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터키 대선에 대하여
성큼 다가온 에르도안 승리에 대한 짧은 생각.
2023년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선거라는 터키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려 하고 있다. 5월 14일에 있었던 1차 투표에서 집권 여당의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약 49%를 득표하며 과반에 거의 근접했고, 야당 공화인민당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약 45%를 득표하며 뒤처졌다. 터키 선거에 주목하던 많은 이들은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도안은 장기 집권, 경제난, 미국과의 관계 악화, 대지진 등 너무나 많은 악재를 안고 선거에 나섰기 때문이다. 선거 전에는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이 클르츠다로을루에 밀리는 결과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1차 투표 결과는 반대로 에르도안이 5%로 야당을 따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22일에는 5%를 득표한 승리당 후보인 시난 오안이 에르도안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28일에 있을 결선 투표에서의 에르도안 승리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설령 다시 이변이 일어나서 에르도안이 패배하더라도 지지세가 여전히 만만치 않음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그렇다면 에르도안은 어떤 구호를 걸었기에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전을 해낼 수 있었을까?
2010년대 이래로 에르도안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면 역시 ‘신오스만주의’일 것이다. 신오스만주의는 지중해와 중동을 호령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새로운 국가 노선이다. 얼핏 복고적이고 퇴행적이라는 인상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국가 서사로서 신오스만주의는 일종의 진취성을 제공하며 인기를 끌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에르도안은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겠다고 노력할 바에야, 이슬람 문명의 언어를 통해 국제 질서에서 당당한 위치를 되찾는 게 낫다고 주창했다. 이전의 국가적 과제였던 유럽연합 가입이 계속 좌절되는 상황에서, 집단을 묶는 공동의 서사와 미래의 목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기획이었다.
신오스만주의를 국민에게 선전하는 전략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2010년대는 터키 방송가에서 오스만 제국 시대를 다룬 여러 사극이 대호황을 맞이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극은 오스만 제국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들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심지어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국제적인 인기를 얻으며 터키 소프트파워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그 결과 터키 바깥의 일부 무슬림들도 이번 선거에서 에르도안을 응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신오스만주의는 그저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포부가 드러나는 서사에 가깝다.
따라서 신오스만주의가 아무리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 수사에 깔린 진취적 메시지와 공동 과업의 제시는 분명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야당의 메시지에는 그런 힘이 부족했다. 야당은 서구와의 관계 회복, 의회 민주주의 복구, 경제 정책 조정 등을 공약했다. 물론 지금의 터키를 위해서는 모두 중요한 정책들이다. 하지만 서구화는 이미 터키가 1923년 건국 이후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국시로 삼았던 구호였다. 그 이전을 기억하는 중장년층 이상에게는 전혀 신선함을 주지 못하는 ‘구태’로 받아들여지기 좋았다. 아마 야당이 미래를 진취적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후보도 70대 중반의 클르츠다로을루보다 더 젊은 후보를 내세웠다면 1차 투표 결과는 몹시 다르지 않았을까.
물론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에르도안이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신오스만주의는 구호의 찬란함에 비하면 다수 국민에게 체감되는 발전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에르도안의 터키만 기억하는 청년층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고, 이들이 유권자에서 차지할 비중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그 갈망을 실제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번 터키 선거의 교훈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변화를 원한다는 구호로는 미래를 건설하겠다는 이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미래가 어떠한 미래든 간에, 신체제 건설을 위한 구체적 비전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현격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문명과 제국이라는 미래의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터키 야당이 제시하는 미래의 언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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