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카르노와 냉전의 사회주의

수카르노와 냉전의 사회주의

인도네시아의 국부 수카르노와 사회주의, 그리고 1965년의 쿠데타까지.

임명묵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독일과 일본의 시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쇄되었다. 냉전은 독일의 유럽 제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제국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점증하면서 발생한 초강대국 대립 상태였다. 폴란드 문제, 독일 문제, 일본 문제, 중국 문제, 그리고 조선 문제는 냉전의 기원에 대한 서사에서 중심축을 차지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되었다.

하지만 서유럽과 동아시아라는 전쟁 전의 지역 중심지 바깥에서는 또 다른 서사가 전개되고 있었고, 그들은 냉전에 다른 이야기를 더할 것이었다. 바로 19세기를 주도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과 그들의 식민지의 서사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민족들은 연합국, 혹은 추축국의 편에서 제2차세계대전에 합류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그 전쟁을 발전된 국가들끼리 벌이는 ‘남의 전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제1차세계대전을 처음부터 ‘유럽 대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대신 그들은 전쟁을 기회로 삼아 꿈에 그리던 자신들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내세우고 점령한 동남아시아에서는, 근대화를 이룬 아시아인이 유럽 제국을 순식간에 몰아내는 것을 보며 유럽의 지배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일본 점령군은 동남아시아에서 식량 징발을 무차별적으로 수행하며 기근을 유발하기도 하고, 반대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전시 작전 와중에 민간인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아시아주의 이념 하에서 민족주의자들을 대동아공영권 프로젝트에 일부 참여시키기도 했고, 이들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일본 이후의 세계, 그리고 유럽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고자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사령관인 야마모토 모이치로와 악수하는 수카르노, 1944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이후의 세계가 도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경영했던 제국이 온전한 형태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물러나자마자 대대적인 민족 운동이 폭발했고, 각국은 그런 독립 투쟁을 막는 데 집중했다. 동남아시아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소련에게는 큰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건국부터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소련에서는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적 비전을 더 호소력 있게 전개할 수 있었고, 그들이 장차 소련과 우호적인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미국은 한편 양가적인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를 경멸했고, 각 민족이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윌슨주의를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 더욱 강하게 주창할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려한 것은 속도와 방법이었다. 지나치게 빠르게 유럽 제국주의가 붕괴할 경우에 발생할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친소련 사회주의 세력이 발호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 체제에 금이 갈 수 있었다. 전후 동남아시아의 민족 운동은 반제국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소련과, 유럽 제국의 질서 있는 후퇴를 관장하면서 전통주의자도 좌익도 아닌 우익 근대주의자들이라는 제3의 인물들을 찾아내고자 했던 미국, 그리고 악착같이 식민지를 들고 가고 싶어 했던 유럽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었다.

인도네시아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장소였다. 당시 인구 1억이었고, 주석, 고무, 석유처럼 세계 경제에 핵심적인 자원을 생산하는 인도네시아의 향방은 강대국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 운동을 지도하는 수카르노는 전시에 일본과 협력하면서 아시아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네덜란드는 그런 민족 운동을 진압하면서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전개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전쟁 와중에 미국은 수카르노가 좌익 세력과 결부되어 인도네시아를 좌경 국가로 만들지 않을까 의심을 하고 있었고, 소련은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인도네시아 지도. 가장 동쪽의 서이리안자야와 중앙의 보르네오를 둘러싸고 수카르노는 계속해서 외교적 공세를 취했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네덜란드의 가차없는 진압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지리하게 지속되고 있던 와중, 독립의 돌파구는 역설적으로 공산당 봉기의 실패를 통해 마련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민족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낙후된 사회적 관계를 공산주의를 통해서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현대화에 나서고 싶어했다. 그들은 수카르노와 네덜란드의 전쟁 중 타협을 용납할 수 없었고, 자바의 마디운에서 무장 봉기를 결행했다. 수카르노는 이를 가차 없이 진압했는데, 미국은 이를 통해서 수카르노가 신뢰할 수 있는 민족 지도자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제 19세기 제국주의를 질질 끌고가고자 했던 네덜란드를 용납할 이유는 사라졌다. 미국이 네덜란드를 전격적으로 압박하면서 인도네시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독립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독립을 이룬 인도네시아는 수없이 많은 섬, 이슬람과 세속주의, 산트리와 아방안, 화교와 자바인 등으로 쪼개져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실행된 선거는 정치적으로 매우 분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놀라운 것은 PKI(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약진이었다. 마디운 봉기의 실패 이후에 스탈린의 조언을 받아 대중노선으로 전환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이슬람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온건한 의제를 내걸면서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했다. 수카르노 본인도 점차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욱 끌리고 있었다. 1955년에 수카르노는 자바섬의 반둥에서 탈식민 지도자들의 회합인 반둥 회의를 개최했고, 이 회의는 미국과 소련의 길 어디도 선택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대다수 비동맹 지도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더 친화적인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유럽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지도자들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은 이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정치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카르노를 신뢰하지 못할 민족주의 지도자로 간주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원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수카르노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으로 기대하며 공산당과 수카르노의 연대를 지지할 것인가? 수카르노의 모스크바 방문과 그의 언행을 보며 모스크바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독립 후 인도네시아에서 계속해서 혼란이 지속되자, 수카르노는 이러한 혼란은 인도네시아의 실정에 맞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의회제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전권을 행사하는 ‘교도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수카르노에 따르면 교도 민주주의는 민족, 종교, 사회주의에서 따온 NASAKOM을 핵심으로 운영될 것이었다. 원내 주요 정당인 공산당의 입지가 약화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소련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에게 교도 민주주의를 적극 지지하고 수카르노 정부에 계속 참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카르노 하에서 소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든든한 진보적 동맹을 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실제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당원 수로 소련과 중국을 잇는 제3의 공산당이 된 상태였다. 여기서 소련의 자본과 기술을 통해서 인도네시아의 넘치는 잠재력을 개발하고, 충분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확보할 수 있다면 전망이 밝지 않으리라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수카르노와 마오쩌둥.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상황은 소련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먼저 수카르노가 소련이 원했던 경제적 현대화에 그다지 관심이 있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국내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카르노는 반제국주의적 수사와 급진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항상 돌파하려고 했다. 첫 번째 단계는 교도 민주주의였고, 두 번째 행동은 네덜란드가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서이리안자야(뉴기니)의 환수였다. 소련은 수카르노가 조용히 경제 건설에 매진하기를 바랐으나, 그래도 반제국주의 전선에 참여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네덜란드 압박에 함께 동참했다. 그러나 마침내 서이리안자야가 인도네시아에 반환되었을 때, 이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재난이었음이 금세 드러났다. 신생 국가 인도네시아에는 문화적으로 전혀 다르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거대한 서이리안자야를 안정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대규모 군대가 투입되면서 군비 지출이 폭등했고, 미국이 인도네시아와 불편한 관계에 들어서면서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수카르노는 난국을 타개하겠다고 말레이시아의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소련은 슬슬 수카르노가 자신들과 보조를 같이 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소련이 수카르노에 발을 뺄 수 없게 만든 다른 요인이 등장했으니 바로 중국이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래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모택동은 소련이 이미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수정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세계 혁명, 특히 피억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또 다른 패권국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국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던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타격이 될 수 있었고, 소련은 중국을 좌익 모험주의라고 맞받아치며 자신이 여전히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고 있음을 여러 방면으로 어필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수카르노를 버린다면 중국의 비판이 정확했음을 입증하는 꼴이 될 것이었다. 흐루쇼프를 이은 브레즈네프 정부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갈등도 지지하면서 수카르노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선출에 항의하며 유엔에서 철수를 선언하는 것까지 지지할 수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은 수카르노의 급진주의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으며, 유엔 철수를 적극 지지하며 수카르노에 밀착함과 동시에 인도네시아 공산당과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의 편에 서면서 소련 공산당을 비판했다. 수카르노도 ‘자카르타-프놈펜-하노이-북경-평양’을 아시아 사회주의의 축으로 선언하며 마오주의의 위험한 메시지를 풀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수카르노는 소련의 경제 지원을 받지 않아도 인도네시아는 인접한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서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공유했고, 중국처럼 핵무기까지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그 나름대로 초조함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수카르노와 완전히 밀착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의제가 수카르노의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여전히 사회경제 정책의 실행에는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1965년 9월 30일, 조급증에 걸린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수카르노 정부 하에서 압도적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혁명위원회를 선포하고 군을 공격했다. 효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미국과 CIA의 지원 하에 빠르게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반공주의자들을 자극하며 수카르노 정부가 완전히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수하르토가 주축이 된 우익 쿠데타군은 빠르게 반격을 실행하였고, 좌익 세력이라고 간주되는 이들 최소 50만 명을 살해하며 이후 30년 넘게 지속될 수하르토 체제를 설립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 도미노 이론에서 가장 큰 도미노 조각이 공산화될 것에 전전긍긍하던 미국은 수하르토 체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1965년의 수하르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중국과 소련은 수카르노의 연금과 인도네시아 좌익의 완전한 파괴에 충격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소련에게 있어서 인도네시아의 실패는 수카르노와 같은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이 덮어놓고 신뢰하기에 어렵다는 증거가 되었다. 한편으로 소련은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다른 국가의 사회주의 동지들에게 줄 수 있는, 마오주의를 따라가면 좌익 운동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분명한 경고로 활용했다. 소련은 수하르토 정권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며 중국을 비난했다. 반면 중국에게 있어서 이는 모택동의 웅대한 붉은 아시아 기획에 뼈아픈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65년 학살에서 인도네시아 화교가 좌익 앞잡이로서 학살의 주된 목표가 된 것은 중국 내에서 대중적인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이는 다음 해에 일어날 문화대혁명을 위한 연료가 되었다. 중국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한동안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소련과 대립을 계속할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어떠했는가? 최소 50만 명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이어지고 건설된 수하르토 체제는 국가를 안정화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일본의 국체론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국가 이데올로기인 판차실라는 수카르노의 좌익적 해석 대신에 수하르토의 우익적 해석으로 새롭게 제시되었다. 1949년 독립 이후에 16년 동안 혼란이 지속되던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지원 하에 이제야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로 거듭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만족스러운 발전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고, 수하르토 시기에 누적된 30년 간의 모순은 1998년 동남아시아를 타격한 연쇄적 금융위기로 폭발하여 새로운 혼란을 초래할 것이었다. 게다가 50만의 학살로 끝난 1965년의 기억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는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1965년, 그리고 1998년 이후의 인도네시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공부를 계속해서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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