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현대 한국 (2)

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현대 한국 (2)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던 한국의 군사화.

임명묵

한국이 과거부터 무(武)를 천시했음은 한국인에게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씨 조선의 통치 계급은 무반과 문반을 합친 ‘양반’이었지만, 명실상부 문반이 무반보다 우대받으며,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것이 고착화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무인인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였고, 문반 가문과 무반 가문을 나누는 경계선도 흐릿했다. 역설적으로 군사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높아진 임진왜란은 무관 및 무인의 지위가 더욱 낮아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비가 대거 동원이 되고, 노비 중에서도 군공을 세워 면천이 되고 무관으로 진급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무관이 문관과 동등한 지위의 ‘양반’이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무과는 양민이나 노비에게 있어서 신분 상승의 열망을 해소해주는 통로로서 기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응시자 수도 늘면서 조선시대에는 ‘만과(萬科)’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권위 있는 양반 가문에서는 무과 급제보다는 문과 급제에 집중하도록 지도했고, 조정 안에서는 무반과 문반의 분리가 품계보다도 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는 동시기 서구에서 진행되는 변화와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은 당시 지구적으로 벌어진 현상, 즉 상업 연계망의 확장과 화약 무기의 보급에 따라서 불거진 전면 무력 충돌 중 하나였다. 서유럽에서는 이 충돌이 연쇄적인 국가 간 경쟁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군사력과 상업적 부에 대한 요구를 크게 늘렸다. 군인과 상인의 지위도 그에 따라서 상승했고, 병역을 지게 된 인민들이 갈수록 더 많은 권리를 국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시적 전면전 이후에 오히려 군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낮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절정에 이르렀던 19세기 중엽, 조선에 처음 당도한 서구인들은 평민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군인의 사회적 위상에 놀라기까지 했다.

무과 응시자 및 급제자의 사회, 문화적 성격도 달라졌다. 한양에 위치한 고위 무관 가문들은 벌열을 형성해서, 신분 상승을 위해 무과에 응시하는 외부자들을 차단했다. 정약용은 한양의 벌열무반이 깡패를 고용해서 지방 출신 응시자를 구타했다고 기록했다. 지방 응시자들은 시험을 통과하기도 어려웠고, 관직에 오르는 길도 험난했다. 정약용은 이 때문에 서북 지역과 남부 지역의 시골에서 단련된 정말 훌륭한 군사 자원들과 한양의 나약한 무반 가문들이 무용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신 한양의 벌열무반은 실제적인 무용이나 군사 전문성보다도, 고전 경전의 군사 지식을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문반과 유사하게 경전의 지식에 집중하는 것은 외부인들로부터 한양 벌열무반의 지위를 보장하게 해주는 좋은 차단막이기도 했고, 그들이 문반과 어울릴 수 있게끔 해주는 교양 차원의 의미도 있었다. 조선은 무반마저 ‘유사 문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에커트가 주로 참조한 저작인 유진 박의 <조선 무인의 역사>

하지만 고종이 즉위했을 무렵, 조선은 더는 무를 천시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세기 전 조선을 굴복시켰던 강대한 청 제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패배했고, 일본은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를 치열하게 개시하고 있었다. 고종은 자신의 시대가 중국의 과거 전국시대나 다름없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어진 오랜 정책은 바뀌어야만 했고, 이는 에커트가 표현한 ‘근대 한국의 첫 번째 군사화 물결’을 형성했다. 이 물결은 조선의 식민화를 막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20세기에 이어질 조선인들의 군사적 심성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새롭게 찾아온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조선의 군사화를 최초로 시작한 이는 흥선대원군이었다. 대원군에게 충격을 준 사건은 1866년 프랑스와 맞붙은 병인양요였는데, 호랑이 포수에까지 의지해야 했던 조선의 군 제도를 개혁해야 함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삼군부를 다시 작동시켰고, 이를 군주권을 강화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삼았다. 대원군은 전국 각지의 성곽과 포대를 보수했고, 무기고에 새로운 무기를 채웠다. 이러한 군사력 정비는 병인양요 5년 뒤에 찾아온 미국의 신미양요를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군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죽은 이들을 추켜세우고, 가족들에도 보상하는 등 점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군사 개혁은 장비와 제도 차원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체제를 보수하고 활용하는 데서 그쳤고, 서구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낸 3세기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신미양요 5년 뒤에 찾아올 더욱 큰 위협, 일본의 강화도 조약 요구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은 상황을 급격한 속도로 전개시켰다. 신사유람단이 근대 문물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과도 유사했던 이런 시찰단들은 메이지 신정부의 다양한 근대화 조치들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군사 시설과 제도도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일본의 군대 역사, 조직, 병력, 제도, 훈련 등을 상세히 서술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선은 일본군 체계를 상대적으로 훨씬 신속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 익숙한 언어(특히 한문)를 통해 자신의 근대군 체계를 건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식들이 실효성이 있는 대대적 군사 개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조선의 대다수 관료들은 개화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종이 대원군의 뒤를 이어 군사 개혁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대원군이 병인양요를 통해 시작한 군사화의 물결은 강화도 조약 뒤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평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온 강화도 갑곳돈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881년, 개혁을 총괄할 중앙 관청인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1880년대 실제 개혁의 추진은 미미하게만 진행이 되었다. 카터 에커트는 통리기무아문과 군무사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군사화의 전조로 평가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갑오개혁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를 딛고, 한국이 청일전쟁에서 청을 물리친 일본의 영향 하에서 개화에 착수하겠다는 상징이었다. 갑오개혁 정부는 메이지 일본이 내세운 부국강병의 기치를 마찬가지로 내걸고, 군부를 새롭게 설치하여 이후 군사 개혁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고종은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자신의 전제군주권을 침해하려는 시도로서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적어도 청을 꺾은 일본을 보며 군사력의 필요성만큼은 공감했다. 동학농민운동과 의화단 운동,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도 세기 전환기의 조선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로 느껴졌다.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군사적 표식과 상징, 언어가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의례에 등장하게 되었다. 고종이 궁궐에서 환구단까지 행차할 때, 행차 길 전체를 군인이 도열하고 있었다. 제국의 새로운 연호 ‘광무’의 무자에는 전면에 등장한 ‘무력’이라는 함의를 읽을 수 있었다. 강력한 전제군주를 꿈 꾼 고종은 1899년에 원수부를 창설하여 갑오개혁 정부에서 만들어진 군부를 능가하는 중앙집권형 군 조직을 설치했다. 원수부의 막강한 권력은 예산에서부터 드러났는데, 1896년 국가 총수입의 16%를 차지하던 군부는 1898년에 28%로 늘어나고, 1901년에는 41%로 늘어나 을사조약 시기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원수부는 오직 현역 군인만 근무할 수 있는 몹시 군사주의적인 조직이기도 했다. 검은색 유럽식 군복을 입은 원수부의 고위직들과 황제와 황태자의 모습은 이전 조선 시대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직 건설 및 개편에 가장 큰 영향력을 해사한 것은 역시 일본인들을 필두로 한 외국인들이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의 영향 하에서 그 유명한 별기군이 창설되었으며, 임오군란부터 갑오개혁 시기까지는 원세개의 지도 하에 청군의 제도가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군이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보여준 형편없는 실력은 근대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청군식 개혁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갑오개혁부터 다시 주도권을 잡은 일본군은 조선군을 근대식으로 새롭게 훈련시켰다. 거의 대부분 한양 주둔군에만 해당되었던 근대식 군제는 점차 지방에까지도 확장되었다. 1895년부터 1905년 사이의 10년 동안 군사화는 더욱 앞으로 나아갔는데, 이를테면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한양 거리 어디에서나 군인을 만날 수 있다고 적기도 했다. 1895년 2000명으로 시작한 조선군은 1900년대 초에 26000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고, 상당수는 한양 바깥 지역의 요충지에 주둔했다.

물론 이 모든 노력의 실제 효과는 역사의 진로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대한제국 재정은 취약했고, 징병제도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러일전쟁, 을사조약, 1907년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은 일본에 사실상 저항하지 않았다. 러일전쟁 개전 초기,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하기 시작한 순간을 목격한 캐나다 언론인 맥켄지의 기록은 몹시 시적이다. “그 추웠던 2월의 밤에, 얼어붙은 해안가에 서서 상륙지에서 이글거리는 석탄과 파라핀 화력으로 드러난 일본 보병의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한국의 역사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에커트는 너무나 무력하고 무의미해보였던 구한말의 군사 개혁이 이후 한국 역사에 찾아올 훨씬 심원한 변화의 기원임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지적한다.

“17세기 초 이후 처음으로 군대가 다시 조선인의 주요 관심사,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의 초점에 놓이게 되었다. 명치 일본이 달성한 ‘부국강병’을 모방하려는 노력은 조선인들에게 유럽과 일본 군사 제도 및 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훈련법을 수용한 제1세대 군 장교를 양성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더 주목하는 것은 실패한 대한제국의 제도적 군사화 자체보다도, 그 과정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심성 변화다.

“이 시기에는 국가만이 군사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침략과 점령이 조선의 공적 제도를 군사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그것은 또한 조선 문화의 군사화에도 기여하여 군대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시을 낳게 했고, 이는 불운한 대한제국 자체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것이었다.”

이미 일본군은 203 고지에서 러시아군과 근대적 전면전을 벌이고 승리했다. 고종이 좌지우지하는 전제군주정 대한제국이 뒤늦게 이를 따라가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수세기 동안 천시하던 군인과 무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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