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개황 (1)
아주 짧게 살펴보는 우즈베키스탄 역사
8월 22일,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모스크바의 공항이 전면 폐쇄되었을 때 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있었다. 하루 전에 모스크바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타슈켄트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8월 21일부터 8월 25일까지 5일 동안 우즈베키스탄을 잠시나마 둘러보기로 했다.
우즈베키스탄을 간 이유는 간명했다. 첫째로는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직항이 전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환승을 하고 가야만 했다. 작년에는 두바이를 통해서 오갔는데, 사실 동선이 꽤나 비효율적이긴 했다. 이번에는 더 짧은 경로로 움직일 수 있는 타슈켄트를 환승지로 선택했다. 러시아로 입국할 때에는 러시아 일정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공항에만 있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우즈베키스탄에 며칠 정도 머물 생각으로 계획을 짰다.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8년 전인 2015년에 친구들과 17일 간 이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이때 우즈베키스탄에 받은 인상이 매우 좋아서 언젠가 꼭 다시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돌고 돌아 진짜로 다시 우즈베키스탄 땅을 밟게 된 것은 8년 만이 되었다. 8년 동안 이 나라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겨우 5일의 짧은 체류로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겠느냐만, 그리고 2015년의 여행으로 우즈베키스탄을 얼마나 내가 알았겠느냐만, 나름 딴에는 각별한 의미를 두고 타슈켄트 공항에 내렸었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와 실크로드 역사 도시 사마르칸트.
일단 이 도시들의 풍광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한국과는 나름 여러모로 관계가 많은 나라라 모두에게 익숙하지만, 또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많지는 나라인 우즈베키스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소개를 먼저 해보도록 하겠다.
지도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우즈베키스탄은 말 그대로 아시아의 한 가운데인 '중앙아시아(Central Asia)', 그 중에서도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모든 아시아의 중심임과 동시에 모든 아시아의 변방과도 같은 곳이었다. 문명의 필수 조건인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대체로 바다의 수증기를 강수의 형태로 공급받는 곳에 위치하는데, 대서양 편서풍을 받는 유라시아의 서쪽 지역, 혹은 인도양과 북태평양 몬순에 기댈 수 있는 인도와 중국 지역이 대표적이다. 반면 우즈베키스탄은, 이 지역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인 '내륙 아시아(Inner Asia)'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다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남쪽에는 거대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여름에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데 물조차 많이 없으니 생활 조건이 쉽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두 요소로 말미암아 중앙아시아는 문명의 변방에서 문명을 이어주는 중심이자 교차로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나는 중국 서쪽 끝의 드높은 천산산맥에서 발원하여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두 강,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의 존재다. 천산산맥의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이 두 강과 오아시스와 같은 수자원들은 중앙아시아에도 도시를 비롯한 항구적인 정착지가 지탱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두 번째 요소는 우즈베키스탄 북쪽의 스텝(키가 큰 풀이 펼쳐진 반건조 지역)과 그곳의 유목민들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 남부, 카자흐스탄과 몽골까지 이어지는 초원 지대는 유목민들의 터전이 되었는데, 이 유목민들은 남쪽의 농경민들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되기도 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진 유라시아의 문명들을 이어주는 이들이기도 했다.
강과 오아시스에 의지하는 도시들과, 이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원 유목민들 덕분에 중앙아시아 지역은 빠르게 문명 교류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고대 시대에는 옥수스 강 유역의 지역이라고 트란스옥시아나(그리스어), 혹은 강 너머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마와란나흐르(아랍어)로 불리웠다. 고대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인도, 그리스와 중동 문명의 상품과 사람, 정보와 이야기를 교환하는 상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나 많이 교역되던 상품이 중국의 비단이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매개하여 문명이 연결되는 길을 우리는 비단길, 혹은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당초 이 지역의 주요 거주민들은 이란계였다. 우크라이나-남러시아 일대에서 발흥한 인도유럽인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점으로 삼고 오늘날의 이란과 인도로 유입되었으니, 태고 시절부터 수많은 지역을 이어주는 교차로 역할을 한 셈이다. 그 후 이란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을 세우고 세계적인 문명을 건설하면서 중앙아시아는 자연스럽게 이란 문명권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된다. 훗날 알렉산드로스를 위시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를 정복하였을 때, 이 지역에도 그리스인들이 유입되고 그리스 문화의 흔적도 남게 된다.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즈에는 한국인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있는 그리스적 불교 미술 양식인 간다라 미술 유적지가 남아있다.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확고한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은 대체로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를 믿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8세기에 급속히 팽창한 아랍의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사산조 페르시아를 신속하게 멸망시킨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까지 들어왔고, 탈라스에서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군과 싸우기까지 했었다. 이로 인하여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확산되고 오늘날까지도 지역 주민 절대 다수가 믿는 지배 종교가 되게 된다. 이슬람의 정복은 당대 이슬람 황금기와 맞물려 이 지역을 세계사의 중심에까지 올려 놓았다. 유럽의 에스파냐부터 이집트를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지적 교류가 확산되었으며, 중앙아시아 출신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명의 기반을 닦았다. 대학자 이븐 시나, 대수학의 알 콰리즈미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아랍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압바스 칼리프가 무너지고, 중동 세계 전체가 분권화를 겪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의 권력 지형은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다. 특히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은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튀르크인들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군주 개인에 충성하는 노예 병단(맘룩)을 꾸리고 그들을 권력 기반으로 삼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은 이슬람 법으로 금지되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더욱 북쪽에 거주하고 있는 튀르크인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튀르크 노예 병단은 점차 궁정 정치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나아가 자신들이 권력을 주저 없이 찬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입된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를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동화된 상태였고 투르코-페르시아라고도 부르는 중앙아시아 특유의 문화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를 통해 유입된 튀르크인들은 훗날 아나톨리아까지 들어가 오늘날 오스만 제국과 터키의 기초가 되었다.
복잡한 왕조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동쪽에서 몽골 제국이 등장하면서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이루는 중요 요소가 또 다시 추가되었다. 재앙과도 같이 등장한 몽골군은 우즈베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각지의 주요 도시를 모두 파괴하면서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원래 이 지역에 지배적이던 이란계 주민들 또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물론 훗날 중앙아시아는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가 되면서 보호를 받았고, 다시 무역이 부흥하고,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긴 했지만 말이다. 기존의 이란계 주민들은 튀르크화된 몽골인들에 동화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종족 구성은 점차 튀르크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오늘날 중앙아시아 5개국 중에서 이란계 국가는 타지키스탄이 유일하다.
14세기에 몽골 제국은 세계사에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만 남기고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을 메운 것은 '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티무르라는 인물이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고, 차가타이 칸국 대신에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군사적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티무르는 자신을 따르는 유목민 군대를 통해 칭기스칸에 버금가는 정복전을 펼쳤다. 서쪽으로는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오스만을 무찔렀고, 북쪽으로는 킵차크 칸국을 쳐부쉈으며, 남쪽으로는 인도의 델리까지 함락시켰다. 티무르는 제국의 수도가 된 사마르칸트에서 천하의 재물과 인재를 결집시켰고, 오늘날에도 우즈베키스탄을 상징하는 장대한 건축물들을 세웠다. 티무르의 손자 울룩벡은 천문대를 건설하고 학문을 진흥하였는데, 사마르칸트에는 아직도 울룩벡 천문대가 남아 있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제국처럼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안정적인 통치 구조를 창출하지는 못했고, 곧 이어 다시 분열과 외침에 시달리게 된다.
1500년 즈음이 되었을 때, 드디어 이 나라의 이름을 형성하게 될 '우즈베크인'이 등장하게 된다. 아랄 해 북쪽, 킵차크 칸국에 더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던 우즈베크인들은 샤이바니의 지도 하에서 남쪽으로 진군했고, 혼란을 겪고 있는 티무르 제국을 정복하고 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등극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티무르 제국의 후예가 있었으니, 남쪽의 인도를 정복하여 무굴 제국을 창건하게 될 바부르였다. 샤이바니와 함께 남하하여 티무르 국가의 유산을 이어받은 우즈베크인들은 북쪽의 카자흐인이나 남쪽의 사파비 제국과 경쟁하면서 비교적 지역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즈벡계 국가들도 통일되지는 않았고 금세 분열하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드디어 수세기에 걸친 장기적 지배가 자리 잡았고, 이 지역의 인구는 차츰 우즈벡화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는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 부하라 에미르국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대부터 19세기를 거치면서 중앙아시아는 수많은 민족들이 오가는 교차로가 되었고, 그때마다 중앙아시아에는 마치 지층처럼 그들의 흔적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면서 오늘날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통과 그리스, 인도와의 교류, 아랍 이슬람 제국의 영향, 튀르크-몽골인들의 도래를 겪으면서, 중앙아시아, 특히 우즈베키스탄은 '순니파 이슬람을 믿으며,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우즈벡 튀르크계인들의 땅'으로 점차 변모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었을 때,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리고 엄청나게 강렬한 영향을 안겨주게 될 외부인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북쪽에서 다가오는 러시아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