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약사 (3) - 백색 혁명과 이슬람 혁명

이란 약사 (3) - 백색 혁명과 이슬람 혁명

순항 중이던 팔레비 왕조는 어쩌다 이슬람 혁명을 맞이했을까?

임명묵

1930년대 이란을 둘러싼 세계 지정학은 급변하고 있었다. 지중해부터 인도양을 모두 장악한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적인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주의는 영국과 갈등을 빚으며 약속된 자본주의의 파멸까지 혁명의 기지를 사수하고자 수세 전략을 굳혔다. 그러나 이란 주변의 두 강대국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력도 등장하고 있었다. ‘아리안주의’를 내세우며 영국 중심의 베르사유 체제를 폐기하고, 소련 공산주의를 없애버리겠다는 히틀러의 독일이었다.

레자 샤는 이란과 공유하는 ‘아리안주의’의 구호, 북쪽의 소련과 남쪽의 영국으로 포위된 이란을 보호해줄 수 있는 새로운 열강이라는 차원에서 나치 독일과 각종 우호 협력을 시작했다. 이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으며 이슬람 세계를 영국, 러시아에 맞서는 와일드카드로 삼고자 했던 독일 전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많은 독일 엔지니어와 기업가들이 이란에 가서 인프라와 건물을 짓고, 공장 건설을 지원했다. 그리고 점증하는 나치의 위협을 바라보는 영국과 소련이 갑작스러운 독일의 등장을 반길 리가 없었다.

1941년, 옛 제국들은 레자 샤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나치 독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소련은 치열한 눈치 게임을 벌였었다. 영국은 소련이 제안한 대 히틀러 연대에 소극적으로 나서며 소련에 불신을 심어주었다. 소련은 영국을 고립시키며 1939년 독일과 충격적인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대응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영국, 소련과의 동시 전쟁에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11년 이란 입헌 혁명을 무너뜨리는 데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던 이유는 영국도 러시아의 개입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도 마찬가지로, 친독 이란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양국의 합의가 맞아떨어지며 이란에 영국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연합국 입장에서는 독일에 맞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는 소련에 물자를 이송해줘야 했고, 레자 샤가 건설한 많은 도로와 이란 종단 철도는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 있을 터였다.

1943년 제2차세계대전 연합국 대동맹 정상회담이 열린 장소는 바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물론 영국과 소련이 원하는 것은 이란의 재식민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지정학적 비상 상황인 제2차세계대전에 이란을 연합국에 유리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자 샤가 건설한 국가 구조가 오히려 더 필요했다.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가 2대 황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련의 강해진 존재감과 레자 샤 치하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이란 산업은 이란에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을 자극했다. 소련과 연계되 이란 공산당, 투데당(Tudeh Party)이 남쪽의 정유 산업 단지부터 북쪽의 소규모 공장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팔레비 정권에 대한 의미 있는 반대 세력으로서 깃발을 흔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을 무찌르며 초강대국이 된 소련, 식민지를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 영국, 이란 노동자 세력의 성장과 사회 모순의 심화는 좌익 세력으로 하여금 혁명의 물결이 이란에 당도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지정학이 어김없이 작용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군대를 철수해야 했으나, 북서부 아제르바이잔과 쿠르드 지역에 여전히 군대를 주둔시키며 분리주의 공작을 벌였다. 바쿠에서 파견된 아제르바이잔 공산주의자들이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에서 북쪽과의 통합을 선전했다. 팔레비 왕조 입장에서는 1920년 길란에 있었던 장갈리 운동이 훨씬 더 무서운 규모로 전개되고 있다는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압박으로 소련군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철수하고 다시 원래의 국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란 위기는 연합국 대동맹이 초기 냉전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던 여러 갈등 중 하나로서 베를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그리스, 한국, 중국과 같은 목록에 올랐다. 이제 이란은 영국, 독일, 러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의 장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맞붙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1945-1946년 이란 위기의 현장. 최근 이란 대통령이 사망한 곳도 이 근방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란의 좌파는 아제르바이잔 위기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좌익에 우호적이었던 민족주의자들은 투데당을 친소 앞잡이로 보거나 아제르바이잔 분리주의자로 보며 경원시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좌익에서 분리되자 팔레비 정권은 좌파를 손쉽게 탄압하고 압박할 수 있었다.

좌파 대신에 떠오른 유력 정치인은 모함마드 모사데크였다. 모사데크는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와 이란 정치의 엘리트로 합류했다.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순간에 외무 장관과 주지사를 지냈지만, 모사데크는 열렬한 입헌주의자였기 때문에 헌정보다 전제정에 가까운 레자 샤와 충돌했다. 무시무시한 레자 샤가 물러나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의회와 지식인, 중산층의 신임을 얻는 민족주의자로서 부상하여 1951년 이란의 총리로 등극한다.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그가 그린 이란이 청사진은 입헌주의와 석유 국유화였다. 모사데크는 모하마드 레자 샤의 권한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위축시키는 입헌군주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이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영국-이란 석유회사(AIOC)의 석유 이권을 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과 외국 자본가를 무찌르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동맹은 새롭게 성장한 민족주의 성장의 지식인과 도시민 대중들이었다. 가두시위와 대중운동을 동원하며 여론을 조성하고 샤를 압박한 모사데크에게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샤에게 군에 대한 통제권까지 내각에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샤는 이대로 가다가는 이란이 공화국이 되고 자신은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도 모사데크의 출현은 달갑지 않았다. 영국은 직접적으로 석유 이익을 상실하게 될 것이 분명했고, ‘대영제국’의 영향권이 축소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도 커다란 고통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으로 허약해진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기에, 영국 정부는 미국을 설득했다. “모사데크 정부가 샤를 누르고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시킨다면, 필연적으로 투데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이란이 친소련 공산주의 세력에 넘어가면 유라시아 지정학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체제가 아니라 ‘대영제국’아라는 구시대의 블록에 집착하는 영국을 탐탁지 않게 보았던 미국은 영국의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모사데크 주도 대중운동이 점점 거세게 성장하며 샤와 충돌하자 개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53년 8월에 아작스 작전이라고 불리는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쿠데타 지지 군중이 아작스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모사데크 쿠데타는 이후 미국의 중동 정책을 완전히 꼬아버린 최대의 실책으로 꼽힌다. 모사데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단순한 민족주의자였음에도, 식민 이권을 여전히 놓지 못한 영국에 휘둘려 주권국의 애국자를 축출한 사실은 이란에서 반미 감정을 끓게 만들었다. 특히 이란인들이 러시아와 영국이라는 전통적 열강 대신에 미국은 호혜적 강대국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큰 배신감으로 다가올 일이었다. 모사데크 사건의 충격은 훗날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 세력이 그들의 반대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데도 계속 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권을 쥐게 된 모하마드 레자 샤는 자신의 신성한 황권이 이란 민족의 근대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입증해야만 했다. 아버지 레자 샤와 달리 이미 민족주의적 정통성에 금이 갔으니, 아버지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더욱 장대하게 성공시켜야만 했다. 어쨌든 모사데크라는 도전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국은 이란 측에 석유 이권의 50%를 주게끔 협정을 개정했다. 크게 늘어난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모하마드 레자는 군을 확장하고, 악명 높은 비밀 경찰 ‘사바크’를 만들고, 산업화와 교육 기관 확충 등 근대화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에 투자를 시작했다. 특히 냉전 시대 미국의 ‘근대화론’을 따르는 전문가들이 유입되어, 농촌의 전통 공동체 사회를 도시의 근대적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1963년, 모하마드 레자 샤는 공산주의라는 ‘적색 혁명’과 이슬람이라는 ‘흑색 반동’으로부터 이란 민족의 근대화를 수호하기 위한 ‘백색 혁명’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백색 혁명은 지주제 혁파의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산업, 교육, 사회보장, 국토개발 등 총체적 차원에서 이란의 전면적 근대화를 선언하는 대계획이었다. 1973년에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폭등하면서 모하마드 레자는 백색혁명의 성과를 공고히하고, 이란을 2000년까지 세계 5대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백색 혁명을 선언하는 모하마드 레자.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샤가 당시 시작한 이란의 원자력 발전 프로그램은 훗날 혁명 정권에 의한 이란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다. 이란의 핵과학자들 중에 여성이 있음을 강조하며 근대화의 성과를 선전하는 팔레비 시절 간행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백색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모하마드 레자의 근대화는 분명히 많은 성과가 있었다. 교육 기관과 학생 수도 종래에 비해서 크게 늘었고, 각종 산업 시설이 건설되어 이란에 본격적인 제조업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팽창한 교육 기관, 관료 기구, 산업체들은 이란에 근대적인 화이트칼라, 지식인, 노동자들을 더욱 큰 규모로 팽창시켰다. 미국에서는 이란이 터키와 함께 중동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여 서구화된 근대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모범 사례라고 치켜세웠다. 그렇기에 혹자가 말했듯 1979년의 이란 혁명은 정말이지 ‘생각할 수 없는(unthinkable)’ 혁명이었다.

그러나 모하마드 레자의 근대화는 정권을 지키기에는 사회를 너무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사회를 크게 뒤흔든 것만큼 발전을 빠르게 이루지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백색 혁명은 모하마드 레자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이란을 빛나는 근대 국가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토지개혁은 졸속으로 이루어져, 정권을 지지하는 중소 지주들은 사라지고 오히려 대토지 소유가 강화되었다. 소작농들의 고통은 그대로 남았다. 국민 보건과 교육은 팽창했지만 국민 다수를 흡수할만큼 빠르고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석유 수출의 부가 테헤란의 왕정과 관계된 상층부에만 집중되면서, 대다수는 근대화의 발전 대신에 근대화가 가져오는 막대한 비용을 자신들만 떠안는다는 불만을 키워갔다. 인구가 과밀해졌으나 토지 개혁은 실패하여 일터가 늘어나지 않은 농촌에서는 테헤란을 비롯한 여러 이란의 도시로 이주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억압받는 자들, ‘모스타자핀’이라는 도시 빈민이 되어 슬럼가에 거주를 시작했다.

한편 교육 받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냉전 시대의 저항 사상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투데당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이란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반식민지 출신의 비서구 국가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사상들, 특히 제3세계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반둥 회의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탈식민이 선언될 무렵, 이란을 대표하는 지식인 잘랄 알레 아흐마드가 ‘서구중독증’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알레 아흐마드는 이란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가 오직 서구만을 바라보고 전통의 인간적 가치를 망각한 ‘서구 중독’ 상태에 있음을 비난했다. 그 이전 칼릴 말레키는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모스크바를 따르는 노선 대신에 이란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탐구한 아시아적 노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잘랄 알레 아흐마드와 '서구중독증'.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향해 가면서 이란에서는 탈식민 사상의 기묘한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든, 아니면 정말로 자신들의 신념을 믿었든 간에 점점 더 이슬람과 이란 전통의 언어를 차용하여 글을 쓰고 있었다. 이런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에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시아파 성직자들이 민감하게 대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아파 성직자는 팔레비의 백색 혁명으로 개방적으로 변해가는 이란 도시 문화에 대해서 매우 큰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미제국주의를 따라 이란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저버리게 하고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반왕정 감정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계급 평등과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회주의자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이슬람의 언어를 배워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따라서 일부 성직자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큰 매력을 느끼고, 이슬람에서 사회주의의 요소가 있었음을 강조하는 자신들의 새로운 신학 해석을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이슬람화되고 있었고, 이슬람은 사회주의화 되면서 두 사상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 학생조직도 등장했다. 이란의 대학가에는 인문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르크스주의 지향의 ‘페다야네 할크’와 이공계를 중심으로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건 ‘무자헤딘 할크’가 조직되어 왕정에 반대하는 시위와 저항 운동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이란 이슬람 혁명’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두 사상가가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알제리, 베트남 전쟁과 연계된 프랑스 탈식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알리 샤리아티였다. 뛰어난 인문학자인 알리 샤리아티는 서구 사회주의 사상이나 프랑스 실존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슬람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시아파 이슬람이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혁명적 사상이지만 이후에 사파비 군주들에 의하여 왜곡되었다고 하며 시아파 이슬람의 본래적 지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리아티의 이러한 주장은 평등의 유토피아를 향해, 불의한 군주에 맞서서 순교를 주저하지 않는 일군의 정치적 활동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도시 빈민들, 지식인들, 사회주의자들이 뭉치고 있었다.

혁명의 군중들이 호메이니와 샤리아티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이미지 출처: historica

그러나 성직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성직자 사상가가 필요했다. 그 인물이 바로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호메이니의 핵심 개념은 아주 간단했다. ‘벨러야테 파키’. 즉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한 신정 통치의 필요성이었다. 18세기 사파비 제국이 무너지고 국가가 약화되면서 시아파 성직자들은 국가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인 권위의 공간을 확보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모하마드 레자의 통치에 분개한 호메이니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신학자들이 아예 국가를 통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메이니는 한편 이슬람과 습합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혁명의 슬로건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호메이니나 그의 동료 신학자,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급진적 구호들이 테헤란의 거리에서 울려퍼질 것이었다.

“이슬람은 피억압자의 종교이지, 억압자의 종교가 아니다!”

“이슬람은 인민의 아편이 아니다!”

”만국의 피억압자(모스타자펜)여 단결하라!”

“만국의 피억업자들을 위한, 동양도 서양도 아니라 이슬람 세계 피억압자들의 당을 만들라!”

“성직자의 의무는 빈자를 부자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1977년, 샤의 제국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테헤란의 현대식 건물들이 새롭게 세워지고 있었고, 군 현대화부터 원자력 프로그램까지 샤의 야심찬 프로젝트들도 순항 중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빈민층, 노동자, 사회주의자, 이슬람 성직자, 자유주의자가 얽힌 불만의 소용돌이가 생기고 있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터 행정부는 인권 원칙을 보편화하겠다는 신념으로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샤의 정부에서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오히려 정부가 더 안정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오판이었다. 그러나 정치 자유화로 백색혁명 이후 15년 간 억눌려 있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78년 벽두, 정부는 이에 맞서 반대파의 최고 저명 인사인 호메이니를 비방하고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악의적 기사를 배포했으나, 오히려 종교 도시 콤에서 거센 반대가 일어났다.

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생기자 사태는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장례 주기인 40일에 맞춰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40일 릴레이 시위는 어떠한 사전 공모도 필요 없이 군중을 손쉽게 모을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로 격상되었다. 40일이 지날 때마다 타브리즈에서, 테헤란에서, 이스파한에서 계속해서 더 큰 기세로 시위가 일어나며 정권을 긴장시켰다. 혁명적 분위기로 전환되자 나라 전체가 뒤숭숭해졌고, 이란 남부 석유 도시 아바단에서는 극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무려 4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아바단 화재의 범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혁명적 국면에서는 당연하게도 샤 정권의 탓으로 돌려졌다. 1978년 9월에 샤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시위대는 테헤란에서 다시 시위를 시작했고, 그 결과 잘레 거리에서 수십명이 군인의 발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란의 저항 운동은 훨씬 더 급진화되었고, 샤는 오히려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979년 1월, 마침내 모하마드 레자 샤는 커질대로 커진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 레자 샤가 팔레비 왕조를 개창하고 54년, 영국과 미국의 힘을 빌려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26년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이란이 겪은 변화는 엄청났다. 열강에 이권을 침탈당하고 유목 부족들도 통제할 수 없었던 반식민지 국가는, 세계에 석유를 수출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철도와 군대를 지닌 근대 국가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 국가가 만들어낸 지식인과 노동자, 도시 빈민은 국가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샤를 몰아낸 다음이었다. 샤가 사라진 이후 대체 이란을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모든 혁명이 그렇듯, 혁명의 피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라크의 나자프에서 프랑스 파리를 거쳐, 샤가 사라진 이란에 당도한 호메이니. 혁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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