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동경(雨中東京) (1)

우중동경(雨中東京) (1)

근대 아시아주의 역사 탐방

임명묵

여행은 다소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석사과정 중에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같이 하며 친해진 친구들이 있다. 한 친구는 인도 미술, 회화 전공, 두 친구는 일본 근대 문학과 지성사 전공. 나는 서아시아 전공으로 소비에트 지역과 시대를 전공한다. 얼핏 보면 너무나 안 통할 것 같은 인간들끼리 모아 놓았지만, 우리는 '아시아란 무엇인가?' '근대란 무엇인가?' 등의 주제로 종종 모여서 긴 얘기를 나누고는 했고, 각자가 공부하는 영역을 교환하며 서로의 생각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모여서 아시아에 관한 오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멤버 한 분이 1월에 한 달 가량 대학원생 연구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동경에 머물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인도를 전공하는 친구와 나는 4명 중에서 다소 한량 기질이 있는 이들이기에, "어 저희도 그러면 가도 될까요?"라고 가볍게 말을 던져 보았다. "저야 오시면 너무 좋죠."라는 대답에 얼렁뚱땅 결정된 동경행.

기본적인 테마는 역시나 '근대 아시아와 일본'이었다. 일본은 동양 국가로서 거의 유일하게 자주적인 독립국으로서 근대화를 수행했고, 그 자신이 나아가 제국주의 열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마디나 틀라스타노바와 같은 학자는 러시아, 오스만, 청, 일본이 그런 맥락에서 '야누스 얼굴의 제국'이라고 평한 바가 있다. 그들은 서구 세력에게 무시 받던 동양의 일부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름의 제국적 기획을 추구하던 국가들이었다. 때로 이들은 서구화를 통해 자신도 '문명 국가'의 일부에 들어가고 싶어했고, 때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서구 국가들에 분개하면서 정체성의 혼동을 겪었다.

이들을 대하는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 이 야누스 얼굴의 제국은 자신들의 제국적 열망을 위해 피지배 민족을 억압하는 압제자였고, 때로는 아시아의 대표로서 서구에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해방적 세력이었다. 서구와 야누스 얼굴의 제국들, 그리고 아시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비전에 따라서 정치적 활동에 투신했고 예술 작품들을 남기고는 했다.

동경은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를 군홧발로 짓밟는 제국의 수도(메트로폴)이자, 수많은 아시아인이 모여 연계망을 건설하고,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영감을 얻어 가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흔적들을 찾아가면서 공부하면서 알게 된 지식의 현장을 느끼고 싶었다.

우리 둘의 숙소는 신오쿠보역 인근의 에어비엔비로 잡았다. 중간에 동행한 친구가 알고 지내는 동경대 출신 일본인 친구와도 잠깐 다녔는데, 겨울에 원래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 않는데 요 며칠 간 계속 이례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여행 하는 3일 내내 비가 왔는데, 어쩌다보니 우중동경(雨中東京) 여행이 되었다. 조금 불편했지만 그래도 운치가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날씨였다.

신오쿠보는 일본 한류 팬들의 거점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와서 역에 내리자마자 조선의 수호신 유재석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일단 짐을 풀어놓고 바쁘게 이동했다.

우선은 JR 야마노테를 타고 하라주쿠 역에서 내려서 아시아주의의 장소를 찾으러 떠났다. 가기 전에는 하라주쿠의 다케시타 도리를 거쳐야 했다.

이 거리는 크레페가 유명하다길래 여행의 기분을 내기 위해서 크레페를 하나 사서 먹어 주었다.

일단 먼저 방문한 곳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신사였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1848년 사쓰마에서 태어나 해군에 입대했고, 훗날 러일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자리로 러시아 제국의 발틱 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격파하여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의 승리는 고종이 의지했던 유일한 외교적인 동앗줄인 러시아를 극동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러일전쟁은 그 자체로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먼저, 러시아와 100년에 걸쳐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지정학적 경쟁을 펼치고 있는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최종적으로 저지한 사건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지킨다는 최종 목적으로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중국, 조선 각지에서 러시아와 충돌하였는데, 일본은 그중에서 영국의 극동 파트너를 맡았다. 이 사건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은 종료되고, 두 국가는 새롭게 떠오른 강대국인 독일 제국에 맞서며 프랑스와 삼국협상을 체결하면서 제국주의 시대는 총력전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지정학적 경쟁보다 어쩌면 더 중요했을 강력한 흐름이 물 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동양 국가가 서양 열강을 군사적으로 분쇄했다는 사실이 아시아 각 민족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판카지 미슈라의 말대로, "현대 세계는 1905년 5월의 이틀 동안 쓰시마 해협의 좁은 물길에서 결정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은 아시아 각지의 항구에서 우레와 같은 축하를 받았다. 인도 총독은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를 끝낼 희망을 찾아 술렁인다고 걱정 가득한 일기를 적었다. 이란과 오스만 제국에서는 동양의 각성을 이끈 일본의 힘은 헌정에서 나온다며 입헌 운동을 시작했고, 각각 입헌 혁명과 청년 튀르크 쿠데타라는 정치적 격변이 이어졌다.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은 조선의 운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인에게는 새로운 각성의 계기였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는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는 조선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라는 윤치호의 말은 일본 제국이라는 특수한 제국주의 열강과 맞닥뜨린, 중첩된 정체성을 지닌 많은 조선 지식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도고의 승리를 기념하여 일본은 경남 진해시에 승전 기념 신사를 지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의 함대가 출항한 곳이 바로 진해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 철거되고 진해탑으로 교체했다.

신사 안에는 작은 기념 공간이 있어서 도고 동상이나 몇 가지 물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전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나가노 지역의 정견사(쇼켄지). 여기서는 도고 제독보다는 다소 뒷 시대 인물의 흔적을 찾고자 방문했다.

절 안을 맞아주는 무섭게 생긴 승려 동상..

이 절에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에 참여했던 철학자 미키 기요시의 묘가 있다.

미키 기요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는 교토 제국대학교 출신으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제자들로 구성된 일명 '교토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교토 학파는 관제 이데올로그들은 아니었지만,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이 일종의 '세계사적 사명'을 띠고 전개된다며 그 전쟁의 목적과 의미를 밝히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종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교토 학파에 참여했는데, 미키 기요시는 그중에서도 전직 좌파로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한 길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 단결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키 기요시 사상에서 가장 독자적인 것은 그의 '세계사 철학'이었다. 그는 고대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 영국, 미국을 거쳐 이어지는 단선적인 역사관을 거부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는 동양 역사는 전사(pre history)가 되거나 아예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은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나란히 함을 보여주면서 역사를 재해석할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미키가 보기에는 제1차세계대전은 서양 국가들이 서로 싸우다가 내파될 수밖에 없고, 그들이 더는 인류 문명의 미래를 제시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이런 문제 의식으로 미키는 새로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서구와 비서구를 모두 아우르는 '세계사'를  연구하고, 그 철학에 입각해 동양에서 서구의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키 기요시가 이 맥락에서 주장한 것이 훗날 대동아공영권까지 발전하게 되는 '동아협동체론'이었다. 그는 끔찍한 전쟁이었던 중일전쟁 또한 이런 맥락에서는 어느 정도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사상은 미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니시다 기타로 철학에 바탕을 둔 교토 학파 일반에 공유되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렇게 정립된 이론이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초극,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초극, 사상에 있어서 자유주의의 초극"으로 구성된 "근대초극론"이었다.

물론 일본의 진보적, 개혁적 사상가들은 "근대도 달성 못한 일본이 대체 무슨 근대초극론이냐"라며 조소했고, 군부를 비롯한 전시 일본의 수뇌부도 이 사상이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할 것이라고 보아 그렇게 고운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사실 근대 초극론은 아이디어만 제시된 뒤에 구체적인 개념이나 실천 방안들이 논의되지 않은 채 추상적이고 모호한 어휘들로만 허공을 떠다녔다는 비판이 많다. 전후 일본에서는 과거와 단절하는 의미에서 침략 전쟁과 천황제 파시즘을 긍정했던 근대초극론과 교토 학파를 몹시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들을 아예 언급도 안 하는 분위기가 크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소위 '탈근대론' 등이 대두되면서, 근대 초극론은 총력전의 시대에 일군의 아시아 지식인들이 전개시킨 독특한 사상으로서 조심스럽게 재조명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침략 전쟁의 도구로 쓰인 것이 몹시 안타까울 정도로 그들의 세계사 철학은 오늘날 지구사(Global history) 논의를 수십 년 일찍 전개한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묘의 주인인 미키 기요시는 제2차세계대전 패전 후 전범의 일원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얼마 안 가 신장염으로 사망하고 정견사에 묻혔다.

그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와중에 발견한 정겨운 정글짐.

정견사에서 30분 정도 더 가면 연광사(렌코지)라는 절이 나온다.

렌코지를 방문한 이유는 여기가 인도 국민군 사령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1897년에 태어나 인도 독립 운동에 투신했는데, 제2차세계대전기에는 영국의 적국인 나치 독일이나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안착한 곳은 일본 제국이었다. 주로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일본군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인도계 병사들을 다시 규합한 보스는 일본군과 함께 영국령 인도로 진공하여 인도를 해방시키겠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물론 그의 구상은 당연히 실패로 끝났고, 일본은 패배했다. 독립은 무력 투쟁을 중시한 보스가 아니라 영국 권력의 틀 안에서 민족 운동을 전개한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가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을 무력으로 무찌르겠다, 그것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한 보스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네타지(지도자)'라고 불린다. 인류가 '악의 세력'이라고 거의 완벽하게 합의한 추축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도에서 보스는 여전히 결의 넘치는 독립 운동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정서도 사실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인으로서는 체감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1945년에 보스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대만에서 머물다가 소련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훗날 그의 유해를 동경으로 가지고 와서 이곳 연광사에 묻었다. 독립 한 인도 정부는 그 후에도 보스를 기리게 되었고, 인도 지도자들이 일본을 찾았을 때 이 연광사를 으레 방문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957년 자와할랄 네루와 1969년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참배했음을 적어 놓았다.

하지만 보스를 굉장히 존경하는 인도 민족주의 진영의 나렌드라 모디는 일본에 방문할 때에도, 인도 대사관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연광사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인도 내에서 연광사에 있는 보스의 유해(화장 후 남은 재)에 관해 진위여부 논쟁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가 보스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022년에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에서 보스의 큰 동상이 세워졌고 모디가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방명록에 가면 방글라데시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등이 방문하여 자신들의 언어로 무언가를 써놓은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Jay Hind는 "힌두스탄에 승리를"이라는 유명한 인도 민족주의 구호인데,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이 적극적으로 사용한 구호로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일단 아시아주의 탐방은 이정도로 마무리하고 도쿄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이곳은 신주쿠의 도쿄도청사.

1933년에 세워진 신주쿠의 이세탄 백화점.

시부야에 K-pop 아이돌 르세라핌 팝업스토어를 열었기에 K의 시대를 맞이하여 방문해주었다.

르세라핌의 인기를 실감했다. 팝업스토어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여기서는 일본 멤버보다는 한국 멤버들의 인기가 훨씬 크다고 한다.

동경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대학원생 친구와 시부야에서 접선하여 긴자의 제국 호텔로 이동했다.

제국 호텔은 본래 1890년에 지어졌는데, 훗날 1922년에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재건축을 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일본을 대표하는 호텔로서 위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1970년에 재건축한 것인데, 몇 년 후에 다시 한 번 재건축을 할 것이라고 해서 그 전에 미리 방문해 보았다.

제국 호텔 앞에는 히비야 공원이 있는데, 이곳 또한 아시아 근현대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순항 전투와 203 고지 전투, 봉천 전투와 쓰시마 해전을 거치며 처절하게 러시아를 향해 승리를 거둔 일본은 의기양양하게 미국의 포츠머스로 가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승전 조약을 맺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 상대 측의 세르게이 비테는 니콜라이 2세와 달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고, 일본이 전쟁을 더 지속할 여력이 없음을 간파했다. 사실 러시아도 군사적 능력 자체가 붕괴한 것이 아니라 1905년 혁명으로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져서 전쟁 수행 능력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기에, 일본 입장에서 빠르게 협상을 타결하지 않는다면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포츠머스 조약은 조선과 남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를 제외하면, 일본이 전쟁 배상금을 받지도 못했고, 사할린도 전체가 아니라 남사할린만 얻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에 분개한 도쿄 시민들이 일부가 모여서 대규모 군중 소요, 폭동, 방화를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1905년의 히비야 방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죽었고, 그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연속적인 군중 소요가 발생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 시대가 점점 마무리 되면서, 일본에서도 자신들의 적극적 의사를 표출하는 근대적 대중 사회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중의 에너지가 어디로 흐를지, 또 어떤 방향으로 분출될지는 1905년 시점에서는 미지수였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비몽사몽으로 와서 일단 돌아다닌 첫날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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