면서 자신이 집중할 주제를 드러내는 서술법은 어지러운 사건의 전개 속에서 요점을 잡을 수 있도록 독자를 훌륭하게 배려한다. 내용의 충실함뿐 아니라 서술의 재미까지 잡은 모범적인 사례로서 읽기에 인상적인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