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은 어떻게 싸우는가? (1): 소련군의 군사 사상

러시아군은 어떻게 싸우는가? (1): 소련군의 군사 사상

소련군은 냉전에 어떻게 적응하고자 했는가?

임명묵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협상을 강요하면서 또 하나의 국면을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나토의 추가적 지원으로는 단기간에 우크라이나 전장의 현실을 뒤집을 수가 없다는 것이 서서히 공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능력이 있는 미국은 더는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의지가 없고, 의지가 있는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를 현 상태에서 연명시킬 수는 있어도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러시아는 전체 전황을 획기적으로 뒤집을 역량은 없지만, 감당 가능한 부담을 지면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추가적으로 계속 점령해나가며 협상을 강요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과 정치, 경제적 체력은 건재하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멀리 보면 2023년 여름에 우크라이나 대반격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드러난 것이다. 이후 2024년 1월에 아브데예프카가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전장 주도권과 우위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정보전과 미디어전 성격을 감안할 때, 많은 관찰자들은 여전히 전쟁 초기, 특히 2022년에 형성되었던 이미지에 기초해서 전장을 판단하곤 했다. 러시아군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군대이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소련-아프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버텨낼 수 없으니 끝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서 그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은 서구권에서도 매우 일반적인 합의였다.

하지만 실제 전황은 훨씬 더 역동적으로 흘러갔고, 러시아군은 초기의 졸전 이미지와는 다르게 신속히 군사 혁신을 이루며 현대전 환경에 놀랍도록 능숙하게 적응해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하는 것, 그리고 러시아 정치의 권위주의화와 군사주의화를 비판하는 것과 러시아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싸우고 어떤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것은 별개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당나라 군대 러시아군’ 수준의 이야기만 복제되는 것은 서구든 한국이든 러시아라는 지정학적 플레이어와 마주할 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미국이 이익을 보고 있다는 친미와 반미를 가릴 것 없이 퍼져있는 ‘전능한 미국론’, 러시아가 출혈을 강요받고 있어 국력이 약화되고 있고 전후에 안정적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어 함정에 빠졌다는 ‘함정에 빠진 러시아론’ 모두 마찬가지다. 일단 현재까지 확보할 수 있는 정보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러시아는 군사적 혁신과 적응, 정치경제 질서의 재편을 통한 국가 강화를 이번 전쟁으로 모두 이루어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러시아가 약하다, 혹은 약해지고 있다는 서구의 일반적인 논의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가 해내야만 하는 정치경제의 전면적 재편을 피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하게 러시아가 어떤 상태인지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만 정말로 필요한,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개혁을 서구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차원에서 러시아군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다소 다른 시각에서 글로 써보고자 한다.

냉전기 소련군의 경험: 기동전과 소모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단순한 해석을 부추기는, 매우 남용되는 개념이 바로 ‘현대전’이다. 러시아군 졸전론은 항상 ‘압도적 공군 전력과 첨단 정찰 자산, 단위 전투력이 압도적인 특수부대를 조합하여 적군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미군식 현대전’을 러시아군이 수행할 수 없다는 비교와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이 ‘미군식 현대전’이라는 개념부터가 일종의 이상화된 이미지이며, 모든 전쟁은 수행 당사국들의 정치, 경제, 군사적 맥락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당장 ‘미군식 현대전’의 이상적 사례로 제시되는 걸프전만 하더라도 실제 압도적 첨단군대의 속전속결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미군은 유사한 교리를 바탕으로 싸운 월남전에서는 이미 패배했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전쟁들만 해도 벌써 20년~30년 전의 이야기이다. 군사 기술의 엄청난 혁신과 상대국들의 대응 체계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했는데도 ‘미군식 현대전’이 무슨 절대적인 만능 해법으로 간주되는 것은 오만함과 숭배가 만들어낸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만 보자면, 러시아군은 자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국가의 사회장악력, 군사적 역량, 군사 기술의 변화, 외교적 계산을 모두 종합하여 전쟁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적화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물은 걸프전과는 전혀 다른 현대전인, 네트워크전과 소모전이 결합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재로서는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전장 환경의 가장 집약적인 모델이자 참고 사례라고 할 때 최신의 현대전은 걸프전과 신화화된 미군 모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전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싱다. (물론 대만이나 중동에서 펼쳐질, 혹은 지금도 펼쳐지고 있는 또 다른 현대전이 있다. 각 주요 전역은 지역과 국가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상호 학습과 적용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현대전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하지만 어쨌든 국가 단위 정규전이라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만큼 중요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전쟁은 한 국가의 역사, 역량, 이념과 전략적 지향, 문화적 구조가 총체로 얽혀들어가는 행위이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군사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러시아군의 직접적인 전신인 20세기 소련군의 경험이 어떻게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군에 계승되었는지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대치 상황.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이 정치적 혼란으로 접어들기 직전인 1980년대 초반, 소련군은 미군 다음가는 명백한 세계 2위의 군대였다. 당시 지구 전역을 패권 경쟁의 무대로 삼고, 20세기의 주요 기술적 혁신을 군사 분야에 총투입한 냉전의 특성상 소련군의 유산은 그야말로 전천후적이었다. 나토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은 유럽 대륙에 수백만의 군대를 상시 대치시키고 있었고, 제3세계에서는 게릴라전과 게릴라 소탕전이 일상이었고, CIA와 KGB는 자국과 상대국의 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정보전, 심리전 교리를 개발했으며, 위성을 통한 정찰이 보편화되며 우주 공간도 전략적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군사조직, 사회동원, 기술적 발전은 양대 초강대국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었지만, 소련은 미국 진영에 포위당한 거대한 대륙 요새라는 점, 산업력과 경제력이 미국 진영에 열세라는 점으로 인하여 자신만의 특화된 군사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소련군의 특징은 군비에 막대한 돈을 쏟으며 미국과 경쟁하는 지구적 초강대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브레즈네프 시기에 윤곽이 잡혔다. 500만에 달하는 육군, 대륙 반대편으로 신속하게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는 공수부대, 수상함과 전투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잠수함과 방공 전력 위주의 투자, 전략적 대등함을 갖추기 위한 핵무기와 미사일 전력 집중, 제한적 규모이더라도 지구적 초강대국 지위의 상징으로서 원양함대와 해외 해군기지 확보, 상시적인 방비를 위한 사회의 군사화와 동원체제 구축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지막지한 규모와 화려한 첨단무기들을 자랑하는 소련군은 그 운영 철학으로서 두 가지 상반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군사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르 스베친의 소모전, 작전술 개념과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기동전, 종심작전 개념이었다.

작전술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스베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스베친과 투하체프스키는 모두 제1차세계대전, 러시아 내전, 전간기의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군사 사상을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스베친은 러시아 군사 사상의 기초가 되는 클라우제비츠 사상을 바탕으로 작전술 개념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것은 전략 단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거시적 목표와 무관한 소규모 전장에서 실행된다. 스베친은 이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개념이 작전술이라고 보았다.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며 전장을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즉각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해졌고, 각 전술 단위는 작전 단위에서 유기적으로 조율된 활동을 통해 ‘부분의 총합보다 큰 전체적 이득’, 즉 작전적 이득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 전술 단위의 유기적 운용이 능숙하게 이루어진다면, 실제 양군의 전력 비율을 뛰어넘는 작전적 성과를 거둘 수 있고, 이 성과가 누적되면 전략적 성공과 정치적 목표 달성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 작전적 사고에서 스베친이 강조한 방법론은 소모전이었다. 스베친은 ‘결정적 전투’를 통해 짧은 시간에 승리나 패배의 윤곽이 드러나는 종래의 전쟁 모델은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서 구시대적인 것으로 판명났다고 보았다. 대신 생산력과 동원력을 바탕으로 우직하게 상대에게 소모를 강요하고, 아군의 소모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적군과 아군의 소모 비율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바로 작전술이라고 본 것이다. 투하체프스키는 반대로 작전의 요체는 기갑과 항공 전력을 집중하여 만들어내는 신속한 전과 확대에 있다고 보았다. 제1차세계대전의 동부전선과 뒤이은 러시아 내전은 지루한 참호전과 소모전이 일상이었던 서부전선과는 딴판이었다. 여기서는 전략 기병이 신속한 기동을 통해 후방에 침투하고 적을 교란하며 전장이 실시간으로 요동쳤다. 투하체프스키는 기술 발전을 통해 상호 간 유기적으로 통신되는 기계화된 군대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보다 훨씬 더 진전된 방식으로 기동하여 적에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기동군은 적군의 종심(전후방 간 거리, 깊이)을 돌파하여 적군을 교란하고, 포위섬멸하고, 전장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공세종말점까지 계속해서 전과를 확대하는 파상공세로 적을 압도해야만 했다. 스베친과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 과정에서 모두 숙청되었지만, 그들의 사상은 대조국전쟁을 통해 계승되어 소련군 신화를 만들어냈다. 소련군은 스탈린이 동원해낸 엄청난 산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독일군을 끝없이 소모시켰고, 바그라티온 작전에서는 제병합동과 기동전의 예술을 통해 독일군 중부집단군을 순식간에 붕괴시키고 베를린을 정복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자파드 81 훈련 당시 폴란드 평원에 도열한 전차들. 이미지 출처: 스푸트니크뉴스

대조국전쟁 이후 소련군은 핵무기라는 완전히 새로운 무기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고민하면서 진통을 겪었다. 흐루쇼프는 핵전력 위주로 군을 재편하여 억지력을 확보하고, 평화공존과 군비감축을 통해 경제발전에 자원을 투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군의 반발과 흐루쇼프의 실각으로 실패했고, 후임자인 브레즈네프는 우스티노프를 통해 상기한 거대한 소련군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소련군의 핵심 개념은 바로 작전기동군이었다. 냉전의 주전장인 유럽에서 나토와 대치하고 있던 소련군은 경제력의 열세로 인해 미국과 장기전을 수행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순식간에 독일 평원을 돌파하여 서유럽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공격자의 위치를 강요받게 되었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계속 따라 나왔다. 대규모 기동군이 순식간에 승리를 거두어 전과를 확대할 수 있을지라도, 위협을 느낀 나토가 핵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소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의 핵무기 사용을 주저하게 만들게끔 후방에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핵심 자산(이를테면 대도시)에 매우 가깝게 기동하는 것을 해법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는 집단군 하나가 단독으로 작전 단위로 기능해야했고, 공수부대, 공군, 방공군, 포병, 미사일, 기계화보병, 헬리콥터가 모두 하나의 단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를 위해 편성된 개념이 작전기동군이었으며, 작전기동군이 종심을 빠르게 돌파한 뒤에 후방 제대가 작전적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투입되는 엄청난 수준의 대규모 작전이 기획되었다. 작전기동군은 스베친의 작전 개념에 투하체프스키식 기동전이 소련이 건설한 거대한 산업력, 군사력과 맞물리며 실현된 초대형 군사기계였다.

(물론 작전기동군이라는 개념은 소련과 맞서 싸워야 했던 나토가 집중적으로 주목하여 그 위상이 과장되게 알려졌다는 것도 공정하게 지적해야겠다. 작전기동군은 종심 작전을 대체하는 정도의 핵심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소련군은 여전히 '종심 작전'을 교리의 기초로 놓고 부가적인 차원에서 작전기동군을 실험적 개념으로 도입해보았다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유럽 평원에서 수백만 단위 군대가 부딪힐 것을 상정한 군사 교리는 제3세계의 비정규전 환경에서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농촌 지역에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정부와 산악, 정글 등에 거점을 마련한 게릴라가 맞부딪히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외교적 여파와 국내 반발 때문에 힘이 훨씬 약한 상대를 쓸어버릴 정도로 전력을 투사할 수 없었다. 대신에 게릴라는 미소 경쟁 구도를 활용하여 자신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가용성 높은 첨단무기를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전장 환경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군사 사상이 필요했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각자 새로운 방식의 전술을 계속해서 실험해야만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헬기에서 내리는 소련 병사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당시, 소련군은 당시 하피줄라 아민 정권을 제거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을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했다. 스페츠나츠와 공수부대를 통한 초기 작전은 실제로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부족 질서를 고려하지 않은 공산 정권에 대한 전면적 반발로 산악 게릴라 반란이 속출했고, 소련군은 대규모 정규군을 주둔시키면서 정권을 지켜내는 것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차, 포병, 공군 위주의 병력은 아프가니스탄 산악 게릴라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판명이 났다. 무자헤딘을 일시적으로 파괴할 수는 있었어도, 마을과 산악 동굴에 은신한 게릴라는 다시 후방을 교란했고, 그 과정에서 지휘부와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한 전투병들은 게릴라에 의해 각개격파되며 소모되기 일쑤였다. 이미 소련이 어떻게 하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잘 기능하는 작전 수립 자체가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전술적 성과는 작전적 성과로도 이어질 수 없었다. 소련은 이 난관에 대처하기 위하여 주요한 전술 혁신을 제한적이나마 추구했다. 전차와 포병, 공군 같은 무거운 병력 대신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투입할 수 있는 Mi-24 공격헬리콥터와 공수부대, 장갑차와 보병 중심으로 단위 제대의 구성을 재편했다. 각 제대는 자율적인 전투 단위로 전장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으며, 지휘부는 동시에 신속한 정찰과 통신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미국도 이에 맞서 스팅어 미사일을 공급하면서 소련군은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최종적으로 실패했지만,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의 경험은 이후 러시아군의 현대전 혁신을 만들어내는 주요한 참조점으로 남았다.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우리와는 소련군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으로 악연이 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경험이 본격적으로 러시아군 사상에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체 직전까지도 유럽을 둘러싸고 나토와 맞서는 데 전력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소련은 작전기동군 너머를 상상하는 새로운 군사 사상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주역을 맡은 인물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총참모장을 맡은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원수였다. 오가르코프는 급속한 과학기술 발전이 전쟁에서 군사기술혁명(Military-Technical Revolution)을 촉발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가 주목한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컴퓨터와 그에 기반한 전자 통신 시스템이었다. 오가르코프는 둔중한 대규모 군단이 상부 지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는 20세기 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이 향후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을 것을 체계적으로 대비하고자 한 거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앞으로 전장은 발전한 정찰, 탐지 능력을 기반으로 적군의 위치를 파악한 뒤에, 실시간으로 포병, 공군, 미사일 등으로 원거리 타격이 이루어지며 훨씬 더 하위 제대가 능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오가르코프는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에 맞춰 군조직과 전술, 작전 교리까지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소련군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정찰-타격 복합체(Razvedyvatel'no Udarniy Kompleks, RUK)’라고 정의했다. 정찰-타격 복합체 이론에 따르면, 우선 다양한 전투 단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정찰과 타격을 실시간으로 수행하도록 재조직되어야 했다. 지휘부부터 말단 소대까지 촘촘하게 배포, 설치된 정찰 자산과 전자 통신 장비는 이를 기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조직적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지휘 체계도 바뀌어야 했다. 상부 지휘는 빠른 탐지와 정보 분석을 통해 준자동화되어야 했으며, 하부 제대는 기존 구조보다 더 막대한 자율권을 부여받아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지금 봐도 놀랍도록 선구적인 오가르코프의 방안은 소련군을 연구하는 미군 측에 적극적으로 연구되어 훗날 군사 문제의 혁명(Revolution in Military Affaris) 이론으로 발전했으며, 걸프전 이후 표준화가 될 네트워크 중심전의 시발을 알렸다. 그러나 소련은 반도체 및 컴퓨터 산업의 부진과 군 조직의 보수성, 기울어가는 소련 경제 문제가 겹치면서 오가르코프 개혁안을 실현하지 못하고 해체하게 되었다.

물론 1991년 소련이 멸망하며, 미국에 맞서 냉전 경쟁의 주역을 맡던 소련의 다양한 혁신과 실험은 폐허만 남기고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으로 보였다. 지구적 패권을 다투며 유럽을 반분하던 소비에트 제국은 역외 지배력을 전부 상실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이 수세기 동안 지배해온 서부 지역과 남코카서스, 중앙아시아마저 이탈했다.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소련이 자랑하던 최고의 군사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했고, 대륙 전체를 수놓던 공군 기지와 레이더 기지는 버려지고 방치되었다. 제국의 최고 엘리트이던 장교단들은 봉급으로 생계가 부족해져 군사 장비를 암시장에 팔았고, 징집병들은 신병들을 죽도록 구타하고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베친과 투하체프스키, 작전기동군과 정찰-타격 복합체는 제국의 영광스러운 과거에나 유효한 말이었다.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핵무기가 유출될지 말지를 걱정해야 하는 러시아군에게 3차대전을 대비하는 군사 용어들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극도로 어려운 전환기에도 조국을 버리지 않고 군을 위해 봉사한 장교단, 과학자, 엔지니어는 존재했다. 그들은 소련군의 유산을 가능한 한 최대한 지켜내고, 새로운 시대가 제기하는 도전에 맞게 러시아군을 혁신해내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해내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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