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개황 (2)

우즈베키스탄 개황 (2)

아주 짧게 살펴보는 우즈베키스탄 현대사

임명묵

몽골 후계 국가로서 모스크바 공국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인 16세기부터 초원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한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순식간에 시베리아를 확보하고 태평양까지 나아갔다. 몽골 제국 이후에 남은 여러 유목 부족들은 모스크바에 저항했지만 복속되었다. 우랄과 남부 시베리아의 바시키르인들이 대표적이다.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더욱 크게 팽창하였고, 수많은 무슬림 지역을 획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을 얻었고, 이란의 카자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캅카스 지역도 정복했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식민지가 된 지역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서 영토 팽창을 마무리했을 때는 제국 후기라고 할 수 있는 1880년대였다.

물론 러시아와 인접한 북쪽의 카자흐스탄에서는 제국의 팽창이 빨랐다. 카자흐인들은 몽골 고원을 다스리는 준가르인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준가르로부터 생존하고자 청 제국과 러시아 제국 양쪽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를 빌미로 초원 정치에 더 깊숙하게 개입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카자흐 지역에 빠르게 진출했고, 여기를 발판으로 삼아 남쪽의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까지 확보했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경략.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제국 팽창의 동기는 여러 가지였다. 유럽의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되며 러시아에서도 식민지를 더욱 확보해야 한다는 심리가 보편적이 되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와 중앙아시아를 '우리들의 알제리, 우리들의 인도'라고 칭하며 이 지역이 차르의 위신을 드높이고 러시아 문명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공간으로 간주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영국과의 경쟁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손을 잡았던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시작했다. 점차 오스만과 페르시아를 물리치며 남쪽으로 확장하는 러시아를 영국은 심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영국이 인도를 통해 북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제국의 후방부를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 두려워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상호 불신은 훗날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리게 될 지정학적 경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유럽에 잘 알려진 오스만과 페르시아 지역과 달리, 중앙아시아는 식민화와 정복을 위한 기초적인 정보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러시아는 그 이전에도 히바 칸국을 압박하고자 원정대를 보냈으나, 기초적인 정보도 없이 사막으로 진군한 결과는 늘 처참하게 끝났다. 이후에도 내륙 아시아는 근대 유럽의 지리학자들에게 아직은 제대로 탐사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지정학적 경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영국과 러시아의 요원들은 중앙아시아의 내륙 도시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민족이 살고 있고 지형은 어떤지 알기 위하여 수차례 위험천만한 조사 임무를 맡았다. 러시아 측에는 또 다른 명분이자 동기도 있었는데, 초원 유목민들이 줄곧 러시아 영토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 시장에 판매하고 있었다. 러시아 동포들을 구한다는 목적 하에 부하라나 히바에 당도한 러시아 요원들은 실제 노예 시장에 잡혀온 러시아인들, 혹은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 러시아어도 잊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60년대를 지나면서 러시아 제국은 카자흐스탄 등지에 확보한 기반을 바탕으로 더욱 공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미하일 체르냐예프, 미하일 스코벨레프 같은 장군들의 활약으로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코칸드 등 우즈베키스탄의 중심적 도시들이 하나씩 러시아의 손에 떨어졌다. 부하라 에미르국과 히바 칸국은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남았지만, 더 치열하게 저항했던 코칸드 칸국은 아예 멸망해버렸다. 1880년대 동안 러시아 제국은 더욱 남하하여 험준한 파미르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까지 정복하고 남쪽 국경을 획정할 것이었다. 러시아는 1850년대 크림 전쟁 당시 영국에 굴욕적으로 패배하면서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하여 위신을 올릴 필요가 있었기에 중앙아시아 정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게다가 1860년대에 미국 남북전쟁의 여파로 당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물인 목화 시장에 격변이 닥치자, 러시아는 자신들만의 목화 생산지를 확보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영국이 인도를 자신의 목화 기지로 바꾸고자 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투르케스탄(중앙아시아)의 건조 지역이 목화 농사에 최적화된 곳임을 깨닫고 이 지역에서 막대한 경제적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 우즈베키스탄의 많은 농지가 목화 생산지로 탈바꿈하며 경제적 경관을 바꾸었다.

콘스탄틴 카우프만의 사마르칸트 원정을 따라간 오리엔탈리스트 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의 작품. "요새 벽 옆에서. 그들이 들어오게 하라(У крепостной стены. Пусть войдут)"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러시아의 정복부터 러시아 제국을 파멸로 이끌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앙아시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여러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먼저 그 이전까지 우즈베키스탄 역사에서 그다지 큰 존재감을 드러낸 적이 없는 타슈켄트가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이곳에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러시아 제국의 행정 기반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타슈켄트는 북쪽에서 이주해오는 러시아인들이 다수가 거주하는 근대 도시로 점차 변모해나갔다. 하지만 현지 권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부하라와 히바에서는 상대적으로 러시아인들의 영향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인들과 우즈벡인들 사이의 교류는 여느 식민지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까지 긴밀하지는 않았고, 둘은 분리된 사회를 형성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무슬림들은 어쨌든 러시아 제국의 네트워크와 좋든 싫든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볼가와 우랄 지역에 거주하는 타타르인들이었다. 제국 초기부터 러시아에 복속된 타타르인들 중에서는 러시아 제국 질서에 협조하는 충실한 무슬림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상업에 종사하며 부를 이루거나 제국의 관료제에 봉직하는 엘리트들도 나왔다. 같은 튀르크계 무슬림은 타타르인들에게 새롭게 확보된 중앙아시아 식민지는 그들이 활양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많은 타타르인들이 타슈켄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도시에 정착하였다. 타타르인들은 단순히 제국 통치에 협력만을 한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근대적 발전'을 촉진하고자 하는 야심도 있었다. 크림 타타르와 볼가 타타르는, 이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러시아에서 얻을 수 있는 근대적 지식과 기술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이 열망은 몇몇 지식인들에 의하여 '자디드주의'라는 정치, 사회, 문화 운동으로 진화하게 된다. 자디드는 '새로운'을 뜻하는 말인데, 막탑과 마드라사라는 전통 학교가 아니라 '우술-이 자디드(새로운 방법)'에 따른 근대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컫게 되었다. 여행과 교육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익힌 자디드주의자들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이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떻게 제국의 무슬림으로서 동포들을 발전으로 이끌어야 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고민을 했다. 제국의 심장부에서 활약하는 타타르인들이 자디드 운동을 주도했고, 그들은 투르키스탄에서도 세력을 확보할 것이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제국의 통치가 끝날 때가 바로 자디드들이 활약할 시점이 되었다. 무슬림 근대화와 문화적 자치를 추구한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장악력이 약해지자 활발한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계기는 1916년에 시작된 투르키스탄 봉기였다. 당시 노동 인력이 극히 부족해진 제국 정부는, 그동안 징병을 면제해주었던 투르키스탄에 광범위한 노동력 징발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법령은 전쟁으로 악화된 생활 조건 속에서 제국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있던 상황에 불을 질렀다. 러시아 식민자들과 중앙아시아 원주민 사이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반란은 얼마 가지 않아 러시아군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으나, 러시아 제국 권력 자체는 이 봉기로 인하여 결정적 타격을 입고 1917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러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타슈켄트에서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전제정을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디드들은 이 기회에 광범위한 자치, 내지는 완전한 독립까지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자디드들은 러시아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이에서도 큰 반대에 직면했다. 그들의 최대 적은 전통적인 교육법과 사회 질서를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는 보수적인 물라(mullah)들이었다. 자디드들이 무슬림 사회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근대화하려고 시도했던 반면, 물라들은 기존 러시아 권력이 중앙아시아 농촌 사회에 그다지 간섭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며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다. 그들이 보기에 자디드들은 무슬림 사회를 선동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무리들에 지나지 않았다. 무슬림 지도층 사회가 전통주의자 대 근대주의자로 분열한 상황에서, 10월 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한 공산주의자들,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통제력을 되찾고자 남하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진보적인 민족 정책과 식민-피식민 관계의 종식, 비러시아 민족의 전면적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었기 때문에, 많은 자디드들은 볼셰비키를 동맹으로 선택하여 합류했다. 물라들과의 투쟁을 통해 급진화된 자디드들은 사회주의를 통한 무슬림 민족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도래를 러시아 제국의 부활로 보는 소수파도 있었고, 그들은 농촌 지역의 반란군인 바스마치 세력에 들어가 소련군에 저항했다.

파란자(베일)를 쓰고 있는 우즈벡 여성.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소련 체제가 성립되면서 부하라 에미르국과 히바 칸국은 사라졌다. 볼셰비키는 동양학자들을 통해 이 지역의 민족 분포 지도를 새롭게 그리고, 각 민족의 발전을 보장하고자 새로운 형태의 행정 시스템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소련의 정식 국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었고, 각 민족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연방에 형식적으로는 평등하게 가맹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조정 과정을 거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이라는 5개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국경과 행정 체계는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 국가들의 기초가 되었다.

진보적 자디드들이 바랐던 광범위한 문화적 자치와 무슬림 민족의 근대화는 1930년대 스탈린 시대를 맞이하면서 아예 다른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의 빠른 근대화를 추진했고, 이를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활용하고자 했다. 많은 소수민족들이 소련 정부의 지원을 통해 근대적 교육을 받고 행정 요직, 산업 현장에 배치되어 소련 체제의 기둥으로 거듭났다. 언어학자들은 각 민족의 표준어를 제정하여 빠르게 보급되고 있는 학교에서 교육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내용은 철저히 '사회주의적'이어야 했다. 기존의 무슬림 민족 지도자들이 지키고자 했던 문화적 전통이나 신앙은 볼셰비키의 신념에 맞지 않으면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내전을 통해 더 급진화되고 소련 체제의 신념을 더 내면화한 새로운 세대는 마을과 도시 모두에서 전통적 사회 질서를 공격하고, 농촌을 집단화하고 옛 문화를 근절하고자 사실상의 전쟁을 벌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정책은 그 뜻부터가 '공격'인 후줌(hujum)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여성은 파란자라고 불리는 부르카를 착용했는데, 소련 당국은 이를 여성 해방을 가로막는 악폐습으로 보았고 여성이 파란자 착용을 거부하게끔 하는 캠페인을 조직했다. 이런 시도는 현지 우즈벡 사회에서 러시아가 주도하는 폭력적인 문화 침탈로 여겨졌고, 새로운 근대적 여성상을 그렸던 우즈벡 여성에 대한 습격과 살해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이 스탈린 체제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927년 안디잔에서 베일을 불태우는 여성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농촌은 신속하게 집단화가 되었고, 모스크와 마드라사(무슬림 전통 학교)는 폐쇄되었고, 마을의 원로는 물론이고 자디드를 포함한 민족 지식인들은 대숙청 기간에 상당수가 탄압을 받았다.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이 전면적인 전환은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만들었다. 많은 중앙아시아인들이 러시아인들과 뒤섞이면서 보드카를 배우고, 이슬람 관습에 훨씬 유연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되어 우즈베키스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문맹 퇴치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여성의 사회 참여도 훨씬 활발해졌다. 특히 독일과의 파괴적인 전쟁은 우즈베키스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유럽 러시아 지역의 피난민들이 타슈켄트로 와서 거처를 마련했다. 러시아인들의 도래는 도시의 주택 문제나 식량 문제를 악화시켰지만, 러시아 문화와 교육 기관들이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남게 되어 우즈벡인들을 계속 가르쳤다. 한편 많은 우즈벡인들이 소련군에 입대하여 독일 전선에 나섰고, 그들은 중앙아시아를 벗어나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과 상호작용하며 더 넓은 세계를 깨우칠 수 있었다. 소련군에서 활약한 많은 중앙아시아인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 같은 핵심 도시에서 교육을 받고 소련 중앙부와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면화 생산을 독려하는 포스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전쟁이 끝났을 때, 우즈베키스탄은 혁명 이전과는 완전히 탈바꿈한 나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코란 대신 레닌을 읽었고, 일부는 기술 교육을 받으며 산업 노동자가 되고 있었다. 타슈켄트는 현대적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우즈벡 공산당 당원들은 전연방 공산당 안에서도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물론 바뀌지 않은 것도 여전히 많았다. 소련 근대성이 충실히 침투하지 않은 농촌은 집단농장으로 변모했음에도 복원력을 과시하고 있었고, 농민들은 대체로 옛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시의 남성들은 러시아인과 교제하며 근대적, 공적 삶을 살았고, 농촌의 여성들은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사실 여기에는 그다지 큰 모순은 없었다. 경제적인 변화도 주로 농업에 집중되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면화 농업을 더욱 특화하여, 우즈베키스탄이 소련 전체 섬유 산업의 원료를 제공하는 기지가 되기를 원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면화를 제공하는 대신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생산되는 산업 및 기술 상품을 받았다.

냉전 시대가 열리면서 이러한 관계는 도전을 맞이했다. 주로 우즈벡 공산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불만이 그 원인이었다. 소련은 냉전 시기에 제3세계 국가들에게 사회주의를 통한 근대화와 발전을 홍보했고, 식민 구조의 청산에 도움을 주겠다고 선전했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간부들이 보기에는, 제3세계를 신경 쓰기 전에 소련 내의 저발전 지역이자 구식민 지역인 중앙아시아부터 먼저 착실히 발전시키는 게 맞았다. 중앙아시아를 소련이 현대화할 수 있다면, 중앙아시아를 발전의 전시장으로 삼아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은 타슈켄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더 자주 방문하고, 그들의 발전을 더 잘 신경 써주겠다고 공약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시기 발전을 가장 상징하는 공간은 수도인 타슈켄트였다. 1966년 대지진이 도시를 강타하고, 타슈켄트 시 중심가가 거의 완전히 파괴되자, 소련 정부는 도시를 새로운 현대 도시로 복구할 것을 공약했다. 새로운 시가지, 새로운 아파트가 세워졌고, 중앙아시아 최초의 지하철과 TV 타워도 세워졌다. 타슈켄트는 우즈벡 이슬람 문명의 전통과 러시아적 현대성이 결합한 발전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우즈벡 공산당 간부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독립성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우즈벡 공산당 안에서는 모스크바 중앙과 더 가까운 타슈켄트 파벌과, 우즈벡 현지 정서에 더 밀착하고 있는 사마르칸트 파벌이 존재했다. 두 파벌 갈등은 스탈린 시기에 격화되었으고 모두 숙청당하긴 했으나, 자디드 출신인 사마르칸트 파벌의 거두 파이줄라 호자예프를 비롯한 사마르칸트 파벌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우즈벡 정치는 타슈켄트 파벌과 러시아 간부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르칸트 인근 지자흐 출신의 한 간부가 우즈벡 공산당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샤로프 라시도프였다. 라시도프는 뛰어난 정치적 기술을 발휘하여 차츰 타슈켄트 파벌의 영향력을 몰아내었고, 중앙의 브레즈네프와 정치적으로 제휴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거의 20년 간 장기 집권을 해내었다. 타협을 선호한 브레즈네프는 지방의 당간부들이 권한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줬는데, 그 덕에 브레즈네프 시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슬람 신앙이 차츰 부활하고, 우즈벡 민족 서사에 입각한 각종 문화나 지적 작업이 이전에 비해서 더 자주 나오게 되었다. 이는 우즈베키스탄뿐 아니라 당시 소련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큰 추세였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면서 소련의 제국 구조는 다시 한 번 불안정해졌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라시도프의 정치적 후원자가 사라지면서, 소련 전국을 강타한 부패 스캔들이 노출되었다. 라시도프가 중앙 계획 기구로부터 할당받은 면화를 장부를 속이고 거짓으로 공급했고, 당원들이 이익을 착복했음이 감사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면화 할당을 맞추기 위해서 아동들이 학교도 빠지고 노역에 동원되는 것이 밝혀지면서, 러시아에서는 우즈벡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심해졌다. 옐친은 이런 후진 지역을 먹여살리느라 러시아가 져야 하는 부담이 막대하다며 소련 체제를 깨자고 선동했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는 그동안 억압되었던 모든 목소리, 소련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까지 열어젖혔고 우즈베키스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기간 목화 농업을 강제 받으면서 짊어져야만 했던 저발전, 그리고 아랄해가 고갈되면서 만들어진 심각한 환경 재해 문제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슬람도 더 공개적으로 부활하여 공적 영역에서 등장하고자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했지만, 소련군 보수파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연방 구조 전체가 해체되자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찾아왔다.

우즈베키스탄의 철권 통치자, 이슬람 카리모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당시 소련의 비러시아 공화국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독립된 주권 국가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련 권력의 해체는 이들이 단순한 지역 지도자가 아니라 한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야심을 불어 넣어주었다. 투옥되고 옥사한 라시도프를 이어 1989년에 우즈벡 공산당 제1서기가 된 이슬람 카리모프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꺼이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맡게 된 나라는 소련의 연방 구조에서 이탈해서 러시아로부터 받던 모든 지원을 상실한, 내륙국만으로 둘러싸인 '이중 내륙국'이자 면화를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도 없이 인구만 계속 증가하고 있는 빈곤한 나라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타슈켄트 정치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의 파벌이 표면화되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퍼지는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불만에 찬 대중들의 마음 속에 퍼지고 있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지키면서, 또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라를 어떻게든 안정시켜야 하는 과제를 풀어나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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