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 (1)
아미르 티무르가 건설한 위대한 도시 사마르칸트 방문
3시간 반 열차를 타고 달려 사마르칸트에 도착. 자전거를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요 도시이니 만큼 열차가 꽤 길게 정차했는데, 담배를 태우러 나온 인도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새삼 이곳의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인도 문화가 우즈베키스탄으로 유입된 오랜 역사, 그리고 두 나라의 가까운 지리적, 심리적 거리가 실감났다.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에서 왔냐, 하니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자기는 원래 인도 캘커타 출신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시에 있는 비료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고, 그 직장에도 한국인(고려인) 동료들이 있다고 얘기했다. 동시에 자신의 고향 캘커타가 지금 한국 문화로 붐을 이루고 있어서, 한글 간판이 가득하고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거리까지 마련되고 있다고. 정차 시간이 15분에서 20분 정도 주어졌기 때문에 꽤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선 그는 힌디어 대신에 벵갈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인데,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강한 힌두 애국자였다. 현 집권당인 힌두민족주의 BJP(인도인민당)와 총리 나렌드라 모디를 직접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와할랄 네루 하에서 오랜 기간 인도를 통치해온 INC(국민회의당)보다는 낫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보기에 일단 마하트마 간디부터가, 제대로 된 민족 운동을 방해하면서 인도 독립 운동에 끼친 해가 컸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인도 국민군을 만들어서 영국에 무장 투쟁을 벌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물어보았다. "네타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니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당신이 그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도쿄에 있는 그의 묘와, 싱가포르에서 인도 국민군이 결성된 장소도 방문했다고 하니 인도 역사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하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는 도쿄에 있는 그의 묘는 가짜라고 말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도 없다고. 네타지는 힌두 승려로서 다시 인도로 돌아와 1990년대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인도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보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일방적으로 러시아의 책임만을 물을 수는 없으며, 또한 인도와 러시아의 우호적 외교 관계는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특히 서방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인도의 국익을 추구하는 외무부 장관 자이샹카르를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추켜세웠고, 그처럼 자신 아들도 우즈베키스탄의 러시아인 학교에서 교육시키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가 14억 인도인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겠으나, 역사와 지정학에 대한 그의 해박한 인식에 상당히 놀랐고, 그의 거침없는 의견에 감탄하며 번호를 교환했다.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었고 그는 일터가 있는 카시로 돌아가야 했다.
사마르칸트의 인구는 약 57만명. 독립 후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2100만에서 3500만 명으로 거의 뻥튀기가 되었다. 농촌의 인구 증가를 도시가 흡수해야만 하지만 도시화율이 그렇게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곳도 공산권 전통에 따라 거주지 통제를 하는 것일까? 제2의 도시 사마르칸트는 어쨌든 100만명 이상의 대도시로 빠르게 탈바꿈을 해야할 것처럼 보인다.
사마르칸트 역에서 얀덱스 택시를 불러 타고 숙소로 이동.
사마르칸트의 대표적 유적인 비비하늠 모스크가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나를 맞아주었다. 도시 중심가의 관광지 같은 사마르칸트의 상징 레기스탄과 달리, 비비하늠 모스크는 시장과 주택가 한 가운데에 느닷없이 지어져 있어서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 8년 전에 사마르칸트에서 택시를 탔을 때 비비하늠으로 가달라고 하니 어딘지 모른다고 하는 택시기사가 있었다. 대체 이걸 모르면서 어떻게 택시를 한다는 거냐.. 아, 하긴 그때는 지금처럼 등록된 택시들보다는 그냥 길거리에서 아무 차 잡아 타고 가격협상부터 시작하면서 택시를 타긴 했었다.
타슈켄트에서 이곳저곳 쏘다니고 3시간 반 기차까지 타려니 힘들어서 방에서 골아떨어졌다. 느지막이 나오니까 역시나 뜨거운 햇살과 함께 어제 밤에 스쳐지나갔던 비비하늠 모스크가 등장한다. 이 느낌을 위해서 일부러 숙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에는,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삼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유라시아 대륙 권위주의 연대의 현장..
예전에는 이런 식당 같은 게 없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비비하늠 모스크가 한눈에 보이는, 2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뷰를 감상. 그야말로 웅장하다.
비비하늠은 아미르 티무르의 아내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1399년 티무르가 인도의 중심 델리를 정복한 이후에 건설하기 시작했고 몇 년 뒤 완공되었다.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코끼리들, 기술자들, 보물들이 투입되었다.
거대한 코란.
티무르 제국의 몰락 이후 사마르칸트 자체도 쇠락의 길을 걸으며 비비하늠 모스크는 꽤 큰 타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소비에트 시대부터 독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복원하며 지금의 관광지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비비하늠 모스크 옆에는 사마르칸트의 중심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시욥 바자르가 있다.
바자르 내부에 위치한 차이하나(찻집, 간단한 식당). 저곳에서 8년 전에서 맛도 없는 핫도그를 우겨 넣으며 여행을 했던 기억. 사실 핫도그 맛이 없었지만 당시 싸이의 젠틀맨이 TV에 나오고 있어서 그게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야말로 부육 이팍 욜리, 대 실크로드의 중심이구나를 실감할 수 있는 한 가게.
시욥 바자르를 나와서 가는 곳은 하즈레트 히즈르 모스크.
이 지역은 한때 소그드인의 땅, 소그디아나라고 불렸었다. 아랍인들이 소그디아나를 정복하고 모스크를 세웠는데, 그 머나먼 옛날에 소그디아나에 거의 처음 세워진 모스크라서 나름 성지인 곳이다. 물론 이 건물은 그때 모스크는 아니다. 몽골 침략이나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모스크가 파괴되었고, 19세기에 다시 같은 자리에 건축되어 오늘날에 사마르칸트의 중요한 모스크로 자리매김했다.
이 모스크 안에는 사마르칸트가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의 영묘도 자리하고 있다. 2015년에 방문했을 때는 카리모프가 죽기 전 해라서 당연히 이런 영묘는 없었고, 2018년에 완성되어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곳저곳에서 온 방문객들이 영묘를 둘러보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8년 전에 오갔던 장소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사람이 많아서 택시로 갔지만, 이번에는 혼자라서 땀을 훔치며 그럭저럭 혼자 산책할 수 있었다. 여기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실크로드 우호 협력비가 있는 곳인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하니..
아프라시얍 벽화가 발굴된 곳이라서 고고학 박물관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이 벽화에서 그 유명한 고구려 사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교과서에서 고구려의 넓은 활동 범위를 증명하는 증거라고 배웠던 기억이 다들 있을텐데 바로 그 아프라시얍이다. 물론 8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라 굳이 다시 들리지는 않았다.
실크로드를 내세우는 도시답게 낙타와 대상(카라반) 관련한 기념물도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다.
길을 계속 걷다보면 다니요르 영묘가 나온다. 다니요르가 누구인가 하면 구약성서의 그 다니엘이다. 이슬람은 성서인 코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가 가장 중요한 텍스트지만, 구약성서도 중요한 경전으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니엘도 성인의 일원이다. 원래 다니엘 영묘라고 주장되는 곳은 지금의 이란에 있지만, 전설 속의 인물이기 때문에 이라크나 시리아, 그리고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까지 다니엘의 영묘라는 장소는 많이들 퍼져 있다. 이라크 바빌론에서 죽었다는 다니엘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찾아보면 역시 티무르가 가져왔다는 설이 제일 많았다. ㅋㅋ
한국인 관광객들을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서로 아는 척은 안 하는 게 해외여행의 마땅한 도리.
이 관은 무려 18m나 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다니엘의 시신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라난다는 전설을 반영해서 이렇게나 길다. 영묘 앞에서는 많은 우즈벡인이 열심히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는데, 중앙아시아의 수피즘 전통이다. 원래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성인 숭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토착 샤머니즘과 습합된 수피즘이 성행하고, 수피즘에서는 성인의 묘나 성스러운 나무 등을 숭배하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용인된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는 이런 전통을 민속적 이슬람으로서, 아라비아의 극단적 이슬람과는 다른 올바른 이슬람으로 장려하는 편이다.
이제 사마르칸트의 상징인 레기스탄으로 가는 길. 레기스탄에는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레기스탄 광장은 딱 보아도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데, 세 개의 거대한 마드라사(전통 이슬람 학교)가 모여있는 곳이다. 맨 왼쪽이 티무르 제국 시대인 15세기에 지어진 울룩벡 마드라사고, 그 옆으로는 17세기에 지어진 틸리야카리 마드라사와 셰르도르 마드라사가 있다.
이 또한 45m 높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건축물들이다.
특기할 것은 상단부에 위치한 그림이다. 떠오르는 태양과 그것을 등지고 있는 동물이 있다(호랑이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이슬람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우상이라면서 묘사하는 게 금기시된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특징이 드러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 문명에서 전통적으로 숭배하는 태양과 몽골 제국의 영향으로 들어온 동양화풍이 섞인 묘사가 꽤나 멋지다.
러시아 제국군의 중앙아시아 정복 원정에 종군한 위대한 동양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이 1870년에 그린 셰르도르 마드라사.
이제 내부로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