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수도 테헤란 (1): 골레스탄 궁전과 미국 대사관

혁명의 수도 테헤란 (1): 골레스탄 궁전과 미국 대사관

화려한 궁전, 혼잡한 도시, 미국 대사관

임명묵

3월 6일, 아제르바이잔에서 3주 가량의 체류를 마무리하고 이제 이란으로 넘어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

당초 계획은 이란으로 향했던 아제르바이잔 혁명가들과 스탈린이 보낸 붉은 군대의 길을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국경을 넘어 입국하려는 것이었다.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본 바로, 아제르바이잔 이란 육로 국경은 거의 대부분 열려 있는 편이고 가끔 지정학적 상황에 따라 닫힐 수도 있다고. 아, 그러면 국경 가는 버스표나 천천히 준비해야겠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쿠의 한 시장에서 야채 가게 아저씨와 여행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그 아저씨께서 말씀하시길...

"지금 이란 가는 국경 닫혔을텐데? 한 번 확인해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아니 출국이 지금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카페에 앉아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항공권 사이트를 통해 바쿠에서 테헤란 가는 표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비행기도 없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렇게 가까운 나라끼리 직항도 끊겼다고? 대강 찾아보니 아르메니아 문제로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이 관계가 험악해질 때가 있는데 그 무렵 끊긴 것 같다. 결국에 피눈물을 흘리며 거금을 주고 경유 편을 구매했다. 바쿠 - 도하(카타르) - 테헤란...

바쿠의 마지막 날에 또 환장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아제르바이잔 여행기 때 풀어보도록 하자.

어쨌든 바쿠에서 도하로의 비행과 도하에서 몇 시간에 걸친 경유 대기, 기껏 남쪽으로 날아와서 다시 북쪽으로 가는 테헤란행 비행을 끝마치고 이란에 입국했다. 이때 워낙 정신 없이 들어와서 공항에서 사진은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입국 심사는 정말 간단했는데, 바쿠의 이란 영사관에서 발급 받은 이란 비자를 검은 차도르를 뒤집어쓴 무서운 아주머니에게 제출하니 슥 보고 그냥 통과하라고 해주셨다.

일단 100유로를 공식 환전소에서 먼저 바꾸고 택시를 탔는데 역시 공항 환율과 공항 택시는 전부 바가지임을 훗날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어쨌든 밤 시간에 테헤란 도시 중앙부에 자리한 '마슈하드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존영을 보며 내가 드디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왔음을 실감했다.

예약도 참 어렵게 어렵게 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제재로 이란은 국제 결제망에서 배제되어 있는 상태고, 당연히 부킹닷컴이나 에어비엔비 같은 오늘날 여행자들에게 당연한 서비스도 이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몇몇 인가를 받은 이란 여행사들이 해외 여행객들을 위한 다양한 대행 서비스를 해주는데, 나도 여기를 통해 예약을 해야 했다. 담당 직원과 왓츠앱 메신저로 연결해서, 테헤란에 며칠부터 며칠까지 있을 거고 예산은 얼마쯤 생각하는데 호텔 예약해달라고 하면 거기에 송금을 해서 예약 확인증을 다운 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슬슬 이란의 극악한 인터넷 환경이 무엇인지를 실감했다. 호텔 프론트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왓츠앱으로 예약 내역 확인하시는 걸 보고, 생각보다 왓츠앱 정도는 쓸 수 있을지도? 했는데 어림도 없다.. 무엇보다 호텔 와이파이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극악한 연결 상태를 자랑해서 도저히 인터넷으로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Express VPN 같은 vpn 서비스조차도 정부가 빡세게 막아놔서, 연결 기다리는 데만 한세월이기 일쑤였고 연결 되어도 얼마 안 가 끊어질 때는 혁명이고 나발이고 진짜 이 인터넷 통제에 분노가 터져나올 지경.

차라리 로밍을 좀 하고 올 걸 하고 나중에 후회를 좀 했다.

그래도 조식은 든든히 먹어야 하니까 다음 날 아침에 호텔 식당으로 올라갔다. 메뉴는 가히 형편 없는 수준이었지만(단백질 메뉴가 두 개인데 하나는 삶은 계란이고 다른 하나는 계란 후라이인 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눈 덮인 알보르즈 산맥이 보이는 풍광은 처음 보자마자 감탄했다. 당시 3월 초였는데 이때만 해도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테헤란 여행은 봄과 가을이 좋다. 여름은 중동답게 다니기 힘들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세계 최악의 대기질을 자랑하는 도시라서 공기가 너무 안 좋다고 한다. 이 때 테헤란의 맑은 하늘을 보고 온 게 행운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파트 벽 면에 저렇게 누군가를 기념하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러시아에서도 자주 보았던 것인데 이란에서도 보게 되어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VPN 써야 하는 것과 마스터카드 못 쓰는 것도 참으로 러시아와 같았다... 하여간 밖에 나와 이란 통신사인 Irancell에 가서 심카드를 개통. 가격은 거의 공짜 수준으로 쌌다.

이후 테헤란을 찾은 관광객들이 대부분 처음으로 방문하는 곳인 골레스탄 궁전을 향해 갔다. 1호선 판즈데 코르다드 역으로 가면 되는데... 테헤란 지하철은 정말 가히 지옥이라고 할만 하고, 이 구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혼잡도를 자랑한다. 여기 근처에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데..

거의 이런 상황이다. 3월 20일에 있을 신년 명절 노루즈를 2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들 무언가 사려고 시장을 찾고 있었다. 거의 뭐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붐비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골레스탄 궁전은 한산하다. 내국인 입장료는 싼 편인데, 외국인 입장료는 가히 2만원 넘는 돈을 받아내는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하다. 골레스탄 궁전은 18세기 후반에 잔드 왕조가 본격적인 궁전으로 쓰다가, 1800년대 이란을 다스린 카자르 왕조의 궁전이 되었다. 왕실 전제정과 전통 덕목에 집착하면서도 서구 근대를 처음으로 마주한 카자르 왕조 특유의 미학과 스타일이 녹아 있는 무척이나 화려한 장소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수평이 안 맞는 게 사진이 무척 거슬린다..

카자르 왕조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앉아 있었던 나세르 앗딘 샤를 재현한 마네킹이다.

사실 내부가 너무나도 화려한데, 어딜가나 다 이렇게 삐까뻔쩍하게 화려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막 와닿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찾아줄만 하다. 테헤란 시민들이 사랑하는 장소임은 분명하다(인스타 핫플 같아서 여자들이 좀 많긴 했다만..).

카자르 왕조의 각료 회의가 열리던 건물인 샴스 올 에마레(Shams ol Emareh) 건물. 저 중앙의 시계탑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나세르 앗딘 샤에게 선물해준 것이었다. 이란의 모든 경제적 이권을 러시아와 함께 뜯어갔지만 그래도 시계는 주었다..

골레스탄 궁전에는 카자르 왕조의 역사와 19세기 이란 근대사에 관련된 전시들도 매우 많다. 이걸 다 소개하는 건 무리인데, 그래도 중간에 발견한 이 거대한 아미르 카비르 그림은 인상적이었다. 아미르 카비르는 나세르 앗딘 샤 치세 초기에 등용된 재상으로서, 이란 최초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 정치인이다. 하지만 나세르 앗딘 샤에 의해 처형되었다.

골레스탄에서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매우 의미심장한 벽화들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란은 뭐 아무 벽에도 이런 걸 그려넣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잡은 숙소가 공교롭게도 구 미국 대사관 건물 맞은 편에 있었던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444일 간의 인질극이 펼쳐진 바로 그 대사관이다.

숙소 근처에서 발견한 카페. 식사도 하고 커피나 차도 마시는 그런 카페다. 원래 팔레비 시대의 여학교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나름 인스타 핫플이라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어이스 엄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

호텔 가는 길의 무시무시한 대사관 건물에는 팔레스타인 깃발과 헤즈볼라 깃발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먹으러 숙소 밖으로 나왔다. 서예라든가 목공예라든가 다양한 공예품을 가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이란에서 이런 가게들 진짜 정말로 엄청나게 많다. 자부심도 대단해서, 대학교 페르시아어 수업 교재에도 공예품에만 한 과가 할애가 되어 있을 정도다.

이란은 쌀 문화권이기도, 빵 문화권이기도 하다. 이 사진의 음식은 첼로 케밥첼로 캬법) 쿠비데로 이란의 국민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쿠비데 케밥은 고기를 갈고 거기에 양념과 향신료를 넣어서 구운 요리고, 그걸 밥이랑 같이 먹으면 첼로 케밥이다. 뜨거운 밥에 버터를 넣고 비비고, 구운 토마토로 느끼한 맛을 잡고 감칠맛도 준다. 여기에 취향에 따라 소금, 후추, 소막(향신료)을 넣으면...

이란에서 나중에는 물릴 때까지 먹은 음식인데, 막상 지금 보니 정말로 다시 먹고 싶다.

3월 8일. 테헤란 이틀차. 내친 김에 숙소 맞은 편의 미국 대사관도 방문하기로 했다. 입장료는 만원에서 만오천원 사이 정도로 냈던 것 같다. 성조기가 내려가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ㅎㅎ

현재는 당연히 미국 대사관이 아니라 "미국 간첩 활동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란과 미국은 국교가 없기 때문에 이란인들이 미국 대사관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두바이 등 인접국 대사관을 찾아야만 한다고.

Down with USA 위에 쓰인 페르시아어는 Marg Bar Amrika이다. 뭔 뜻인고 하니 "미국에 죽음을!"이다. 근데 Death to America는 너무 공격적이라서 다소 완곡어법인 Down with USA로 많이 옮기는 모양이다.

자매품으로 마르그 바르 에스러일(이스라엘에 죽음을), 마르그 바르 엥겔리스(영국에 죽음을)도 있다.

아니 스티븐 코헨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코헨은 미국의 좌파 계열 러시아사학자로, 러시아 혁명은 긍정하되 스탈린 체제는 비판한 학자였다. 지금은 완전히 논파된, '온건하고 합리적인 부하린 노선'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했다. 좌파 계열 학자여서 미국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글도 많이 썼는데 아마 거기서 갖고 온 것 같다.

정말 이 호전적인 미학에는 언제나 경외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르그 바르 엄리커 써놓은 서체를 보라... ㅋㅋ

이란 혁명의 발발과 미국 대사관을 향한 압박이 시작되자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대사관의 기밀 문서들을 파쇄하기 시작했다. 모사데크 쿠데타에 관여한 것부터 그렇고 여러모로 미국 대사관이나 정보 기관들이 뒤에서 여러 활동을 벌인 것은 당연했으니.. 그런데 대사관을 점거한 뒤에 군중들이 저 파쇄된 종이들을 하나하나 다시 맞춰가며 여러 문서들을 복원해냈다. 이란 대사관 인질극 사태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 <아르고>에도 잠깐 나오는 장면.

한 방에는 세계 각지의 반제국주의 투사들을 기리기도 했다. 모택동, 수카르노, 간디.. 아니 근데 사카모토 료마는 대체 왜?

이쪽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다. 볼리바르, 카스트로, 체게바라, 차베스.. 말콤 X도 있다.

여기서 기리는 것은 이슬람 세계의 반제국주의 전사들. 윗줄 좌측은 레바논 시아파 무장조직의 이마드 무그디예(2008년 시리아에서 아마도 모사드에 의하여 암살). 그 오른쪽은 그 유명한 쿠드스군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 그 오른쪽은 이라크 출신으로 혁명 전쟁에 참여했지만 훗날 솔레이마니와 함께 피습당한 이라크 출신의 아부 마흐디 알 무한디스. 가장 오른쪽은 '후티 운동'의 아버지인 예멘의 후세인 알 후티.

그 밑줄도 포함하여 정말 근본 넘치는 라인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관람객은 나 하나였는데 전시실을 다 보니 직원이 영어로 시청각실이 남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더니,

"너 영화 아르고 봤어?"

"아, 당연히 봤지."

라고 하니..

"우리는 다른 얘기를 보여줄게."

대체로 인질극 사태 당시 미국 뉴스 자료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풀려난 인질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점거 군중으로부터 받은 위협은 없고 그들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었고... 등등 통상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보여주긴 했다. 그런데 그냥 뉴스 자료만 계속 보여줘서 편집이나 컨텐츠 구성이나 좀 아쉽긴 했다.

1979년 혁명이 들끓던 대사관을 나와서 다시 2024년의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대사관 안은 적막했지만 대사관 바깥에서는 혁명과 상관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도 혁명과 아예 상관 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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