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말주의에서 에르도안주의로: 터키 정부가 원하는 시민의 창출
Ihsan Yilmaz의 Creating the Desired Citizen: Ideology, State and Islam in Turkey 서평.
2023년은 터키 역사의 이정표가 될 해이다. 5월에는 20년 째 집권하고 있는 레젭 타입 에르도안의 재선 여부를 확인할 대통령 선거가 있다. 현재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과 부패, 경제난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 등으로 선거전은 매우 박빙으로 치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관권 선거와 부정 선거 등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승리하고자 할 것이다. 2023년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의 터키인들이,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서 연합군의 침공을 몰아내고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2023년에 터키의 지도자로 집권한다면. 그는 공화국 역사의 10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을 제시할 사람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에르도안으로서는 패배해서도 안 되는 선거고, 여론조사에서 밀린다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수도 없는 선거다.
물론 2023년의 터키는 100년 전의 1923년의 터키와는 완전히 달라진 터키다. 1923년의 터키를 건국한 국부는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였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서구 열강의 침공과 발칸과 카프카스의 민족 분쟁과 대혼란을 보면서 터키 민족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혔다. 그가 바라보기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한 이유는, 서구에서 벌어지는 눈부신 발전에 눈을 감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은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몽매함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타튀르크는 서구로부터 생존하기 위해서 터키를 서구처럼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타튀르크는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종교를 정치와 분리하는 철저한 세속주의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공적 역할을 더욱 바랐던 다수 유권자와 아타튀르크 및 그의 후계자들의 생각은 계속 충돌했다. 군부, 관료, 사법부 엘리트들의 세속주의 헤게모니와, 그에 맞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저항이 20세기 터키 역사를 규정했다. 하지만 2002년 선거로 집권한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노련한 정치적 기술로 세속주의 엘리트를 무력화하고, 터키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군부를 숙청하면서, 이슬람주의를 통해서 권력을 공고화했다. 그렇게 이슬람을 통한 에르도안 독재 권력의 수립은 세속주의 터키를 후퇴시키게 되었다.
이 같은 서사는 오늘날 터키라는 나라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처음 접하는, 가장 기본적인 설명이다. 이 서사는 실제로 터키 현대사의 윤곽을 그릴 때 매우 유용한 설명이다. 하지만, 세속주의적 케말과 이슬람주의 에르도안의 대립 구도에만 집중하면, 실제로 케말주의가 ‘에르도안주의’로 대체되는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케말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단순한 선악구도로만 바라보면, 케말주의가 지녔던 한계와 이슬람주의자들의 노련함, 그리고 둘 사이의 깊은 연속성을 놓치게 된다. 따라서 전체 윤곽 밑에 숨겨진 터키 현대사의 내면의 모습들을 알지 못한다면, 이슬람주의와 신오스만주의 등 지금의 에르도안 체제가 어떤 기반 위에 서있고, 그 기반이 어째서 이토록 단단한지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흐산 이을마즈의 “원하는 시민 만들기: 터키에서 이데올로기, 국가, 그리고 이슬람(Creating the Desired Citizen: Ideology, State and Islam in Turkey)”은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라는 터키 현대사를 관통하는 두 이념을 ‘국가가 원하는 시민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는 훌륭한 입문서다.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는 격렬하게 대립하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사상으로 보이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다. 하지만 이을마즈는 두 사상이 터키 근대사를 통해서 형성된, 공통의 매우 강력한 감정적 기반을 공유한다고 강조한다. 그 감정적 기반 속에서 터키 국가 체제가 탄생했고, 에르도안주의자들은 그 국가 체제를 이용하면서 케말주의 헤게모니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상을 배태한 터키 근대사와, 케말주의자들과 에르도안주의자들을 가리지 않고 공유한 터키인들의 격렬한 감정, 그리고 두 경쟁자들이 무자비하게 사용한 국가 기구를 비교해야만 터키의 오늘을 알 수 있다.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는 모두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탄생한 사상들이고, 그 경험은 바로 오스만 제국의 길고 고통스러운 해체였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삼개 대륙을 호령하던 위대한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부터 근대화를 이룬 서구 열강과의 경쟁에서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체결한 1774년의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부터 제국이 최종적으로 해체되는 1920년의 세브르 조약까지, 약 150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계속 축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에 점령당한 곳의 무슬림들은 고향을 잃고 아나톨리아로 밀려 들어왔고, 열강을 등에 업은 기독교인, 유대인 등의 자본이 제국을 휘젓는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대한 이슬람 문명의 지도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제국의 엘리트와 신민이 이제는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받으며 무지몽매하고 나약한 사람들로 간주되는 굴욕을 느껴야 했다.
제국의 몰락과 해체, 서구의 간섭은 다수의 터키인들을 ‘불안한 민족(Anxious nation)’으로 만들었다. 역사는 그들에게 서구 세력이 언제든지 터키를 침략하고, 내부의 불만 세력을 선동하여 분란을 유도하고, 그리하여 터키인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선사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따라서 터키인들은 항상 외침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적대적 세력이 자국을 포위하고 있다는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과 함께하게 되었다.
케말주의는 이런 불안함을 타개하기 위한 최초의 방법론이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오스만 제국 말기에 부상한 정치 세력인 청년 튀르크의 계승자들이었다. 이들은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이슬람과 결부된 튀르크 민족주의를 촉진하여 제국의 해체를 최대한 막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이들의 가장 특징적인 비전은 민족의 과학적 계몽과 세속주의의 추구였다. 따라서 1923년에 아타튀르크가 로잔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합국의 추가적 간섭을 중지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그가 향후 추진할 정책의 방향성은 매우 명확했다. 아타튀르크와 터키군, 그리고 패권 정당인 공화인민당은 먼저 해체된 오스만 제국을 터키 공화국이라는 형태로 재건해야했고, 국가를 건설하면서 갖춘 권력 기구를 활용해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을 터키 공화국의 근대적 주체로 새롭게 훈련시켜야 했다. 이 국가 건설과 주체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터키 국가와 사회는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관계 양상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국가 기구를 통해서 하향식으로 주체를 만들고자 하면, 시민과 체제가 세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고 분류한다. 첫 번째는 체제가 ‘원하는 시민’이다. 이들은 체제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국가 기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고, 내외부의 적들에 둘려쌓였다고 불안해 하는 국가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이다. 두 번째는 체제가 ‘원하지 않는 시민’이다. 이들은 체제에 의해서 불온한 세력이라고 낙인찍혀 있고, 언제든지 외부의 적과 연계하여 국가를 뒤흔들 수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체제는 안보를 명목으로 이들을 철저히 분류하고 감시하고,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차단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체제가 ‘용인하는 시민’이다. 이들은 국가가 ‘원하는 시민’과 같은 정도의 충성을 보이지는 않고, 급진적이고 권위적인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동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든지 국가의 편에서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한 시민이기도 하다. 이을마즈에 따르면,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는 모두 이 세 종류의 시민을 분류하고, 국가 권력을 통해서 원하지 않는 시민을 억압하며 용인되는 시민을 창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을마즈는 케말주의가 원하는 시민을 두고 Homo ‘LASTus’라고 정의한다. 네 알파벳은 각각 Laicism, Ataturkism, Sunni, Turk에 대응한다. 즉, 세속주의적이고, 아타튀르크를 숭배하며, 순니 무슬림인 튀르크인이 케말주의가 가장 원하는 종류의 인간형이다. 나머지는 직관적으로 납득이 갈텐데, 세속주의를 강력히 추진한 정부가 왜 순니 무슬림(S) 요소를 요구했을까? 저자는 정부가 이슬람을 공적 영역에서의 행동 강령으로 삼는 것은 극렬히 반대했지만, 오스만 제국 해체의 역사를 겪으며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정체성의 표지는 순니 이슬람이라는 것에는 여전히 공감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유대인, 기독교인 등 다른 종교와의 투쟁이 그 시기를 관통하는 도전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따라서 ‘원하는 시민’은 공적 영역에서 구태여 이슬람이라는 상징을 드러내면 안 되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종교를 묻는다면 ‘순니 이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했다.
반대로 Homo LASTus에 하나라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체제가 원하지 않는 시민이 되어 고난을 겪어야 했다. 세속주의(L)에 동의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이슬람 정체성을 표출하고자 하면 그는 이슬람주의자로 규정되었다. 단순한 세속주의적 근대화의 비전을 넘어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주의와 권위주의까지 공감하는 아타튀르크주의(A)에 동의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불신의 대상이었다. 순니 이슬람(S)이 아니라 알레비와 같은 다른 종파를 믿는 이들, 튀르크인(T)이 아닌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 등의 다른 민족들도 역시나 정부에 의해서 계속 감시받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공연히 표출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케말주의가 원하지 않는 시민은 결코 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수는 아타튀르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케말주의가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쿠르드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싫어했고, 알레비는 이단이라고 생각했고, 소련 사회주의가 국가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국가가 원하는 시민인 Homo LASTus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완전히 세속화(L)되지 않은 이들로서, 여전히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서 정체성을 놓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체제는 순니파 무슬림이자 튀르크인이고 아타튀르크를 존경하지만, 종교심이 투철한 사람들을 ‘용인하는 시민’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지지층으로 삼았다. 이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케말주의가 동원한 기구는 역설적으로 몹시 세속적이지 않은 기구인 ‘국가 종무국(Diyanet)’이었다. 종무국은 터키의 모든 모스크를 위계적으로 조직한 국가 관료제인데, 국가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국적으로 일시에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국가가 애용한 것은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금요 예배의 설교였다. 종무국에서 작성한 국가의 메시지는 모스크 네트워크를 타고 내려가 예배에 나오는 모든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여기서 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주제는 애국주의, 안보적 위협에 대한 경각심, 민족을 구원한 아타튀르크의 위업을 이슬람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되었다.
케말주의 헤게모니는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반대파의 도전을 받아왔다. 특히나 종교심을 표출하고자 하는 이들이 케말주의의 가장 큰 경쟁자들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군부는 좌파에 대응하기 위해 이슬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고, 순니 무슬림을 터키 민족의 핵심 정체성으로 삼는 서사의 확산을 지원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경제 자유화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갖췄고, 이란 이슬람 혁명의 변화를 받아 정치적인 권력을 적극적으로 노렸다. 이슬람주의의 도전은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1990년대에 세속주의자들에게 다시 주목을 받아 1997년의 ‘연성 쿠데타’를 비롯하여 억제되었으나, 이미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해를 받을수록 이슬람주의자들은 더욱 강해져서, 더욱 결집된 세력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2002년에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승리하게 되었다. 정의개발당 집권기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의 자유주의, 2008년부터 2013년 게지 시위까지의 과도기, 2013년부터 완전한 권위주의로 향하는 3기로 구분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케말주의 독재 시절에 등장했던 각종 사회 공학 프로그램과 국가의 주체 형성 노력이 다시 부활한 정의개발당 3기다. 에르도안도 케말주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원하는 시민, ’원하지 않는 시민‘, ’용인하는 시민‘이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에르도안이 원하는 시민은 서구에 대한 의심과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이슬람과 터키 국가를 사랑하며, 국가를 넘어서는 오스만 제국의 영역 전체에 대해, 나아가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향한 깊은 소속감을 느끼고, 그 수호자로서 에르도안에 충성심을 느껴야만 한다. 에르도안이 원하지 않는 시민은 반대다. 서구를 추종하고, 이슬람 신앙에 진실하지 않고,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으며, 에르도안에 비판적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케말주의의 충성스러운 시민인 호모 Homo LASTus가 들어가고, 에르도안주의자들은 그들을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며 위스키나 마시는 신 귀족 집단‘, ’하얀 튀르크‘로 경멸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에르도안주의의 원하지 않는 시민 범주는 케말주의의 원하지 않는 시민 범주와 상당부분 겹친다. 알레비와 기독교인, 유대인은 올바른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 여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남는다. 정의개발당의 자유주의 시기에 에르도안을 지지하면서 정치적, 사회문화적 권리를 증진했던 쿠르드인들은 이제 에르도안주의를 따르지 않고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것이 확실할 때 다시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에르도안을 지지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는다. 원하지 않는 시민들에 대한 이러한 억압은 2016년 쿠데타 시도가 발생하면서 더욱 격해졌는데, 에르도안주의자들이 자신 정권과 국가의 존재론적 불안을 더욱 심하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르도안주의가 원하는 시민을 창출하기 위해 대중문화와 교육을 활용하는 점을 주목한다. TV 드라마의 주제부터 학교 교과서 내용까지 포괄하는, 터키의 서사가 전면적인 전환을 겪고 있는데, 아타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터키 현대사를 넘어서서 오스만 제국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본래 공화인민당의 케말주의자들은 오스만에 대해서 몹시 양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위대한 역사임과 동시에, 종교에 매몰되어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실패한 역사라는 것이다. 후자가 더 두드러진 정서가 될 때 오스만 제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었다. 하지만 에르도안 시대에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신오스만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내외적인 정책을 오스만과 연계해서 풀어 나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에르투그룰이나, 19세기에 제국을 지키고자 분투하고 이슬람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압뒬하미드 2세에 대한 사극은 터키, 나아가 중동 지역 전역에서 매우 인기 있는 사극이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여기에는 에르도안주의의 세계관이 일정 부분 들어있다. 에르투그룰이나 압뒬하미드는 선량한 무슬림 튀르크인의 지도자로서 그려지고, 그리스인이나 서구 열강은 무슬림 튀르크를 위협하는 사악한 적들이다. 이런 대중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모두 에르도안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터키의 국내 정책과 외교 정책을 오스만 제국의 역사와 상징으로 정당화하는 에르도안의 접근에 호감을 느낄 개연성은 높다. 교육의 경우에도, 에르도안 정권은 이맘 하팁 학교를 비롯한 종교 학교의 지원을 크게 늘리고, 종교계 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우선적으로 배정하고, 교과의 종교 교육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케말주의자들이 종무국의 금요일 설교를 바탕으로 용인하는 시민을 창출한 과정을 에르도안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 종무국의 설교가 주로 아타튀르크가 강조한 애국주의와 종교와 공적 영역의 분리 등, 케말주의 이념에 충실했다면, 이제는 오스만 영역 전체, 나아가 이슬람 공동체와 터키를 연결해서 생각하라는 ’문명주의적 사고방식‘과 서구를 잠재적 적으로 항상 경계하라는 노골적인 적개심 표명 등의 이전에 없었던 주제들이 전면에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2010년대를 거치며 종무국에 대한 에르도안주의자들의 장악력이 완벽해진 이후부터 이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종무국 금요 설교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숭배를 점점 언급하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터키 역사를 생각할 때 이는 정말 놀라운 변화다.
이을마즈는 케말주의 종무국을 ’디야넷 1.0‘이라고 하고, 에르도안주의 종무국을 ’디야넷 2.0‘이라고 한다. 따라서 용인되는 시민도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면서도 세부적인 차이를 보인다. Homo Diyanetus 1.0과 Homo Diyanetus 2.0은 모두 서구를 경계하고, 애국심으로 뭉쳤으며, 이슬람을 성실히 믿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1.0은 터키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서구를 경계하고, 이슬람을 구태여 공적 영역의 언어로 끌고 오지는 않으려는 이들이다. 반면 2.0은 터키 민족주의를 넘어서 신오스만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관점에서 전체 서구를 적대시하고, 적대적 세계의 생존과 문명적 자부심의 강조를 위하여 이슬람이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것을 환영한다. Homo Diyanetus 2.0은 그래도 에르도안의 개인숭배로 빠지지 않고, 경제와 권리 등 여러 지표에서 정의개발당에 대한 지지를 무조건적으로 보내기보다는 유동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에르도안주의자들이 완전히 ’원하는 시민‘은 아니다.
이 책은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가 각각 경쟁적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원하는 시민과 주체를 형성하고자 한 노력을 비교하고, 두 이념과 체제 아래에 놓인 연속성을 밝히면서 터키 현대사를 종래의 전형적인 시각을 넘어서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특히나 케말주의의 형성 과정을 서술하면서 이들이 에르도안주의나 이슬람주의보다 먼저 갖추었던 반서방주의와 ’불안한 민족‘으로서의 집단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케말주의를 흔히 친서방주의라고 간주할 때 놓칠 수 있는 오스만 제국 후기의 경험과 현대 터키의 연속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역시나 케말주의 체제가 에르도안주의 체제로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전환된 근저의 기반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명시적으로 에르도안주의의 미래를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케말주의에 염증을 느낀 청년층이 오늘날 에르도안주의의 반-헤게모니를 형성하는 결정적 인구 집단이 되었다는 것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케말주의 주체 형성 노력은 완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에르도안에게 헤게모니를 상실했었다. 하지만 이 체제가 심어놓은 세속적 삶과 서구 지향적인 태도,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히 다수의 터키인들이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르도안주의가 권위주의적으로 국가 기구를 활용한 주체 형성에 매진하면, 에르도안주의의 원하는 시민도 물론 상당히 육성되겠지만 동시에 매우 큰 반감을 지닌 미래의 반대자들을 역시 육성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터키의 보수파들이 어째서 그렇게 K-POP을 심각하게 경계하는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문화, 교육, 종교 기관과 금요 설교를 통해서 ’호모 에르도가니투스‘를 만들고자 하는 터키 정부의 갖은 노력을, 아이돌 음악이 파괴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예상치 못한 일, 그리고 당혹스럽고 기분이 나쁜 일이었겠는가.
스티븐 코트킨은 그의 저서 ’자석산‘에서 스탈린주의가 어떻게 사회주의적 인간과 주체를 형성하려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을마즈는 터키에서 케말주의와 에르도안주의가 각각 원하는 주체를 형성하려 노력한 역사를 조명했다. 이 노력들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 기구와 권력의 하향식 작동을 통해서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저자도 자신의 책이 포괄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듯이, 국가의 주체 형성 노력에 대면하는 사회와 각 행위자의 수용 및 저항은, 국가 측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서사로서 마찬가지로 비중 있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그 어떤 국가도 개입하지 않았지만, 국가의 주체 형성 노력을 모두 헝클어버리고, 국민으로 호명되는 개인을 아이돌 팬이라는 새로운 주체로서 재탄생시키는 K-POP의 막강한 힘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에르도안의 반서구주의는, 그의 가장 큰 적이 워싱턴 D.C.나 브뤼셀, 파리에 있는 게 아니라 서울에 있다는 점에서 유효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