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4월 1일에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을 타격하여 혁명수비대 지휘관들을 사살했다는 뉴스가 떴고, 그 직후 테헤란의 거리에서는 이 ‘순교자들’을 기리는 현수막과 건물에 걸리는 거대한 그림판들이 등장했다. 이때 나의 친구가 된 이슬람 공화국의 충성파 청년들인 모스타파와 레자는 “국가가 부른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전장에 간다. 우리 삼촌도 성스러운 방어전(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순교하신 분이다.”라며 각오를 드러냈고, 하메네이가 주재하는 호메이니 대모스크에서 열리는 이드 알 피트르 예배에 나를 데려가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구 문명(tamadon-e qarbi)’에 비난을 퍼붓는 하메네이의 설교 이후에 “하이다르! 하이다르!”를 외치고,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을 외치는 군중들을 보며 압도되었다. 이란에 한 달 체류하며 영어가 통하는 서구 지향적이고 정부와 혁명에 냉소적이었던 청년들과 주로 교류하던 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이란 체제의 취약성과 견고함에 대해서 더 미묘한 관점을 취하게 되었다. 모두가 정부를 싫어하는 것 같고, 모두가 샤리아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가도, 이란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치는 이 국민들이 과연 이슬람 공화국의 위기 국면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사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슬람 공화국은 신기루처럼 무너질 수 있지만 강력한 요새처럼 다시 단단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테헤란에서 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충격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진실의 약속 작전(Amaliyat-e Vade-ye Sadegh)’을 발동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치킨을 먹고 카페에 가서 노닥거렸던 테헤란의 발리 나스르 광장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미사일을 보며 연호하는 군중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무언가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때 이란이 발사한 대부분의 미사일과 드론은 요격되었고, 이스라엘은 보복 명목으로 이스파한 일부 군사 시설에 제한적 공습을 가해서 1차 공방전은 비교적 양국의 큰 피해 없이 종결되었다.

그 뒤 여름과 가을의 사건 전개는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 헤즈볼라와 전쟁이 시작되며 이스라엘은 남쪽의 가자와 북쪽의 레바논에서 동시에 작전을 해야했으며, 북부 지역에서 헤즈볼라의 위협을 피해 난민이 몰려오며 국내적 부담이 계속 가중되고 있었다. 전쟁 1주년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미 국제 여론은 이스라엘에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바이든 행정부 또한 2024년 11월 대선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현상유지 수준을 뛰어넘는 명시적인 지원을 확약할 수도 없었다. 이때 네타냐후가 선택했던 것이 바로 7월에 테헤란에서 자행한 하마스 수장 이스마엘 하니예 암살과 9월에 레바논에서 전격적으로 수행한 ‘삐삐 작전’ 및 하산 나스랄라 제거 작전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10월에 ‘진실의 약속-2’ 공습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네타냐후는 왜 이렇게까지 갈등 수준을 높여야만 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네타냐후는 이란과의 갈등 수준을 높여서 이스라엘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을 원했다. 듣고 보면 미친 소리 같아보여도 중동의 역학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는 전략이다. 네타냐후는 가자를 평정할 수 없었다. 물속의 물고기처럼 인민전쟁을 수행하는 하마스를 제거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갈 수도 없다. 조직력을 회복한 하마스가 언제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격을 허용한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비난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내에서 제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성과도 못내고 후퇴도 못하는 상태에서 유일한 옵션은 인도주의적 재난을 감수하고 250만 가자 인구 전체를 청소하는 일이다. 이는 아무리 어린아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잔디깎기’를 해온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윤리적 부담이 너무나 큰 일이다. 그리고 안 그래도 팔레스타인 문제로 서구와 글로벌 사우스 간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250만명을 향한 작전은 든든한 후원자인 서구도 용인하기 버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