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동경(雨中東京) (2)
동경 역사와 문화 탐방
아침에 일어나서 전 날에는 못 둘러보았던 신오쿠보의 한류 거리를 잠시 걸어보았다. 우리를 맞아주는 한국의 상징 엽기떡볶이와 BTS.
신오쿠보는 한국 느낌은 한국 느낌인데 뭔가 '어설프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떠나기 전에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특히 저 '한류백화점'에서 보이는 한글 간판과 서체가 어색한 인상을 크게 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일본이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한 데 반해 한국 거리는 아무리 어설프게 보여도 시작부터 무언가 활기가 넘치는 듯한 인상도 있었다.
순두부찌개가 뭔가 일본에서 잘 팔리는 종목 같았다.
첫번째 방문지는 미나토구 치요다선의 노기자카역. 이 인근에 일본의 유명 연예기획사인 쟈니스 사무소 건물이 있다. 원래는 소니뮤직의 사옥이라서 소니뮤직 산하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SME의 걸그룹 '노기자카46'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소니뮤직의 자금 문제로 쟈니스에 매각하여 현재는 쟈니스 사무소가 되었다. 사실 이거 보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방문지에 가까워서 겸사겸사 보고 왔다.
노기자카 역에서 나오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대표하는 장군인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
러일전쟁에서 해군을 상징하는 전투가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한 쓰시마 해전이었다면, 육군을 상징하는 전투는 려순 공방전과 봉천 전투였다. 그중에서도 대련과 려순은 요동반도의 끝에 위치한 러시아군의 요충지였다. 1898년에 러시아는 대련과 려순을 조차했고, 애초에 '다롄(대련)' 자체가 러시아어로 멀다는 뜻의 Dal'nyi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이를 개입의 빌미로 삼아 추가적으로 만주 전체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중국 하얼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만주 횡단 철도, 하얼빈에서 장춘을 지나 대련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가 뻗어나가면서 러시아 세력 투사의 길이 뚫리는 중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이런 세력 팽창을 좌시하면 조선에서의 모든 이권을 러시아에 상실함과 동시에 러시아 군사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것이라며 공포에 떨었다. 그런 일본은 마침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를 극히 경계하던 영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신중파였던 세르게이 비테를 경질하고, 동양 국가 일본이 강력한 러시아에 어떻게 위협이 되겠냐는 식으로 일본의 불만 제기를 모두 묵살했다. 일본은 결국에는 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겠다 판단하여 러시아를 공격하며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려순항의 함락은 만주에서 동중국해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완수되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대비는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는 국가 내부적으로는 몹시 낙후하고 취약했고, 총력전인 제1차세계대전에 적응하지 못해 붕괴했으나, 군사 기술적인 면의 신속한 진보를 따라잡고 있었다. 려순은 현대 병기로 단단하게 무장된 상태였고, 일본은 여전히 근대화에 매진 중인 후발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려순을 함락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야전 지휘관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이 려순 공략전을 수행한 그 야전 지휘관이 바로 노기 마레스케였다. 그는 203m 높이의 이령산, 소위 '203 고지'를 향해 무자비한 돌격 작전을 명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에 의해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막대한 희생 위에서 어쨌든 일본군은 203 고지와 나아가 려순, 대련 전체를 함락시켰고 이는 러일전쟁 승리의 단초가 되었다.
203 고지 전투는 10년 뒤에 펼쳐질 진정한 현대전, 제1차세계대전 특유의 전쟁 양상을 예고하는 전투였다. 하지만 독일이나 프랑스 등 이 전투를 참관한 측에서는 돌격을 통해서 현대적 방어 시설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화가 생기기도 했다(참조: 미완의 파시즘). 반대로 일본에서는 노기가 주도한 무리한 돌격 작전이 불필요한 피해를 만들었다면서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사실 1일차에 방문한 히비야 공원에서 일어난 대규모 군중 소요도 이처럼 큰 피해를 딛고 승리했는데 얻은 것이 겨우 이것 밖에 안 되냐는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노기 또한 자신의 아들들을 전투에서 잃었기 때문에, 비판 여론은 무마되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잘못된 지휘에 책임을 지겠다며 자결을 하겠다 했으나, 군주보다 신하가 먼저 죽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메이지 천황의 말에 따라 자결을 포기했다. 하지만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죽자마자, 이제 자신도 갈 수 있게 되었다며 아내와 자결하였고 일본, 나아가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도쿄의 노기 신사는 노기가 살던, 그리고 자결을 했던 그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노기의 집이 있다는 것은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이 때는 신사만을 방문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삼삼오오 도쿄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갔다.
신사에 올 때마다 신토의 상징물들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는데 항상 하지 못한다...
이 날은 내부에서 행사가 있는 듯 했고 무녀들이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도 도고 신사처럼 작은 역사관이 있는데 노기 동상을 볼 수 있다. 내가 지나친 곳에는 다른 동상도 아예 밖에 세워져 있는 것 같던데 못 본 게 조금 아쉬웠다.
노기 신사를 보고 우에노로 향해서 도쿄 국립박물관에 향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 간 이유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동행 친구가 꼭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하여서.
오른쪽 건물은 동양관이었는데 우선 여기를 먼저 보면서 다른 일행의 합류를 기다리기로 했다.
박물관답게 가격이 아주 비쌌던 당고와 말차. 날이 으슬으슬해서 밖에 오래 기다리기 조금은 힘들었다.
관람 목적은 바로 이 그림. 1595년 즈음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세가와 도하쿠의 송림도 병풍(松林図 屏風)이었다. 나야 그림 볼 줄 모르지만 이 그림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은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간 3일을 포함하여 한 열흘 정도만을 도쿄 국립박물관 개관 150주년을 기념해서 공개한다고 했던 것 같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나무만을 그린 장르화로서의 특성이 굉장히 선구적이라고 하는데 미술사를 잘 몰라서 ㅎㅎ
일본 다도 문화에 관해서 만화책 '효게모노'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접했기 때문에 이런 다구들이 굉장히 반가웠다. 이 검은색 구로라쿠 같은 것은 효게모노 작중에서 일본 다도의 거장 센노 리큐가 추구하는 미학을 담은 결정체로서 굉장히 중요한 테마로 나온다.
미술관을 나와서 우에노 공원을 거쳐 우에노 역으로 가는 중인데 꽃나무를 보며 동경에서는 벌써 날씨가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아직 밝다는 느낌은 없었다.
우에노역 안에 있는 한식당 '비빔'.. 여기서 먹은 것은 아니고 한국인으로서 반가워서 찍어보았다..
동행한 친구의 일본인 친구가 여기서 잠시 합류했다. 교환학생 갔을 때 만난 분이라는데 동경대를 졸업했다고 한다. 슬라브 어문학 전공이라길래 반가워서 '서로가' 안 되는 러시아어로 짧게 얘기하기도. 그렇게 넷이서 8년 만에 방문하는 우에노 역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이분의 모교인 동경대 캠퍼스를 둘러보고자 이동.
사실 동경대에서는 전공투에 의해 불탔다는 야스다 강당을 보고 싶었는데, 하필 이날이 센터시험인가 하는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이라서 캠퍼스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래도 동경대를 꿈 꾸는 일본 수재들을 보며 동아시아 문명으로서 일체감을 경험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그 다음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뭐 이 신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니 자세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시작부터 음산한 느낌을 주는 입구.
정국신사..
출병하는 병사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동상이라고 했던 것 같다.
1918년에서 1925년까지,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며 백군을 지원하고 극동 러시아에서 지정학적 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기념하는 비석.
일본 근대군의 아버지라는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이 서 있는데 나무위키에 따르면 일본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동상이라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쇠로 된 도리(신사 입구)인 것 같다.
해가 뉘엇뉘엇 저물고 있었고, 야스쿠니의 전쟁 기념관인 유슈칸은 폐장 시간이라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야스쿠니에 간 진짜 이유는 라다비노드 팔 판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팔 판사는 연합군이 일본의 전후 청산과 전쟁 범죄 처벌을 위해 열었던 극동군사재판에서 인도(나아가 일본에 짓밟힌 전체 아시아)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소위 도쿄재판이라 불리는 이 재판에서 그는 몹시 충격적이게도 연합국이 일본을 단죄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력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우익을 위주로 팔 판사가 높은 평가를 받을 때가 많고, 한국에서는 주로 그의 친일적인 성향을 비판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그 또한 좋든 나쁘든 20세기 아시아의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그런 의견을 제시하게 되었는지 분석하고 있다.
팔 판사의 판결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역시 아시아주의였다. 그는 영국령 인도에서 캘커타 고등법원의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영국 식민 지배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고, 전 날에 보았던 찬드라 보스와 마찬가지로 일본(혹은 일본 제국주의)을 아시아 세력으로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의 틀이라면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정복하는 것과 일본이 아시아를 정복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는데, 서구 식민 제국이 일본 식민 제국을 처벌한다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느냐'는 결론이 도출되게 된다.
이런 전형적이지 않은 접근은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비판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겪지도 않으면서 환상을 품고 대한 사람으로 많이 이야기하고, 옹호자들은 아시아, 혹은 제3세계의 관점을 대변하는 이로서 높이 산다. 단순히 보수나 우익 진영에서만 그러는 것은 아니고, 미국의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일본사학자 존 다우어 또한 그의 기념비적 저서 <패배를 껴안고>에서 팔 판사의 판결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단순히 좌우, 보수-진보로 재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제2차세계대전의 문제가 아시아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몹시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과 인도는 팔 판사를 양국 우호의 오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베 신조는 총리 시절에 인도 캘커타를 방문하여 팔 판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고, 모디 또한 찬드라 보스를 포함하여 팔 판사가 일본-인도 우호 관계의 중요한 증거라고 짚었다. 특히 중국을 견제하고자 양국의 협력 관계가 활발해지는 오늘 날에 이런 상징의 동원과 재발굴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야스쿠니의 인도인을 보며 나는 아직 그의 판결에 대하여 무엇을 판단하기보다는, 팔 또한 과거 시대 속의 하나의 인물로서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졌다.
이제 다음 행선지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