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다시 혁명을 만나다
테헤란에서 만난 혁명적 친구들, 그리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안잘리를 거쳐 라슈트로 돌아와서 테헤란으로 가는 장거리 합승 택시를 잡아탔다. 도착한 건 거의 새벽 1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숙소에 들어가서 체크인을 하고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이제 여행 일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노루즈가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지라 알보르즈 산맥에 쌓인 눈도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노루즈 직후이기도 하고, 이날이 또 무슨 휴일이어서 테헤란 시민들은 전부 교외로 놀러 나갔던지라 도시 전체가 한산했다. 교통량도 거의 없어서 테헤란하면 자동 연상되는 악명높은 대기오염도 없이 하늘이 깨끗했다.
스타벅스는 없지만 스타벅스 컵은 주는 나라, 이란 이슬람 공화국. 라마단 기간에도 여는 카페를 찾느라 정말 고생했는데 숙소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호베이제 호텔이라는 곳에서 주간 영업도 하고 있어서 여기를 많이 찾았다. 아마 외국인들이 많이 묵는 곳이라 열어줬던 듯. 호텔 직원이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한국인? 다우드 킴도 여기서 묵었어!'라고..... 다우드 킴은 엄청난 팔로워를 자랑하는 한국인 무슬림 인플루언서인데 외모가 나름 곱상해서 이슬람 세계에 K-무슬림 아이돌 느낌으로 팬질하는 여자 팬들이 매우 많다. 인성 논란이 있는데 이란에 와서는 무려 방송국 출연까지 했다고...
체류 기간이 한달을 넘을 느낌이라서 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발급 받았던 비자는 30일 비자였는데, 일주일 정도 더 머무를 계획이었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테헤란의 출입국사무소에서 증명사진과 여권, 비자를 들고 가야한다. 가니까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가득했다. 소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탈레반 통치,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치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으로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들은 페르시아어와 매우 유사한 다리어를 써서 이란 사회에 비교적 잘 통합된 편이다. 하지만 이들을 전부 받아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안 그래도 불안정한 이란 경제에 압박이 될 난민이 더 들어올 것이 뻔해서 이란 정부는 귀화를 거의 인정하지 않고 한시적인 거주 허가만 제공한다. 매일매일 거주 허가를 연장하기 위해 줄을 서는 아프가니스탄 인들로 출입국 사무소는 늘 인산인해다.
페르시아어를 내가 능숙하게 못하기도 하고, 휴대전화 반입 금지라 번역기를 쓸 수도 없는 상황. 게다가 비자 연장 수수료를 현금으로는 안 받고 무조건 카드로만 내라고 하는데 이란 카드도 없는 나는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하면서 발만 동동 굴렀었다. 그때 영어를 능숙하게 쓰시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누님이 오셔서 카드 결제도 대신 해주시고(비용은 이분께 현금으로 드림), 비자 연장 창구를 6개인가 거쳤어야 했는데 그 순서도 다 알려주셔서 정말 구원을 받았었다. 연락처를 교환했는데, 안타깝게도 일정이 안 맞아서 이란을 떠날 때까지 다시 가지는 못했다. 자기 딸을 정말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못 보여주고 가게 되어서 너무 아쉽다고, 이란에 올 때 반드시 다시 연락하라고 따스한 말씀을 건내주셨다.
숙소는 이전 미국 대사관(현 미국 간첩 활동 박물관) 바로 근처인데, 역시 위치가 위치다보니 이런 웅장한 슬로건도...
어느 날은 이란의 대학로라고 할 수 있는 혁명거리를 찾았다. 여기는 레자 샤가 세운 유서 깊은 대학교이자 이란 최고의 대학교인 테헤란 대학교가 위치한 곳인데, 혁명 이후에 혁명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혁명 거리의 광장은 이렇게 팔레스타인과 이슬람 혁명의 구호가 가득하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면 고학력의 중산층 젊은이들이 많은 곳이다보니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자유주의적 공간이 즐비하다.
테헤란 대학교의 정문.
조선의 BTS, 미제의 프렌즈, 일본의 너의 이름은이 나란히 있는 그야말로 한미일 문화 삼각 편대의 현장... 너의 이름은 밑에는 페르시아어로 "망가, 페르시아어와 영어"라고 쓰여 있다. 혁명 거리는 이란 제일의 서점 거리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한국 소설이나 일본 만화를 파는 서점들이 많다.
혁명 거리는 테헤란 지하철 이슬람 혁명 역(엔겔러베 에슬럼)과 시립 극장 역(테아트레 샤흐르) 사이에 있다. 거리를 다라 시립 극장 역까지 갔는데, 이곳은 더네쉬만 공원, 대학생 공원이라는 곳이다. 테헤란의 LGBT 커뮤니티가 모이는 장소로 유명한데 정권이 이런 공간을 몇 군데는 제한적이나마 묵인하는 모양.
테아트레 샤흐레 역으로 내려가면 이런 불신자들의 피규어를 파는 매대도 놓여 있다.
혁명 거리의 만화책방에서 발견한 대조선의 <나혼자만 레벨업>...
진격의 거인이나 주술회전 같은 요새 인기작품은 물론이고, 20세기 소년이나 아키라와 같은 고전들도 판매하는, 사장님의 안목과 품격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어 정식 출간은 되지 못하고 대부분 영어판을 수입해서 파는 듯.
노루즈 연휴도 끝났지만, 이제 슬슬 나를 괴롭혔던 라마단도 끝나간다. 라마단이 끝나는 기간 역시 이슬람권에서 매우 중요한 축제 기간이기 때문에 거리마다 이렇게 축제 행사가 굉장히 많았다. 이란을 구성하는 각 민족, 아제르바이잔, 루르, 쿠르드, 발루치 등의 민속 의상 탈을 쓴 사람들이 각 민족의 전통춤을 선보이는 아주 제국적인 곳이었다.
테헤란의 주요 중심가 중의 하나인 발리 아스르 광장에서 내려가면 나오는 팔레스타인 광장. 이 무렵이 바로 지금의 이란-이스라엘 갈등을 시작하게 한 이스라엘의 이란 영사관 공격 직후였다. 혁명수비대 쿠드스군의 모하마드 레자 자헤디가 이때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그를 순교자로 기리는 사진과 그림이 건물 곳곳에 걸려 있었다. 팔레스타인 광장답게 조명도 전부 팔레스타인 국기 색깔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리고 사진에서도 나오지만 이스라엘 보란 듯이 히브리어로 무언가를 적어놓아서 매우 신기했다. 번역기 돌려보니 쓴맛을 볼 줄 알아라, 뭐 이런 메시지였던 것으로 기억.
당연히 종교적으로 상징적인 광장이다보니 신축 모스크도 하나 있었고, 라마단 기간 막바지답게 공짜 음식을 나누어주는 이프타르 부스도 있었다. 얻어먹지는 않았다...
호베이제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카페 두바이'. 물담배와 차를 중심으로 요깃거리도 파는 전형적인 이란의 물담배 가게다. 테헤란 시내를 더 돌아다닐 기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에서, 낮에는 호베이제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밤에는 카페 두바이에서 물담배를 피면서 책을 읽는 호사스러운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맞은 편 테이블의 젊은 남성 두 명이 무언가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중국, 러시아 등이 언급되며 군대, 미사일 같은 용어가 나오길래, 아 이 사람들 지금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정치 얘기를 하고 있구나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으려고 힐끗힐끗 쳐다 보았는데, 그러다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Hi" 하길래,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영어를 꽤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금세 합석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대학원생이고, 역사를 공부하고 있고, 이란에 여행을 왔다 등등.
두 친구도 각자 소개를 했다. 한 친구는 모스타파라는 친구인데, 테헤란 대학교를 졸업하여 현재는 미디어학으로 석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부업으로는 수제 보석 가공을 이란 전통 방식에 따라서 한다고. 다른 친구는 직장인인 레자였는데, 취미로 이란의 전통 음악을 부르고 전문적인 공연도 다닐 정도라고 했다. 자기소개가 끝난 뒤에 이란 혁명에 관심이 많다고 하니까 정말로 좋아했다. 그때 이 친구들이 굉장히 체제에 충성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란에 와서 많은 사람과 대화해도 내가 관심이 많았던 혁명의 역사나 최근의 정치적 동향에 대해서는 얘기할 기회가 많이 없었고, 대부분은 반정부 논리를 펼쳤기 때문에 이런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건 몹시 귀하게 여겨졌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레바논 운동의 선구자 참란과 무사 알 사드르, 카셈 솔레이마니, 나아가 바이든과 트럼프, 중국과 브릭스의 부상에 관하여 무수한 얘기를 나누었고, 그들 역시 나의 지식을 높이 사며 관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주제가 우크라이나로 넘어갔을 때, 이들 역시 알렉산드르 두긴이 테헤란에 왔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언급하며, 현대성이 만들어낸 정신적 위기에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과 이슬람의 가치에 대해서 매우 지적으로 수준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적어도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프로파간다보다는 뛰어나게 양측의 주장을 진지하게 평가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렇게 카페 두바이에 개근 도장을 찍으며 며칠 간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날 모스타파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곧 있으면 라마단이 끝나는 축제일인 이드 알 피트르다. 그 날에 무슬림들이 모여서 라마단 단식이 끝났음을 축하하고, 모여서 함께 예배를 본 뒤에 식사를 한다고 하며, 같이 하메네이를 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어? 하메네이를 본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제안에 황당해서 되물었다.
모스타파의 답변은, 이맘 호메이니 대모스크에서 공개 예배를 하는데, 새벽 일찍 가서 운이 좋으면 하메네이가 주재하는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이런 엄청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무조건 데려가달라고 오히려 부탁을 했다. 그렇게 새벽에 모스타파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서 이맘 호메이니 대모스크로 출발.
여기까지 가는 데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개혁주의, 자유주의 성향의 이란인과는 전혀 다른 이란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모들이 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고 라마단이 끝났음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나누며 모스크로 향했다. 테러 위협을 방지하고자 전자전 재밍 장치에 총을 든 경비병력까지 배치된 삼엄한 경계가 있었고, 모스크의 안뜰로 들어가고자 할 때는 어린 병사들이 몸으로 제지하고 있는 몸수색 안전 검사 줄에서 한참을 줄을 서야 했다. 위에서 허가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더 들여보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무언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모스타파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우리는 라흐바르(최고지도자)를 만나기 위해 모인 군대다!"라고... 그러다가 또 "마르그 바르 엄리커" "마르그 바르 에스러일" "마르그 바르 엥겔리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영국의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돌림노래처럼 불렀다. 나도 운 좋게 모스타파와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2층에서도 맨 뒷좌석이었지만, 저 멀리서 최고지도자가 서게 될 연단이 눈에 보였다.
모스타파와 함께..
모스크는 남녀 분리가 원칙인데, 1층의 좌측에는 예배를 보러 나온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구름처럼 모인 인파가 이맘의 인도 하에서 코란 구절을 낭송하고, 메카 방향으로 절을 올리는 모습은 정말로 엄청난 장관이었다.
드디어 나타나신 아야톨라 하메네이.... 정말로 먼 발치에서 본 것이었지만 그가 등장하면서 모두가 집중하게 되는 그 공기의 전환이 대단했다. 하메네이는 이날 이스라엘의 이란 대사관 공격을 규탄하고, 서구 문명의 도덕성이 완전히 파산했음이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군중들이 갑자기 "헤이다르!"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모스타파의 해설에 따르면 시아파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맘 알리의 별칭인 사자를 뜻한다고. 그는 유대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배를 끝내고 다른 친구들과 합류해서 모스크 구역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 자선 행사, 식사 나눔, 이런 공연 행사가 매우 많이 보였는데 아이들이 군복을 입고 결연히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역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배가 끝나고 다들 모여서 켈레퍼체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이 음식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유튜브나 구글 등지에서 Kalle-pache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시면 된다. 주로 양 머리와 뼈를 푹 끓여서 먹는 곰탕과 수육이다. 양의 머리고기와 양설, 양눈알, 양뇌까지 먹는 이란 최대의 호불호 아재 음식. 아직 쌀쌀한 아침에 뜨끈한 곰탕 국물을 먹으니 처음에는 너무 좋았는데, 한국과 달리 냄새를 잡는 데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목을 넘기고 올라오는 누린내는 상상 이상이긴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정말 다시 먹고 싶은 음식. 역시 정권에 충성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인가.
모스타파, 레자, 두 딸의 아버지인 토목엔지니어 살레흐, 살레흐의 동생 마흐디까지..
곧 이란을 떠날 나를 환송해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