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제프에는 비가 내린다 - (1)

르제프에는 비가 내린다 - (1)

대조국전쟁 화성작전의 전적지 르제프 탐방

임명묵

이번 르제프 행 버스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원래 예정되었던 4시간 운행이 아니라 무려 5시간이나 걸리는 기나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맨 뒷자리에 술에 쩔은 미친 할아버지가 앉더니만, 듣기 거슬리는 큰 목소리로 계속 신경질적으로 이것저것 중얼거리는데, 잠이 들라고만 하면 뭐라고 지껄이고, 잠이 또 들라고 하면 또 갑자기 짜증내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말해서 자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침 핸드폰 배터리도 꺼져서,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내 노트북에 들어 있는 책을 읽으면서 간신히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르제프에 도착하니 밤 11시 반. 원래 6시 출발 10시 도착이었어야 하는데, 30분 늦게 출발하고 1시간을 더 늦게 도착하여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와버렸다. 힘들긴 했지만 일단은 꿉꿉한 버스의 공기와 미친 할아버지의 짜증나는 목소리로부터 해방되고, 시원한 르제프의 바람과 적막한 도시의 고요함을 마주하자 한결 나아진 느낌이었다.

도시 중심부의 남쪽 끝에서 내렸고, 숙소는 마침 도시 북쪽 끝이었다. 그래도 인구 6만의 대도시답게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걷는 게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았다. 중간 대로에 위치한 성당이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2005년에 새롭게 세워진 성당이라고 한다.

표지판에 '볼가강'이라고 써 있어서 놀랐다. 내가 아는 볼가강 본류는 여기를 지나지 않는데? 지도를 찾아보니 볼가강의 지류가 흐르긴 했다. 볼가강 발원지 리빈스크에서 바로 다른 지류로 뻗어나가는데 모스크바와 자웅을 겨루었던 중세 도시 트베리를 지나서 르제프로 향한다.

그렇게 시작된 르제프의 아침.

르제프는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인구 6만 명의 작은 소도시이다. 르제프는 행정구역 상으로 트베리 주에 속해 있는데, 트베리 또한 볼가강 수계망에 속했고, 중세 기준으로 북동쪽에 위치하여 모스크바와 대단히 유사한 지리, 인문 환경 속에서 성장한 도시였다. 중세에는 모스크바와 트베리가 루시의 패자를 놓고 쟁패를 벌였는데, 모스크바가 승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트베리 권역에 속한 르제프 또한 볼가강을 통하여 수운과 무역이 발달했으나,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 요충지로서의 성격은 1942년 대조국전쟁 시기에 나치 독일군에 점령하면서 역사에 남게 될 르제프 전투로 이어진다.

아마도 흐루쇼프 시기, 1960년대 즈음에 지어졌을 것 같은 아파트. 우리가 묵은 숙소도 비슷한, 아주 낡은 건물이었다..

숙소는 르제프의 중심을 관통하는 레닌 대로를 끼고 있는데, 도로 맞은 편에 서부 러시아의 최대 마트 중 하나인 삐쬬로치까가 자리하고 있었다.

르제프 북쪽에 위치한 주요 광장인 혁명 광장. 옛 르제프 시가지에 있었던 주요 광장이었는데 당연히 러시아 혁명 이후에 혁명 광장으로 개명되게 되었다.

광장 안에는 1987년에, 소련이 다 망하기 직전에 세워진 세 혁명가들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노동자, 병사, 농민 혁명이여 영원하라! 라고 적혀 있다.

인구 6만 대도시 트베리의 '중앙 시장'... 내부를 조금이라도 구경했어야 하는데, 무엇을 팔고 있을지 이제 와서 궁금증이 생긴다.

르제프에 온 날은 비가 계속 내렸다. 그냥 추적추적 내리는 것을 넘어서 꽤 많이 내리기까지 했는데, 우산을 살 수 있는 곳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가 간신히 하나 발견해서 거금 1400루블(21000원!)을 주고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 다음 날 숙소에 깜빡하고 두고 옴..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좌판을 깔고 무언가를 열심히 팔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치원 시장도 옛날에 지붕이 없을 때는 저런 모습이 많았는데...

레닌 대로를 따라 쭉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소비에트 광장을 갈 수가 있다. 무척이나 많은 새들이 있는 것이 인상적..

이런 조그마한 호수도 있었는데, 한적한 소도시 공원 호수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것이 운치가 무척이나 훌륭했다.

러시아의 많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군사 영광 기념 도시탑'이다. 원래 소련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대조국전쟁에서 쟁투를 벌인 몇몇 도시에 수훈했었고, 이 도시들은 오늘날에도 명예가 높은 '영웅 도시'로 기념되곤 한다. 2007년 러시아 연방에서는 영웅 도시급은 아니지만, 러시아 군사 역사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도시들을 '군사 영광 도시'로 지정하고, 위와 같은 기념물을 세우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서도 똑같이 생긴 기념탑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한편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점령지인 페오도시야, 멜리토폴, 마리우폴이 군사 영광 도시로 지정되었다.

비를 맞으며 외롭게 서 있는 레닌 동상. 1938년에 세워졌었는데, 르제프를 점령한 독일군이 동상을 파괴하고 이 앞에서 르제프 시민을 교수형했다고 한다. 1951년에 다시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관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르제프, 군사 영광의 도시

작은 조국 - 위대한 러시아. 라고 써 있다.

소비에트 광장의 정류장. 그 옆에는 꽃집이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도시에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해가 넘어갈 때쯤 되니 꽤 많이들 보였다.

인근에 위치한 나치 독일 강제 수용소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소비에트 광장 맞은 편에는 또 그라친스키 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그라친스키는 르제프에서 혁명 활동에 참여한 군사 위원이었다고 한다.

1918년 혁명 1주년을 맞이하여 세워진 오벨리스크인데, 상단의 포탄 자국은 대조국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포격으로 생긴 것이라고 했다.

르제프를 남북으로 가르는 볼가강과 1984년에 세워진 신교(new bridge).

르제프 전투에 참여한 소비에트 영웅들을 나열한 영웅의 길. 러시아의 주요 군사 영광 도시에는 이런 길이 꼭 있기 마련이다.

훗날 르제프 해방에 사용되었다는 포를 이렇게 전시하고 있다.

아마 2023년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올해 5월 9일 전승절에 설치한 기념물인 것 같았다. 2022년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난 뒤에는 2023이 다소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는 한다...

르제프의 대표 명물 중 하나인 르제프 해방 오벨리스크. 원래 이 자리에는 성당이 있었다고 했는데 독일군 점령기에 파괴되고, 1963년에 르제프 해방을 기념하는 이 오벨리스크를 건립하였다.

르제프 오벨리스크 맞은 편에는 여느 러시아 도시의 이런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꺼지지 않는 불(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도 정말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부조가 매우 영웅적이고 멋있다.

1968년에 르제프 시민들이 100년 뒤인 2068년에 열어보리라고 묻어둔 타임캡슐인 것 같았다.

아마 100년 뒤 미래의 시민들에게 "소련은 더 발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겠지?" 같은 것을 물어보는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련은 100년은 커녕 25년도 더 못 가고 사라졌고... 현대 사회는 2068년까지 생존이 불투명한 상태라는 것이 얄궂다.

1944년에, 무려 전쟁 중에 르제프의 탈환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물이다. 그만큼 르제프는 수많은 소련군의 피를 뿌려야만 했던 대격전지였다.

볼가강을 가로지르는 1950년대에 건설된 구교(old bridge)를 걸으면서 한 컷.

무슨 공수부대 관련 기념비 같은데, 펄럭이는 소련 국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한 컷 찍었다.

아프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러시아에서 많이들 세워졌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해체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소련 사회의 혼란과 무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많은 당사자들이 '우리의 전쟁은 헛되지 않았다'라고 외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당초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개입 목적으로 설명했던 '국제주의적 대의'를 지금도 얘기하고 있다.

'평화의 시대, 조국의 이익을 수호했던 그들을 기억하며'

제2차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평화의 시대에도, 세계 각지와 러시아 각지에서 싸웠던 소련군 참전자들을 기리는 것이다.

중국, 라오스, 알제리, 앙골라 등 유명한 냉전과 탈식민화의 현장도 있지만...

1956년 헝가리 개입을 암시하는 '헝가리'.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곱게 넘어갈 수 없는 '한국'이 눈을 사로 잡았다. 그밖에도 타지키스탄,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야, 북캅카스 지역.... 91년 이후 새로이 제국의 변경이자 골칫거리가 되었던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다음은 르제프 시내를 마저 돌아보고, 근교의 핵심적인 명승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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