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과 냉전의 도시 타브리즈

몽골제국과 냉전의 도시 타브리즈

중세와 근대의 역사 중심지

임명묵

신년이 얼마 전이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신년(1403년) 기념 조형물이 놓여 있다.

이란의 자랑인 정원 문화. 집 뜰에 이런 정원이 있는 곳이 많은데 여기는 카페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야외석 밖에 없어서 북부의 찬바람을 맞아야 했지만 다른 계절에는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도 한국인을 상징하는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저녁에는 타브리즈를 상징하는 음식인 쿠프테 타브리지를 먹었다. 타브리즈식 쿠프테라는 뜻인데 한국에는 터키식 이름인 '쾨프테'로 더 유명하다. 쾨프테는 말그대로 다진 고기로 만든 미트볼인데 실제 미트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음식. 터키쪽 쾨프테는 작은 떡갈비 여럿을 굽는 경우가 많은데, 타브리즈식 쿠프테는 공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커다란 고기 경단 하나를 국물과 함께 내놓는다. 숟가락으로 누르면 진흙처럼 쉽사리 으깨지는데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 매우 맛있다.

숙소 근처에 위치한 700년 된 유적인 타브리즈 아르그. 몽골 제국을 구성한 일 칸국 시기에 세워진 거대한 종교 단지로 내부에는 모스크와 정원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혼란기 끝에 거대한 정문만 남았고, 혁명 이후 이슬람 공화국 정부는 인근에 새로운 대 모스크를 짓고 있는 중이다.

이 무렵에는 밤마다 물담배 카페를 찾아가 물담배를 피며 책을 읽는 것이 루틴이 되었는데, 이날도 여느 때처럼 물담배집을 찾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 12시 가량에 책은 적당히 읽을만큼 읽었다고 생각해 숙소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길거리에서 흡사 WWE 레슬링 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수염이 잔뜩 난 덩치 큰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신기해하며 또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역시 한국인이며 아제르바이잔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어쩌구 저쩌구를 얘기했는데..

알고보니 그 역시 카페 주인. 자기 카페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게 어떻냐고. 네가 얘기하면 정말 좋을 사람도 마침 안에 있다고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얼떨결에 들어가니 멀끔한 양복을 입은 저 사진의 신사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며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너 터키어 아냐고 물어보고 "조금은 압니다(Az biliyorum)"라는 답을 듣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영어, 페르시아어, 터키어가 섞인 대화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분의 이름은 두만 에르뎀으로 나름 지역 잡지에 기고도 하는 향토 지식인이었다. 역사 지식의 수준도 상당했다. 석사논문의 주제를 러시아 혁명기 아제르바이잔 공산주의자 나리만 나리마노프로 잡았다고 하니 씨익 웃으면서 "그는 공산주의자였지. 하지만 '민족 공산주의자'야! 우리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자랑이지!" 라고 했다. 그와 함께 고대 돌궐부터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19세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넘나든 튀르크 지식인들에 이어 오늘날의 에르도안에 이르기까지 줄곧 대화를 나누었다. 중간에 타브리즈로 여행을 온,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이스탄불 출신의 터키인 아저씨까지 잠깐 껴서 삼국 대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의 세계관은 명백히 테헤란보다는 앙카라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독특했다. 아타튀르크는 위대한 국부지만 후대의 케말주의자들은 터키를 아나톨리아에 가두면서 소극적으로 구는 등 실책을 범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이 다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고 있다고 했다. 자신을 신실한 무슬림으로 밝힌 그는 현대 서구 자유주의의 한계가 명백해졌음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대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되어서 새벽 3시 반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연락처를 나누고 타브리즈에 있는 동안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

밤에는 조명 때문에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낮에 보면 정말 700년 된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세월의 아우라가 더 잘 느껴진다.

이것이 아르그 근처에 짓고 있다는 타브리즈 대모스크. 테헤란에서 나중에 보게 될 이맘 호메이니 대모스크와 비슷하게 디자인된 것 같다. 역사적인 모스크를 복원하기보다는 요새 스타일로 마구잡이로 지어서 비판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 다음으로 향한 행선지는 1934년에 완공된 구 아제르바이잔 도청 건물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과거에는 이 지역에 도래한 근대화를 알려주는 명백한 행정 중심지였다. 가운데에 우뚝 선 시계탑이 유명해서 그냥 '시계탑'이라고도 불린다. 어제 만난 두만 선생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현대사에서 몹시 중요한 건물이라고 강조하며 꼭 방문을 권했다. 안 그래도 방문할 것이었지만..

메인 홀에는 페르시아 문명을 상징하는 공예품인 거대한 카페트가 걸려 있다. 바닥에 깔린 것도 겁나게 크다..

건물 모형과 그 안에 전시된 호메이니/하메네이 카페트도 장관이다.

가운데에는 타브리즈 및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이슬람 공화국에서 강조하는 위인들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식이 부족하여 입헌 혁명의 지도자 사타르 칸 한 명 밖에 알 수 없구만...

건물 전경을 찍을 포인트를 잡기가 조금 어려웠으나 여차저차 찍은 도청 건물.

이 박물관 전시에는 전혀 써있지 않았지만 사실 이 건물은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의 정부청사이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친독 성향의 레자 샤를 영국과 함께 몰아내고 북부 이란을 점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련 아제르바이잔 공산주의자들이 이란의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건너가 친소 공산국가로 분리독립을 추구했다. 당연히 이란 정부는 물론이고 일반 이란 국민들 입장에서도 이전 카자르 시대에 영국과 러시아의 분할통치 악몽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란 공산당 전체가 분리주의를 추종하고 소련 괴뢰국을 세우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정부에 의해 대거 탄압되고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는 위기의 시기까지 겪게 된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사건은 나치 독일을 함께 물리친 동맹 소련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소 유화파였던 루스벨트의 죽음 이후 들어선 강경파 트루먼 정부는 소련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고, 스탈린이 계속해서 팽창을 추구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란 북부를 세력권으로 두려고 하는 소련의 시도는 냉전 구도의 초기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으니, 이 타브리즈의 아제르바이잔 도청은 냉전의 최전선인 한반도와도 간접적으로 연결된 공간이라고 하겠다.

타브리즈시 관광국 소속의 가이드들. 왼쪽 형님은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하셔서 건물 전체를 소개해주고 타브리즈의 역사까지도 줄줄이 말씀해주셨다. 오른쪽 친구는 BTS 및 한류 팬으로 한국인을 보아서 너무 반갑다고 조선의 상징 손가락 하트까지 해주었는데.... 이 친구 말고도 타브리즈 도청에서 관광 관련 진로를 꿈꾸는 젊은 여학생들이 많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왔다고 하니까 옹기종기 모여서 손가락 하트 하고 사진 찍어주느라 혼났다...

밖으로 나가며 바라보는 도청 시계탑.

1958년 팔레비 시기에 세워진 아제르바이잔 박물관이다. 주로 고고학 자료나 동전, 이슬람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데 크게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하지만 건물은 정말 멋있다.

1465년에 완공되어 5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타브리즈 블루 모스크 관람. 페르시아어로는 Masjed-e kabud. 역시 블루 모스크라는 뜻이다. 이 당시 타브리즈는 카라코윤루(흑양조)와 악코윤루(백양조)라는 일칸국 후계 국가들의 영역이었다.

훗날 타브리즈는 사파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한테 함락되기도 했었다. 블루 모스크는 그 때 오스만군에 의하여 약탈을 당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 지역이 으레 그렇듯이 건물을 가장 위협한 것은 지진이었다. 1780년 지진의 손상을 복구하지 못하고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팔레비 시기에 들어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블루 모스크의 내부

아마도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웅들을 표현한 조각인 것 같다. 타브리즈도 이라크 국경과 가까웠고 사담 후세인의 미사일 공격도 여럿 받았다.

타브리즈 도시 북쪽에 위치한 사타르 칸 가옥에 방문했다. 사실 카자르 시대(19세기)의 옛 집은 이미 없고 건물 자체는 팔레비 시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자리만큼은 그대로여서 지금은 입헌혁명의 전사 사타르 칸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국왕군에 맞서 농성을 펼칠 때 이런 대포를 사용했으니까 전시했겠지.. 당시 타브리즈는 입헌혁명을 뒤엎으려는 국왕에 맞서 반란을 선포하고 굶주림을 견뎌가며 11개월 간 포위를 견뎌냈다(1908-1909년). 타브리즈가 버티며 전력이 약화된 동안 인근 길란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남부에는 바흐티야리 부족이 북상하며 국왕을 위협했다. 결국에는 혁명을 좌시할 수 없었던 러시아군이 1911년에 북쪽에서 개입하며 타브리즈를 함락시켰고, 많은 농성 가담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사타르 칸은 이 무렵 테헤란에 진출해서 정치적 활동을 벌였기에 살아남았으나 기반을 잃어 경쟁자들에 밀려났고 1914년에 사망했다.

서체가 어려워서 읽지를 못하겠어요... ㅜㅜ

타브리즈에도 어디에도 사람들은 애플을 찾는구나....

저녁에는 다시 두만 에르뎀 선생을 만나러 갔다. 타브리즈에 위치한 한 카페인데, 지역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모이는 문화 살롱 같은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두만 선생과 압뒬하미드 2세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너 알렉산드르 두긴이라고 알아?"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는 나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ㅋㅋ

카페에서 헤어진 뒤에는 숙소 인근에 다른 물담배집을 찾았다. 하나 피는 데 2천원도 안 되는 놀랍도록 저렴한 집이었다. 솔레이마니 장군과 호메이니 하메네이 사진이 있는.... 여자들은 감히 출입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맛은 매우 좋았다.

타브리즈도 일정도 점점 마지막 날을 향해.... 다리를 건너 미술관으로 향한다.

현대 타브리즈를 대표하는 예술가, 조각가 아하드 호세이니의 갤러리가 이곳에 있다. 원래 앞서 올린 아제르바이잔에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개인 전시관이 생겨서 작품들을 모두 여기로 옮겼다고.

1944년 생인 아하드 호세이니는 타브리즈를 고향으로 하는 이란 아제르바이잔인으로,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이스탄불, 파리 등지에서 활동한 국제적인 예술가였다. 90년대부터 완전히 이란으로 돌아와서 타브리즈의 예술 발전과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분이라고 한다.

Zendegi(삶)이라는 작품이다.

다음편에서 다른 전시물들을 더 소개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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