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군은 어떻게 싸우는가? (3): 쇼이구-게라시모프 체제의 개막
권력의 재편과 전장의 새로운 설계도
2011년은 푸틴 정권의 성격이 서구와 협조적 관계에 기반한 민주주의에서 대결적 외교정책을 바탕으로 한 애국주의와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이정표가 되어준 해였다. 국내의 반푸틴 시위와 국외의 아랍의봄, 결정적으로 나토의 리비아 공습과 카다피 축출은 크렘린 상층부에 서구가 러시아에서도 얼마든지 정권을 전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푸틴은 점차 미국의 대외정책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면서, 국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동원하며 2012년에 다시 권좌로 돌아왔다. 이런 맥락에서 푸틴 3기의 정책들은 다시금 군사력에 커다란 방점을 두기 시작했으며, 대내적으로도 대조국전쟁 신화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며 군은 러시아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올라서게 된다. 푸틴은 집권 직후부터 세르듀코프의 구조조정 이후에 새로운 조직과 기술을 바탕으로 군을 재편하는 과업을 맡을 두 인물을 발탁했는데, 바로 국방장관 세르게이 쇼이구와 총참모장 발레리 게라시모프였다.

세르게이 쇼이구는 시베리아의 투바 공화국 소수민족 출신이다. 토목 엔지니어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투바 자치공화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쿠주게트 쇼이구의 아들로 소비에트 체제의 충실한 구성원이었다. 이후 쇼이구는 옐친과의 인연을 통해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비상사태부 장관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장관으로 이끌었던 비상사태부는 대중에게 확실히 존재감을 확실히 알릴 수 부서였다. 사건 사고가 몹시 잦았던 전환기 러시아에서 쇼이구는 현장형 지휘관으로서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쇼이구는 장기집권으로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푸틴 정권에서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군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외부자로서 구조조정을 이끌며 군 조직의 불신을 샀던 세르듀코프의 후임으로도 적절했다. 비상사태부는 사태 수습을 위해 군과의 긴밀한 교류가 필수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쇼이구 본인도 장성 계급을 수여 받았기에 군의 신임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충성심도 있었다. 일찍부터 옐친 서클에서 푸틴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쇼이구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당대표를 역임하며 실로비키와 민간 정치인을 매개했다.

쇼이구가 정치권과 군을 매개하며 조직, 행정적 업무를 이끈 인물이었다면 총참모장 발레리 게라시모프는 실제 군을 지휘하며 혁신을 주도할 지휘관이었다. 타타르스탄 카잔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게라시모프는 군에 입대하여 지휘관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998년 제2차 체첸 전쟁 당시에는 반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극동 군관구, 북캅카스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거쳐 모스크바 군관구장까지 승진을 거듭한 뒤 2012년에는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게라시모프는 2000년대 색깔혁명, 2011년 아랍의봄 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비정규전과 내전, 정치전, 인지전 등 비군사적 작전에 러시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둘러싼 연구를 했으며 이는 2013년에 “예측에서 과학의 가치”라는 글로 발표되기도 했다. 이 글은 후일 서구 평론가들에 의하여 ‘게라시모프 독트린’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드러낸 것으로 실제보다 훨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게라시모프는 ‘러시아 하이브리드전의 창시자’로 엉겁결에 주요 분석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서구의 오해와 과장과는 무관하게 게라시모프가 2010년대 전장의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하며 군사 혁신을 이끈 사람인 것은 맞다.
푸틴의 군사행동은 쇼이구-게라시모프 체제에 실전 기회를 부여했다. 2013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혁명은 돈바스와 크림에서 친러시아 주민들의 집단적 반발로 이어졌고, 푸틴은 이를 나토의 팽창 야욕으로 규정하면서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섰다. 2014년 2월에는 러시아군이 흑해함대 모항인 세바스토폴이 있는 군사 요충지 크림반도로 진입하여 분리주의 주민 투표를 조직하고 러시아로의 합병을 지원했다. 동시에 돈바스에서는 무장 민병대를 지원하여 그들이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물리치고 실질적 통제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과 공식적인 충돌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던 푸틴은 처음에는 일부 장비와 지휘관 파견 등 소극적 수준의 지원만 하며 상황을 살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본격적으로 돈바스 반군 진압에 나서자 푸틴은 2014년 8월부터 러시아군을 은밀히 돈바스에 투입해 반군의 거점 방어를 돕도록 했다. 2014년 8월에 있었던 일로바이스크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돈바스 반군 연합은 진격해오는 우크라이나군을 손쉽게 포위하고 격퇴하면서 중요한 일격을 가했으며, 2015년 1월 데발체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 수복은 사실상 좌초되었다. 돈바스 분쟁은 우선 프랑스, 독일,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합의한 민스크 협정에서 ‘동결’되었으나, 저강도 분쟁은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이 발생하기 전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2015년 9월에 푸틴이 시작한 시리아 개입은 돈바스보다 훨씬 더 고강도의 군사 활동이었다. 2011년 아랍의봄이 시리아에 도달하면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바샤르 알 아사드가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곧이어 반군이 조직되고 내전이 발발했다. 푸틴은 처음부터 외교적으로 아사드를 지원했는데, 시리아가 소련 때부터 이어진 군사 협력국이자 러시아의 주요 지중해 출로인 타르투스 해군기지를 제공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미국,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수니파 계열 극단주의 반군을 지원하고 있으며, 시리아의 다원적 인구 구성을 고려할 때 아사드의 바트당이 여전히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학살자로 비난을 받는 아사드를 비호하는 것은 역시 러시아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었다. 푸틴 입장에서는 아사드가 리비아의 카다피와 같이 나토의 공습으로 축출되는 일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구와 대결이 시작된 2014년에 푸틴은 화학무기 사용을 근거로 아사드 정권을 공습하려 했던 미국에 강한 반대 의사를 표하며 제동을 걸었다.
2014년 이후 시리아의 상황이 악화되며 러시아군은 군사 개입을 할 필요성과 명분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수니파 반군 일부는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ISIS로 진화했고, 이들은 2014년 6월에 이라크 모술을 함락하고 지하드 국가의 건국을 선언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러시아 측은 서구의 정책이 ISIS를 탄생시키고 인도주의 위기를 만들었다며 비난을 가했다. 한편 ISIS와 반군의 동시 공세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있던 아사드 정부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전설적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가 이끄는 쿠드스군과, 솔레이마니와 긴밀한 협력관계인 레바논 헤즈볼라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존하고 있었다. 솔레이마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무력 투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2015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참전을 요청했다. 9월에 마침내 타르투스항과 흐메이밈 공군기지에서 러시아 화력이 반군과 ISIS를 향해 전개되기 시작하며 시리아 내전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게 되었다. 공습을 통해 반군의 진격을 막아낸 러시아군은 2016년부터는 지상병력과 특수부대를 포함하는 다양한 군종을 전투에 투입시켰고, 러시아군, 혁명수비대, 헤즈볼라의 도움으로 아사드는 팔미라와 알레포 등 핵심 요충지를 탈환하며 내전의 사실상 승리자를 자임할 수 있었다. (2024년 말에 허무하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2012년에 등장한 쇼이구-게라시모프 체제 하에서 진행된 러시아군 개혁은 돈바스와 시리아를 거치면서 실험과 실전 평가, 조정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피드백 고리를 확보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10년간 러시아군은 기술 발전과 변화하는 전장에 발맞추어 대략적으로 네 개 분야에서 전면적인 혁신과 보강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전투 방식의 변화: BTG, 정찰-타격 복합체, 드론전
2012년에 러시아군은 작전 수행의 기본을 맡게 될 ‘대대전술단’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군을 모방하여 여단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던 세르듀코프 개혁을 더 심화하는 것이었다. 대대전술단은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며 만들어졌다. 첫째 목표는 신속성이었다. 색깔혁명은 정치적 격변과 군사적 충돌이 며칠 단위로 급속히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속히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부대가 필요했는데,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력과 생존성을 확보할 정도의 규모는 유지해야했다. 대대급 부대가 바로 이 두 요구 사항의 절충점으로 여겨졌다. 둘째 목표는 유기적인 제병 합동을 통한 자기완결적 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체첸, 남오세티아에서 드러났듯, 현대전은 전차, 보병, 통신, 방공, 공병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자기완결적 전투 단위를 필요로 했다. 자연스럽게 신식 대대전술단이 수행할 새로운 전술 교리를 만드는 것이 그 다음 과제로 등장했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1980년대 총참모장 오가르코프가 꿈꾸었던 정찰-타격 복합체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정찰-타격 복합체 구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반인 통신망 현대화를 시작으로, 드론과 위성 등 미거시 영역의 정찰 자산 확충과 개발, 정찰-타격 회로의 실시간화와 자동화 훈련이 실험되었다. 드론전도 정찰-타격 복합체의 실제 구현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 혁신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군이 보인 무인기 역량을 주의 깊게 관찰한 러시아군은 이미 2010년에 오를란-10과 같은 자체적인 정찰 드론을 개발했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돈바스와 시리아의 전투 일선에 드론을 보급하며 새로운 전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의 드론 운용은 소규모 부대도 후방 지휘부가 운용하는 항공기나 위성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적을 탐지하게끔 설계되었다. 드론은 탐지-분석-결정-타격이라는 의사결정 회로를 하위 제대에게도 일임하는 정찰-타격 복합체 사상의 열쇠가 되어주었다.

2. 조직적인 전장 시스템 통합: 다층방공망-A2/AD, 전자전, 글로나스
러시아군은 전투 단위뿐 아니라 전장 단위에서의 기술적 현대화도 추구했다. 미군 및 나토와의 대립을 더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두게 된 러시아군이 나아갈 기본적인 방향성은 명확했다. 먼저 미군의 주력 자산인 압도적인 공군력에 맞설 수 있는 방패를 키우는 일이었다. 소련군은 일찍이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 자산을 축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해군 차원에서도 훗날 중국 A2/AD(반접근-지역거부) 사상의 기초가 되는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소련은 잠수함, 방공포, 대공 및 대함 미사일을 주요 요충지에 집결시켰다. 이는 적이 공간 지배력을 공고히하는 것을 방해하여 해군과 공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이라크군이 운용하는 소련제 방공 자산이 미공군에 의하여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것을 보고 추가적인 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쇼이구-게라시모프 체제에서 러시아군은 발트해의 칼리닌그라드, 새롭게 획득한 크림반도, 시리아의 타르투스와 흐메이밈, 극동의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 전략적 요충지에 체계적인 다층방공망을 설치하고, 각 방공 자산별로 기능을 특화하고 역할을 조율하는 데 열중했다. 고고도 공역은 S-300, S-400, S-500 시스템, 중고도 공역은 부크 시스템, 저고도 공역은 이동식 방공차량인 판치르가 맡게 하여 다양한 방식의 원거리 공습으로부터 주요 거점의 생존성을 증대시켜 나갔다. 정찰-타격 복합체 사상에 맞게끔 방공망도 자동화되었다. 방공망은 레이더의 탐지는 곧바로 지휘부로 수신되어 각 계층에 따라 최적의 방공 무기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될 것이었다.

드론, 방공망, 미사일의 전반적 발전에 러시아가 전장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집중한 또 다른 분야는 전자전이었다. 정찰, 유도무기 타격, 무인기 운용 등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무선 통신은 현대전의 주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모든 군은 상대의 무선 통신을 타격, 교란하고 나의 무선 통신을 지켜내는 전자전 역량에 투자해야만 했다. 러시아군은 전술 단위에서 적 통신을 감청하고, 드론과 유도무기의 전파를 교란하는 크라수하-4와 같은 이동식 소형 장비부터, 전략 단위에서 수천km의 전파 환경을 조율하는 무르만스크-BM과 같은 대규모 장비까지 전자전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했다. 동시에 효과적 전자전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전문 인력 훈련과, 전자전 부대와 일선 지휘소와 전술 부대의 통합 작전을 실험했다. 크라수하-4는 적군 레이더 신호를 교란하여 아군 포병 및 방공망의 노출을 방지했고, RB-341V(리어-3)는 오를란-10 드론을 통해 적의 휴대전화 기지국 전파에 접속, 통신망을 교란하고 위치를 추적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주로 상대 방공망을 무력화해 공중 타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는 미군식 전자전과 달리, 러시아식 전자전은 일선 지상 병력의 생존성과 타격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었다.

대대전술단과 정찰-타격 복합체, 다층방공망의 기술적 기반은 위성항법시스템이었다. 미국이 운용하는 GPS에 의존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독자적인 위성항법시스템인 글로나스를 일찍부터 개발, 운용했다. 하지만 꾸준한 투자가 이루어졌음에도 소련 해체의 충격과 러시아 경제력의 제약으로 글로나스의 기술적 수준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2010년대 들어 러시아는 글로나스의 성능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본격화하며, 현대전의 핵심 기반을 자력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글로나스용 위성을 추가 발사하고, 위성 수명과 항법 정확도를 개선했으며, 이를 통해 실시간 전장 좌표 공유와 유도무기 운용의 신뢰도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중앙 지휘본부부터 전방의 대대전술단, 무인기 운용부대까지 각 작전 단위는 글로나스를 통해 공통의 위치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고, 이는 러시아식 정찰-타격 체계와 다층방공망이 기능적으로 통합되는 기반이 되었다. 미군과의 전력 비대칭 상황에서 러시아는 이 독자적 항법체계를 통해 지휘통제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미군의 GPS 교란이나 단절에도 견딜 수 있는 작전 지속 능력을 갖추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