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가? - (2)
나토와 러시아의 대립인가? '우크라이나 위기'의 폭발인가?
3.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정치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혼용되어 쓰이던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식 인명, 지명 표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우크라이나 역사를 소개하는 여러 책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향한 관심은 주로 피침략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동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자연히 ‘동구 전체주의 러시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문명’으로 합류하고자 한다는, 현재의 전쟁과 연관된 지나친 목적론적 사관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널리 퍼진 상태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사관은 드넓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진 실제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와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겪은 혼란과 갈등을 설명해내지 못해, 사태 이해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유럽 지향 사관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소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공화국 중 하나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 지도부를 다수 배출했으며, 소련에서 최대 규모의 산업 투자를 받은 사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나누는 정체성의 흐릿한 경계도 실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표현된다. 아울러 우크라이나가 지닌 모든 문제도 서구와 러시아라는 더 큰 지정학적 플레이어 사이의 관계 문제로 환원되어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드네프르 강을 기점으로 나뉘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의 상이한 정체성은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해할 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배경 지식이며, 실제로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를 계속해서 자아내는 기본 조건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지역별로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이유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국경이 형성되는 복잡한 과정에 기인하고 있다. 몽골에 의한 키예프 루시의 멸망 이후, 루시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 분화해 나갔고, 남서쪽의 우크라이나는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권력이 자리한 경계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강성해진 모스크바의 차르는 점차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분화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국 권력에 다시 통합되었기에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와 명확히 경계를 그을 수 없었고, 러시아어와의 유사성은 지역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전통적으로 크림 칸국의 영역이었기에 우크라이나와 연관이 거의 없었던 남동부 지역(노보로시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주민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러시아인 인구 비중이 높고 러시아 산업지대와 연계가 컸던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하게 러시아와 유대감을 느꼈다. 반면에 폴란드 지배 기간이 길었던 서부와 중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지향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특히 스탈린의 전후 국경 조정으로 처음 러시아 통치를 받게 된 갈리치아와 리비우 등지의 극서부 지역은 더더욱 그랬다. 소련의 공화국 경계 구획으로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한 여러 지역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고, 이 경계에 따라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독립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는 금세 정치적 분열을 마주하게 되었다.
독립 이후 다른 탈소비에트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서도 사유화를 통해 부상한 올리가르히가 정국을 주도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체제 이행 국면이 끝난 뒤에 탈소비에트 국가의 진로는 일반적으로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발트 3국처럼 자유민주정과 시장경제를 안착시키는 경우, 혹은 중앙아시아의 대다수 국가와 아제르바이잔, 푸틴의 러시아처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경우가 있다. 이 두 모델은 지향점은 달라도 안정된 정치 질서를 창출하며 통치에 일정 수준의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다른 세 번째 경로는 유권자 집단의 분열로 민주주의나 권위주의가 안정되지 못하고 정치적 분규가 이어지는 길이다. 동서 갈등이 있는 우크라이나와 남북 갈등이 심한 키르기스스탄은 모두 지역 갈등으로 정치적 리더십이 안착하지 못하고 끝이 없는 ‘혁명들’의 연쇄를 겪은 국가들이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는 각지의 산업체와 자원을 사유화하여 부를 쌓았고, 이를 자신들이 후원하는 정치인들에 투자하여 특권을 계속 지켜나갔다. 게다가 동서로 분열된 우크라이나 정치의 특성으로, 푸틴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등장하여 올리가르히를 국가 권위에 종속시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석유와 천연가스라는 막대한 수익성을 제공하는 자원도 없었기에, 다른 올리가르히보다 우위에 서는 권력이 등장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사유화 정치의 혼란이 러시아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개별 올리가르히들은 유럽과 러시아에 모두 발을 걸치는 이권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자신들끼리 권력을 두고 경쟁을 했다. 올리가르히 간의 경쟁에 종속된 정치는 우크라이나 사회의 실질적 개선을 거의 이루지 못했기에, 선거에 승리한 정권은 다시 부패의 고리에 빠지며 대중의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실망한 대중이 신속히 이탈하여 정권은 유효한 정치적 프로젝트를 어느 것도 추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 유셴코 정권이 들어서고, 그 유셴코 정권이 다시 야누코비치에게 정권을 잃고, 야누코비치는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또 다시 물러나게 되는 리더십 부재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리더십의 연속적 붕괴는 우크라이나의 동서 정치 갈등을 계속해서 악화시켰다. 처음 개별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들은 그 자체로 유럽과 러시아를 강하게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적 기반과 사업 관계에 의해 특정 방향성에 더 이끌리는 경향은 존재했다. 여기에 더하여 오렌지 혁명과 유로마이단을 거치며 서구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서, 우크라이나 정치는 점점 서구 아니면 러시아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양극화를 겪었다. 이러한 양극화는 특히 서부의 여론이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통해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고, 러시아가 이에 절대적인 반대 의사를 내비치면서 그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양자택일 정치가 대표적으로 드러난 유로마이단 혁명은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의 구조조정과 구제금융 패키지를 거부하며 러시아의 지원안을 받아들인 것이 유럽연합 가입 포기로 해석되면서 촉발되었다.
유로마이단 혁명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가 지닌 상이한 경제 구성이 두 지역의 정체성 갈등과 맞물린 결과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소련 시기에 러시아의 산업지대와 연계되며 공업 지대로 발전했다. 동남부의 중공업은 소련 해체 이후에는 경쟁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크라이나 경제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지역 주민 다수를 고용하는 주요 기반이었다. 동부의 산업은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값싼 에너지 자원과 정부의 보조금에 의지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 시기에 더 낙후되었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농업 의존도가 더욱 컸고, 새로 투자되는 제조업은 대체로 독일 제조업의 네트워크에 연계되어 있었다. 지역 내 산업 기반이 적었던 서부 우크라이나인은 주로 키예프, 나아가 서유럽으로의 노동 이주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8년 위기와 뒤이은 유로존 위기로 경제적 곤경에 처한 야누코비치 정권이 양자택일해야 했던 선택지는 두 경제 지역의 이해관계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유럽연합의 패키지를 선택했다면, 동부의 산업지대는 러시아에게서 우호적인 에너지 가격의 혜택을 포기해야 했고, 정부 보조금을 상실하며 구조조정과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서부의 농업과 제조업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폴란드와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노동 이주의 문을 더 열어줄 수 있었다. 동부 돈바스에 지역 기반을 지니고 있었고, 러시아와의 정치적 연계가 중요했던 야누코비치에게 유럽연합 패키지는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다. 그러나 유럽연합 패키지의 거부는 서부에서 거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자살을 피한 야누코비치는 정치적 타살을 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오렌지 혁명과 유로마이단에서 나타난 지역 간 권력의 불균형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서부는 빈곤하고 동부는 부유했는데, 실제 정치적 격변기에 승리를 한 지역은 언제나 서부였다. 서부는 거리에서 대중을 동원하여 집권 권력을 비토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유로마이단의 절정이었던 야누코비치 탄핵에서 이 불균형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의회에서 탄핵 정족수에 근소하게 미달하는 투표 결과가 나왔음에도 탄핵이 강행되었는데, 동부 지역에서는 탄핵이 위헌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정국 주도권을 다시 가져올 수는 없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우위는 이 동맹에 참여한 두 집단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었다. 첫째는 수도인 키예프에 형성된 중산층들이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련 해체 이후에 등장한 고학력 중산층 계층은 역시 올리가르히 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 대안을 유럽과의 연계 강화에서 찾았다. 이들은 키예프에 진출한 서구 기업에 취업하거나,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이동성을 바탕으로 서유럽으로 직접 이주하여 대안을 개척할 수 있었다. 더하여 푸틴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는 러시아는 키예프의 신세대 중산층에게 소프트파워를 제공할 수 없었고, 영미권과 서유럽에서 강한 문화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높은 소득과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서구식 시민사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한 이들 집단의 존재는 소비에트 시기의 유산에 의존해야 했던 동부의 시민사회보다 더 강력했다. 두 번째 집단은 극서부 지방을 주요 기반으로 삼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유로마이단 이후 정부 구성에 참여했던 극우 정당 스보보다는 일찍부터 스테판 반데라와 같이 나치 부역자이자 폴란드인,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과 우크라이나 봉기군(UPA)의 지도자들을 찬양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보보다 계열 조직들은 준군사조직을 결성하고 자체적인 군사 훈련을 수행했고, 이들은 유로마이단 봉기에서 경찰 및 경쟁 조직과의 거리 전투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보여줄 수 있었다.
고학력 중산층의 시민사회와 민족주의적 극우 준군사조직 같은 정치적 자산을 갖지 못한 동부 우크라이나가 연속적인 정치적 좌절에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러시아계 주민이 많고 러시아와 더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던 크림과 돈바스의 반발은 더욱 격렬했다. 그리고 친러시아 주민들은 유로마이단의 상황을 러시아 언론 매체의 해설을 통해서 받아들였는데, 스테판 반데라를 숭배하는 극우 민족주의 조직이 준동하고 있다는 러시아의 선전은 키예프의 사태 전개에 이들이 공포감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유로마이단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위기가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지 않고, 러시아 흑해 함대의 크림 반도 사용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푸틴은 군을 통해 크림 반도를 점령했다. 푸틴은 이후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에서 유로마이단에 반대하는 분리주의 민병대가 등장하자 이들을 후원하고 우크라이나군의 진압 시도를 막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개입은 주요한 지정학적 요충지를 상실할 수 없다는 판단에 더해서, 대도시 중산층의 지지가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민족주의에 기반해 정권 정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푸틴 체제의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푸틴은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강력한 비판에 직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림 병합과 돈바스 전쟁은 러시아에도 경제적 충격을 가했지만, 우크라이나가 유로마이단 이후에 마주한 곤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러시아를 끊어내고 유럽에 합류하며, 부패한 올리가르히 체제를 공정한 자유민주정으로 개혁하겠다는 유로마이단의 기획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초콜릿 올리가르히인 페트로 포로셴코는 유로마이단의 정신을 실현하겠다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자신이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는 정치경제 구조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제기한 지정학적 도전에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에 원조를 제공하고, 농산물 시장을 열어주었지만, 신자유주의적인 개혁 패키지도 같이 제공했다. 민영화, 효율화, 경쟁 등의 언어가 들어왔다. 물론 이러한 정책에 승자들은 명백히 존재했다. 초국적 영농 기업에 판매한 농지에서 재배된 수출 작물이 유럽연합 시장에서 판매되었고, 더 많은 인력이 유럽으로 이주하여 본국으로 급여를 송금했고, 서부에 독일 자동차 부품 업체가 투자를 더 확대했다. 그러나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은 부패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 시절의 유산인 공공 영역의 사회 복지가 삭감되자 큰 고통을 겪었다. 전쟁으로 작동이 정지된 돈바스의 산업 지대에서 일어난 손해는 회복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한 혁명에 실망한 우크라이나 유권자들이 포로셴코를 향한 지지를 빠르게 거둔 것은 당연했다. 사회경제적 개선에 실패한 포로셴코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호소하며 지지를 유지하고자 했다. 포로셴코는 스보보다 등 극우 정당에서 내거는 역사관과 상징을 일부 수용하며 극우 세력의 지지를 흡수했고, 2015년에는 탈공산주의법을 제정하여 소련 시절의 역사적 기억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제정된 언어법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국어로 지정하면서, 돈바스 주민의 반감은 더해졌지만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는 더욱 강해졌다. 포로셴코의 이러한 행보는 2015년에 합의된 돈바스 평화 프로세스의 결과물인 민스크-2 협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민스크-2에서의 핵심은 돈바스, 나아가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분권화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민족주의 세력을 주요 지지 원천으로 삼는 포로셴코는 민스크 협정을 이행할 수 없었고, 양측은 협정을 위반하며 전투를 계속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아조프 연대를 비롯한 극우 무장조직이 실제 전투에 참여하며 양적, 질적으로 성장했고, 군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민족주의 선전만으로 돈바스에서의 지속적 갈등과 포로셴코의 부패, 사회경제적 악화를 덮을 수는 없었다. 포로셴코는 2019년 대통령 선거에서 군대, 언어, 신앙이라는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서부의 몇몇 지역에서 제한적 지지만을 얻었을 따름이었다. 대신 우크라이나인들은 1991년 이래로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올리가르히 정치를 혐오하고 있었고, 이러한 기성 정치 혐오에 편승한 새로운 정치인에 열광하고 있었다. 부패 척결과 돈바스 전쟁 종식을 주요 의제로 내세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바로 그였다. 2000년대부터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활약한 그는 또 다른 주요 올리가르히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가 소유한 TV 방송국에서 ‘국민의 종’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정치 풍자극에서 젤렌스키는 고등학교 교사로 나와 키예프의 부패 정치인들과 올리가르히를 조롱하고, 바이럴을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포로셴코와 경쟁 관계였던 콜로모이스키는 젤렌스키를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고, 젤렌스키도 정치적 야심을 드러냈다. 젤렌스키는 선거에서 율리야 티모셴코나 페트로 포로셴코 등 기존의 키예프 정치에 너무 깊게 연루되어 있던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을 동원할 수 있었고, 돈바스 전쟁 종식을 공약하여 소외감을 느낀 동부 주민들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었다. 젤렌스키는 70% 이상의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집권한 젤렌스키는 처음에는 진지하게 돈바스 평화 프로세스에 임했었다. 그는 돈바스의 우크라이나 영역과 분리주의 영역 모두를 포괄하는 선거를 추진하는 슈타인마이어 공식에 동의했고, 돈바스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무장조직의 진출선을 뒤로 물려 분리주의자들에게 전향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유로마이단과 포로셴코 집권기에 영향력을 극대화한 준군사조직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2019년 돈바스의 전선 마을 졸로테에서 아조프 연대 지휘관은 젤렌스키의 철수 명령에 공개적으로 항명하며, 모든 평화 프로세스는 러시아에 항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포로셴코는 계속해서 젤렌스키의 평화 노력에 반발하며 서부의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반대파를 동원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민스크 협정을 이행하고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정체성을 포용하고자 한 노력은 적극적인 반러시아 민족주의 군사 조직이 비토권을 쥐고 있는 한 현실화될 수 없었다.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돈바스 평화 프로세스의 좌절 이후, 또 다른 공약인 정치 개혁에서도 젤렌스키는 효과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젤렌스키는 포퓰리즘 정권이 빠지는 전형적인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는 썩은 기성 정치권과 달리 청렴한 새 인물을 기용하겠다며 방송계에서 확보한 인맥을 공격적으로 정부 요직에 배치했으나, 이들은 전문성이 없었고, 정책은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 간의 복잡한 이권 네트워크에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정부를 기존에 운영되던 방식으로라도 운영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올리가르히와 다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국민의 종 정당 인사들은 자연스럽게 부패와 연루되게 되었다. 2020년에는 불운하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어 우크라이나 경제에도 다시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실질적 성취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역기능적인 정부를 끌어내리고 더 역기능적인 정부를 집권시키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2020년은 유로마이단 이래로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 들었던 동부의 친러시아 정당이 다시 반등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크렘린과 인적, 사업적 연계를 깊게 갖고 있던 빅토르 메드베드추크는 주요 친러시아 정당인 ‘야당 플랫폼 – 삶을 위하여’를 이끌었는데, 역시 우크라이나의 올리가르히 중 하나였던 그는 TV 방송국 3개를 보유하며 자신의 의제를 전국적으로 홍보할 폭넓은 기반을 갖고 있었다(반면 젤렌스키는 콜로모이스키와 결별하며 그의 방송 네트워크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젤렌스키의 돈바스 평화 프로세스 실패는 동부 지역이 젤렌스키에 보냈던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었고, 이 지역 주민들은 다시 메드베드추크에 지지를 보냈다. 메드베드추크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푸틴과의 인적 친분을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러시아로부터 스푸트니크 백신을 공여받을 것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에 백신 위탁 생산도 허가할 것이라며 자신의 거둔 성과를 홍보했다. 젤렌스키는 스푸트니크 백신의 신뢰성을 문제 삼으며 이를 거부했는데, 팬데믹 국면에서 빈국 우크라이나는 서구에게서 백신을 빠르게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신 정치는 젤렌스키의 인기를 다시 한 번 떨어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 의회 선거와 2020년 지방 선거 결과는 젤렌스키, 콜로모이스키, 포로셴코, 티모셴코, 메드베드추크를 따르는 정당들이 제각기 일정 수준 지지를 얻어내 극도로 파편화된 양상을 보였으며, 젤렌스키가 남은 임기 동안 이 추세를 반전시키리라 예상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2021년이 되었을 때, 젤렌스키가 취한 가장 인상적인 조치는 정치 개혁, 경제 성장, 평화 회복을 위한 정책 발표가 아니었다. 2021년 2월 2일, 젤렌스키는 메드베드추크가 소유한 방송국을 폐쇄하고, 2월 19일에는 그와 그의 아내를 정부의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 정치적 억압을 시작했다. 메드베드추크의 축출은 현재로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 추정되는 사건 중 하나다. 현재로서는 크렘린의 정책 결정 동기를 보여주는 문서적 증거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푸틴의 동기와 사고 과정을 주변 정황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드베드추크 축출은 러시아군의 국경 증강이 시작된 2021년 2월 21일과 가장 근접한 시기에 발생한 ‘계기’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방송국의 폐쇄와 정치인의 제거는, 푸틴에게 있어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외교와 정치 공작 등 비군사적 수단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로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언론사 폐쇄라는 자유민주정에서 논란이 될 수 있는 젤렌스키 정부의 행동에 서구 정부들이 러시아 가짜뉴스를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비난해 온 서구의 ‘이중잣대’를 드러내는 증거로 다가왔을 것이다.
메드베드추크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계기였는지와는 무관하게, 21년 한 해 내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며 위기관리 프로세스는 파행을 향해 달려갔다. 3월 24일에 젤렌스키는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시를 재수복하겠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물론 크림반도는 여전히 국제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되고 있는 곳이었지만, 크림에서 이미 지배권을 확립한 러시아 입장에서 이는 우크라이나의 도발로 간주될 수 있었다. 반면 대통령령 이전부터 러시아는 국경 지대에 군사력을 계속해서 추가 배치하며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군사적 압박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편으로 돌리기보다는 정권이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안보에 더 호소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나토 가입을 통한 안보 보장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게 떠밀었다. 갓 집권한 바이든 행정부도 2021년 내내 러시아에 강경하게 대처했고, 7월에는 미국, 영국과 우크라이나 해군이 흑해에서 공동 훈련을 진행하며 러시아를 추가로 자극했다. 러시아는 10월에 한 차례 군사력을 더 증강했고, 이후 푸틴과 바이든 대통령이 만나 최후로 입장 차이를 좁혀보려고 했으나 합의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메르켈과 마크롱이 끝까지 중재를 하고자 노력했지만, 미국,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강대강 대치를 계속하며 2021년의 위기는 2022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4, 나가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푸틴은 왜 전쟁을 감수했을까? 왜 하필이면 2022년 2월 24일이었을까?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푸틴과 크렘린 엘리트의 이념적 지향, 서구의 행태에 그들이 느낀 감정적 분노, 8년간 제재에 대응하며 쌓아 올린 내구력 등 여러 배경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라는 초강수를 두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결국에는 가깝게는 유로마이단 때부터, 멀게는 독립 이래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였다. 동서에 따른 정체성 분리와 그에 연계된 경제적 구성의 차이는 우크라이나 정치를 분열시켰고, 사유화를 통해 등장한 올리가르히를 제압할 권력 구심점이 등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역기능적 정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발생한 정치 위기는 키예프 중산층과 서부의 극우 민족주의자가 모두 ‘유럽’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동맹을 맺고 야누코비치 정부를 축출하며 유로마이단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에 동남부 주민들, 특히 러시아에 정서적 유대가 강했던 돈바스와 크림의 주민들은 통제되지 않는 극우 준군사조직의 활동에 분노와 공포를 느꼈다. 유로마이단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며 이 조직들의 영향력은 계속 커졌다.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러시아의 푸틴 정권이 직면한 취약성과 공명하며 위기를 확대시켰다. 옐친 시기에 등장한 올리가르히 체제를 일소하기보다는 순치시키는 데 치중한 푸틴은 2008년까지는 원자재 수출과 최소한의 정치 질서 수립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빠른 개선을 달성했고, 높은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영토 경계 내에서 정치적 권력을 바탕으로 부를 추출해내는 올리가르히 체제의 기본 문법은 바뀌지 않았다. 푸틴 정권은 자유화를 통한 서구적인 성장 모델을 채택할 수도 없었고, 자본과 사회를 동원해내 국가적 목표에 투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가동할 장악력도 없었다. 2008년 이후 사회적 개선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자유 선거를 통한 정당성 갱신도 해낼 수 없었던 푸틴 정권의 입지는 계속 취약해져 갔다. 2011년 국내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해외의 아랍의 봄이 겹쳐지며 푸틴 정권은 큰 위기 의식을 품게 된다.
이제 정권은 서구에 대항해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익과 각종 문명적 가치를 지켜낸다는 민족주의 수사에 의지하여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유로마이단 혁명은 푸틴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라는 정권의 정당성 서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도전이었다. 실제로 오데사에서 돈바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극우파와 친러시아 민병대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푸틴은 이 분쟁에 개입하여 ‘서구와 우크라이나의 반데라주의자들’에 맞서서 러시아 민족을 수호하는 결단을 내린 이로 자신을 홍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림 합병과 돈바스 개입은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호시탐탐 노리는 초역사적 열망을 갖고 있다는 서구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서사를 강화했다. 소련에 향수를 표출하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주민이나 중노년층은 친러시아 반역자로 비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돈바스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극우 민족주의 준군사조직은 미국의 군사지원도 받으며 꾸준히 성장했다. 즉,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는 푸틴 정권의 취약성을 자극해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왔고, 이 개입이 우크라이나 정치의 파행과 일정 부분 극우화를 더욱 심화시켜 돈바스 전쟁을 종식시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실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젤렌스키가 공약한 돈바스 평화 프로세스의 실패와 뒤이은 메드베드추크의 제거는 우크라이나의 혼란과 러시아의 개입이 단단히 얽혀 있어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자면, 아직 전쟁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소 무리한 추정일 수 있으나,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군이 나토의 지원을 받으며 돈바스, 심지어 크림도 무력으로 수복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을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군은 2014년 이후 서구의 지원을 받으며 양과 질 면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과 나토가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해준다는 전제 하에서 우크라이나가 돈바스를 되찾는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면 러시아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돈바스는 물론이고 크림까지도 국제 사회에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주권 영토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개입은 어떤 명분으로도 포장해도 침략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실질적으로’ 돈바스의 분리주의 민병대를 후원하고 있다는 관측만 나왔지, 당국은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러시아군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바스군이 우크라이나의 선제 공격에 빠르게 대응할 역량도 없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가 무력으로 돈바스, 나아가 크림을 되찾을 수 있다면 정권은 추락하는 지지율을 간단하게 반등시킬 수 있었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치 국면만 이어가도 극우 민족주의 반대 세력의 정권 비토는 막을 수 있었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사회 내부에서 지지 동력이 상실되고 있었던 푸틴 정부는 마지막 기둥인 민족주의 영역에서도 처참하게 패배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적 정책이 러시아 내부에 파장을 일으켜 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카드가 소진되었다고 판단한 푸틴은 가장 최종적인 수단인 군사력의 직접 사용을 선택했다.
전쟁의 원인이 러시아에서 푸틴 정권이 처한 헤게모니 위기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악순환으로 인한 극우 민족주의 성장의 상호작용이라면,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양국 정치가 상호작용하여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과정을 돌아보았을 때, 푸틴이 굳이 우크라이나 전토를 병합하기를 원했다고 볼 근거는 약하다. 푸틴이 제기한 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는 단순히 우크라이나 전토를 얻기 위한 선전 구호가 아니라, 동남부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했다며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을 달래기 위한 진지한 요구사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우크라이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서구의 정책은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 극우 민족주의 조직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기에, 푸틴의 서사에서 우크라이나의 극우 민족주의와 나토 가입은 이미 불가분의 요소로 합일되었고, 그렇기에 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라는 요구사항도 평화의 ‘최소 조건’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해하기 명확한 중립화와 비무장화는 헌법에서 중립국 지위를 명시하고, 무장 수준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 다소 모호하게 들리는 탈나치화는 스테판 반데라 숭배로 상징되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극우 민족주의를 극단주의 이념으로 규정하고 공적 공간에서 추방하는 요구 사항으로 구체화될 수 있으며, 러시아계 주민들의 지위를 우크라이나 주민들과 동등하게 보장하라는 연방화, 자치화 요구도 높은 확률로 포함될 것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한국전쟁식 휴전 방안, 비무장지대에 유럽군 주둔과 같은 서구에서 논의되는 협상안들이 러시아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아야 한다. 푸틴은 단순 영토 요구를 넘어서 우크라이나의 민족 서사와 체제가 푸틴의 정권 기반인 러시아 민족주의를 위협한다는 불만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욕적 요구를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더욱 강화된 우크라이나가 수용할 수 있을까? 전장의 현실은 우크라이나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고 있다. 병력과 무기는 점차 고갈되고 있고, 러시아군은 군수 생산을 확대하고 전술과 작전을 개선하며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전선에서의 변동은 그다지 가시적이지 않으나, 우크라이나는 현재 제1차세계대전 말기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선을 유지하고 사회를 동원해내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2024년에 예정된 대선을 치르지 않고 계속해서 집권하고 있는 젤렌스키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내년부터 더 거세지면,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를 향한 불만과 염전 여론이 분출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러시아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시 경제의 위기 신호를 극복해내고 1년에서 2년 가량 더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을 보여준다면, 우크라이나가 붕괴할 때까지 소모전을 이어갈 것이다. 이 경우, 러시아는 당초 목표로 했던 동남부 지역의 안정화와 무관하게 훨씬 더 광범위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요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원래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전체 합병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가 동부 영토를 강탈당하고, 다수 인구가 죽거나 해외로 유출된 상황에서 러시아는 다시 개국하게 될 자국 방송을 통해 친러시아 선전을 개시하고 러시아 자본을 통해 우크라이나 재건 정국을 주도하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해서 올리가르히와 타협을 통해 등장한 푸틴 정권의 정치경제 구조가 겪고 있는 격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푸틴주의 정치경제의 기본 공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계체제 반주변부로서 러시아는 주로 원자재를 수출하고, 제한된 제조업은 정치 권력의 보호를 받는 국내 시장에서 수익을 올렸다. 국가의 부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특정 원자재 생산 도시에 매우 집중되었다. 서구 지향 고학력 중산층은 연줄이 없을 시 체제의 사다리를 오를 가능성이 없음에 좌절했고, 러시아의 광대한 내륙 도시들은 소비에트 시절의 유산을 지키며 쇠락하고 있었고, 지방 도시 주민들은 사회 장악력이 없는 정권의 무관심 속에서 탈정치화되고 무기력해진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많은 것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서구의 경제 제재는 올리가르히가 러시아 바깥으로 나갈 탈출구를 봉쇄해주었고, 푸틴은 전쟁이 불러일으킨 애국주의 열기를 통해 올리가르히에 대한 장악력을 훨씬 더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후 전쟁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군사케인즈주의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보였다. 러시아 국부 펀드에서 엄청난 자본이 차출되어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향하는 계약병과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받는 고임금으로 제공되었고, 이는 러시아 경제의 분배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너지 생산지에 고여 있던 돈이 런던으로 탈출하지 않고 시베리아, 남부 러시아, 북캅카스 등지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푸틴 정권은 서구 기업이 철수하고 남은 생산 시설과 러시아를 탈출한 올리가르히의 자산을 측근들에게 분배함과 동시에, 그들을 1990년대식 올리가르히가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는 국영기업에 종속된 대리인으로 격하시켰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위한 국가의 대대적인 자원 동원과 그를 위한 국내 자본 권력 구도의 재편은 러시아가 과거의 종속경제에서 탈피해 중국을 연상케하는 국가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하고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정치경제의 변화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던 이념적 변화와 상호작용한다. 2014년 크림 병합으로 시작된 서구와의 대립은 러시아에서 더욱 완고한 문화적 보수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게 했다.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에 대한 혐오,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군사주의 예찬, 문명 국가론과 다극세계론으로 특징지어지는 ‘러시아 담론’은 콘스탄틴 말로페예프, 알렉산드르 두긴,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등 제도권과 비제도권 모두에 포진해있는 우익 사상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러시아가 이 시기 ‘푸틴주의’ 국가로 이행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푸틴주의라는 일관된 사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익 지식인들은 반서구주의와 문화적 보수주의만을 공유하는 여러 갈래의 사상을 제각기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라인 문화에 익숙한 청년과 청소년 세대에게 이들의 우익 담론이 도달한다고 볼 여지는 적었다. 따라서 새로운 러시아 보수주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대중에게 큰 호소력이 없는 일부 우익 지식인과 국가의 문화 기관 위주로 유통되는 담론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사회경제적 개선을 가져오기 어려운 푸틴 정권이 채택한 임시방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전쟁이 발발하고, 수십만 명의 남성들이 군에서의 전투를 경험하고, 국내 산업이 진작되는 가시적 변화가 따라왔고, 국가의 보수주의와 반서구주의 이념은 사회의 더 넓은 영역까지 확산될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중등교육에서도 기초적인 교련 시간을 도입하고, 대조국전쟁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 보훈 사업에 예산 지출을 더욱 크게 늘렸으며,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자를 정부 엘리트 집단에 적극 기용하는 ‘영웅의 시간’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질서의 대대적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외교 담론과 수사에서도, ‘황금의 10억론’과 같은 냉전 시대 소련이 발전시킨 반제국주의가 재등장하기 시작했고, 중국, 이란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와의 연대 의식이 더욱 공공연히 표출되었다. 러시아는 자신이 직면한 대규모 경제 제재를 서구의 신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패권으로 규정하고, 반제국주의 담론을 통해 비서구 국가를 묶어 제재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담론과 언어로만 존재했던 이념이 2022년부터는 실제 국가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 이념으로 부상했으나, 사유화 국면의 대재난으로 양국에서는 안정적 정치 질서가 등장하지 못하고 정경합일의 올리가르히 체제가 지속되었다. 올리가르히 체제는 국민 다수의 삶에 실질적인 개선을 안겨주지 못했다. 정권의 취약성이 늘어가는 가운데,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도시 고학력 중산층이 다시 제기한 서구식 자유주의는 소비에트 시기의 일자리, 사회보장, 문화적 기억에 의지하는 대중에게 외면을 받았다. 러시아의 대중은 소극적 현상유지와 민족주의를 제공하는 푸틴을 계속 지지했다. 키예프에서는 서부의 극우 민족주의 그룹과 키예프의 고학력 중산층이 더 강력한 동맹을 맺어 정치적 변혁을 추구하였으나, 러시아의 개입 이후에 마이단 정치는 포퓰리즘과 민족 갈등의 혼란으로 치달았다. 무엇보다, 유럽연합의 구조조정안은 올리가르히 체제를 개혁하지도 못했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남은 기반에 더욱 큰 타격을 가하며 우크라이나 사회의 조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양국 정부는 모두 사회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실패하거나, 혹은 시작 자체를 포기하면서 민족주의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서구와 러시아의 지정학적 단층선, 그리고 서부와 동부의 문명적 단층선이 존재하는 우크라이나를 치명적인 전장으로 만드는 갈등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이 글에서 추측한 대로, 민스크 협정의 사실상 파기와 메드베드추크의 정치적 배제로 정점에 달한 돈바스에서의 위기관리 실패였지만, 더 깊은 원인은 탈소비에트라는 헤게모니 공백 공간에서 자유주의를 포함한 어떤 프로그램도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모든 지역에서 즉각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에도 서구는 계속해서 이를 만병통치약으로 홍보하며 정치 위기와 지정학적 대립을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위기관리 실패에 기여했다.
그 결과 푸틴 정권은 헤게모니 공백을 단순한 비(非)자유주의로 대처하는 취약한 체제에서, 자본과 사회를 동원하고, 군사케인즈주의를 통해 국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경제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보수주의 이념을 이식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반(反)자유주의 체제로 이행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현재 보여주는 놀라운 내구력에도 불구하고, 가시화되지 않은 위험 요소가 증폭하면서 붕괴할지, 혹은 정권이 표방하는대로 비서구 국가를 규합하여 ‘황금의 10억만을 살찌우는 서구 신식민주의’의 진지한 대안을 건설할 수 있을지 지금 단계에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국제 질서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1년에서 202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탈소비에트 공간, 나아가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질서가 어떤 이유에서 실패했는지를 더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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