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돌의 도시, 아르메니아 예레반
캅카스 산맥 남쪽 내륙,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가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면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수도 예레반에 도착한다. 캅카스 산맥 남쪽의 깊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는지라, 연결되는 비행편이 그렇게 많은 나라는 아니다. 아르메니아의 면적은 경상도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약 270만명 정도. 하지만 중동 문명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유서 깊은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뛰어난 상업 민족으로서, 서쪽으로는 이스탄불부터 동쪽으로는 인도양 세계까지 유라시아의 초원길과 바닷길의 무역로에서 활약을 했다.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오스만과 페르시아를 쳐부수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아르메니아 영토는 크게 오스만 제국령과 러시아 제국령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의 뒷배를 믿고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오스만 제국을 휘젓고 다닌다는 불신을 품게 되었다. 러시아와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며 국경 지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사막을 관통하며 무슬림 민병대와 부족 전사들의 습격을 받으며 사막을 관통해서 시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아르메니아 대학살 과정을 통해 오스만령의 서부 아르메니아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공동체가 모조리 사라졌고, 대신에 러시아령의 동부 아르메니아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수도인 예레반이 이 과정에서 크게 성장하여 인구 100만의 대도시가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상인은 물론이고 지식인, 과학자, 예술가로 활약해왔었고, 스테판 샤우미안이나 아나스타스 미코얀 같은 저명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배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둘러싼 아제르바이잔과의 갈등은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무려 소련 해체 이전부터 발발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988년 전쟁은 소련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독립하였는데,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그 인근 지역을 점령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30여년 간 국력을 키운 아제르바이잔의 복수를 불러왔다.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은 2024년에 해체하기로 결정되었다.
여행을 떠난 2019년에는 이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이었음을 생각하면 세월이 참 빠르다.
수도 예레반의 대표 공항 츠바르트노츠 국제 공항.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항 시설은 꽤 괜찮았던 거로 기억한다. 사실 터키, 아제르바이잔과 관계가 끊어지고, 이란과도 육로 교통이 여의치 않아서 육지 속에 고립된 섬이 되어 항공 교통 의존도가 높기는 할 것 같다. 제대로 육로로 타국으로 가려면 인근 그루지야를 통해 나가야만 한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우리를 태워주신 기사님. 민족은 무려 그 '아시리아인'이라고 한다. 이라크와 시리아에 대부분 살고 있는데, 아르메니아에도 몇천 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자기 아들은 현재 러시아로 이주하여 거기서 직장을 잡고 산다고. 소련의 민족집단이란 대체 얼마나 다양했던 것인가.
택시를 타고 보면서 발견한, 다음에 더 자세하게 볼 예레반의 명물 '아라라트 노이 코냑'. 그야말로 웅혼하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다녔던 모든 여행지 중에서 단연코 베스트 1을 꼽자면 아르메니아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중요한 하나가 건축이다. 유럽이나 소련, 다른 이슬람 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독특한 석조 건축이 매우 운치가 있다. 고대-중세 아르메니아 건축 양식에 훗날 러시아적 영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근현대 아르메니아 건물들은 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거웠다.
물론 지하 통행로는 전형적인 소련의 그것이다..
예레반의 유명한 슈퍼마켓 체인 예레반-시티 중 하나다. 이 자리는 원래 예레반의 시장이 있던 자리다. 저 황금 문도 아마 그 시절 시장을 가리키는 건물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저 문 건너편 내부로 들어가면 현대적인 마트가 자리하고 있다.
예레반-시티 마트 반대편에 위치한 블루 모스크. 18세기에 지어졌는데, 당시 이 곳은 페르시아 제국에 신속한 튀르크계 부족이 지배하던 예레반 칸국의 중심지였다. 페르시아 영향이 강하고, 시아파 모스크다. 소련 정부에 의하여 모스크로는 폐쇄되었지만 문화유산으로 인정 받아 건물 자체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독립 이후에는 다시 예레반에 유일하게 남은 모스크로 부활했다.
앞서 아르메니아 건축을 찬양했지만 여기도 결국 소비에트 연방이었기 때문에 이런 소련식 건물도 당연히 여기저기 눈에 띈다.
2019년 당시 중국의 디지털 약진을 여행지 이곳저곳에서 확인했었는데 그 중 하나. 샤오미와 화웨이를 자연스럽게 쓰는 캅카스의 사람들. 근데 노키아는 왜 아직도 있는 건가?
시내 관광을 하기 이전에 일단 체크인부터 해야했다. 숙소 예약이나 교통편 관련은 모두 같이 여행하시는 일행에게 일임했었는데.. 체크인 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당시 일행이 페이스북에 남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며 당시의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해드리고자 한다.
"예레반 첫날. 예약한 숙소에 가서 벨을 누르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시내를 한 시간 정도 방황하다가 다시 가서 벨을 누르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누군가 나와서 그 틈에 들어가서 호스텔을 찾으니 너네는 예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 골드 호스텔 아닌가요, 했는데 자기네는 스마일 호스텔이란다. 그런데 주소는 똑같다. 이야기를 해 보니 자기들이 몇 년 전부터 호스텔을 운영하다가 몇 달 전에 잠깐 동안 어떤 인간한테 세를 줬는데 그 인간이 호스텔 장사를 했고 우리는 그때 예약을 했었던 것. 정말 이제는 나 자신에게 경이를 느낀다. 다행히도 여기 주인 아줌마가 좋은 사람이라 자리 남는다고 여기서 묵어도 된다고 허락해 줘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어쨌든 잠시 몸을 뉘이고, 캅카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예레반의 산들바람을 맞이하며 풍류를 즐기다가..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서기로.
모택동이 '원자탄보다 중요한 게 밥이니 밥부터 먹자'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여행 시작하기 전에 인근 식당에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사실 그리 잘 사는 나라는 아니니 어디 길거리 식당에서 대충 먹으면 예산을 훨씬 절약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식도락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니.. 맥주를 시키니 피스타치오가 기본으로 나왔다. 캅카스, 이란, 터키 쪽의 피스타치오는 전세계 최고의 진미 중 하나라는데 실제로 그랬다. 너무너무너무 맛있다! 게다가 맥주 안주라니..
포도잎에 다진 고기류를 넣고 쪄서 먹는 돌마라는 음식인데, 역시 터키, 캅카스, 이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음식이다. 소련에서는 약간 아르메니아 민족의 대표 음식처럼 포지션된 거 같은데, 돌마라는 말 자체는 터키어에서 온 말이다.
아르메니아도 굳이 따지면 페르시아 문화권이라고 할 정도로 페르시아와 무척이나 비슷하고 가까운 면모가 많다. 그중 하나가 밥을 즐겨먹는다는 것이다. 향신료로 양념한 이 밥도 진짜 너무 맛있다. 아.. 다시 가고 싶다 캅카스. 내년엔 반드시 가리라.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한 번 점령해서 나름 유명해진, 남러시아의 로스토프-나-도누 인근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나서 볼셰비키 혁명가가 된 알렉산드르 미야스니키얀의 동상과 그 기념 공원이다. 아르메니아 볼셰비키로서 아르메니아의 공산화와 안정화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25년에 사고를 당해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카메라로 제대로 담아낼 수 없었어서 안타까웠다..
7월 예레반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영상 39도, 40도에 강렬한 햇살이 계속해서 내리쬔다. 도시 곳곳에 분수와 음수대가 있어서 목을 축이거나 열을 식힐 수 있었다. 예레반 시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분수로 나와 놀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공원은 정비 상태가 과히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나쁜 것도 아닌 준수한 상태였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곳에 좌판이 있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얘기하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아르메니아계 소련 전투기 조종사 넬슨 스테파냔. 239회의 출격으로 수많은 독일군 장비를 파괴했고, 전투기 에이스로서 인정 받아 소련 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았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소일하고 오며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시민들.
아르메니아 정부 부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대로인데, 해당 사진의 건물은 외무부이다. 그 앞의 기념상은 전설적인 혁명가 스테판 샤우미안의 기념상. 그루지야 트빌리시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으로, 교육을 통해 급진화되어 볼셰비키가 되었다. 트빌리시에서 활동하다가 당대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일하고 있던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자 석유 중심지 바쿠로 건너가 거기서 노동자 운동 및 혁명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샤우미안은 바쿠 석유 노동자를 중심으로 바쿠에서도 노동자 정부를 만드는 정치 활동을 벌였고, 이는 '바쿠 코뮌'으로 알려지게 된다. 왜 바쿠 코뮌이냐면, 석유 노동자의 중심지였던 바쿠는 아르메니아인, 페르시아인, 러시아인 등이 모두 모여사는 국제적 산업 도시였던 반면, 바쿠를 둘러싸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무슬림 튀르크인이 사는 농촌 지역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쿠는 볼셰비키가 장악한 섬과 같이 '코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나머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마하마드 아민 라술자데가 주도하는 민족주의 정당의 지지가 훨씬 강했다.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의 민족 긴장은 그런 배경 속에서 계속 성장했고, 특히나 러시아의 전선이 붕괴되며 오스만 제국군이 차츰차츰 바쿠로 다가오면서 아르메니아계가 주도했던 바쿠 코뮌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무장해제 시켜놔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3월 사건', 혹은 '3월의 날들'로 불리는 무장해제 과정의 충돌 속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볼셰비키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하여 대거 살해당했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복수의 칼을 갈다가 오스만 제국군을 등에 업고 바쿠를 점령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인이 보복 학살을 당하는 와중에, 스테판 샤우미안을 비롯한 바쿠 코뮌의 26명 인민위원들은 몰래 감옥에서 탈출하여 카스피해에 정박된 함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함선은 볼셰비키가 통제하는 볼가강의 아스트라한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에 볼셰비키에 이를 가는 멘셰비키가 다스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크라스노보츠크로 향했다. 건너편 이란에 주둔한 영국군의 사주가 의심되는 가운데 26명의 인민위원은 모두 멘셰비키의 카스피 정부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샤우미안을 대표로 26명의 인민위원을 혁명의 순교자로서 성대하게 기렸고, 예레반에도 이렇게 샤우미안 동상을 세운 것이다.
바쿠에는 이것보다 더 거대한 26명의 인민위원 순교 기념공원도 만들었으나,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이 커지고 아제르바이잔의 반아르메니아 정서가 강해지면서 2009년 즈음에 모두 철거되었다.
아르메니아의 명물인 코냑을 노상의 바에서 팔길래 한 잔 시켜서 우선 시동을 걸기로 했다. 날도 더운데 40도 짜리 술의 향이 코와 목을 확 쏘면서 알딸딸하게 만들어주었다.
카메라로는 다 담지 못하는 웅장한 예레반의 공화국 광장. 이 나라 말로는 '흐라빠락'이라고 한다. 1924년에 계획된 거대한 광장으로, 50년에 걸쳐서 예레반 도시를 건설하며 웅대한 아르메니아 양식 건물들을 하나하나 추가해가면서 완성했다. 직접 눈으로 보면 정말 대단하다. 주로 정부 부처 건물과 박물관 등이 세워져 있다. 중앙 광장에는 큰 분수들도 있어서 밤이 되면 사람들이 다 여기로 나와서 밤을 즐기고 있었다.
소련의 상징, 어디든 편히 누워서 자는 동네 개들..
1930년대에 건축된 예레반의 웅장한 오페라 극장. 아르메니아의 민족 시인 오바네스 투마냔의 동상이 있다. 옆에는 아르메니아의 대표 음악가 알렉산드르 스펜댜리얀의 동상도 있다.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음악인 아람 하차투리안의 동상이다.
이제는 예레반의 또 다른 대표 명물 관광지인 캐스케이드로 향한다. 캐스케이드 초입에 위치한 이 기념상의 주인공은 알렉산드르 타마냔이라는 아르메니아의 건축가이다. 1878년에 태어나 6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인 1936년에 죽었는데, 1924년에 예레반 도시 건설 기본 계획을 모스크바로부터 승인 받고 사실상 현대 아르메니아의 도시 경관을 총지휘하면서 이 나라에 엄청난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소도시에 불과한 예레반을 훗날의 백만 대도시로 만들 기초 작업을 지휘했고, 앞서 본 흐라빠락이나 오페라 극장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 전통 경관과 현대 경관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데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감탄한 아르메니아의 건축과 풍경이라는 것은 타마냔이라는 인물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예레반의 대표적 랜드마크 예레반 캐스케이드. 이 또한 타마냔의 1924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1971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80년에 부분 완공을 했다고 한다. 그 후에 경제난과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치되다가 차츰차츰 무언가 꾸미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의 기념단지로 개발되었다. 맨 위에 올라가 있는 높은 탑은 1967년 10월 혁명 50주년 기념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러면 쓰나.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다시 맥주 한 잔 충전하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