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고향, 고리

스탈린의 고향, 고리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향, 고리를 방문

임명묵

트빌리시 여행 이전에, 그루지야를 여행지로 삼은, 아니 코카서스를 여행지로 삼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고리(Gori)를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실제 이동은 기차로 했는데 구글맵에서는 철도 경로가 안 나와서 자동차 도로 경로로 대체. 거리는 대략 85km.

트빌리시 역에 내리니 한 밤 중이었다. 이미 기차 안에서 아르메니아 출국과 그루지야 입국 심사를 다 받았기 때문에 걱정 없이 내렸다.

1982년에 브루털리스트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트빌리시 역. 트빌리시에 온 건 좋은데, 고리로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서 일정상 다소 무리를 한 것이 문제였다. 트빌리시에서 하루 묵지도 않고 다음날 아침에 고리로 떠날 예정이었어서... 기차역 근처에서 밤을 새야만 했다. 근데 불야성의 한국에서도 요새 24시간 영업점이 줄어들고 있는데 그루지야라고 딱히 있을 리가.. 역 광장에서 커피 한 잔 사먹으라는 호객 할머니를 피해서 어떻게든 24시 영업을 하는 피난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 결과 발견한 지하에 있는 식당 하나.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냥 밤 새서 놀러 온 사람들인지 그루지야 사람들 몇 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냄새는 퀴퀴하고 공기는 습해서 밤을 새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 오히려 잠이 들지 않아서 좋은 건가?

그루지야의 대표 민속 요리인 힌칼리(힝칼리)를 주문해서 일단 허기를 달랬다. 코카서스까지 쳐들어온 몽골군에 의하여 만두가 여기도 전파되었는데, 현지화를 거쳐서 지금의 힌칼리가 되었다. 물론 동북아시아의 웅장한 만두에 비하면 다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무엇보다 간장도 없고) 그래도 꽤 맛있는 만두다. 힌칼리 안에는 육즙이 가득 있어서 소롱포처럼 한 입만 살짝 베어물고 새어나오는 육즙을 조금은 마시고 먹는 게 좋다. 그리고 소가 하나도 없이 밀가루 반죽으로 꽉꽉 뭉쳐 있는 꼭다리 부분이 힌칼리의 특징이라 하겠는데 저걸 손잡이처럼 잡고 먹는다.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는 나름 소비에트권의 부먹찍먹 논쟁이라고..

흡사 아키라를 연상케하는 사이버펑크적인 주크박스. 동 틀 때까지 계속 버티는데화장실에서는 바선생들이 우수수 튀어나오고.. 그래도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시는 40대 그루지야 남성 올렉씨랑 재밌게 얘기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확실히 아르메니아보다 바다가 더 가까워서 그런지 풍경이 더 푸르른 느낌이다. 사진으로만 보면 참 이쁜데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일단 고작 80km 거리를 뭔 2시간 반인지 3시간인지를 걸려서 갔는데, 초반 40km를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신속하게 주파해서 어라? 이거 차표에 잘못 찍혀있는 건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났다. 그런데 나머지 40km를 거의 2시간에 걸쳐서 가는데..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시골 간이역 하나하나를 다 정차하니 이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탄 객차는 커튼도 하나 없어서 코카서스의 직사광선이 직빵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창문도 마음대로 못 여는 차여서 그야말로 맥반석 계란이 되기 딱 좋았다. 잠도 못 잤으니까 잠이라도 청하려고 했는데 햇살이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중간에 좀 규모가 있는 역에 정차했을 때 후다닥 승강장 매점으로 달려나가서 환타 두 개를 사지 않았더라면 고리 가기 전에 그루지야에 대한 분노를 엄청나게 키웠을지도...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도착!

그야말로 가슴 설레는 고리 역이다. 고리에 도착하니까 밤 새고 땡볕에 시달렸는데도 신기하게 피로가 싹 사라졌다. 역시 영험한 고장이 따로 없다..

고리는 인구 4만 4천 명의 한적한 시골 소도시다. 조치원이 대충 인구가 4만 명이니까 딱 조치원 정도의 사이즈. 그런데 사실 고리가 그루지야에서 인구가 다섯 번째로 많은 도시다.. 왜 이렇냐 하면 그루지야 자체가 총 인구가 370만 명 가량인 소국이기 때문.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되는 120만 명이 수도인 트빌리시에 살고, 항구 도시 바투미(20만)와 과거의 산업 중심지인 쿠타이시(14만)가 그 다음을 잇는다. 사실 고리도 소련 해체 직전에는 인구가 6만 7천 명에 달했는데 소련 해체 이후의 혼란을 거치면서 인구 유출이 심각했던 곳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는 코카서스 산맥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요새가 유명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거 보러 온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 이거 보러 왔지... 이오시프 스탈린 국립 박물관!

1878년 구두 장인 베사리온 주가시빌리와 그의 아내 케케 겔라제 사이에서 이오시프 주가시빌리가 태어난 곳이다. 주가시빌리는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고 자퇴한 뒤에 혁명에 투신. 코카서스를 종횡무진하며 볼셰비키의 혁명 자금을 대다가 러시아 혁명과 함께 제국 권력의 중심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혁명 과정에서 얻은, 강철의 사람 '스탈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사에 한 획을.. 아니 여러 획을 그었다.

트빌리시 기차역 안에는 스탈린 동상이 서 있는데, 저 구역으로는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아마 동상 훼손 행위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

역에서 나와서 역 근처 숙소로 향하는 길. 진짜 하늘도 맑고 평화로운 곳이다.. 역시 인물은 이런 고장에서 나오는가. 숙소에 짐을 맡겨 놓고 일단 못 잔 잠을 조금 청한 뒤에 다시 길을 나서기로.

저 멀리 고리 읍내, 아 아니 시내가 보인다.

진짜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라니.. 이것이 바로 성지순례..

고리 시청. 원래 이 앞에는 최후의 스탈린 동상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연기 군청이 이렇게 크다고 생각하면 조금 어색한데.. 고리 시청은 참으로 웅장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에 탈스탈린화를 개시하고, 소련 전역의 스탈린 우상화는 종적을 감췄다. 수많은 스탈린 동상이나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전부 교체가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극소수의 기념물은 살아남았고,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스탈린 고향인 고리의 스탈린 동상이었다.

하지만 이 동상도 2008년 러시아-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아 전쟁으로, 러시아에 분노한 그루지야인들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고리 시청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스탈린 공원이 나온다. 스탈린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자니 소련 아이들을 사랑하신 스탈린 동지의 하해와 같은 마음이 떠오르며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스탈린 공원의 맨 끝에는 스탈린 박물관이 있는데 여기가 고리를 온 이유이자 목적이 되겠다.

이 허름하고 낡은 집에서 스탈린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래 주변에 당연하게도 다른 집들이 많았는데, 스탈린 기념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철거되고 빈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집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이 무슨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건 아니었고, 아버지가 장인 일(자영업)도 하면서 때로는 날품팔이도 하는, 그냥 동네에서 그럭저럭 먹고사는 집이었다. 저기 왼쪽 방이 베사리온 주가시빌리, 케케 겔라제 부부와 스탈린이 살던 곳이었고, 지하는 구두 공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1879년 12월 21일에 태어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1883년까지 보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런데 사실 1879년은 기록 상 오기고 1878년이 맞다.

박물관 밖에는 조금 크기가 작은 스탈린 기념상이 하나 더 있고.

스탈린이 실제 사용했던 철도 차량도 있다. 이 철도 차량을 타고 스탈린이 이곳저곳 쏘다녔다. 스탈린은 비행기를 무서워했기 때문..

박물관으로 들어가보자..

고리는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에 의하여 점령된 곳 중 하나였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바로 위가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는 남오세티아 자치 공화국이라서 정말 지척이다. 고리 시에는 전쟁의 흔적을 기념한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여기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루지야 중앙 정부에서 2008년 전쟁을 계기로 스탈린을 지우려고 하는 시도는 고리 시의회에서 계속 반대에 부딪히는 것 같다. 우리 동네 큰 인물 감성..

스탈린 프로파간다.. 아름답습니다..

스탈린 동지께서 뻑뻑 피우시던 파이프 담배.. 유명한 혐연가였던 레닌은 스탈린이 자기 앞에서 계속 담배를 피워대자 "이 아시아인은 할 줄 아는 게 연기 뿜는 거 밖에 없구만!"이라고 했고 스탈린이 그 파이프를 레닌 면전에서 집어 던졌다. 매우 유명한 일화다..

스탈린 동지께서 드셨던 술병과 술잔, 그리고 체스판..

정말 다종다양한 스탈린 그림을 볼 수 있다. 트빌리시의 산에서 혁명 모의를 하는 소년 주가시빌리.

똘똘한 아들 잘 키워보겠다고 남편 술주정을 견뎌가며 아들 뒷바라지를 한 스탈린의 어머니 케케 겔라제의 사진이다. 아버지는 이오시프가 그냥 자기 따라서 구두나 만들면 좋겠는데, 아들이 공부 잘하는 것 같으니 어떻게든 더 공부시켜서 출세시키려고 했던 케케..

실제로 스탈린이 간 트빌리시 신학교는 들어만 가면 러시아 제국의 엘리트층에 바로 편입이 될 수 있는 지역 명문 학교였는데, 혁명 활동 하겠다고 때려친 아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루지야 문자로 써 있는 것이 아마 스탈린이 그루지야어로 발표한 그 유명한 시인 것 같았다. 시에 재능이 있던 스탈린은 그루지야어 시를 여럿 써서 냈고, 그루지야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인이 아니라 혁명가가 되었다..

스탈린의 혁명 및 유형 활동 지도. 그루지야에서 바쿠도 가고, 러시아 내륙의 볼로그다도 가고, 나중에는 예니세이강 상류의 북극 투르한스크도 가고..

코카서스 문화권이라서 그런지 이런 카펫들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고르키에서 레닌과 스탈린." 또 여행의 시작을 레닌스키예 고르키 방문으로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더욱 뜻깊은 작품..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방위를 위한 총력 투쟁을 개시하는 전시들이 시작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가볼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제철소가 건설되는 모습..

농민의 피와 땀을 쥐어짜서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는 산업.. 동부 우크라이나에 집중되는 저 거대한 산업 시설들을 보면 참 역사라는 게 뭔지..

10월 혁명 24주년 기념 연설을 담은 프라우다 신문. 10월 혁명 24주년이 어떤 해냐 하면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 지척까지 몰려왔을 그 때다. 이때 스탈린은 후방(지금의 사마라)으로 도망가지 않고 모스크바를 사수하겠다고 버티면서, 극동에서 차출한 신규 병력들을 독일군 공습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열시켰다. 그 병력은 곧 독일군에게 중요한 반격을 가할 수 있었고 소련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서 살아나 승리를 향한 처절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 기념일은 더는 1917년의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이 1941년의 모스크바 방어전 기념일로 더 자주 소환되는 것 같다.

얄타 회담의 스탈린..

1933년 말년의 케케 겔라제. 1856년에 태어난 케케는 1937년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스탈린은 혁명 이후에 일 중독자로서 너무나 많은 업무를 처리했고,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자식들과 어머니를 방문할 시간이 없었다. 러시아어를 하지도 못했던 케케는 아마 신부가 된 아들과 함께 그루지야에서 계속 살아가는 삶을 꿈꿨겠으나.. 스탈린은 점차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고, 모자는 1935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스탈린은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37년은 소련의 정치,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는 대숙창이 있는 해였다.

1953년 세계 권력의 절정에 오른 남자의 사망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흉상이 있는데 생전 둘의 우정과 교분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해리 트루먼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소 유화책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렇게 냉전이 시작된다.

만수무강! 경하 사대림 동지 70수 진.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 1949년 스탈린은 70세 생일 잔치를 열었고 전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이 참석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새로운 붉은 황제가 된 모택동도 세계 공산주의의 교황께 입조하고자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했었다.

그림은 이렇지만 실제는 이렇게 어땠을까.. 스탈린에게 어머니란 무엇이었을지..

하여간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그림들.

박물관 바깥의 스탈린 기차를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스탈린 박물관을 떠난다. 고리에 온 이유이자 목적을 완수했으니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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