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9): 스탈린의 벙커, 사마라

볼가 대종주 (9): 스탈린의 벙커, 사마라

소련의 전시 수도이자 항공 우주 산업의 중심지

임명묵

우파 역에서 사마라로 출발. 원래 시베리아에서 내가 본 러시아 철도역 양식은 이렇지가 않고 좀 더 옛날 건물 느낌이 팍팍 나는데... 요새 역들을 새로 재건축하고 있는 것도 같다. 2000년대에 다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1942년 우파 철도 역에서 스탈린그라드로 향한 바시코르토스탄의 여성 농민들을 기념하는 기념판. 정말 어딜 가나 대조국전쟁을 기념하고 있다..

8시간 정도를 기차를 타고 갔다. 러시아 열차는 1등석(2인실), 2등석(4인실), 3등석(방 없음)으로 구분되는데 우리는 계속 3등석만 타고 있다. 러시아 열차는 1520mm의 광궤 열차다 보니 아무래도 차체도 커서 좌석이 널찍한 편이다. 물론 공간 활용을 하는 데는 끝이 없다. 3등석 플라츠카르타 같은 경우에는 넓은 쪽에 가로로 2층으로 4개 침대를 배치하고 복도를 놓은 다음에 좁은 쪽에는 세로로 또 2개 침대를 배치해서 6개를 한 단위로 쓴다. 비상시에는 짐칸으로 만든 3층도 사람을 '넣는' 공간으로 쓸 수 있으니 9명까지는 들어갈 수 있다.

나는 키가 좀 있는 편이라 세로칸을 쓰면 다리가 다 펴지지 않는데, 2층으로 낑낑 올라가서 몸을 구겨 넣자니 아 이거 여기 눕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역시 사람이 비좁은 공간을 또 아늑하게 느끼기도 해서, 은근히 잠이 잘 와서 편안하게 갔다. 무엇보다 기차에서 에어컨을 틀어주니 그게 천상의 행복이었다!

볼가강을 따라 펼쳐진 드넓은 초지. 확실히 카잔 어름까지 느껴졌던 삼림 지대의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는 정말로 옛 유목민들이 말 타고 다녔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땅들이 나온다.

철도역 맞은 편의 철도청 건물인 것 같았다.

너무나 러시아답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스러운 역사가 있어서 놀랐다. 찾아 보니 199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는 밝아 보이지만 시간은 저녁이라 우선 날도 늦었고 하니 숙소로 이동하기로 한다. 숙소는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호텔.

아 이 위풍당당한 버스 터미널이여.

그 옆의 호텔은 더 위풍당당했다. 무려 '10월 혁명 호텔'.

심지어 앞에는 이렇게 레닌 두상까지 있었다. 먼 옛날 당에서 세워서 만들었던 호텔 아니었을까..

우선 좀 뭘 사서 먹으려고 나왔는데, 터미널 바로 옆에 마트가 있다고 지도에 떠서 찾아가 보니 이런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등장했다. 흡사 경기도나 지방 대도시에 펼쳐진 전형적인 조선의 아파트 단지 같은 이 친숙함... 선진적인 아파트 문화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인과 조선인은 형제 민족이 아닐 수 없다.

마트에는 식료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 물가가 오르긴 했지만 물자 자체의 수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느낌. 며칠 전 한국 언론에서 러시아 경제가 서방 제재로 대타격을 입었다면서 3월에 물건이 동 난 마트 사진을 올렸던데 진짜 반성 좀 해야한다. 언제적 3월이냐?

카드와 무현금화가 진행 중인 러시아에서도 키오스크는 이렇게나 널리 퍼지고 있다.

술 먹고 출출해서 케밥을 사먹으러 또 나왔다. 러시아의 배달 플랫폼인 얀덱스 예다로 물건을 받아 가는 배달부. 얀덱스는 러시아의 토착 인터넷 기업인데 한국으로 치면 네이버와 같은 포지션이다. 2010년대 이후 사세를 확장해서 택시, 배달, 지도 등등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이다. 현재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났다. 분명 정부가 관리를 할텐데 러시아의 플랫폼 기업 관리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러시아의 영웅에 영광을! 아르센 이딜로프.

사마라는 인구 100만이 넘는, 러시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다. 볼가강 중류의 농업과 산업 중심지고 특히 항공 우주 산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에 도시가 팽창했다 보니 사실 도시가 볼 것이 엄청 많다고 하기에는 그렇다. 그럼에도 이곳의 절대적 랜드마크가 있으니 바로 '스탈린 벙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 코 앞까지 독일군이 몰려오자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 함락을 가정하여 후방에 전시 수도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장소로 낙점된 곳이 사마라였다. 당시는 사마라는 아니고 소련의 정치가 이름을 따서 만든 '쿠이비셰프'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레닌의 박제된 시신을 비롯하여 모스크바의 핵심 시설과 자료들이 비밀리에 쿠이비셰프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그대로 남아 침략자를 몰아내자고 호소하였고, 그의 군대는 모스크바 겨울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쿠이비셰프에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스탈린이 보낸 전신인데 쿠이비셰프(사마라)의 항공기 제작 공장에 보내는 유명한 편지다. "지금 우리 붉은 군대에게 일류신-2는 공기와 같고 빵과 같은 것이다."라는 어록이 담겨 있다. 전선에 전투기 깔아야 하니 빨리 빨리 좀 생산하라는 것이었는데, 5개년 계획과 대숙청으로 단련된 스탈린의 동원, 공포 통치 덕분에 실제로 이런 닦달은 효과가 매우 좋았다. 그리고 단순히 전투기가 아니라 기종을 명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스탈린은 전쟁을 거치며 미국, 영국과의 외교, 소련군이 처한 전략적 상황부터 군사 장비들의 디테일한 성능까지 전쟁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지식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후방 수도로서 쿠이비셰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지도.

'쿠이비셰프, 소련의 2번째 수도'라고 써있다.

Ekskurssiya라는 박물관 견학을 할 때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속사포처럼 러시아어를 쏟아내는데 당연히 거의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곳이 스탈린의 개인 집무실(로 계획된 곳)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양 옆에는 러시아 제국의 장군들인 쿠투조프와 수보로프 초상화가 있었는데, 모두 나폴레옹 전쟁 때 활약한 명장들이다. 나폴레옹 전쟁은 러시아에서 '조국 전쟁'이라고 불리고 독소 전쟁은 그 전쟁을 계승하여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린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혁명가보다도 러시아의 차르로서의 정체성이 더 컸을 것이다.

아마 장군들과 모여서 회의를 하는 회의실인 것 같다. 지도는 전쟁 초기 독일군의 무서운 공세로 초래된 급박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꼬마애가 '마르끄..스..? 뭐라고 읽어야 해요?'라고 어머니한테 묻던데 역시 저놈의 Marx 이름 읽는 거 헷갈리는 거는 전세계 만국 공통 아닐까 싶었다.

벙커는 개인 관람이 불가능하고 무조건 단체 관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개인 관람객들이 들어가려면 인원수를 다 채워야만 하는데, 같이 간 동행 말로는 5년 전에는 동행 수를 못 채워서 못 들어갈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는 관람하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

스탈린 벙커 맞은 편에는 1932년에 혁명 15주년을 기념하여 설치된 차파예프 동상이 있다. 바실리 차파예프는 적백내전의 가장 유명한 영웅으로 계속해서 기념되었다.

더 내려가면 볼가강 강변이 나온다.

강변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피서를 나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러시아에는 Limonad라고 불리는 음료가 있는데, 어원은 레모네이드겠지만.. 양산형 과일 주스를 전부 다 리모나드라고 한다. 노점에서 이렇게 파는 리모나드는 탄산수에 원액을 섞어서 주는 형태. 길거리에서 먹기에 크바스와는 또 다른 쏠쏠한 맛이 있다.

추억의 방방을 타는 어린이들. 방방 마지막으로 탄 게 초등학교 3학년인가 그때쯤이니까 20년 다 되어간다.

그저 평화 그 자체라고 밖에는 더 표현할 수가 없는 사마라의 강변.

러시아 제국 황혼기의 전설적인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동상이다. 철도가 대대적으로 설치되기 전 러시아는 내륙 수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였지만, 하류에서 상류로 운행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기에 이런 배끌이 노동자들(burlak)을 활용했다. 레핀은 사마라 지역에 머물면서 볼가강 배끌이 노동자들을 취재했고, 그들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생생한 인간으로 조형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실제 사마라 외곽에는 레핀이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집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언젠가 반드시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마라 레닌 동상.

왜 붙어 있는지 이유는 모르겠는 승리 깃발.

미하일 프룬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고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이끈 장군이다. 그의 이름을 딴 모스크바의 프룬제 군사 학교가 유명하고, 그의 출생지인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는 원래 소련 해체 때까지도 프룬제로 불리었다. 그가 사마라에 머물며 적백내전 남동 전선을 지휘할 때 사용했던 집이라고 한다.

지도로 표상되는 공간 이미지를 '지리체(geo-body)'로 인식하고, 그 위에 상징적 캐릭터를 덧씌우면 국토 공간에 의미가 더해진다. 이는 20세기 이후 매우 보편화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 반대하는 자다!

의미 심장한 적백내전기의 구호. 프룬제의 어록일까? 좀 더 찾아보아야겠다.

사마라에는 지굴료프스코예 맥주 공장이 있다. 지굴료프스코예는 러시아 전역에서 팔리는 카스 정도의 위상의 국민 맥주다. 재밌게도 사마라 근교에는 톨리야티라는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가 있는데 이 톨리야티에서 생산하는 대표적인 차량 이름도 지굴리다.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양조장 견학이 끝난 시간대라 아쉽게도 근처의 생맥주 판매장에서 맥주나 한 병 사서 더위를 쫓고자 홀짝였다.

근처에는 사마라에 위치한 '영광 광장'이 있다.

이 웅대한 기념비는 소비에트 시절 사마라의 항공기 제작 노동자들이 모금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스탈린의 닦달과 함께 열심히 일류신 전투기를 생산하여 대조국 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이 그들의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기념비 뒤의 광장에는 소련 영웅들과 러시아 애국주의를 기념하는.. 러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역시 가득하다.

사마라에서 재직했던 소련군 원수들인데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다 있다.

길을 가다가 우리에게 갑자기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여행객들이신가요? 그래서 아 맞다, 한국에서 여행 왔다고 답했더니 자기도 한국 가본 적이 있다고. 현재 사마라 도청의 사업/투자/경제 쪽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인 루스탐이었다. 이름이 무슬림계 이름인지라 민족을 물어보니 타타르인이라고 했다. 사마라 자랑을 쭉 늘어놓길래 당연히 열심히 맞장구 쳐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경제 제재 이후에 좀 큰 변화가 있으신가요?"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는 여행 동안 물가가 오른 것은 좀 느꼈지만 생활 영역이 대단히 나빠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체로 맞습니다. 생각했던 것만큼 제재가 효과가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계속 염두에 둘 필요는 있습니다. 첫째로 인플레이션이 언제까지, 어느 수준으로 진정될 것인가입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 위험해질 수는 있습니다. 둘째로 장기적 결과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는 겁니다. 내년 초까지는 되어야 이 제재가 진짜 어떤 효과인지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명함을 주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덕분에 짧지만 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군 모병 포스터. "이 과업".

과거에 쿠이비셰프 시였던 이름값을 하는 쿠이비셰프 광장. 저 위압적 건물은 놀랍게도 오페라 극장이다.

발레리 쿠이비셰프. 혁명 이후 주로 경제 영역에서 활동했고, 우랄-쿠즈네츠 지역의 산업 건설에 열중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과음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40대 후반에 죽었다.

다시 사마라 역으로. 밤 기차를 타기 전까지 맥주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푸드코트의 버거킹에서 맥주를 계속 들이키며 정신을 알딸딸하게 만드는 도중, 갑작스럽게 선곡이 BTS로 바뀌면서 30분, 아니 1시간 가까이 BTS 노래를 듣자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때 페이스북에 분노의 포스팅을 올렸다 다음날 지웠는데... 결론은 언제나 하나다. 방탄소년단 제발 입대 해!

이제는 더 남쪽의 사라토프로 8시간에서 9시간 정도를 가야 한다.

너무나 쾌적했던 기차 여행. 러시아 플라츠카르타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잡하다는 건데, 이상하게도 이번 기차에서는 객실이 텅텅 비어 있어서 아주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게다가 에어컨까지 틀어주니... 아침에 정말 푹 자고 일어났다.

사라토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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