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중부의 소도시 골파예간에서 생활 문화 체험
인구 5만 소도시 중산층의 삶을 보다
곰에서 보아야 할 것은 꽤 보았으니 이제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기로 한다. 원래라면 사파비 제국의 황도 이스파한을 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신년 노루즈를 앞두다 보니 교통편 구하기도 힘들고 여러모로 이동이 난감했다.
그러다가 문득 테헤란에서 하루 정도 만났던 친구 생각이 났다. 테헤란 대학교 학생이었는데, 노루즈 명절 기간 고향에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그 고향이 어디인가 하니 이란 중부의 소도시 골파예간. 나도 살면서 처음 들어본 곳이었다.
콤에서 혹시 너희 집 놀러가도 되냐고 문자를 남기니까 오면 너무 반가울 것이라고 환대를 해주었다. 다음 행선지를 그렇게 골파예간으로 정하고 교통편을 알아보아야 했다. 다시 강조하자면 노루즈라서 버스 같은 걸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까지 대중교통이 많기라도 하겠나? 아라크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골파예간까지 다시 교통수단을 알아보아야 하나 고민이 있었다.
그래도 어찌 출발은 할 수 있었다. 밤에 숙소에 돌아왔는데, 로비에서 담배를 피던 아저씨 하나가 또 호구조사를 실시하길래 성실히 응해 주었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나 택시 기사인데 너 마음에 든다. 싼값에 해줄테니 다음 행선지까지 태워줄까? 다음 행선지 어디야?"
처음에는 좀 믿기지가 않아서 반신반의 했는데, 떨떠름하게 "골파예간입니다"라고 말하니 정말 싼 값을 불러주셔서 아 성도 콤에서 귀인을 만나는구나 하면서 다음날 낮에 보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골파예간으로 250km의 여정을 시작. 확실히 중부 지역으로 내려오니 슬슬 건조한 이란 고원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교롭게도 골파예간에 가는 길에는 인구 7만 명의 소도시인 호메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왜 호메이니겠는가? '호메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마침 택시 기사도 보수의 심장 콤에서 거주하는 중년층 아저씨기 때문에 이슬람 공화국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이라서, 호메인 들러서 호메이니 가옥이나 한 번 보자고 설득했다. 서기 1900년에 바로 이 집에서 세계를 뒤흔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직 녹음이 우거질 계절도 아니고, 이날은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기에 집이 더욱 황량해보였다. 그래도 혁명의 아버지이자 국부의 생가인데, 나이 한 20살쯤 되어 보이는 껄렁한 위병 한 명을 빼면 내부에 직원도 없어 보였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 당시 분노한 시위대에 의하여 가옥이 전소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당국은 철저히 부인), 그 영향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나 우중충한 생가..
이분이 택시 기사 아저씨 하미드. 40대 후반 정도 되는 나이인데 거의 장성한 자식이 둘 있다고. 신실한 시아파 신자라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를 열 번이나 갔다고 한다. 심지어 이번 명절 끝나고 또 갈 거라고... 비행기표가 그렇게 싼가? 아니면 육로로 간다는 건가? 이걸 물어봤어야 하는데 까먹었다.
콤에서 호메인으로, 호메인에서 골파예간으로 가는 길... 싼값에 하루 종일 운전해주시고 뒤에 돌아올 때는 또 빈 차로 공쳐야 할텐데도 쾌활함을 잃지 않으셔서 너무 감사했다.
골파예간 중앙 광장에서 약속해둔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 말에 따르면 골파예간은 이란 전역에서 케밥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구 5만 명의 조치원급에 불과한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골파예간 케밥만큼은 누구나 다 안다고. 정말로 나중에 테헤란에서 진짜 캬버베 골파예거니, 그러니까 골파예간 케밥이라고 이름 붙인 가게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병천 순대와 같은 것이려니 싶었다.
해가 지고 골파예간에 도착해서 다행히 라마단 야식인 이프타르 시간이라 동네의 모든 식당이 불을 켜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나름 동네 맛집이라고 유명한 왁자지껄한 가게로 들어가서 맛있게 먹긴 했는데 사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한국인인 나로서는... ㅋㅋㅋ
이 친구가 운전을 하는 친구라서, 덕택에 자가용을 타고 '시타델'이라는 곳에 올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영어를 잘해서 시타델이라고 말했는데 페르시아어로 찾아보니 아르게 구가드, 뭐 구게드 요새라는 이름의 옛 성곽이다. 16세기에 지어져 얼추 500년이 된 이 요새는 현재 개조되어 문화 시설 및 호텔로 쓰이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면 실크로드 한 밤의 낭만인 것처럼도 느껴지는데, 저 악사 할아버지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끝없이 노래를 부르고 나보고 자꾸 춤 춰보라고 떠밀어서 곤혹스러웠다(춤은 안 춤 ㅋㅋ).
방 바깥에서 바라본 풍경. 이란 물가를 고려하면 가격이 그리 싸지는 않았다. 1박에 4만 5천원 정도 내었던 기억. 게다가 호텔 안에 과자랑 음료수 멋대로 까먹었는데 그것도 나중에 칼같이 계산 받던....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이들 견학 프로그램이 있는지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이 뛰놀고 있었다. 밤과는 분위기가 완전 달라진 게 인상적.
예전에 우즈베키스탄 여행할 때 이런 중세 성곽 + 카라반사라이(대상 숙소) 컨셉의 숙소를 몇 군데 보았던 것 같아서 익숙한 풍경이다. 물론 그때는 거기서 묵지는 않았음..
여기는 골파예간 중심부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친구가 차를 몰고 와서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고맙게도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데, 자기 집에서 며칠 묵으라는 제안을 해왔다. 가족끼리 얘기를 했는데 손님이 찾아왔으니 자기네 집에서 묵게 하는 것이 도리라서 나만 괜찮다면 며칠 여기서 같이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것. 너무나 감사하게도 넙죽 받으며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어머니의 친구분이 하는 약국에 들려서 신년 준비 물품을 받아와야만 했다. 이란인들은 하프트신(Haft-sin)이라는 물건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신년을 맞이한다. 7개의 알파벳 Sin(س)으로 시작하는 물건들이고 각각 의미가 있다.
손님이 왔으니 집에 다과를 더 보충해야겠다면서 동네 제과점을 또 들렸다. 그런데 제과점에 가니 러시아에서 내가 수도 없이 마주쳤던 콘페티(Konfety, 단 과자) 가게랑 완전히 똑같은 느낌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란에서 차를 마실 일이 정말 많았는데, 이란에서 단 과자를 칭하는 말인 쉬리니(Shirini) 한 접시에 차를 마시는 그 모습이 러시아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과 정말 비슷하게 겹쳐 보였다. 역시 유라시아는 하나.
이란인들은 쌀을 많이 먹는데, 사실 한국처럼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문화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래도 이건 내가 이란에서 먹은 음식 중 국밥과 좀 흡사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호불호 최강의 이란 음식 중 하나인 페센준(페센잔)이다. 페센준은 호두, 석류, 다진 고기를 가지고 끓이는 호레쉬트인데 호레쉬트는 대강 커리 느낌이 나는 스튜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호두의 저 기름진 맛과 석류의 신 맛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이란을 대표하는 호불호 음식으로 명성을 떨친 편이다. 지역에 따라서 기름진 맛과 신 맛의 밸런스를 잡는 맛이 다 다르다고 한다. 이란 연구하는 학교 선배가 이란에서 페센준 먹고 절레절레 했다길래 나도 그 맛이 너무 궁금하던 차, 이렇게 먹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 참고로 나는 맛있게 먹었다.
뭔가 닭도리탕이랑 비슷한 맛이 날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양념을 한국의 그 갖은 양념을 쓰지 않으니까 뭔가 맛이 심심하긴 했다. 그래도 이 동네 특유의 향을 느끼며 맛있게 먹었다.
이제 환갑 정도 되시는 알리 레자 자번박트 선생님. 이 집의 가장이시고 골파예간에서 소규모 건축 자재 공급 회사를 운영하고 계신다. 사무실에 놀러가서 차 한 잔 하는데 이슬람 공화국에 충성하는 어른들이 우글우글 몰려들면서 나에게 정치 얘기를 마구마구 물어보았다. 그 광경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하셨던...
옆에는 그의 아들 마흐디. 친구의 동생이다. 친구가 27살이니 10살 정도로 꽤 터울이 있는 편. 17세 고등학생이고 이란 힙합을 즐겨 듣는 친구다.
TV를 틀면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만 틀어주는 채널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아 송강호 선생님 그립습니다..
친구의 서재를 둘러 보았는데, 테헤란대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책들은 거기에 있지만 여기에는 예전에 읽던 책들이 몇 권 남아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하나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도 있었다. 딱 내가 고등학생 때이던 12~13년 전 무렵에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이다. 이란과 한국을 잇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파울로 코엘료의 공동 유행은 대체 어디가 기원인 걸까? 역시 미국인가?
이 친구 말을 들어보니 집이 대단히 잘 사는 것은 아니고, 전형적인 소도시 중산층인데 생활 수준이 꽤 괜찮은 것 같아서 놀랍긴 했다. 국토가 넓으니까 테헤란 바깥에서는 이렇게 넓은 집에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어찌어찌 널찍한 TV에, 자식들 노트북과 휴대전화, 자가용 정도는 꾸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란의 불평등과 빈곤도 상당한 편이라 이 정도 되는 생활 수준을 못 누리고 사는 사람도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일단 4인 가족이 필수품은 다 갖추고 사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중산층의 삶과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아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버님이 책장에서 주섬주섬 꺼내며 한국에서 손님이 왔으니 보여주어야 한다는 책. 페르시아어 제목은 "모든 길은 금으로 포장되어 있다"였던 것 같은데,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영어판 제목이 그거라고 한다. 영어 중역본인 셈인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세상에 내가 이걸 이란의 인구 5만 명 소도시에서 보게 될 줄이야. 대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감탄..
아까 제과점에서 사온 다과와 대추야자, 과일과 차까지 야무지게 준비된 테이블이다. 솔직히 이란의 쉬리니는 너무 달아서 단 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예의상 몇 개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는 맛있어서 계속 열심히 먹었는데 계속 다과도 먹어~ 대추야자도 먹어~ 권하셔서 곤혹스럽긴 했다. ㅋㅋ
아버님 알리 레자 선생님께서 골파예간에 왔으니 우리 동네 명소들은 봐야지 하면서 같이 나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뭘 보러 가나요? 하니 메너레 바 마스제드 살주기언. 셀주크 시대(대략 1천년 전) 미나렛과 모스크를 보자고. 오토바이 한 대를 끌고 나오시더니 뒤에 타라고 하시길래 냉큼 뒤에 올라서 따라갔다.
골파예간의 상징인 골파예간 미나렛. 피사의 사탑처럼 살짝 휘어져 있는 것이 이 탑의 포인트다. 셀주크 시대에 지어졌으니 역시 대략 900년에서 천년 쯤 된 구조물이다. 인근에 바자르(시장)가 있는데, 전통 시대에는 캐러반(대상)을 안내하는 육지의 등대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생각지 못하게 귀한 건축물을 보게 되어 흡족했다.
그 다음에는 1114년에 지어진, 90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골파예간의 조메 모스크를 방문했다. 조메는 페르시아어에서 금요일을 뜻하는데(아랍어 주마), 이슬람은 금요일이 제일의 휴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중앙 모스크랑 거의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셀주크 양식인가? 건축을 잘 몰라서 알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사파비 시대보다 훨씬 투박하고 오래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조메 모스크 내부.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밖에서 간신히 찍었다. 건축물 자체는 오래 되었는데 이란 정부가 관리를 할 수가 없어서 관광지로 개발하기보다는 일단 훼손이 최대한 안 되게끔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있는 듯 하여 안타까웠다.
이토 준지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기하학 무늬를 보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