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국제 무역을 원했다: Red Globalization (1)

소련은 국제 무역을 원했다: Red Globalization (1)

달러에 목 말랐던 소련의 이야기, 오스카 산체스-시보니의 Red Globalization 서평 (1)

임명묵

냉전은 무엇이었나? 앞서 올린 여러 책의 서평에서 많이 이야기한 주제지만,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강대국이 계몽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지구적으로 투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직접적 무력 충돌을 회피하는 전면적 경쟁 체제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1947년에서 1989년까지의 시기를 냉전이라는 렌즈를 쓰고 보면 실제 그 시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많은 주장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반박이 20세기 후반은 냉전보다도 탈식민화가 훨씬 더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냉전은 그저 탈식민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부속된 국면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다. 유사하게, 다른 이들은 20세기 후반은 미국의 압도적 패권이 관철되는 시기였고, 소련은 그 과정에서 잠시 걸림돌이 되었던 존재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주장은 결국에는 제국주의, 혹은 미국 패권이라는 거대한 힘이 20세기 후반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구조고, 소련과 소련이 표상한 이념인 사회주의는 역사적 중요성이 훨씬 약하다는 함의가 깔려 있다. 예컨대 20세기 후반이 탈식민화의 시대였다는 주장에서 소련은 장기적 탈식민화 과정의 연속에서 활동한 국가고, 탈식민화를 지원하고 촉진한 주체로 등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유럽 식민주의를 그대로 내면화한 존재로서 소련 진영 또한 유럽적 근대성을 강요하고 탈식민화를 가로막은 이들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소련이 미국에 맞서는 동등한 수준의 강대국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각은 냉전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냉전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유라시아의 거대한 육지를 장악한 소련이 빨간색으로 색칠되어 있고, 동유럽의 수많은 국가를 바르샤바 조약기구 형태로 거느리고 있었으며, 중국과 베트남까지도 공산주의 세력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부터 미국 턱 밑의 쿠바까지, 그야말로 소련과 공산주의의 존재감이 ‘지구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엄청나게 보이지 않는가? 물론, 북미 전체와 대서양 건너편의 서유럽 국가, 호주와 남한, 일본 같은 태평양 국가들에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파랗게 칠하고 있는 자유 진영도 마찬가지로 대등한 세력처럼 보인다. 이렇게 세계 육지의 구석구석을 서로 나눠서 통제하고 있었으니 우리는 이 시대를 ‘냉전’, 혹은 ‘양극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양극 경쟁은 서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형태로, 동아시아에서는 남북한 분단과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 아폴로 계획이 차례로 나타나며 우주로까지 확대되었고 말이다.

미국 vs 소련, 지도만 보아도 너무 잘 드러나지 않나?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너무나 눈물이 나는 낮은 수준의 경제.. 표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역량을 분석한 학자들은 입을 모아 ‘양극성은 신화’라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그랬다. 소련의 경제력은 통계 상으로는 2위였지만, 미국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소련 통계의 신뢰성 때문에 항상 의심받던 수치였다. 거대한 중국은 사회주의 우군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전혀 개발되지 않은 공간이었고, 그마저도 소련에 적대하게 되었다. 동독, 폴란드, 헝가리 같은 국가들은 규모 면으로나 개발 수준 면으로나 영국, 프랑스, 서독 같은 선진국에 비할 바가 안 되었다. 양극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오로지 미국과 소련이 서로 수만발의 핵무기를 쌓아놓고 으르렁 댈 때밖에 없었다.

오스카 산체스-시보니의 저서 Red Globalization은 이처럼 양극성의 신화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만 본다면, 소련 공산주의가 전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붉은 색의 지구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단어는 Red가 아니라 Globalization이다. 시보니는 국제 무역을 중심으로 소련의 정치-경제를 분석하면서, 국제 무역의 구조 속에서 소련은 한 번도 본질적으로 이탈하여 자급자족 체제를 건설한 적이 없고, 오히려 국제 무역의 발전에 적응하고 때로는 중요한 플레이어로 참여하면서 활동했던 국가라고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홍콩대 교수 오스카 산체스 시보니. 이미지 출처: 홍콩대학교 웹사이트

시보니의 논의의 근간을 이루는 틀은 우선 세계체제다. 월러스틴이 종속 이론을 더 견고하고 설명력 높은 이론으로 진화시킨 결과물인 세계체제론은 세계를 중심-반주변-주변으로 나눈다. 중심부는 자본과 기술을 지니고 있고, 주변부는 원료와 시장을 담당한다. 반주변부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매개하는데, 반주변부라는 개념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상승하는 국가나 중심에서 주변으로 하강하는 국가의 존재를 설명해낸다. 지구 자본주의의 공간적인 분업 속에서 각 국가는 자신들이 맡고 있는 역할이 있고, 서유럽, 북미, 일본과 같은 중심부는 고도의 기술과 자본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주변부는 중심부의 생산을 위한 원료를 담당하고, 이러한 위계성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서구의 패권이다라는 이야기가 세계체제론의 주요 주장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위치는 세계체제 속에서 어떠했는가?

겉으로 보면 러시아는 열강이다. 지구 육지의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그 상당수는 전통적인 러시아인의 거주 영역 바깥, 즉 식민지다. 19세기 제국주의 쟁탈을 다룬 지도를 보면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을 담당한다. 영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전체의 패권을 놓고 투쟁했다는 ‘그레이트 게임’도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 경제적 수준을 보자면 러시아는 결코 영국, 프랑스와 같은 제국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경제적 개발 수준은 실질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지나지 않았으며, 식민지로 자본을 수출하여 이익을 얻는 나라가 아니라 중심부 선진국의 자본을 끊임없이 수입하며 개발을 도모하던 국가였다. 그래도 자체적인 군사력 기반과 과학 기술의 기반이 약하게나마 존재했고, 거대한 영토와 자원을 바탕으로 국제정치 무대에서 목소리를 냈으니 러시아를 ‘반주변부에 속한 열강’ 정도라고 취급은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러시아의 산업 구조는 목재와 곡물, 광물을 독일과 프랑스에 판매하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본재를 사와 산업화를 추진하던 전형적인 낙후한 반주변부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으로 세계 자본가들을 모두 파묻어버리겠다고 선언한 소련은 이러한 종속 구조를 깨고 낙후한 위치에서 상승을 도모했을까? 오스카 산체스-시보니에 따르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혁명의 열정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소련의 지도자들은 엄정한 국제 무역과 금융의 현실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여느 정부 부처와 마찬가지로 국제무역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도 구 제국 시대의 엘리트들이 그대로 복귀하여 업무를 이어갔다. 당연하게도 업무의 관성 상 그들은 구 러시아 제국 시대의 무역 구조를 다시 복원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볼셰비키 지도자도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게 확실하게 드러난 이상, 소련은 국제 무역에 다시 복귀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차근차근 발전을 시도하는 게 더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곡물을 판매해서 국제 무역 결제에서 활용할 경화(hard currency)를 확보해야 했고, 그 경화를 통해 다시 공작 기계 같은 선진 자본재를 구매해야 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 또한 국제 무역과의 연계 속에서 구상된 안이었다.

소련이 국제무역을 위해 사용했던 금태환 주화, 체르보네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대공황은 소련이 상정한 국제 무역 구조 속에서의 온건한 발전 경로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블록 경제가 자리 잡으면서, 소련은 곡물을 판매하여 기계를 사오는 무역 구조에서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요 수요자인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신들 제국에서 가급적 모든 수요와 공급을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을 위협하는 것 같은 사건들, 예컨대 파시스트 체제의 부상이나 영국과 중국 등지에서 가속화되는 반공주의가 소련 지도부에 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다. 시보니에 따르면 수백만의 기근을 감수하고 이루어진 농업 집단화와, 거대한 중공업 투자로 상징되는 스탈린 혁명은 소련의 내적 동학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안보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어서 군수 산업을 확충하고자 했던 소련의 조급증이, 대공황이라는 국면과 맞물려서 벌어진 궁여지책에 가까웠다. 농업집단화는 악화된 세계 시장 환경에 대응하여 곡물을 내놓지 않으려는 농민들에게서 곡물을 강제 조달하고자 했던 사업이었고, 스탈린은 폭락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일단 소련이 팔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곡물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속 곡물을 수출했다. 그렇게 얻은 경화로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자본재를 사오고 산업화를 추구한 것이다. 만약 국제 무역 구조가 온전하고,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이 가시화되지 않았다면, 스탈린과 그 동료들은 그리 급하게 산업화를 하기보다는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곡물 가격이 회복되기까지 기다리면서 더 천천히 산업화를 추진했을 것이었다.

시보니는 소련 지도자들을 혁명적 열정, 혹은 광기가 넘치는 인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느 자본주의 국가 지도자들처럼 예산 제약과 무역 흑자 같은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인물들로 본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을 전후로 소련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을 제시한다. 미국이 전시에 제공한 랜드리스는 다시 한 번 자본주의 국제 무역에 연결되었을 때 소련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스탈린은 자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유휴 자본을 투자할 곳을 확보하고 싶어하며, 막대한 자원을 지니고 있는 소련이 그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후에 국제 무역이 복원된다면, 미국 자본의 투자를 받아 소련이 자원을 개발하고 수출하며, 소련 경제의 고도화에 필요한 선진 기술을 더욱 열심히 수입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미국의 FDR은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과 이 점에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구상은 현실화될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국제 무역 참여를 통한 경제발전보다도, 동유럽 제국의 확보를 통한 안보 불안 해소에 더 방점을 두었다. 전쟁으로 2700만 명의 인명을 희생한 소련 입장에서 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동유럽 제국을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미국과 영국의 엘리트들에게는 소련의 세계 공산화 시도로 해석되었다. 전후 세계를 자유무역과 국제 분업의 이상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재조직하고자 했던 미국의 엘리트들에게 스탈린의 동유럽 적화는 지구적 차원에서 소련이 제기하는 도전으로 확대해석 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의 국제 무역 참여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동유럽 제국의 존재를 인정받으면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국제 무역 체제에 합류할 기회를 계속해서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사망해버렸다.

탈스탈린 시기인 1950년대는 스탈린의 꿈이 어느 정도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서유럽과 일본에서 경제 부흥이 시작되면서, 미국과의 직접적 교역 대신에, 핵심부에 해당하는 자본과 기술을 갖춘 서유럽 및 일본과 교역하는 선택지가 생겨난 것이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지역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완전히 종속된 공간이었지만, 전후 재건이 가시화되면서 서유럽과 일본 모두 미국으로부터의 일정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과 교역을 수행하는 데도 부족했던 달러를 아끼면서 교역 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 참여하지 않고 경화가 언제나 부족했던 소련은 서유럽과 일본의 문을 두드리며 물물교환(바터) 형태로 교역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 특히 소련은 서유럽 식민 제국이 여전히 확보하고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핵심 자원(이를테면 고무)에 접근하고 싶어했다. 소련은 주로 목재, 식량, 석유를 판매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원과 기술을 확보하고자 하는 무역을 원했는데, 이는 사실상 러시아 제국 시기의 무역 구조를 재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철의 장막은 무역을 원하는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한편 1950년대는 소련에 있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린 시기이기도 했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탈식민화가 가속화되면서, 수많은 신생 독립국이 생겨났다. 그들은 서유럽 제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어했고, 자국에서 나는 자원과 생산품을 수출하는 데 자율성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어쨌든 나름의 기술적 고도화와 산업화를 이룬 소련 입장에서, 자체적 산업화를 달성하고 싶어하는 신생 독립국들은 유망한 수출처임과 동시에, 소련이 영국이나 프랑스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었던 특수한 자원들을 직거래 할 수 있는 수입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탈식민화와 냉전의 묘사에서 상투적으로 따라오는, ‘반제국주의와 탈식민화를 지원함으로써 소련 사회주의 발전 모델을 수출하고, 미국에 대응하는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고자 하는 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오스카 산체스-시보니에 따르면 소련은 탈식민화의 기회에 반색했으나 실제 실행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념적인 열정보다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행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련 경제가 안고 있던 본질적 제약을 깨닫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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