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비에트의 도시 라슈트
미르자 쿠첵 칸과 장갈리 운동의 역사
아르다빌에서 길란의 라슈트까지의 여정은 약 250km. 구불구불한 도로를 타고 가야해서 약 5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다.
바로 남쪽 도로를 탈지, 아니면 북쪽으로 빠져서 아제르바이잔-이란 국경을 따라 아스타라를 찍고 카스피해를 따라 내려갈지 궁금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후자를 원했다. 원래 넘고자 했으나 넘지 못한 아제르바이잔-이란 국경을 눈으로라도 볼 수 있으니까..
참고로 원래 아스타라는 아락스강을 양편에 끼고 형성된 마을이었는데, 러시아 제국이 남하하면서 아락스강을 경계로 두 마을로 갈라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아제르바이잔 아스타라와 이란 아스타라가 따로 존재한다. 예전에는 국경을 넘는 육로 여행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남캅카스 고원 지대를 따라 가는 길.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데 길가에 한국으로 치면 도로변 가든 같은 그럴싸한 식당들과 명절 시즌 소풍을 나온 가족 차량들이 많이 보였다.
딱 보아도 '나 국경이요'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 같은 펜스. 국경을 육로로 건넌 적은 두 번 있는데, 모두 기차 안에서 건너는 것이라 육로 국경을 따라서 길을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지금도 저 국경을 넘나들며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란으로 밀수를 하는 보따리장사꾼들이 많다고 들었다. 소비에트 정권 이전에는 아마 국경을 이렇게 막아놓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다.
아스타라 가기 직전에..
아스타라에 진입했는데, 카스피해 해변 도로를 따라 갈 것을 기대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탁 트인 카스피해를 보면서 지루한 드라이브를 견디려고 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이제 길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였음을 알려주는 풍경이 있으니 바로 논이다. 카스피해에 면한 지역인 길란과 마잔다란은 강수량이 높아 빽빽한 삼림 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높은 강수량 덕택에 이렇게 이란의 쌀농사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구 증가 때문에 북부 지역의 쌀 생산량으로는 이란의 쌀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어서 꽤 많은 분량을 수입해야 한다.
라슈트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지고 밤이 되었다. 명절 시즌에다가, 라슈트는 테헤란하고도 가깝고 바다에 면한 인기 관광지라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숙소를 잡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르다빌에서 여기까지 태워준 택시기사한테 부탁하여 호텔 대신에 에어비엔비 같은 숙소를 구했다. 고마워서 일단 밥은 샀는데 이 양반 하는 행동 모든 게 바가지 삘이 나서 내키지는 않았다...
메뉴는 이란의 첼로 케밥인데 구운 고기 + 밥으로 구성된 심플한 요리다. 거의 이란의 주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금 비싼 걸 시켜서 닭고기(주제)와 양고기(구스판드)가 섞인 박티야르 케밥(캬버베 바크티여리)을 주문했다.
이란에서 밥을 시키면 일단은 다 먹어도 되는 양인지 싶을 정도로(어쩌면 옛날 한국처럼) 한 바가지를 주는데, 바닥을 노란색 누룽지로 만들어서 바삭하게 먹는다. 안에 열을 품고 있어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밥 안에 1인용 버터를 녹여서 버터를 칠해준 다음에, 기름기를 잡아주는 구운 토마토와 고기를 반찬으로 먹으면 된다. 여기에 기호에 따라 후추와 소막 같은 향신료를 첨가하면 완성.
가격이 그렇게 크게 비싸지는 않았는데, 라슈트 시내에서는 한참 외곽인 데다가 방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인터넷이 안 잡혀서 꽤나 불편했다. 둘이 같이 여행 와서 머무르면 딱 좋을 크기일 것 같은데 뭐 여행은 혼자서 해야 제맛이죠...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라슈트 시내 도착. 마침 방이 하나 남는 저가 호텔이 있어서 시내에서의 투숙도 해결 완료. 슬슬 날이 더워지는 가운데 도시 활보를 시작한다.
라슈트는 현재 추산으로 인구 약 75만 명을 자랑하는 북부 이란 최대의 대도시 중 하나다. 민족적으로는 페르시아인(주류 이란인)과 사촌지간쯤 되는 이란계 민족인 길란인으로 페르시아어와 근연 언어인 길라크어(길라키)를 구사한다.
길란은 타브리즈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란에서 근대화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까 보고 온 육로 국경을 넘어가면 러시아 제국령 아제르바이잔이었고, 많은 길란 노동자들이 타브리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쿠 유전에서 미숙련 노동자로 일하며 바쿠에서 거침없이 발전하는 근대 산업 공간을 경험했다. 또한 카스피해라는 세계 최대의 호수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무역 거점지로 성장한 곳이기도 했다. 카스피해는 이란을 아제르바이잔, 다게스탄,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연결시켜주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연결 통로는 아스트라한을 통해 북상하여 모스크바까지 이어질 수 있는 러시아의 볼가강 수계망이었다. 러시아 상품과 이란 상품이 라슈트와 안잘리 항구를 거쳐갔다.
이곳은 라슈트 시를 대표하는 길란 도청 건물인데... 타브리즈 도청처럼 지금은 문화재다. 꽤 장기간의 문화재 보수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1920년대에 러시아계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고, 역시 유럽적 근대성의 도입을 모토로 내건 팔레비 정권이었기 때문에 시계탑을 당당히 세웠다.
광장에는 길란의 상징이자 이란인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민족주의 게릴라 지도자인 미르자 쿠첵 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시청 광장을 내가 찍은 사진으로 보면 참 멋이 없는데, 원래는 이런 모습으로 제일 유명하다. 특히 라슈트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다보니, 이 광장을 상징하는 사진들은 모두 비가 추적추적 내린 분위기의 사진들이 많다.
이란 어딜 가나 있는 이란 이슬람 혁명 순교자, 혹은 이란-이라크 전쟁 순교자들을 기념한 기념물 같았다. 도청 광장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공원이다.
이 날은 피곤해서 여행할 기력이 잘 남지 않았다. 사실 어디를 봐야할지 잘 감이 안 오기도 했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숙소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밤이 되어서야 나와보았다. 밤이 되니 명절에 여행 온 사람들로 도청 광장이 북적였는데, 아무리 봐도 맛집 대기줄을 서는 모습이 보이길래 "이야 이란에서도 맛집은 맛집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근처를 배회했다. 이곳은 맛집 대기줄인 것을 넘어서, 길란의 유명 음식인 '자골바골'을 파는 집이 모여 있는 맛집 골목이었던 것이다. 원조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즈즈-브즈'라고 부르는 음식인데, 양고기 내장 양념 볶음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먹었던 것은 큼직큼직하게 잘라서 볶던데, 길란에서는 거의 다지다시피 해서 볶아내어 이것도 별미였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하게 파는 조합은 '델'과 '지가르'인데 심장과 간을 뜻한다. 저런 빵을 조금 찢어서 후추 뿌리고 얹어 먹으면 꽤나 맛있다.
휴가를 즐기는 시민들.. 아마 많은 수는 테헤란에서 왔을 것이다.
나온 김에 입이 터져서 밥을 또 먹었다. 밤에만 영업하는 노상 포장마차들이 잔뜩 깔려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렇게 숯불을 피우고 케밥을 팔고 있었다. 닭고기와 양고기 케밥에, 여기는 신기하게도 생양파 하나를 통째로 주네.. 눈물을 흘리며 양파를 먹었지만 맛은 최고였다.
이 모습은 한국 어디 서해안 해수욕장 관광지에라도 온 것 같은 푸근함이었다..
길란에 온 이유는 앞서 도청 광장의 기마상에서 본 이 분 때문. 바로 '페르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주인공 미르자 쿠첵 칸이다.
오면서 본 것처럼 길란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빽빽한 삼림이 있어서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뻗치기 난감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이란 입헌혁명(1905-1911) 당시 길란에서는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지주를 공격하고, 중앙 정부군을 숲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이 등장했다.
입헌혁명 자체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중단되었지만, 길란의 게릴라 운동은 토지개혁 옹호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승리의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이란이 참전도 안 했는데 제1차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며 카자르 왕조의 위기가 계속해서 심화되자, 1915년에 미르자 쿠첵 칸을 중심으로 한 '장갈리 운동'이 등장했다. 장갈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단어 '정글'과 어원이 같은 단어.
미르자 쿠첵 칸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 이슬람 도덕률의 회복, 영국 제국주의 종식을 목표로 내걸고 이곳에서 독자적인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그 세력이 대단하여 장갈리가 테헤란까지 진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도 일어났다. 게다가 2년 뒤 1917년 소련이 탄생하며 전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미르자 쿠첵 칸은 볼셰비키 스타일의 공산주의자는 절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에 접근하여 지원을 얻어내고자 했고, 국명도 페르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어쨌든 이곳은 라슈트 시절 그의 가옥이다.
아버지가 상인이었다고 하는데 조금 사는 집이었나보다. 꽤 큰 저택이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알려주러 온 가족 관광객들을 몇 명 볼 수 있었다.
미르자 쿠첵 칸의 가옥을 보고 난 뒤에는 택시를 타고 미르자 쿠첵 칸의 영묘로 향했다. 이곳은 시내에서 조금 차를 타고 가야만 나오는 묘지인데, 당연하게도 저 큰 건축물이 그의 영묘다.
미르자 쿠첵 칸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으며 국가까지 세우고 이란 해방을 향해 달려갈 것 같은 기세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세력은 이후 쭉 내리막을 걷게 된다. 소련군이 라슈트 북쪽의 안잘리 항구에 상륙하자 이란에서는 반영 민족주의만큼이나 반소/반러 민족주의도 함께 끓어올랐다. 동시에 장갈리 운동 내부에서는 종교에 우호적이고, 토지 개혁을 꺼리는 미르자 쿠첵 칸을 가짜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급진파 공산주의자들이 불만을 제기하고 있었다. 결국 장갈리 운동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했는데, 그 사이에 무능한 카자르 왕조에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 궁정의 실권을 장악한, 훗날 팔레비 왕조를 개창하는 레자 칸이 등장한다.
소련은 가망 없는 길란에서의 혁명 활동을 지원하는 것보다 새로운 민족주의 근대화 세력인 레자 샤와 협정을 맺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레자 샤가 미르자 쿠첵 칸을 진압하는 것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레자 샤의 강력한 군대에 쫓기는 신세가 된 미르자 쿠첵 칸은 산악지대에서 쿠르드 부족민을 만나 참수되었고, 그의 목이 레자 샤에게 전달되며 일세를 풍미했던 이란 정글의 혁명 게릴라는 끝났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미르자 쿠첵 칸이 성직자 배경이 있기도 하거니와, 그의 반제국주의, 반군주정 투쟁은 이란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계보로 주창하는 과업들이기도 했다. 혁명 정부의 주도 하에 그를 이란 역사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끌었던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이렇게 화려한 영묘도 새로 건립되었다.
위에 작은 글씨는 모르겠고, 큰 글씨로는 오, 알리 이븐 아부탈립이시여! (Ya Ali Ibn Abu Talib)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알리는 4대 정통 칼리프이자 시아파에서 선지자 무함마드의 적통을 이는 위대한 이맘으로 모시는 존재..
현대 이란의 삼거두라고 할 수 있는 호메이니, 하메네이, 솔레이마니 장군을 여기서 또 뵙는다.
전형적인 이란식 순교자 알리미.
길란에 있을 때 열심히 먹어둬야겠다 생각되어 자골바골을 한 접시 더 먹었다.
라슈트 시장을 한참 걷다가 비린내가 코를 찌르길래 가보니까 생선 골목이 펼쳐져 있었다. 카스피해하면 보통 바쿠로 상징되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보고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어업은 카스피해 주민들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산업이다. 신생 소련과 팔레비 이란이 무역협정을 체결할 때도 가장 중요한 의제로 오른 것 중 하나가 어업이었다. 식량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한 러시아와 이란 양국 모두가 카스피해에서 나는 물고기를 주요한 식량 자원으로 활용했고, 그래서 양국의 어획 쿼터를 협상하는 문제도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카스피해 연안에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생기면서, 이란까지 포함하는 5개국의 카스피해 활용을 협상하는 어려운 과제가 생겨났다. 지금은 해결된 상태..
라슈트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17세(!) 2008년생 마흐부브. 안 되는 페르시아어로 그와 얘기를 했는데, 그의 풍성한 수염은 둘째치고 어디를 데려다 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스타일을 자랑함과 동시에 자신은 알라를 신실히 따르고자 노력하는 무슬림이라 소개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