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도상륙(昭南島上陸) - 2
남양공대, 아랍 거리, 영국군 항복지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남양 공대.
1991년에 세워진 싱가포르의 국립대학교인 남양 공대(NTU)는 싱가포르 국립대(NUS)와 함께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학교다. 교수진에 대한 파격적 대우로 유능한 인재를 유치하고 학생들을 철저히 훈련하는 전형적인 '싱가포르 명문대학교'인 것 같았다.
이 건물은 남양 공대의 명물 중 하나인 아트, 미디어, 디자인 스쿨 건물로, 옥상 위에 설치된 잔디밭이 상징이다.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을 터부시하는 나라다보니,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자판기를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도 역시 학생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마셔줘야 하지 않겠는가. 자판기를 보니 역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임을 깨닫고 굉장히 흡족해졌다. 기념으로 녹차 한 잔 뽑아서 마셔주었다.
남양 공대 학생 식당에서 만난 어떤 싱가포르 할아버지. 저 때 링컨이 힙합을 하고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보더니 중국어로 무언가를 연발하셨다. 그래서 "워쉬한궈런"이라고 해주니까 유창한 영어로, "네 티셔츠에 그 사람 링컨 아니냐?"라고 다시 묻길래 "예스"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뒷면을 보여주었는데...
대문짝만한 손중산(여기 식으로는 '쑨얏센') 얼굴이 프린팅 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러더니만 "링컨이 바로 이 사람의 멘토였다. 네 티셔츠에서 링컨 얼굴을 보니 반갑다."라고 해주었다. 나도 남경의 중산릉에 다녀왔다고 하니 너무 좋아하면서, 너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누구냐고 물어왔다. 누구를 말했는지는 여기서는 비밀이지만 이분도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지나가는 다른 학생에게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길래, 나도 셀카 하나를 남겼다.
푸드코트식의 학생 식당 말고, 여러 식당과 매점들이 모여 있는 구역도 지나갔는데, 백종원의 비빔을 발견... 남양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대조선의 문화에 다시 한 번 가슴 속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2015년에 지어진 남양 공대의 또 다른 명물 하이브. 위키백과에 따르면 딤섬 찜기처럼 생겨서 별명도 딤섬 찜기라고 한다.
내부에는 50개가 넘는 강의실이 있는데, 뭐랄까.. 하나의 개미굴과 같은 싱가포르 사회의 어떠한 이상향이 구현된 것 같아서 감탄스러우면서도 조금 섬찟했다.
NTU의 또 다른 유명 관광지로는 운남 정원(Yunnan Garden)이 있는데, NTU가 설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씨가 날씨이니만큼 정원을 차분히 산책하기는 어려웠고, 이 건물만 잠깐 방문했다. 차이니즈 헤리티지 센터인데, 듣기로는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할 당시 싱가포르를 롤모델로 삼고 수많은 당간부들을 연수 보냈을 때 그들이 지냈던 숙소가 이곳이었다고. 등소평은 "중국에 천 개의 싱가포르를 만들겠다."라고 공언한 것으로 유명하고, 싱가포르 인민행동당은 소련 공산당만큼이나 중국 공산당에 막대한 영감을 준 조직이었다.
이 날은 광대한 남양 공대를 따라 걷다가 진이 빠져 버려서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져서 잤다. 선선한 밤에 잠시 나와 산책을 할 때 발견한 상징물.
8월 9일이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절인데, 방문했던 때가 마침 7월 마지막 주라서 곳곳에서 국경절을 기념하는 상징물을 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를 떠났던 날인 토요일에는 국경절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장관들이 펼쳐졌다고 친구가 전해왔다.
그 다음 날에는 싱가포르의 아랍 거리(아랍 스트리트)를 탐방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랍 스트리트에서부터 우리를 맞아주는 조선식 인생네컷..
블랙핑크의 위세를 절감할 수 있는 제니 선생님도 영접.
아랍 본토는 물론이고, 사실 전공생임에도 서아시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뭔가 '아랍 거리'라고 하기에는 훨씬 '싱가포르답다'는 느낌이 든 곳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랍 거리는 향신료가 가득 쌓여 있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물담배 피고, 특유의 아랍어 발음이 시끄럽게 계속해서 귀를 때리는 그런 곳인데.. 이곳은 관광지라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역시 너무나 잘 구획되고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 거리에는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를 딴 '무스카트 거리'가 있는데 바로 이 곳이다. 여기에는 1932년에 완공된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술탄 모스크도 있다.
싱가포르에서 아랍인의 존재는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인데,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를 타고 서쪽에서 무슬림들이 계속해서 진출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인도양 동서를 오가는 선편은 그야말로 폭증했고, 이 기세를 받아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전통 있는 중동의 상인 민족들이 인도양 동쪽에 정착했다. 나는 방문하지 않았는데, 친구는 아르메니아 교회에 방문하기도 했다.
아랍인들은 래플스와 함께 싱가포르의 탄생부터 이 도시에 정착했고, 그 시점에 그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곳이 바로 아랍 거리가 된 셈이다. 그 옆에는 '리틀 인디아'도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전날 방문했던 차이나 타운도 있다. 그야말로 동중국해와 인도양 해상 무역의 주역들이 만나는 결절지인 셈이다.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일본에서는 소남도 시기에 술탄 모스크를 이렇게 자신들이 아시아인을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했다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기도 했다. 만세일계 천황을 믿는, 극도로 일국주의적인 일본이 1942년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은 물론이고 힌두교도와 무슬림까지 지배하는 동아시아의 거대 제국으로 팽창했는데, 그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아시아주의였다. 물론 반대로, 대중적으로 확산된 아시아주의의 여론 때문에 일본이 팽창하기도 했다.
아랍 거리의 터키 식당에서 사르마, 라흐마준, 샐러드 등을 먹으며 지중해 스타일 건강식을 섭취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누가 갑자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아니 이 사람 여기 왜 있어?"라는 한국말을 해주었는데, 알고보니 한국에서 몇 번 만나 뵈며 친하게 교류했던 지인이었다. 정말이지 동아시아의 중심 국제 도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 다음 방문지는 싱가포르의 구 포드 공장.
1913년 헨리 포드가 만든 컨베이어 벨트 생산 양식은 '포디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사실상 현대 대중 사회의 기틀이 되었다. 1930년대는 그 포디즘이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었는데, 특히 나치 독일과 소련 같이 반자유주의적인 현대화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포드 공장의 지구적 확장에는 당연히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서구 국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에 포드 사는 싱가포르에 말라야 포드 공장을 완공했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제2차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당연하게도 군수 공장으로 사용 되었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영국을 향해서도 전쟁을 선포하면서 동남아시아는 빠르게 전장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이 통치하고 있는 동남아시아로 파죽지세로 진군했는데, 가히 일본군의 전격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의 쾌속 진격이었다. 피분송크람이 통치하는 파시스트 태국 정권을 추축국에 가담시킨 일본은 태국을 발판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를 공격했고, 우월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영국 해군 함대를 궤멸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막강한 독일군을 상대해야 했던 영국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당연히 2선급 부대를 배치했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의 손 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병력 대부분이 말레이인이나 인도인 등 식민지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대영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충성심도 호주 출신 등의 백인 병사들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3개월이라는 시간만으로 일본군은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거점 전체를 장악했다.
싱가포르에서 사실상 포위된 영국군은 저항이 무의미하다 판단되어 일본군에 항복을 결정했고, 당시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지휘소로 쓰고 있던 포드 공장에서 항복 협정이 맺어졌다. '항복의 길'을 따라 걸으라고 조성해 놓은 싱가포르의 '쿨함'에 다시 한 번 탄복.
안쪽으로 가면 전시관이 있다.
전시실 바깥에는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그린 애국 그림들 중 훌륭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전시관은 당연하게도 1942년부터 1945년, 즉 소남도 시절 일본이 싱가포르에서 벌인 악행과 학살을 기억하게 하고, 국가 안보를 생각하게 하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주의, 아시아 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동남아시아를 장악했고, 실제로 그것이 유럽 식민 제국의 취약성을 폭로하여 이후 동남아시아의 독립 전쟁과 탈식민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관변 어용 민족 단체들도 전쟁 후에 그대로 독립 투쟁을 수행하는 기구들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민족 운동을 철저히 대동아공영권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 수행 프로파간다에 종속시켰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잔인한 수탈과 동원이 일상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그런 여러 동남아시아 점령지 중에서도 조금 종류가 다른 고통을 겪은 곳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곳의 인구 대다수가 중국인인데, 일본은 1937년 이래로 중국과 잔학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실제로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연결되어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중요한 숨통과도 같았다. 영국령 버마나 프랑스령 베트남 같은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인접하여, 충칭으로 거점을 옮긴 장개석에게 필수적인 보급품을 지원하는 통로가 되었다. 싱가포르와 같은 지역에 국민정부와 연결되어 있는 주요 인사나 첩보 요원이 존재했음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싱가포르의 중국인을 불신하여 숙청, 투옥, 고문, 학살을 자행했고, 싱가포르의 중국 공동체에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전시관은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일 전쟁으로 시작하고 있다.
일본 제국의 최대 팽창기에 제작된 세계 지도에서 싱가포르가 나온 부분을 찍어보았다. '소남도'.
바로 이 책상이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아서 퍼시벌의 항복 협정이 맺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야마시타를 상징하는 전설의 명언 "예스까 노까!"가 나왔다(나무위키를 보면 어느 정도는 와전된 곳이라고 하다만).
대영제국의 최대 핵심 거점 중 하나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자그마한 동양인이 제국의 주인인 영국인을 볼품없고 무력하게 만든 것은 당시 젊은 리콴유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리콴유가 말년까지 '아시아적 가치'를 주창한 것도 이때의 경험이 각인되어서가 아닐까. 결국 소남도 점령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래플스의 항구에서 리콴유의 싱가포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친구와 같이 방문을 했는데 이런 견학단들이 꽤 많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살짝 말을 여쭈어보니, 싱가포르로 귀화하는 New citizens를 위한 역사 및 안보 견학 코스라고 한다. 싱가포르의 시민이 되기 전에, 알 건 알아야 한다는 취지의 견학인 듯 했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이들의 운명은 다들 좋지 못했다. 영국이나 호주 출신 백인계 병사들은 창이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상당수는 악명 높은 버마 철도 현장 등에 동원되어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반면 인도계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지휘하는 인도국민군에 참여했고, 버마로 진군하는 임팔 작전의 선봉 부대에 서게 되었다. 사실 싱가포르 입장에서는 점령군인 일본군에 부역했다고 볼 수도 있을텐데, 싱가포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도계 주민들의 입장을 생각하여 중립적, 혹은 약간은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드 공장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쭉 걷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언덕길이 하나 나온다. 이곳에는 일본군이 격전지에서 전사한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소남도 시절에 지었던 '소남 충령탑'의 터가 있다. 더운 날씨에 언덕을 꽤 올라야 해서 쉬운 길은 아니었다.
꽤 재밌었던 건 이 날씨에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일본인 아저씨가 있었던 것인데.. 하필이면 영국군이 야마시타에게 항복한 그 장소에 이런 수상한 일본인 아저씨가 있다니 도저히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일본인이냐 물으니 맞다고 하면서, 프리터로 일하면서 축구 경기 보러 다니고 해외 여행 다닌다고 했다. 소남 충령탑을 보지 않겠냐고 하니 흔쾌히 동행에 나섰다. 물론 가는 동안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오타쿠 토크가 꽃피웠다...
역시 이 나라도 사람 사는 나라답게 이런 장소가 있어줘야 제맛이 아니겠는가.
차이나타운을 따라서 숙소를 걷는 중에 발견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힌두 사원.
최고 중심가에서 한 잔에 만 몇천원 씩 하는 끔찍하게 비싼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