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고리에서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다

임명묵

트빌리시 역으로 돌아와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에 있는 쇼타 루스타벨리 역으로 향했다. 트빌리시 지하철은 1966년에 개통되었는데, 소련 지하철이 으레 그렇듯 정말 엄청나게 깊다. 다만 다른 소련 도시 지하철과 달리 관리가 잘 안 되는 듯 하여 찌린내가 진동을 해 그렇게 쾌적하지는 않았다.

이 동상은 그루지야의 민족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동상. 12세기 말에 태어난 중세 시인인데,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라는 작품으로 매우 유명하다. 스탈린이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동상은 194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트빌리시는 전형적으로 러시아-유럽식 화려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아르메니아보다는 좀 더 평범한 느낌이다. 그래도 도시가 매우 아름답다.

여기도 지하철 역 출구 가까운 곳으로 기억하는데, 일화가 하나 있었다. 일행과 내가 깊디 깊은 트빌리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데, 저 밑에서 어떤 여자애 하나가 번개 같은 속도로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더니 우리 사이를 비집고 먼저 나갔다. 처음에는 "뭐 저런 경우 없는 애가 다 있지?" 싶어 기분이 나빴는데,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역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Are you Korean?" 어... 뭐지?

맞다고 하니, 아 자기는 방탄소년단 팬이고, 한국 사람과 꼭 대화를 해보고 싶었단다. 그래서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랑 같이 사진을 찍자길래 찍어주고 서로 갈 길을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연락처 교환해서 같이 놀았어야... ㅋㅋ

1850년대에 설립된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 건물 자체는 1896년에 개축된 것이다. 트빌리시는 러시아 제국의 코카서스 총독부가 위치한 곳이었고, 그루지야 귀족들이 다른 코카서스 민족보다 훨씬 러시아 주류 귀족층에 더 포용적으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 19세기에 들어서 고급 문화의 발전이 남달랐다. 특히 이곳에서는 그루지야어로 제작된 연극과 오페라가 공연되었는데, 공연 문화가 초기 민족 문화 형성에서 행사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꽤나 중요한 장소라고 하겠다. 한편 트빌리시에는 러시아 제국에 협력한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19세기 트빌리시 문화의 발전을 지켜보며 각자의 민족 문화 창달을 실험하게 된다.

이 건물은 1953년에 완공된 그루지야 SSR 정부 청사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그루지야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이때는 여행 스킬(?)이 조금 부족해서 몰랐는데, 여기 앞에 1989년 4월 9일 반소 시위를 기념하는 기념비도 있었다고 한다. 1991년 소련 해체 무렵에 트빌리시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있었는데 당연히 이 건물도 그때 타격을 꽤 많이 받았다고.

다시 한 번 이때는 코카서스 지역의 역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은 상태라서 뭐가 뭔지 전혀 몰랐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이 건물 옆에 보론초프 궁전이 있는데, 러시아 제국의 코카서스 총독 보론초프의 관저였던 듯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거기서 독립을 선언하고 단명한 자캅카스 연방을 건국했다는데.. 못 봐서 아쉽다.

보론초프 궁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루스타벨리 거리에는 오페라 극장부터 국립미술전시관,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국립박물관도 있다. 그루지야 역사를 잘 모르니 우리는 현대사 공부하는 사람들 답게 신속하게 소비에트 시기로 향했다...

역시 소비에트 시대의 백미는 숙청과 투옥, 강제수용소.

"우리 프로그램의 현실,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당신과 나, 일하려는 우리의 의지,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려는 준비, 계획을 이행하려는 우리의 결의입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드넓은 소련의 굴라그 지도.

그루지야 출신의 공산주의자로서, 그루지야인 스탈린과 아르메니아인 미코얀과 함께 소위 "코카서스 삼인방"을 구성했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에 관한 기사다. 오르조니키제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었고, 혁명기에 코카서스국(Kavburo)을 담당했으며, 스탈린 시기에는 중공업인민위원을 역임하며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지휘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수상쩍게 자살했다.

"그루지야에서 점령은 계속된다.."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이후에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는 압하지야 공화국과 남오세티야 공화국. 물론 이 두 민족의 서사는 다르다.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폭발한 그루지야 민족주의가 자신들을 억압하려 들기에 러시아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해체될 때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이곳은 바로 트빌리시의 가장 중요한 광장인 자유 광장.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제국의 남방 경략을 지휘한 이반 파스케비치 장군의 이름을 딴 파스케비치 광장, 혹은 예레반 광장이었다(파스케비치가 예레반을 정복함). 훗날 소련 시기에 레닌 광장이었다가 지금은 자유 광장이 되었다. 1907년,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라는 공산주의자가 제국 중앙은행이 운송하는 돈을 여기에서 급습하여 털어가고 혁명 자금으로 전용했다. 그 은행 강도는 스탈린이 된다...

도시 중심부의 핵심 광장이다보니 그루지야의 주요 정치적 사건들도 이곳에서 많이 일어났다. 1991년 그루지야의 독립 운동은 물론이고 2004년 장미 혁명 때도 중심적인 무대가 되었다. 광장 가운데의 황금 상은 그 유명한 "용을 죽이는 게오르기"를 묘사했다고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시의 문장도 이것일 만큼 정교회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이다.

구소련 시기의 레닌 광장 시절.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어딘지 알 수 없는 작은 교회당... 그루지야 정교회 양식의 건축이 아름다웠다.

그루지야는 와인의 산지로 유명해서 그루지야에 있는 동안에는 맛은 몰라도 최대한 와인을 많이 먹기로 했다. 우연히 국내에 번역 출간된 <몰로토프 회고록>에서 스탈린과 측근들이 크렘린에서 어떤 술을 먹었는지를 접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 각종 그루지야 와인 이름들이 소개가 되어서 참고를 했다. 킨즈마라울리, 흐반츠카라, 치난달리, 오잘레쉬... 하지만 스탈린은 와인보다도 아르메니아 코냑과 러시아 보드카 같은 독주류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어쨌든 와인의 나라이니 와인을. 안주는 인근 마트에서 사온 각종 간편식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아침으로 먹을 음식은 그루지야식 파이인 하차푸리. 약간 두툼한 피자 느낌인데 안에 치즈가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따뜻할 때 먹으면 진짜 너무 맛있다. 그런데 사실 많이 먹기에는 조금 무겁고 부담되긴 하는 음식.

이것은 하르초와 함께 그루지야에서 가장 은혜로운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오자쿠리(오자후리)". 고기와 감자를 살짝 튀기듯이 볶아서 내오는 음식 같은데 특히 짭쪼름한 양념과의 궁합이 진짜 아시아의 근본 음식들이 생각날 정도로 정말 맛있다. 아 또 먹고 싶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이곳은 스탈린의 지하 출판 기지.

스탈린은 트빌리시에서 혁명 활동을 할 때 이 집을 거점으로 쓰면서, 지하에 불온문건 출판을 위한 비밀 인쇄소를 두었다. 저 내부에 가면 스탈린이 눕던 침대를 비롯한 스탈린 방이 나온다.

박물관에서 설명을 해주시는 이 할아버지가 이지도르. 우리를 보더니 중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니, "한국! 반인민적이고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정부가 있는 곳 아닌가!"라는 정말 소련 시대에서도 안 할 법한 말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컨셉 과몰입인 거 같긴 한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소련 시대에 KGB에서 근무했고, 아제르바이잔에서 활동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랑 같이 일도 했다고 한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아제르바이잔 KGB 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절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지도자, 나아가서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은퇴 이후에 소일 거리로 여기서 스탈린의 흔적을 지키신다는 듯..

아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저 스왜그.. 자기보고 "소소"라고 했는데, 이시도르라는 이름의 애칭이다. 얄궂게도 스탈린의 이름 "이오시프"의 애칭도 "소소"다. 그래서 "당신은 두 번째 소소 아닙니까?"라고 하니, 웃으면서, "맞다. 첫 번째 소소는 그분이다."라고...

이곳이 바로 스탈린이 누워서 잠을 청했던 침대.

이 다음으로는 도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므타츠민다 판테온이다. 1929년에 만들어진 므타츠민다 판테온은 그루지야에 살았던 명사들의 묘역으로 조성된 곳이다. 1829년에 사망한, 러시아 제국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사망 100주기를 맞아 이장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보예도프는 러시아 제국이 카자르 이란을 상대로 승전하면서 남부 코카서스를 할양 받은 뒤에 파견된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테헤란에서 근무하면서 하렘의 여성들을 탈출시킨 사건이 발각되어 테헤란의 군중들이 운집했다. 패전한 이란에서 반러 감정은 이미 드높아진 상태였고, 그리보예도프는 결국 사망했다.

이때는 그리보예도프 사건을 알지 못했는데, 판테온 초입에 '테헤란에서 사망'했다고 쓰인 사람의 묘가 중요하게 놓여 있어서 신기하게 보았던 기억이다. 알았으면 사진을 남겼을텐데.

판테온 건물.

TV타워가 뒤에 보이는 가운데 소련식 묘비들이 여럿 놓여 있다. 그루지야의 유명 작가, 예술가, 정치인, 학자 등등일 것이다.

사실 이거 보러 왔다... 고리 박물관에서 열심히 소개했던 스탈린의 어머니, 케케 주가시빌리의 묘다. 그루지야에서 평생을 살다 죽고 그루지야의 가장 유명한 위인들과 나란히 묻히게 되었는데,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판테온에서 내려와서

무려 정체 불명의 '유럽 광장'에 도착.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간다. 트빌리시 구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관광 필수 코스라고 한다..

열심히 타고 강까지 건너서..

아름다운 코카서스의 명소 트빌리시로 어서 오세요~

저쪽이 500여년 되었다는 나리칼라 요새인 듯 했다.

저기 위에 사람들 올라가 있는 게 보이던데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걸까, 안 무섭나? 등등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저기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던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

나리칼라 요새에서 다시 유럽 광장 쪽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돌아오면 트빌리시의 중앙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리케 공원으로 내려다준다. 이곳은 1958년에 세워진 20m의 알루미늄 상 '어머니 그루지야'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루지야 와인과 검을 한 손에 각각 들고 있는데, 와인은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검은 적을 맞이하기 위해 들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 아르메니아 상에 비하면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또 그 나름의 풍취가 있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제 다음의 탐방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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