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약사 (1) - 근세 페르시아의 형성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사파비 제국까지 짧은 역사 개략
기원전 천년 경에 이미 이란 고원에는 이란인들이 거주했다. 그중 고대 왕국 메디아와 메디아를 이은 아케메네스 제국은 이란을 근동에서 가장 강한 민족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조로아스터교라는 제국의 원리를 발전시켰는데, 이 신앙은 선과 악의 끝없는 대립과 종국적으로 다가오는 선의 승리라는 세계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불과 빛을 숭배했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배화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그들의 사원도 ‘불의 사원(Ateshgah)’였다. 조로아스터교는 단순한 자연 숭배에 머물고는 했던 고대 신앙을 추상적인 원리를 지닌 고등 종교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고, 근동 종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아케메네스조가 멸망하고, 헬레니즘 계통의 셀레우코스 왕조 통치를 받은 뒤에야 이란에서 다시 제국이 등장할 수 있었다. 북동부 유목민들의 왕조였던 파르티아와, 남서부에서 파르티아를 대체한 사산 제국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지중해 세력인 서쪽의 로마와 맞서면서 중동에서 패권 쟁패를 벌였다. 소위 ‘고대 페르시아’ 혹은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라고 불리는 시대의 유산은 이란이 여러 이민족에 정복된 이후에도 꿋꿋이 이란인들의 자부심으로 남게 된다.
7세기 비잔티움과 사산 제국의 영향을 받은 아랍인들이 이슬람을 바탕으로 제국을 건설하면서 이란은 다시 한 번 이민족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헬레니즘 제국과 아랍의 이슬람 제국 사이에는 차이가 명확했다. 그리스인들의 지배는 단명하였음은 물론이고 이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새기지 못했다. 하지만 아랍의 지배는 수백 년을 이어갔으며, 결정적으로 이란인들의 종교를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이란 역사의 진로 전체를 바꾸었다. 우마이야 칼리프와 그 뒤를 이은 압바스 칼리프는 북아프리카에서 인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며 세계 모든 이들을 이슬람 신앙 공동체로 아우르는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로마의 시리아, 이집트와 페르시아 제국의 이란이 아랍인들의 통치 하에 합쳐지고, 중국, 인도, 서유럽의 물산과 지식이 칼리프의 보호 아래 집결되면서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가 펼쳐졌다. 아랍인들은 강력한 무력과 신앙을 지녔으나, 광대한 땅을 다스리는 정교한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 궁정 관료와 기술자,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관계로, 이슬람 황금기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란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뻗은 ‘이란 세계’에서 페르시아 학자들과 문학인들은 오늘날까지 인류 지식의 근간을 이루는 대업적을 남겼다.
압바스 제국은 황금기를 누리며 분권화되고 있었다. 태수, 혹은 총독 직위를 받은 지역 유력자들은 모든 무슬림의 지도자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대리인’인 압바스 칼리프에 명목상으로 종속하지만, 자체적인 왕조를 세우며 새로운 권력의 중심을 형성했다. 이란 동부에서는 타히르 왕조, 사만 왕조 등이 등장하면서, 바그다드의 아랍 중심과는 구별되는 페르시아계 정치체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동 역사의 새로운 주역이 등장하게 되니 북방의 튀르크인들이었다. 칼리프, 혹은 지역 유력자들은 자신의 친위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 북쪽의 이교도 집단에서 끌려온 노예 병단을 만들고는 했다. 코카서스의 체르케스인도 많았지만 주력을 형성하는 이들은 튀르크인들이었는데, 이들 노예 병단이 자신의 군주를 제압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는 일이 압바스 칼리프가 허약해지면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이들 튀르크족은 동쪽에서 이란을 거쳐서 중동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문명의 표준을 페르시아 문화로 수용하게 되었다. 투르코-페르시아 문화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이란인들의 자부심인 대서사시 ‘샤나메’ 또한 투르코-페르시아 계통의 가즈나 왕조 하에서 집필되었다.
튀르크인들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오구즈 튀르크들이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고, 이들은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터키 동부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중에서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창건된 셀주크 왕조는 중동을 거의 통일하고, 십자군과 싸우면서 서아시아에는 사실상 튀르크 시대가 개막되었다. 하지만 그다음 도래한 세력은 튀르크 세력처럼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중동에 유입되지 않았다. 더 동쪽에서 찾아온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이란과 터키에 이르는 지역을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항복하지 않은 도시들은 모조리 불에 타고, 도시민도 잔혹하게 몰살 당하면서 이란 세계에는 문명의 대재난이 찾아왔다.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에는 이란계 농민과 도시민의 영역이 대폭 축소되고, 유목민인 튀르크인에 급격하게 동화되면서 오늘날 ‘스탄’ 지역이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는 튀르크 세계가 되었다(하지만 스탄이라는 말은 땅을 뜻하는 페르시아어로 여전히 페르시아의 흔적은 남아있다).
몽골의 대파괴는 이란에도 그야말로 파멸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수천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 관개 시설이 파괴되고, 유서 깊은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란의 대규모 농경지는 유목을 위한 초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민족적으로는 튀르크화되고 종교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이란 문화를 장기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튀르크-몽골 군사 지도자들 간의 쟁패가 몽골 제국의 붕괴 시기에 가속화되었는데 그중에서 다시 한 번 위명, 혹은 악명을 떨친 인물이 절름발이 티무르, ‘티무르 이 랑’이었다. 티무르 역시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라는 동부 이란 세계에 거점을 마련하고 서쪽으로는 굴기하는 오스만 제국을 응징하며 이란 세계를 다스렸다.
티무르 제국의 해체 이후 다양한 유목 부족의 세력 쟁패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오늘날 이란의 기틀을 다질 집단이 등장한다. 붉은 모자를 쓰고 다녀 ‘붉은 머리’라는 뜻의 키질바시로 불리었던 사파비의 전사들은 시아파에서 얘기하는 종말의 날이 임박했으며 그때가 되면 평등한 세상이 열린다는 믿음을 설파했다. 신흥 종단은 오랜 혼란기가 이어지고 있던 동부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에서 급속히 세를 확대하였다. 사파비는 페르시아의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했고, 마침내 1501년에는 이스마일 1세가 14세의 나이에 일 칸국의 수도였던 타브리즈에 입성해 페르시아의 샤(황제)를 선포했다.
서아시아에서는 100년 전에 야심 찬 신흥국으로 발돋움하던 오스만과 이미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가 맞붙은 것과 유사한 정치적 구도가 펼쳐졌다. 다만 이제는 서쪽의 오스만이 노련한 제국이었고, 과거 티무르 땅에 가까운 동쪽의 사파비가 야심 찬 신흥국 역할을 맡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스마일은 오스만의 영역인 동부 아나톨리아의 시아파들과 유목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교리를 선동하면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국가 건설과 강화 정책이 자신들의 자치가 침해한다는 이유로 제국 정부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던 상태였다. 새로운 카리스마적 군주인 이스마일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괜찮은 선택일 수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키질바시 반란군이 오스만 동부를 위협했고, 당시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는 사파비의 도전을 더는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셀림은 사파비 국경 지대의 시아파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나섰고, 마침내 양측 군대가 1514년에 찰드란(오늘날 이란-터키 국경)에서 맞붙게 되었다.
셀림의 찰드란 전투는 그의 할아버지가 지휘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비하면 유명세가 떨어지지만, 군사사적 중요성으로 본다면 결코 콘스탄티노플에 못지않았다. 찰드란에서 셀림이 지휘하는 예니체리와 포병대는 이스마일이 이끄는 사파비의 기병대에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전장에서 유목민 군대의 우위가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었다. 찰드란의 승리를 발판으로 셀림은 사파비의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점령했으나, 너무나 먼 원정 거리에 예니체리가 반발을 일으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마일은 찰드란 전투의 패배가 불러일으킨 수치와 분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스마일의 미소와 별개로 사파비 제국은 그 뒤에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마치 오스만이 앙카라 전투의 패전을 딛고 더욱 강해진 것처럼 말이다. 초대 이스마일과 그 뒤를 이은 2대 타흐마스프, 5대 압바스 샤 치세를 거치면서 사파비는 종말론을 믿는 수평적 무력 집단에서 위계적 체계를 갖춘 국가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제국의 시아파 교리는 점차 보수적이고 예측 가능한 형태로 옮겨갔고, 통치를 위해 꼭 필요한 페르시아인 관료, 상인, 지주들이 중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무력을 지닌 키질바시들의 저항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촉발되기도 하였으나, 압바스의 중앙집권화 노력으로 키질바시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다. 수 세기 만에 페르시아 땅에 안정적 질서가 자리 잡자 생산과 교역이 번창했고, 사파비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먼 곳에서 찾아온 유럽 상인들에게 판매하여 큰 이득을 보았다. 유럽인들 입장에서는 사파비가 동쪽에서 오스만을 견제해줄 강력한 힘으로 남아줘야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는 데 유리했다. 압바스는 이스파한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국제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투자해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로 도시를 가득 채웠다. 그 덕에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런 사파비의 번영은 내부적 안정뿐 아니라 군사적 우위를 통해 외부적 안정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찰드란에서 얻은 교훈을 빠르게 채택해 반격에 나섰다. 새로운 전법은 특히 동쪽의 위협으로 부상한 우즈벡족과 상대할 때 유용했다. 이스마일 샤는 찰드란에서 패배하기 전인 1510년에 우즈벡족의 강력한 지도자 무함마드 샤이바니를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에서 패퇴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샤이바니 사후에도 우즈벡족은 동쪽 변경을 계속해서 위협해왔다. 이스마일의 뒤를 이은 타흐마스프 샤는 1528년 잠 전투에서 화력을 통해 우즈벡 기병대를 격퇴하면서 찰드란 전투를 재현했다. 잠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동쪽의 초원지대는 훨씬 넓었기 때문에 사파비 제국에는 여전히 많은 기병대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화약 무기의 유용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파비 제국은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과 우즈벡, 아프간인들과 전쟁을 이어갔다.
사파비 제국은 이슬람 중에서도 시아파를 국교로 채택하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이란의 제국을 재건했다고 선전했다. ‘이란 세계’의 중심을 다시 ‘이란인들의 제국’으로 통합하고,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을 묶는 시아파 신앙을 주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순니파에 대한 적극적인 억압이 있었고 이는 순니파 아프간인의 침공과 내부 순니파의 반발로 인한 사파비 제국의 붕괴에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사파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를 통합하고 이란을 시아파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현대 이란을 직접적으로 형성한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시아파 사상은 무엇일까? 시아파는 본래 정통 칼리프 시대에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이는 무함마드의 혈통, 그중에서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되어야 한다는 집단에서 출현했다. 반대로 순니파는 칼리프(예언자의 대리인)는 무슬림 공동체의 협의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알리는 이슬람 제국 내부의 갈등 끝에 암살되고, 칼리프는 우마이야 일족이 차지하게 되면서 알리 지지파는 격분했다. 제국의 반대자가 된 알리 지지파(시아파)는 알리의 아들들인 하산과 후세인에게 거병을 요청했는데, 하산은 우마이야 칼리프와 타협하고 은거했고, 후세인은 자신의 지지자를 찾아 이라크로 이동하던 중 우마이야 군대에 의하여 참살당했다. 이 사건은 후세인이 사망한 장소인 이라크의 카르발라의 이름을 따서 카르발라 참극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 뒤에 등장한 압바스 칼리프도 시아파를 곱게 보지는 않았다. 시아파는 제국의 이단 종파로서 핍박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시아파 정체성과 역사, 교리 모두 소수 종파라는 특성과 큰 관련을 맺었다. 먼저 시아파의 감성을 이해할 때 필수적인 것은 카르발라 참극에서 비롯된 ‘순교자’ 정체성이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정의를 위해 움직였다는 후세인은 순교자의 대표로 기억된다. 이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시아파에서는 아슈라라고 하는 특유의 애도 의식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정의를 위한 죽음’이라는 순교자 테마는 시아파 감성의 핵심을 형성하며 근대 이란 역사에서도 오늘날까지도 작동하는 상징이 되었다.
교리적인 면에서 시아파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이맘이다. 순니파에서 이맘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 데 반해 시아파에서 이맘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정통 후계자인 알리와 그 알리의 후계자들을 뜻한다. 이들이야말로 모든 무슬림 공동체를 인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무슬림들은 이맘의 말을 따라야 한다. 물론 누가 이맘인가를 둘러싼 문제도 중요했고, 여기서 5이맘파, 7이맘파, 12이맘파 등의 여러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세계 시아파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교파이자 오늘날 이란인들이 믿는 시아파는 그중에서도 12이맘파이다. 이 이맘은 일반적인 무슬림 평신도는 알지 못하는 비의를 알고 있다. 문제는 이맘이 더는 없다면? 12이맘파에서는 열두번째 이맘이 핍박을 피해 사라졌다고 믿는다. 이를 은폐(가이바)라고 한다. 부정(不正)한 세계에서 이맘이 은폐한 가운데 시아파 신도들은 이맘의 뜻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학자들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순니파가 상대적으로 신도들 간의 권위가 수평적인 데 반해, 시아파에서는 ‘은폐’된 이맘의 비의에 더 잘 접근하여 세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이끌어줄 수 있는 성직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몇몇 위대한 성직자들에게는 이맘 칭호를 붙이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이맘 호메이니’가 있다).
그러니까 시아파는 ‘정의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순교자’와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신도를 인도하는 이맘’이라는 테마가 순니파보다 훨씬 더 극대화되어 있다(순니파에서도 물론 이 테마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시아파를 이란의 국교로 만든 사파비 제국 하에서 성직자들의 역할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속 통치자인 사파비 황제는 이란 세계의 지배자였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 힘쓰는 군주로 선전되었다. 이들은 권력을 통해 시아파 성직자들을 관리하고 그들 사이의 위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시아파 성직자들은 대신에 그들이 가진 권위를 통해서 사파비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해주고 적절한 교리 해석(파트와)을 반포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사파비 제국의 황제는 순니파의 칼리프 직위를 갖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 많은 면에서 유사했다. 오스만 제국도 자체적인 성직자 관료제를 건설하여 제국의 통치에 적법한 정통성을 주장했고, 무슬림 신민의 다양한 법률 송사를 종교 전문가들에게 일임했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은 1920년대까지 살아남았던 반면, 사파비 제국은 아프간인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이란 땅에는 유목 부족의 난립이 이어지면서 장기간의 혼란기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 18세기의 혼란기로 말미암아 이란은 19세기와 20세기의 서구 근대의 충격을 사뭇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