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시 혁명?: 마크 베이싱어의 <혁명의 도시>를 읽고

한국의 도시 혁명?: 마크 베이싱어의 <혁명의 도시>를 읽고

왜 2010년대의 모든 혁명은 환멸로 끝나고 말았는가?

임명묵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발표 이후 내게 들었던 직감은 ‘보수의 멸망’이었다. SNS에도 그런 관점으로 글을 올렸고, 몇몇 언론 기고문에도 그런 시각을 담았다. 사실 이것은 내가 6공화국 민주주의를 열렬히 사랑하는데 윤석열이 그것을 망쳤다는 데서 오는 분노는 전혀 아니었다. 2020년대를 거치며 완연한 보수주의자가 된 나는 6공화국 민주주의 체제에 거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6공화국 민주주의는 이 체제를 바꾸자는 모든 변혁적인 언어를 허락하지 않으며, 정치인들과 그와 연관된 이해관계자들이 국가에 기생하기 좋은 판만을 깔아주는 온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상 생각했다. 이 체제가 단기간에 바뀌지 않을 것이라 거대한 무력감을 느낀 나는 대신에 20세기 역사에서 체제를 바꾸어내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낸 무수한 실험에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매료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 모택동의 혁명과 등소평의 개혁개방, 헨리 포드의 생산자 포퓰리즘, 호메이니와 샤리아티의 이란 혁명과 하산 나스랄라의 헤즈볼라, 가말 압델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 혁명과 사이드 쿠틉의 무슬림형제단 운동, 아히메이르와 베긴의 수정시온주의,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나사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쇼와유신파,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 트럼프와 머스크의 MAGA까지. 좌파 운동, 우파 운동, 민족주의, 제국주의, 초국가적 지역연대를 가리지 않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졌던 현실을 바꾸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모습을 공부하며, 이 갑갑한 6공화국 민주주의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해방감을 느꼈다.

한국 현대사에서 나에게 그런 영감을 주는 존재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나는 지금은 너무도 부끄럽게도 201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조롱하며 10월 26일에 김재규의 묘를 찾았던 바가 있다. 당시 스스로를 ‘중도’라고 생각했던 나는 박정희 체제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공로가 있지만, 지금 내가 누리는 87년 체제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그 시점에서 적절하게 사라졌어야 한다고 여겼고, 10.26은 그 전환의 비용을 무척이나 낮춘 긍정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1979년에서 1981년까지 이어진 한국 개발체제의 다면적 위기를 고려했을 때 그때 대한민국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6공화국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보수주의자로서 박정희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적어도 그 인물의 퇴장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되고 넘어갈 사건이 결코 아니었음은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전간기 질서에 도전했던 일본의 실험과 일본 제국의 해체, 냉전 체제의 수립,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종언과 미소의 제3세계 쟁패가 만들어낸 공기를 실시간으로 호흡하며 한국의 구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한국을 건설해냈던 사람이었다. 그 거대한 변화를 진두지휘한 박정희를 다시 참조하는 일은 일각의 비판처럼 ‘수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상변경이 불가능한 6공화국 민주주의의 바깥을 엿보게 해주는 ‘진취’로 다가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12월 3일의 계엄령에 분개했었다. 모든 도전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6공화국을 어떻게 2시간 반만에 해제될 계엄령으로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한국 현대사의 상처로 남은 단어인 계엄령을 소환하면서, 박정희로 대표되는 한국 보수 역사의 자산마저 쓸려나가게 된다면 이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6공화국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는 합의이자 헤게모니로 생각하고 있다고 짐작했었고, 그 헤게모니가 막강한 복원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여기서 계엄이 옳았다, 부정선거가 의심된다, 중국이 반국가세력을 통해 국가를 조종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최소 40% 이상이 윤석열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실상 엄청난 인구가 계엄을 사후 승인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고, 6공화국 민주주의를 더는 신성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뜻이었다. 수면 밑에서 끓고 있던 변화를 나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보수가 멸망할 것이라는 계엄 직후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는 그 이후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래 독서 리스트에서 우선순위가 그리 높지 않았던 책 두 권을 집어들었다. 하나는 마크 베이싱어의 책 ‘혁명의 도시(The Revolutionary City)’였고, 다른 하나는 아랍의 봄을 다룬 아세프 바야트의 ‘혁명가 없는 혁명(Revolution without Revolutionaries)’이었다. 오송역에서 서울역으로 올라와서 광화문의 약속 장소로 갈 때 나는 첫 번째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작년 1월부터 수도권 생활을 정리하고 본가가 있는 인구 4만 명의 소읍으로 돌아오니, 나는 익숙한 고향의 한산함에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에 서울역 앞에서 펼쳐지는 기도회와 탄핵 반대 집회를 위해 광화문에 모여드는 인파로 붐비는 전철이 몹시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서울이라는 대도시 공간은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변화의 에너지를 꿈틀거리게 하는가. 그다음으로 읽기로 결심한 것은 아랍의 봄에 관한 책이었다. 아랍의 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혁명, 그리고 모두의 낙관주의가 빠르게 빛이 바래고 환멸만이 남은 혁명으로 유명하다. 마침 중동에서는 아사드 정권이 무너졌기에 안 그래도 이 책을 대학원 친구와 함께 읽어보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오늘의 예측불허한 한국을 이해하는 데 역시 모든 예측을 거부했던 아랍의 봄이 큰 참조가 될 수 있지 않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1. 2010년대: 혁명의 시대, 환멸의 시대

1994년생인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2010년대와 보냈다. 2010년대의 여러 세계사적 사건들은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를 선호했던 나에게 환희와 환멸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트럼프 당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2010년대의 사건을 인식해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2020년대의 내 생각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혁명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 가지다. 2011년에 아랍 세계를 강타한 아랍의 봄(특히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 2013년에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정부를 무너뜨린 유로마이단 혁명, 그리고 2016년 박근혜를 탄핵시키며 문재인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진 한국의 촛불 혁명이다.

여기서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에 대한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아니라면, 진보나 보수나 한국의 촛불 혁명을 과연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해볼 수 있겠다. 진보 입장에서 보기에 이 사건은 한국 사회가 마땅히 위치해야 할 정상 상태로 돌아온 회복으로 여겨졌고, 오히려 민주당의 보수성 때문에 진짜로 혁명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사건은 적법한 투표로 뽑힌 대통령을 좌익 세력이 대중을 동원하여 끌어내린 난동으로 민주당의 폭주가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였다. 사실 당시 박근혜 탄핵 집회에 몇 번 참석했던 나조차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식인이나 여러 논자가 이 사건을 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진보에서 보수로 나의 생각이 이동하면서 박근혜 탄핵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완전히 바뀌었지만 ‘이런 게 혁명일 리가 없다’는 판단은 동일했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에 정의하기 나름이다. 일단 2016년 한국의 촛불 혁명에 대해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아랍의 봄이나 유로마이단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사건도 이집트, 튀니지, 우크라이나에서 사회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 국가를 더 혼란하게 만들기만 했다는 점에서 2016년 박근혜 탄핵과 매우 흡사했다. 그런데 2010년대에 커다란 희망과 함께 나타난, 속한 지역도 사회의 특성도 다른 네 국가(튀니지, 이집트, 우크라이나, 한국)에서 벌어진 대중 운동에 따른 정부의 퇴진이 모두 환멸만 남긴 채 국가를 더 위기에 몰아넣고 끝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어떤 면에서 2010년대의 세계, 그리고 특히 대중운동과 혁명의 속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대중이 제도로 합의된 틀을 거부하고 그 바깥에서 국가 기구를 포위해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는 현상을 뜻하는 혁명은 결국에는 그 급진성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하고,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심화시킨다. 혁명 이후 들어선 정권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이전 정권의 엘리트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며 혁명 세력을 실망시키고, 고도로 복잡한 현대 국가 운영에 미숙한 급진적 혁명 세력은 사회 안정을 해치며 다수 국민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역시 혁명은 피해가야만 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을 무언가 더 대단한 의미로 인식하게 하는 다른 사건들도 기억하고 있다. 17-19세기를 강타한 대서양 세계의 숱한 혁명은 오늘날 세계의 표준인 자유주의 질서를 확립했다. 강고한 전통주의자가 아니고서야 현대인 중에서 이 혁명들에 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편 엄청난 폭력과 함께 시작되며 20세기 전체를 규정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있고, 볼셰비키의 정신에 영감을 받아 1949년 중국과 1958년 쿠바에서 만개한 사회주의 혁명들도 있다. 더욱 해석하기 까다롭고 더 논쟁적인 1979년의 이란 혁명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혁명들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가치 평가를 하는 사건들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바로 사회 질서 전체를 뒤흔들고, 최소 수십년에서 최대 수세기까지 이어지는 견고한 정치 체제의 수립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역사 속의 대혁명들은 거대한 폭력과 혼란을 낳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체제(앙시엥 레짐)의 모순을 일거에 혁파하고, 한 사회를 도약시키는 추진력을 폭발시켰다. 이는 혁명 이후 일상은 전혀 바뀌지 않고 피곤한 정쟁만 반복되는 2010년대의 세 혁명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고, 바로 그래서 우리는 촛불 혁명을 혁명이라고 감히 불러주기 거부했다. 그렇다면 과연 혁명은 무엇인가? 진짜 혁명과 가짜 혁명이 있는가? 나눌 수 있다면 어떤 기준으로 나눠야만 하는가?

2. 농촌의 사회 혁명과 도시의 시민 혁명

정치학자 마크 베이싱어는 이토록 정의하기 어려운 혁명의 유형을 몇 개로 구분하며 새로운 혁명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가장 주요한 참조점으로 삼는 학자는 혁명 연구의 ‘3세대’를 대표하며 구조주의 혁명 이론을 제시한 테다 스카치폴이다. 스카치폴은 1979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국가와 사회 혁명>에서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을 비교하며 사회 혁명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강조한다.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혁명적 에너지가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의 계급 관계가 격변하는 혁명이 바로 사회 혁명이다. 스카치폴은 혁명의 원인, 전개, 결과가 갖는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혁명의 일반 이론을 쓰는 것은 어렵다’라고 했지만, 그는 사회 혁명이 불평등한 농촌의 토지 소유 관계에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할 때 일어난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즉, 혁명에 관여하는 자들의 선택이나 이념, 우연한 사건의 연쇄보다도 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 토지와 계급이라는 구조가 혁명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스카치폴의 이론은 매우 매력적인 혁명론으로서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나 당연히 비판도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그의 이론에 대한 대표적인 반례가 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에서 농촌의 토지 관계는 매우 중요하긴 했으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혁명의 이정표들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라는 러시아 제국의 양대 도시에서 나타났다. 게다가 모두가 봉기를 반대하는 와중에 압도적 카리스마로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인물의 존재, 볼셰비즘이라는 특유의 이념을 고려하지 않고 러시아 혁명을 과연 어디까지 구조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때문에 저명한 역사사회학자 잭 골드스톤은 구조와 행위자, 대외적 요인까지 고려한 제4세대 혁명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베이싱어는 스카치폴의 사회 혁명론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즉, 사회 혁명이 아닌 혁명들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혁명다운 혁명’과 ‘혁명답지 않은 혁명’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혁명답다고 생각하는 사건들,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이란 혁명은 스카치폴이 강조한 사회 혁명과 관련이 있다. 스카치폴이 <국가와 사회 혁명>을 쓴 1979년은 이란 혁명과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마지막 사회 혁명이 일어난 해였고, 그 이전까지 혁명은 대부분 계급 갈등을 포함한 사회 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 유로마이단 혁명, 촛불 혁명은 사회 계급 관계의 전면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고, 단순히 정권 교체로 끝났던 혁명이었다. 즉, 2010년대의 혁명들은 사회 혁명이 아닌 무언가 다른 범주의 혁명들이었다. 이 새로운 혁명들은 농촌의 빈곤과 토지 불평등, 노동자의 불만과 사회주의 이념과 그다지 연을 맺고 있지 않았고, 정권 교체와 자유 선거의 실시라는 자유민주주의 의제를 주로 추구하는 시민 혁명이었다. 그리고 시민 혁명은 사회 혁명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전세계 혁명의 새로운 트렌드로 빠르게 부상했다. 남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까지 이어진 연쇄적인 민주화 운동, 1989년에서 1991년에 냉전 체제를 무너뜨린 동유럽 혁명, 2000년대 구소련 지역의 색깔 혁명까지. 이 혁명들은 앞선 사회 혁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웠고, 의제는 선거 민주주의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역시 계급 관계를 뒤집는 혁명적 결과를 창출해내지 못했다(혹은 않았다). 그렇다면 왜 1979년까지 세계사를 뒤흔든 사회 혁명은 퇴조하고, 시민 혁명에게 왕좌를 내주게 되었을까? 베이싱어에게 있어서 이 변화는 근본적으로 혁명이 일어나는 공간과 장소에 관련되어 있다. 거대한 도시화라는 20세기의 대전환은 그 스트레스 속에서 농촌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냈다. 이후 충분히 도시화가 진행되었을 때, 혁명의 주무대는 이제 도시로 옮겨가 ‘도시 시민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사회 혁명과 도시 시민 혁명의 구체적인 차이는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나타나게 된 것인가? 여기에는 20세기 세계를 뒤흔들었던 여러 이념의 변천사, 칼라시니코프 소총에서 라디오와 최루탄, 살수차를 망라하는 기술의 변화 등 숱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사가 으레 그렇듯 혁명 또한 구체적인 장소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임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실제 혁명적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향했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으며, 혁명의 여정이 그 자체로 인류사의 주요 주제를 관통하게 되었다.

근대 대중 정치가 시작되고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가 분출했던 19세기 유럽에서 혁명은 대부분 도시적인 사건들이었다. 도시는 불만에 가득찬 군중이 모이는 장소이고, 혁명가들이 전복시키고자 하는 국가 권력 기관이 집결해 있는 신경적 중추다. 하지만 19세기식 도시 혁명은 21세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 시민 혁명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었다. 오늘날의 혁명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비폭력적인 군중이 광장에 모여서 정부를 압박하고 진압 병력과 대치하는 종류의 이미지다. 그러나 19세기 혁명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다. 이들 19세기 도시 혁명가들은 광장에 모이지 않고 도시의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전투를 벌였다. 반정부 군중을 잘 드러내고자 한 도시 시민 혁명과 다르게 19세기 도시 혁명은 정부의 압도적 무력에 쉽사리 노출되지 않고자, 난개발된 무질서한 도시 공간을 요새로 활용해 농성하고 정부군을 타격하는 전술을 취했다. 그러나 무력 사용에 가차 없었던 당대 정부는 총과 기마대를 활용하여 도시의 소요 사태를 효과적으로 제압해왔다. 사실 국가의 힘은 혁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 힘이 집적되어 있는 도시에서 국가와 무력으로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혁명가들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은 이유는 도시 혁명이 한 번의 승리로 단번에 국가를 뒤집을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근접성 딜레마라는 개념으로서 설명한다. 도시는 국가 권력이 모인 곳으로, 혁명가들이 정부를 제압했을 때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모여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강압에 쉽사리 진압될 수 있는 위험도가 매우 높은 장소이기도 하다.

러시아 혁명까지만 하더라도 근대 혁명은 상당수가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선술집에 숨을 수 있는 피난처를 만들고,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여 기마대와 진압군에 테러를 가하는 도시 혁명가들에 의해 수행되는 패턴이 우세하게 관찰된다. 당연히 국가는 무질서한 도시 공간을 혁명의 거점으로 삼는 혁명가를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공간론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대응은 불온분자들이 숨을 수 있는 피난처를 없애는 일이었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은 커다란 광장과 대로, 규격화된 건물을 통해서 도시에 근대적 질서를 부여하고 반란군이 자랄 토양을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관료제와 군사 조직의 발전, 복지 제도의 확립은 국가가 혁명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혁명적 불만을 사전에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며 국가가 도시를 쉽게 장악하게 되고 근접성 딜레마의 균형추가 국가 쪽으로 옮겨갔지만, 혁명가들은 농촌에서 새로운 거점을 찾았다. 국가 주도의 근대화와 세계시장의 변동성이 광대한 농촌까지 뻗치기 시작하면서 농촌은 점점 더 불안정한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과거 혁명의 물결을 감내해야 했던 선진 산업 사회는 농촌 불안을 잘 통제해낼 수 있었으나, 제국주의가 물러가면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신생국은 취약한 국가 역량으로 인하여 광대한 농촌 공간에 촘촘한 행정력을 투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련은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투쟁의 등대로 빛을 내기 시작했고, 세계 각지의 혁명가들은 인적, 물적, 이념적 지원을 기대하며 모스크바를 찾았다. 여기에 농촌에 해방구를 둔 마오쩌둥이 중국 혁명을 끝내 성공시키며, 농촌 기반 사회 혁명의 가장 중요한 참조점도 등장했다. 냉전 시대가 되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촌은 불평등한 토지 소유 관계에서 자라나는 농민의 불만에 불을 지피는 혁명가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스카치폴이 관찰한 농촌의 사회 혁명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모든 혁명이 농촌 기반 혁명도 아니었고, 반드시 사회 혁명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이나 이란 혁명은 도시 기반 사회 혁명이었고, 몇몇 농촌 혁명이 계급 질서를 바꾸지 않고 식민제국을 몰아내는 데서 끝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가 있었다. 농촌으로 이동한 사회 혁명가들은 국가 권력의 촉수를 피해 ‘해방구’를 만들었다. 혁명가들은 해방구에서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받기 위하여 중앙 정부에 느끼는 빈곤한 농민의 불만을 대리하여 대안적인 사회 질서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또 혁명가에 불만을 품은 농민이 중앙군을 끌어들이지 않게끔 공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혁명은 뿌려진 씨앗이 맹아로 싹터 만개하기까지 최소 수년, 최대 수십 년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동시에 농촌 기반 사회 혁명은 계속되는 게릴라전 끝에 국가가 무너지고, 탈주하는 구체제 엘리트와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반드시 실시되는 몹시 폭력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1979년은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위대한 사회 혁명이 있던 해였다. 동시에 이 해는 사회 혁명의 시대가 종식되는 해이기도 했다. 사회 혁명에 지적 자원을 공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매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고, 동구권과 소련 제국의 붕괴, 중국의 세계 시장 참여는 이념적인 방향성은 물론이고 농촌 게릴라에게 도달하는 물적 지원마저 없애버렸다. 그 대신에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혁명적 사건들은 사회 혁명의 구호와는 다른 요구 속에서 형성될 때가 많았다. 전지구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화,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의 증가, 실시간 통신망을 통한 국제적 시민 사회와 지구적 공공 여론의 등장, 미국식 시장경제와 선거민주주의가 절대적 표준으로 제시되는 워싱턴 컨센서스 시대의 개막이 맞물리며 혁명이 다시 도시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도시 시민 혁명은 장소만 도시였지 19세기식 혁명론을 따르지 않았다. 농촌에서 군의 추격을 피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주하는 게릴라 혁명도 아니었다. 새로운 혁명은 전국, 아니 전세계가 TV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수도의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이 단지 그 자리 위에 서서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이루어졌다. 바리케이드도, 칼라시니코프 소총도, 해방구도 없는 이 혁명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혁명은 국가 권력이 모인 도시는 혁명적 성공에 근접한 곳이지만 동시에 진압에 가장 취약한 곳이라는 근접성 딜레마는 어떻게 해결해냈는가?

근접성 딜레마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을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군중이 도시 공간에서 국가의 권력 기구를 압박하는 과정은 용이해진 반면, 정권은 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진압하는 데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짊어져야 했다. 도시의 근접성 딜레마가 갖는 균형의 추가 국가가 아니라 혁명가들 쪽으로 다시 옮겨온 것이다.

새로운 도시 시민 혁명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과정이다. 정부를 향해 누적되어 있던 불만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점화되며, 사람들은 정부를 규탄하기 위해 시위에 나선다. 이 시위는 비폭력적이고,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의 바다와 거기에 포위된 국가 기구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시각 효과에 의지한다. 자신들의 많은 머릿수를 드러내는 이런 시위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임계점을 넘기 전에는 다른 혁명 운동에 비해서 몹시 무력해보인다. 국가가 경찰력을 배치하고, 광장을 통제하고, 폭력적인 돌발 행동을 하는 군중을 조명하며 지지를 흩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럽에서 최초의 도시 혁명의 물결이 지나간 뒤, 도시에서 혁명가들이 숨을 장소를 없애기 위해 만든 거대한 광장과 대로를 사람이 꽉 채운다. 국민 전체가 이 시위를 지켜보며 지방에서도 수도로 올라와 시위에 참여하는 인구가 발생한다. 혁명적 사건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며, 혁명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정부가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세계적인 토론이 시작된다. 마침내 정부가 진압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면 군중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민주적 선거로 새로운 정부를 선출할 준비를 시작한다.

베이싱어는 이러한 새로운 혁명이 가능하게 된 여러 요인을 지적하나,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기술과 정서였다. 대규모 군중이 한날한시에 모여서 같은 구호를 외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거리의 통신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회를 나가본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야 없이는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사람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메가폰, 앰프,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거리 통신 수단과 음향 증폭 장비가 발전하면서 집회의 지도부는 군중을 통솔하고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지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거대한 군중이 점차 광장에서 가시화되는 가운데, 국가는 이전과 같이 일방적인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킬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단순히 오와 열을 갖춘 군인이 총기를 발포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인민이 정부에 대해 갖는 대표성과 영향력이 늘어나면서, 살상은 점점 택하기 어려운 해결책이 되어갔다. 국가는 살상을 하지 않으면서도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개발했다. 기마경찰, 곤봉, 방패, 최루탄과 살수차는 20세기 전반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대중소요를 일찌감치 겪은 다양한 선진국에서 발전해 이후 전세계 경찰의 표준 도구로 채택되었다. 물론 급진 운동 조직에서 훈련을 받은 시위대와 진압도구로 무장한 경찰 병력의 충돌은 여전히 상당히 폭력적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다짜고짜 총을 쏘며 거리에 피를 뿌리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도시민들은 점점 광장에 모여 국가의 충실한 도구인 경찰을 압박하고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자신감을 얻어갔다.

군중을 연결하고 동원해내는 기술은 이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이르면서 계속 발전해나갔고, 시위대에 우호적인 정서도 마찬가지로 성장했다. 제2차세계대전과 68 학생운동 이후 사람들은 점점 인권이라는 단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냉전 논리로 반공 권위주의 정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주던 미국 또한 국내외의 인권론에 영향을 받아 시위대와 타협하라며 개입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폭력적인 사회 혁명을 지원하는 소련은 점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지쳐 해외 혁명 원조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자신도 도시 시민 혁명에 굴복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은 시장경제와 선거 민주주의를 정상 국가의 표준으로 널리 선전했고, 미국의 영향력을 수용한 각지의 시민들은 자국 정부의 부패와 실업, 경제난, 부정선거와 인권 탄압에 분노하여 더욱 자주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1979년을 기점으로 사회 혁명의 시대가 저물고 도시 시민 혁명의 시대가 혁명의 바통을 이어받게 만들었다.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독재자가 아무리 쉽사리 무력 진압을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비무장한 시민에 발포를 하라는 명령은 일선 경찰이나 군인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국제적인 비난과 고립 속에서 권력 엘리트의 고립을 초래한다.

이외에도 베이싱어는 농촌 기반 사회 혁명과 대비되는 도시 시민 혁명의 여러 특징들을 보여준다. 시간적으로 더 느리게 진행되며, 농촌의 계급 구조와 권력 배열이 혁명의 성패를 가르는 농촌의 사회 혁명과 달리, 도시 혁명은 엄청난 속도감과 ‘압축된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수십만, 혹은 백만 이상의 인간이 한 장소에 집결할 때 도시는 그 이전의 일상적 감각에서 이탈하여 무언가 세계가 뒤집히고 있다는 비일상적인 분위기에 진입한다. 변화의 전망에 고무된 사람들은 수없는 돌발 행동을 벌이고, 이 사건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욱 커다란 폭풍을 만든다. 사건의 밀도가 높은 도시 시민 혁명의 순간에 모든 행위자들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엄청난 변칙성 속에서 심리적인 압박을 받으며 내내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져야 한다. 이 압박은 권력자를 단 한 번의 선택으로도 권좌에서 축출될 수 있는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가 주축이 되는 기존의 사회 혁명과 달리, 새로운 도시 시민 혁명은 국제적 연결성이 높은 수도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산층은 계급 질서의 격변을 초래하는 사회 혁명을 기피하고, 부패하고 억압적인 정부를 끌어내고 선거에 의한 권력 교체를 선호한다는 점에서 정상성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이들이다.

농촌의 사회 혁명과 도시의 시민 혁명 중 그러면 어떤 것이 더 성공적일까? 이는 ‘성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질문이다. 단순히 반대 세력이 권력자를 축출한다는 의미에서만 보자면, 도시 시민 혁명이 성공률이 더 높다. 발생도 더 잦다. 그리고 혁명 이후의 혼란도 더 적다. 경제에 대한 충격도 낮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가 얼마나 더 견고히 유지되며 오랜 유산을 남기느냐의 문제로 간다면 정반대가 된다. 사회 혁명은 성공 자체도 몹시 어렵고, 소요되는 시간도 훨씬 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혁명 집단은 이념적으로 통일되고,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낼지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어낸다. 물론 계급 질서를 바꾸려는 사회 혁명은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수반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충격과 엘리트 인력의 이탈은 사회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강력한 통제력을 지니게 된 혁명 세력은 자신들의 청사진에 따라서 국가를 조직해내는 견고한 정권을 세우고, 혁명이 약속한 혜택을 자신들을 지지해준 하층 계급에 분배하는 경우가 많다. 즉, 사회 혁명은 최대주의(maximalist) 혁명이다.

반대로 도시 시민 혁명은 성공 자체가 쉽고 혼란도 더 적지만, 안정적인 체제를 만드는 데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이는 군중이 최대한 많이 운집하여 번개처럼 정부를 무너뜨려야 하는 도시 시민 혁명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머릿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고,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사건 전개의 밀도와 도시 및 국가 기관을 마비시키는 운동의 특성상 도시 시민 혁명에서 사람들이 더 쉽사리 지치기 때문에 속전속결이 중요하다. 많은 수를 단기간에 동원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집회에 모인 군중 간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은폐하는 일이다. 따라서 도시 시민 혁명은 ‘어떤 사회를 만들자’는 긍정의 언어, 혹은 계급 질서를 바꾸자는 사회 혁명의 언어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최대 연합의 대다수 구성원이 동의할 수 없는 더욱 급진적인 요구가 주류적이 되면 시위에 이탈자가 등장하며 군중의 단일 대오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도시 시민 혁명에서는 ‘저 압제자를 갈아치우자’는 부정의 언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최소주의 요구가 승리의 공식으로 부상한다. 다들 지금의 질서가 일단은 싫기 때문에 동상이몽을 꾸면서도 광장과 거리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정의 언어로는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 질서를 꾸리기 몹시 어려워진다. 혁명은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고,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단순히 집권하고 있는 권력자만 끌어내려서 이미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불만이 팽배해 있던 사회의 모순이 해소가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도시 시민 혁명의 중산층 중심성, 서구 지향성은 혁명을 급속도로 보수화하고, 폭발한 급진주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시 새로운 혁명 운동을 전개하기 때문에 도시 시민 혁명 이후에 등장한 민주 정권은 안정적 통치 질서를 수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잦다. 바로 이것이 아랍의 봄이 순식간에 아랍의 겨울로 움츠러들고, 오렌지 혁명을 겪은 우크라이나가 유로마이단이라는 새로운 혁명을 겪고, 유로마이단 이후에도 민족, 지역 갈등이 격화되며 내전과 전쟁을 맞이하게 된 이유다. 빠른 희망과 빠른 환멸은 도시 시민 혁명의 특징이다. 대규모 폭력과 그를 통한 견고한 신질서 수립이 사회 혁명의 특징이듯이 말이다.

3. 한국의 도시 혁명: 87, 16, 24

베이싱어의 도시 시민 혁명 개념을 지금의 한국을 바라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꽤나 유용하다. 6공화국은 두 가지 혁명을 거친 체제다. 첫째는 6공화국을 탄생시킨 87혁명이다. 이 혁명은 냉전 막바지에 사회 혁명을 노린 좌익 세력이 불을 당겼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좁은 국토와 냉전기 반공 체제의 막강한 행정력 때문에 사회 혁명가들은 농촌에서 해방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농지 개혁과 한국 전쟁으로 평등해진 토지 소유 구조는 농민의 혁명적 불만을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87혁명은 근 30년에 가까운 개발체제 하에서 진행된 도시화와 그 도시 속 중산층의 성장 덕택에 가능했던 전형적인 도시 시민 혁명이었다. 87혁명이 성숙한 중산층인 넥타이 부대의 합류로 가능했고, 결과적으로 중산층이 원하는 안정적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을 주축으로 체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도시 혁명에서 중산층의 주도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7혁명에는 다양한 사회 혁명의 성격이 있었다. 개발체제는 안보 확립과 경제 성장을 지고의 가치로 내걸었고, 자본 축적을 위해 국민의 소비를 억제하고 내핍을 강요했다. 개발 시대는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이 느끼는 불의의 감각이 계급 질서의 변화 내지는 전복을 꿈꾸는 사회운동의 시대와 동의어이기도 했다. 이 에너지가 87혁명을 통해 열린 정치적 무대에서 만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개발체제가 심은 각종 제조업 공단 지역을 해방구로 삼으며 도시 중산층이 꾀하는 혁명의 연착륙에 전면적인 도전을 가했고, 농민 운동과 도시 빈민 운동도 마찬가지로 발호했다. 대학가에서 성장한 급진적인 학생 활동가들은 통일된 세계관과 이념적 지향을 확립하기 위해 각 단위에 침투하여 조직화를 꾀했다. 물론 이런 운동은 고소득 국가의 대열에 합류한 한국 사회가 사회 혁명 대신에는 소비 사회의 안정을 택하며 주변화되었지만, 6공화국 체제는 사회운동 세력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수용하며 발전해왔다. 6공화국 체제가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이전의 어떤 헌정 체제보다 견고한 안정성을 보인 것도, 경제발전을 거치며 변화된 계급 질서와 불화하던 정치 질서가 87혁명을 기점으로 사회 혁명의 에너지를 계속해서 수용하며 적응해나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16년의 촛불 혁명은 그 변화된 계급 질서가 도시 시민 혁명이라는 형태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촛불 혁명은 87혁명 당시의 사회 혁명 에너지가 대부분 소거된 형태로, 완연한 중산층 중심의 도시 시민 혁명으로서 등장했다. 물론 사회 운동 세력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도 저항해왔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보수 정부 시기에는 더욱 가열찬 정권 퇴진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16년 촛불 혁명은 한국 보수 세력이 그들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추진한 각종 정책과 반대 여론을 대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은 다수의 중산층 시민이 주축이 되어 광장에 모인 덕택에 가능했다. 이들은 사회 혁명을 원하지 않았으며, 대다수는 박근혜 정부가 보인 불통에 분개하여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집중하는 최소주의 구호를 제기했다. 16년 광화문 촛불 시위에는 이전 사회 운동 세력이 주도하는 시위와 달리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광장에 다수 군중의 머릿수를 드러내며 국가 기구를 압박하는 전형적인 도시 시민 혁명의 전술이 등장했다. 사회 운동 세력의 시위를 다양한 폭력 수단을 통해 진압해온 경찰은 광화문 시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는데, 비교적 사회 주류에서 제한적인 관심을 사는 사회 운동 세력과 달리 이미 사회적 힘이 상당하며 여론을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중산층이 시위대의 주류를 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세계체제에서 높은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으며 상당한 수준의 자산을 축적한 중산층이자, 87체제를 통해 전면에 부상하며 30년에 걸쳐 두터운 헤게모니를 축적해왔다. 세대적으로 보자면 이 중산층들은 정상 가정을 꾸린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나이대가 많았다.

촛불 혁명이 반공-개발국가 시기에 형성된 권력기관, 재벌, 보수언론의 영향력을 분쇄하고 중산층의 헤게모니를 공고히한 도시 시민 혁명이었음은 혁명 세력을 등에 업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 시기에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사회 운동 세력과 수도권 중산층의 연합을 통해 견고한 지지 기반을 구축한 문재인 정부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으면서도 사회 운동 세력의 최대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절충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성장과 공급 억제를 통한 부동산 시장 통제는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정부 정책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본 이들은 결국에는 수도권에 자가 주택을 보유하고, 1차 노동시장에서 보호를 받는 급여생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개혁’은 보수화를 의미했다(조금 좌파적인 언어로 얘기해보자면, 민주당을 지지하는 중년의 중산층들이 동시에 삼프로와 같은 뉴미디어 투자 채널의 열렬한 시청자 집단이자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 활발한 금융적 주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중산층이 주도했기에 보수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촛불 혁명은 아랍의 봄이나 유로마이단과 같은 빠른 환멸의 시간을 맞이했다. 집권 초 80%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곧 40%로 내려앉았고, 집권 연합 내에서는 이탈과 분열이 시작되었다. 경제적 조건이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자산 불평등의 심화에 삶의 전망에서 불안이 크게 증대된 청년층은 문재인 정부의 문화 정책으로 인한 성별 갈등에 투신했다. 그 결과 남성 청년층이 촛불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중산층 영합 정치에 불만을 품은 각종 최대주의 계파들이 이런 타협적인 개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며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주문했고, 그 결과 더욱 강경한 메시지를 내세우는 이재명 체제가 부상하게 되었다. 개혁과 혁명, 급진과 타협 사이를 오간 정부 정책이 특히 부동산 시장에서 거대한 혼란을 낳고, 진보적 자유주의를 원하는 소박한 중산층 일부가 이재명식 강경론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탈했다. 바로 그 결과가 2022년 윤석열을 탄생시킨 대통령 선거였으며, 촛불 혁명이 마주하게 된 최종적인 환멸의 순간이었다.

2024년 12월 3일에 윤석열이 시작한 초유의 계엄 정국은 그러면 촛불 혁명을 다시 부활시켰나? 베이싱어가 관찰한 도시 시민 혁명의 순간이 다시 시작된 것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사태가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고자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뛰쳐나왔고, 계엄령은 2시간 반 만에 종료되었으며, 2016년을 떠올리게 하는 탄핵 정국이 개시되었다. 이번에는 군중의 가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로 광화문 대신에 여의도가 선택되었는데, 이는 권력 중심인 청와대와 연결된 광화문 광장이 윤석열이 관저를 용산으로 옮기면서 다소 상징성이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또 다른 권력의 중추인 국회가 소재한 여의도는 새로운 상징적 공간으로 부상해 응원봉을 든 군중이 도시 시민 혁명의 순간, 평화적으로 운집한 군중이 머릿수를 통해 권력 기구를 압박하는 이미지를 연출해냈다. 그렇게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중산층의 최소주의적 도시 시민 혁명은 다시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고, 역시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서구권 외신의 막대한 찬사도 다시 받아냈다. 모든 것이 8년 전과 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었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베이싱어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도시 시민 혁명은 최대 연합을 빠르게 모집하여 정부를 강하게 압박할 때 성공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주의 구호를 외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여의도 시위와 시위대의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 및 사회 운동 세력은 성공 공식을 따르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촛불 혁명이 환멸로 끝나며 한국의 정치 지형은 더욱 양극화되었고, 절대적으로 민주당을 비토하는 또 다른 커다란 유권자 집단은 윤석열의 계엄령을 지지하지는 않을지라도 민주당이 주도하는 도시 시민 혁명에 참여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청년 남성이 2016년에 합류했다가 2024년에는 이탈한 대표적인 인구 집단이었음이 다양한 통계로 드러났다. 게다가 촛불 혁명이 준 환멸은 반대 세력뿐 아니라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이미 만연해 있었다. 촛불 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온건함과 타협책으로는 혁명을 완수할 수 없었으니, 이제는 정말 급진적 정치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시위대에서 제기되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87혁명을 통해 형성된 사회 혁명 세력과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즘, 성소수자 운동, 온라인 커뮤니티의 각종 하위 문화 집단이 모두가 제각기 최대주의 구호를 외쳤는데, 이는 오히려 자유주의 회복만을 원하는 중산층 집단을 시위 대오에 합류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해 요인이었다.

결국 신속한 탄핵이 이루어질 수 없음이 드러나며 민주당은 딜레마 속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이 표방하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 혁명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가장 활동적인 지지 집단을 동원해낼 것인가? 하지만 민주당은 현재 한국 사회의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급진적 변화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정치경제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중년의 중산층이기 때문에 이는 자살 행위가 될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16년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중산층이 만족할 수 있는 타협안을 내걸 것인가? 이는 이미 촛불 혁명에 환멸을 느껴 더 강력한 혁명적 리더십을 원하는 민주당의 주류 당원 및 사회 운동 세력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이들이 집회에 합류하기를 거부한다면 군중을 꾸준히 상징적 장소에 가시화하여 권력 기구를 압박하는 도시 시민 혁명의 표준 전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중산층 시민은 집회 무대를 창조하지 않는다. 열성적 지지자와 사회 운동 세력이 만든 판에 ‘합류’할 뿐). 그리하여 이재명의 민주당이 택한 것은 강경파의 에너지를 우선 ‘내란 수괴 윤석열을 끌어내자’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보수적 중산층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대표 본인이 사법 리스크 지니고 있어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던 민주당이 택한 최선의 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적 사태 전개(contingency)가 가속화되고 고밀도로 집중되는 도시 혁명의 시간에서, 시간에 쫓겨 택한 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가 있었다. 윤석열 끌어내리기를 위해 민주당이 표방한 총력전 태세는, 2016년부터 6공화국 체제 자체에 불만을 느끼는 또 다른 혁명 세력을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자. 마크 베이싱어는 <혁명의 도시> 결론에서 도시 시민 혁명의 미래를 논하며, 20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도시 시민 혁명의 성공률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2010년대의 혁명들이 세계적으로 보여준 환멸의 순간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요인이 더해졌다. 광장에 모인 군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권위주의 국가가 다시 붉은 여왕의 경주를 시작했다. 국가는 정보 인프라를 통해 시민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폭력적 대처 대신에 가시성이 좋은 공간을 폐쇄하고 시위대를 도시 공간의 구석에 가두어내며 그들을 제풀에 지치게 만들었다. 도시 시민 혁명을 제압하는 다종다양한 기술이 오늘날에도 중국, 러시아, 이란에서 개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강력하지 않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도시 시민 혁명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베이싱어는 2010년대 후반 이래로 세계를 줄곧 강타하고 있는 다른 현상에 주목해보자고 제안한다. 2016년에 미국에서 트럼프의 당선과 2021년에 좌절된 재선에 분개한 트럼프 지지자가 일으킨 의사당 난입 폭동. 유럽에서 거세지고 있는 신우파 정당들. 이들은 도시 시민 혁명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자유주의적 중산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회 집단이 ‘혁명’을 내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89년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시 시민 혁명 중 하나인 동유럽 혁명 당시에 동독인들은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를 내걸며 공산당 독재를 무너뜨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 지지자들이 이제 반대로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라는 구호를 쓰며 혁명을 촉구하고 있다. 광장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중산층의 전유물이 아니고,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생각지 못한 숱한 사회 집단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2025년 새해에 그 광경을 직접 목도했다. 한남동 관저 앞에서, 공덕 서부지법 앞에서, 누군가는 반혁명(counter revolution)이라고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파시스트 폭도라고 비난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유우파 혁명이라고 외칠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기이한 광경을 보며 나는 환멸로 끝난 2010년대의 혁명 하나를 더 깊게 공부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아랍의 봄을 다룬 <혁명가 없는 혁명>을 읽은 이유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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