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국가 중국': 간양의 <문명 국가 대학>에 관하여

'문명 국가 중국': 간양의 <문명 국가 대학>에 관하여

현대 중국의 새로운 지적 도전과 한국

임명묵

이 글은 제가 참여하고 있는 모 세미나에서,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중국 사상가 간양(甘陽)의 저서 <문명 국가 대학>을 소개하는 글에 제가 작성한 답글입니다.

저는 이 책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세미나에서 발제자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바를 아주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중국은 단순한 국민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 전통 위에 서 있는 문명-국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통삼통, 즉 정치의 사회주의, 경제의 자유주의, 문화의 보수주의라는 세 전통을 일통하여 국가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중화 전통을 계승한 현대의 문명-국가다. 따라서 서구의 리버럴, 신좌파 경향을 추종하기보다는,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보수주의자들, 예컨대 앨런 블룸, 레오 스트라우스, 새뮤얼 헌팅턴 같은 지식인들을 공부할 때 더욱 풍성한 시각을 얻을 수 있으며, 대학 교육은 중국 고전과 보수 전통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표준 교양을 제공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시진핑 정권의 관방 이데올로기와 매우 합치하는 사상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오주의 경제 정책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재발굴하고, 이를 덩샤오핑 개혁개방과 연결하는 마오-덩 통합 사관도 그렇고, 그 근간은 중국 문명의 자체적인 전통과 자주성이다라는 서구로부터의 인식론적 독립 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를 세계의 표준으로 세웠던 미국에서 트럼프의 당선으로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지금, 중국의 이러한 시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생각을 담아 답글을 작성했습니다.


  1. 초국적 네트워크를 통해 문명국가론을 재구성하기?

간양이 제시한 문명국가론, 요컨대 국가는 자국의 고유한 문명 전통 속에서 정체성을 재규정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은 저도 참 관심이 많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터키, 이란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공부를 조금은 해보기도 했고요. 중국의 경우는 왕후이, 자오팅양 등 특정 학자들의 이름이나 조금 아는 정도였는데, 간양의 주장을 덕택에 알게 되어서 그것도 매우 좋았습니다.

문명국가론과 주체적 인식론-존재론의 요구는 현재 지구적인 현상이기에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서 말한 국가들 이외에도 인도, 인도네시아, 아랍의 사례도 있지요. 최근에는 미국도 이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즈음 알렉산드르 두긴은 최대의 관심사를 ‘트럼프 혁명’에 두고 있지요. 간양이 서구도 고전에 근거한 보수주의자를 중심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데, 논란의 부통령 JD 밴스에 사상적 영향을 준 패트릭 드닌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가톨릭에 근거한 ‘포스트 리버럴’ 사상을 공격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도 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럽게 현재 유럽의 극우 정당들의 약진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도 동시에 들게 됩니다만, 이점은 아직은 잘 확신이 안 서기는 합니다. (각주 1)

조금 더 지성사적인 차원에서 기원을 찾자면, 인도 출신의 지식인 판카지 미슈라의 저서 <분노의 시대>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주 2) 판카지 미슈라는 이 책에서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볼테르와, 분노를 상징하는 루소를 병치시키고, 일종의 ‘루소의 동진’을 얘기합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송학의 서천에 대한 반발로서 루소의 동진일 수 있겠습니다) 계몽주의가 보편주의와 능력주의의 압제를 휘두르며 세계 각지에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이 양산되고, 그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며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와 능력주의에 다양한 방식으로 복수를 기획하고, 그러한 사상을 가진 세계 각지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이야기가 책의 주요 내러티브입니다. 독일 낭만주의와 이탈리아 마치니주의, 이스라엘 시온주의와 중동의 이슬람주의, 인도의 힌두트바가 계속해서 얽힙니다. 바이마르 시기의 보수 혁명론이나 유럽을 휩쓸었던 파시즘 사상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죠. 책을 읽은 지 4년이 지나서 자세한 내용은 많이 잊었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의 경우 루쉰에 주목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양의 문명국가론을 지성사적인 하나의 계보로 엮어본다면,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에서 루쉰을 거쳐서 쑨원으로, 그리고 장제스의 신생활운동과 마오주의로, 마침내 현재의 신좌파와 문명국가론으로 이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량치차오와 타고르, 쑨원과 레닌주의, 장제스와 독일 우익 사상 등 현재 중국 신좌파/문명국가론도 트랜스내셔널한 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알렉산드르 두긴이 대표적인 예일 것 같고, 간양이 언급한 헌팅턴도 중요한 사례겠습니다. 그러고보면 두긴도 헌팅턴을 매우 중요한 참조로 자주 인용합니다. 혹은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요? 근대 중국 사상에서 근대 일본의 영향은 매우 지대합니다. 그리고 문명국가론과 고유의 인식론, 존재론도 사실은 1930년대 교토학파나 일본 낭만파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각주 3) 왕후이 같은 경우에는 또 다른 대안적인 역사 이론인 나이토 코난의 송 근세론을 비판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간양이 내세우는 중국의 독자성, 고유성, 우월성은 이러한 트랜스내셔널한 연결고리를 계속 밝혀내며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중국의 정치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양이 드는 정치의 사회주의(레닌주의)-경제의 시장주의-문화의 보수주의라는 현대 중국의 삼각형은 사실 중국이 고유하게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제레미 프리드먼은 그의 저서 <혁명이 무르익다: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소련이 1970년대 말에 냉전 제3세계 정치를 통해서 매우 유사한 통치 방법론에 도달했다고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각주 4) 요컨대 냉전과 탈식민의 정치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수렴된 일종의 일반론일 수도 있고, 나아가 중국, 소련, 유고슬라비아, 인도 등 제2세계-제3세계의 대화 과정에서 구성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오의 분권화가 소련으로부터 독자성을 모색하는 시도였다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조금 과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1958년에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이 있었다면 1957년에는 흐루쇼프의 인민경제회의(sovnarkhoz) 개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주 5) 계획의 지역 이양과 기층 인민 참여 중시, 국가 단위의 계획 통제와 중앙 관료제의 전문성 사이의 길항은 소련이 건국 당시부터 직면한 경제 관리의 문제였고, 신중국이 과연 소련에서 확립된 논쟁의 구도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지는 회의적인 감이 있습니다.

여담으로 그가 시도하는 마오와 덩을 통합해내는 작업은 시진핑 시기에 등장한 관방의 신중국 역사 담론과 일치한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다들 명확히 와닿는 게 없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진핑의 의의가 전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보이는 두 사조, 즉 마오의 평등주의와 기층 대중주의, 영구적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홍군 혁명론과 덩의 전문가와 경제성장 중시, 서구 중심 국제 질서 참여를 통한 안정화라는 선부론을 통합해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2010년대 중국의 신좌파와 신우파를 시진핑을 통해 순치시키고, ‘탈정치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서구를 향한 간양의 ‘정치성’은 중국 국내를 향한 ‘탈정치성’과 병행하는 느낌이 들고, 어느 것이 시진핑의 중국에서 더 중요한 동인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2. 문명의 인식론?

저는 서구의 탈식민론이 서구중심성을 도리여 강화한다는 간양의 지적에는 십분 동의합니다. (서양중심론을 비판하며 서양중심론을 강화한다). 탈식민 연구 경향에서 ‘탈식민적 주체’는 당연하게도 주된 연구 사조에 맞게 ‘선택’되며, 그 선택의 과정에서 서구의 인식론, 존재론적 헤게모니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주된 주제가 아니니 소략하겠습니다).

그런데 B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여전히 국가와 문명을 서열화하는 간양의 시각이 서구 중심주의 문명론과 닮아있다는 다른 각도에서도 얘기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열화 자체는 문명 사회가 지닌 인식론의 본질이고, 그래서 서구 중심주의 문명론과 간양의 중화 중심주의 문명론이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각주 6) 예컨대 저는 이란을 여행하면서 그곳 보수파들에게서 이슬람 문명의 우월성을 (서구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자와 부처에 대비해서) 강조하는 많은 식자층을 만났습니다. 서구에서 그것은 19세기에는 ‘문명화의 사명’으로 드러났고 오늘날에는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나 IMF/세계은행의 GDP 통계, 혁신 지수 등으로 드러나고 있겠지요. 문명적 인식론의 서열화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제임스 스콧이나 월터 미뇰로처럼 문명이나 국가가 아닌 다른 준거가 필요할 것 같고, 현재 유라시아 각지나 트럼프주의의 비자유주의 인식론이나 서구의 자유주의 인식론은 어떻게든 여러 가치에 위계를 부여하며 서열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서양을 공부하려면 보수파를 읽으라고 말하는 그의 관찰도 저는 적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현재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향한 반격은 어쨌든 포퓰리스트 우파들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19세기에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것이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라고 할 때, 20세기에는 사회주의-좌파가 그 주도권을 가졌고, 작금 21세기에는 그 주도권을 보수-우파가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요? (각주 7) 특히 지금 중국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를 자유주의를 향한 반발이라는 틀로서 하나로 융합해내는 것이 중요한 지적 과제일 것 같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진핑 사상도 같은 맥락일테고요. 이란 이슬람 공화국도 마찬가지의 지적인 조류를 관찰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의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건 ‘자유주의 패권이 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위기의식일텐데, 정말로 자유주의 패권의 보편성이라는 ‘외부의 적’이 사라진다면 그 동거 체제는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이며, 국내의 통치성 위기는 기존의 통치 논리로 계속 무마할 수 있을지도 질문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간양에게서 더 알고 싶은 건 민족적, 혹은 문명적인 정치경제에 대한 입장입니다. 마오의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인민공사라는 분권화 대중혁명, 등소평의 향진기업과 분권적인 경제특구를 통한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기의 폭발적 경제성장, 나아가 시진핑의 국진민퇴와 공동부유까지 신중국의 정치경제는 몇 차례의 단절을 겪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간양과 시진핑이 강조하듯 명백한 연속성이 있기도 하죠. 이 연속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중화 제국식 정치경제의 문명적 장기지속을 논할 수도 있을까요? 중화 제국의 정치경제는 흔히 화북에서 형성된 강압력(coercive power)와 강남에서 형성된 상업 자본의 결합이자 길항으로 설명되고는 합니다. 이 정치경제를 작동시키는 제도와 문화는 양유음법에 민중의 도교를 들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청말에서 현재까지 근현대 중국의 정치경제사를 이러한 다양한 전통의 장기 지속으로 얘기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고(남중국해의 화교 자본, 과거제를 통한 능력주의적 관료제, 해관 체제, 기타 수많은 요소들), 이 작업이 설득력 있게 진행된다면 ‘포스트 리버럴’ 세계에서도 통치 헤게모니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를테면 요나하 준의 송과 에도의 이분법은 문명적 정치경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적 작업이라고 여겨지고요. (각주 8)

서구, 중국, 일본의 고등교육을 비교하는 부분에서는 당연히 한국의 사례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국의 고등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날을 새워야할 것이고 진단도 제각기라 백가쟁명이 펼쳐질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고등교육에서는 공동체가 합의한 일정한 공통 커리큘럼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공 간 칸막이는 물론이고 교양의 경우도 어떤 과목을 들어도 되는 현재의 제도는 대다수 학생에게 중요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꿀강 찾아먹기’ 같은 강의 쇼핑이 되고, 중구난방인 졸업 요건은 매학기마다 학생들에게 졸업 전쟁을 치르게 만듭니다. 차라리 통합된 리버럴 아츠 교육을 제공하는 게 학생을 위해서도, 공동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중국 공산당도 없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과거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아니기에 이러한 합의된 커리큘럼이나 지식 집합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 고유의 관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굳이 한국 고유의 관점이 있어야만 하는가, 혹은 있기는 한가라는 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절대적 보편성을 전제하고 북미 학계를 그 수위에 놓으며 지역적 관점에 따른 고유한 지적 작업을 평가절하하는 풍조는 시대적으로 미국 단극패권이 인식론 차원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현재 상황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학문도 그런 관점을 채택했기에 미국 학문의 영원한 하위 파트너로 남았으며 한국의 대학은 유학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적어도 한국 고유의 관점에 따른 공동체의 합의된 지식 체계를 만들 필요는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한국의 관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창비주의일까요, 아니면 창비주의에서 파생된 동아시아론일까요? 일본과 같은 국학이나 중국과 같은 한학이, 전통이 최소 두 세차례 이상 갈아 엎어진 한국에서 가능할까요? 이점에서 분명한 회의론이 발생하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그래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를 다시 살려내고 과거 창비주의 동아시아론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주 9) 제가 보기에 한국 학계는 중국 학계나 일본 학계에 비해서 이미 북미의 최신 학문을 수입하여 소화하는 데서 상당히 앞서 있습니다. 중국 학계, 아니면 특히 일본 학계가 고유의 관점에 천착하여 굉장한 깊이 있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영어권 아카데미아의 언어에서 활약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점은 오히려 고유한 관점의 부재라는 한국의 약점이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K-POP의 지구적 성공도 유사한 기제로 달성되었죠). 따라서 한국 지식 생산은 더 지역적인 맥락을 더하는 방향으로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한국은 국학을 할만한 독자적인 지적 자원과 깊이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현저히 모자라기에, 역으로 중국 문명을 수용하고 일본 제국의 통치를 받아 미국을 추종하는 한국이 일종의 지적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토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말한 유불선 포함삼교를 빌려오자면 일중미 포함삼제국의 플랫폼으로서 한국이랄까요.

발제문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일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를 다 읽고 장탄식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저자 후기를 보면 가라타니가 『세계사의 구조』였나를 중국에서 강연할 때, 왕후이가 중화 제국을 같은 렌즈로 설명해줄 수 없냐고 요청했고, 가라타니가 친애하는 동학의 부탁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유목과 정주의 상호작용을 통한 중화 제국의 형성을 자신의 교환양식 이론으로 설명해내며 ‘제국론’ 자체를 발전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탄식을 했던 이유는 가라타니나 왕후이에 비견되는, 동아시아 지적 공론장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역시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비가 오키나와와 대만이라는 경계지대를 끌어들여 동아 삼국의 지적, 나아가 정치적 중심을 한국에 놓고자 했던 야망을 불태웠던 그 과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래서야 동아시아 공론장이 아니라 日中 공론장 아닌가. 등려군과 나카모리 아키나의 시대에 내세울 변변찮은 가수가 없었던 X세대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1990년대에 등려군이나 나카모리 아키나는 없었어도 K-POP을 통해 일중 문화를 통합해내고 나아가 유라시아와 서구에도 통용되는 문화적 진전을 이루어낸 것을 보자면, 일중미 포함삼제국을 통해 학술 담론의 주도권을 얻어내고 한국 공동체의 지적, 담론적 합의를 이루는 것도 아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K-POP을 만들어냈듯이, 지금의 공화국 위기도 새로운 지적 작업을 해낼 수 있는 모멘텀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이 중국, 일본, 미국의 담론을 종합해 한국 자신을 설명해내어 세계 공론장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면, 저 간양 선생의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제국적 호방함과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되놈의 오만함’에 우리 조선인이 한 방 먹여주는 것이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1) Christophoer Coker의 The Rise of the Civilizational State는 문명국가론을 잘 개괄해주는 영어권 책입니다. 벤저민 타이텔바움의 『영원의 전쟁』은 두 전통주의(Traditionalism) 사상가인 두긴과 미국의 스티브 배넌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터키의 경우 간양은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이야기한 도식을 그대로 따르는데, 최근에는 케말주의 혁명의 반서구주의적 측면을 조명하고 에르도안과의 연속성을 이야기하는 연구도 나오고 있습니다. Samuel J. Hirst의 Eurasia's Discontent: Soviet and Turkish Anti-Westernism in the Interwar Period 및 Yihsan Yilmaz의 Creating the Desired Citizen: Ideology, State and Islam in Turkey가 있겠습니다. 패트릭 드닌은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와 Regime Change: Toward a Postliberal Future.

2) 판카지 미슈라는 『분노의 시대』 이외에도 『제국의 폐허에서』도 썼는데 여기서는 이슬람의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중국의 량치차오를 주요 인물로 내러티브를 끌고갑니다.

3)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 초극론』, 장인성 선생님의 논문 『세계사와 포월적 주체: 고야마 이와오의 역사철학과 근대비판』. Kosuke Shimizu의 The Kyoto School and International Relations: Non-Western Attempts for a New World Order.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중동의 범이슬람주의의 서구 근대성 비판과 그에 기반한 정치 및 운동에 대해서는 Cemil Aydin의 The Politics of Anti-Westernism in Asia: Visions of World Order in Pan-Islamic and Pan-Asian Thought.

4) Jeremy Friedman의 Ripe for Revolution: Building Socialism in the Third World. 소련이 갖고 있던 시장 지향적(?) 성격에 대해서는 Oscar Sanchez-Sibony의 Red Globalization: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Soviet Cold War from Stalin to KhrushchevThe Soviet Union and the Construction of the Global Market: Energy and the Ascent of Finance in Cold War Europe, 1964–1971.

5) Kwangyeol Ko, Khrushchev's Perestroika: The Sovnarkhoz Reform in the Soviet Dnipropetrovsk, 1957-1965

6) 이를테면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에는 청제국이 문명의 담론으로 어떻게 대만의 생번인과 신장의 준가르인들에 위계적 인식을 드러냈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죠. 건륭제의 마지막 원정에는 준가르인을 ‘쥐떼’로 묘사하고 ‘초멸(剿滅)’ 해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문명의 인식론이기도 하고, 상위의 가치로 구성원의 차이를 재생산하는 위계적 정치체인 ‘제국’의 인식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데릭 쿠퍼의 『세계제국사』.

7) 파시즘의 반자본주의성에 대해서도 논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스테판 링크의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 혹은 재니스 미무라의 『제국의 기획』, Aaron Moore의 Constructing East Asia: Technology, Ideology, and Empire in Japan’s Wartime Era, 1931-1945. 한국의 경우는 역시 Carter Eckert의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 1866–1945. 또 Sungik Yang의 Korea’s Fascist Moment: Liberation, War, and the Ideology of South Korean Authoritarianism, 1945–1979에도 해방 정국부터 유신 시대에 이르기까지 보수 우파에서도 일관되게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를 혐오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슬람주의 좌파도 보수파가 느끼는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사회주의까지도 포용한 결과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길항하는 모습은 Asef Bayat의 Revolution without Revolutionaries: Making Sense of the Arab Spring에 잘 나옵니다.

8) 요나하 준, 『중국화하는 일본』. 러시아의 경우도 차르와 보야르로 이루어진 가산제, 재분배 국가라고 생각한다면 모스크바 공국에서 소련을 거쳐 현재 푸틴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John Arch Getty의 Practicing Stalinism: Bolsheviks, Boyars, and the Persistence of Tradition 이런 책도 있고요. 중국의 경우 클라우스 뮐한의 『현대 중국의 탄생』이 청제국부터 지금까지의 장기지속을 다룬다고 하는데 제가 아직은 읽지 못했습니다.

9) 창비의 동아시아론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은 최원식, 백영서 편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백영서 동아시아담론의 계보와 미래: 대안체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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