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2): 왜 하필 지금 러시아를?

여행을 준비하며 (2): 왜 하필 지금 러시아를?

임명묵

“이번 방학 때는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나요?”
학기를 끝마치고 지인들을 뵐 때 으레 듣는 질문이다. 그러면 으레 이렇게 답하고는 한다.

“그럼요. 코로나도 마무리되었으니까. 오랜만에 좀 나가 봐야죠.”

“그럼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려구요?”

행선지에 대해서 기대를 해주시는 분들이 꽤 있다. 지난 몇년 간 페이스북에서 내가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것을 지켜보신 분들이시다.

“러시아요.”

하지만 내 입에서 ‘러시아’ 세 글자가 떨어지는 순간 다들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다. 물론 내 여행지가 대부분 구소련권이었기 때문에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신 분들도 계셨지만. 그러나 어떤 분이든 그다음 질문은 무조건 똑같았다.

“거기 지금 갈 수 있어요?”

앞으로 갈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헷갈리는, 2022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나라의 이야기를 눈으로 담아보고자 한다.


2022년 2월이 끝나갈 무렵, 푸틴의 명령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식 표현으로 ‘특별군사작전’은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세계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로 접어든 지 이미 30년을 넘긴 상태였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이 수행하는 일부 전쟁,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무력 충돌을 생각하면 ‘지구적 평화’는 허상일 수 있었지만 적어도 다수의 인류가 한 세대에 걸쳐서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 익숙한 안온함이 깨지고, 낯선 불안이 성큼 엄습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전쟁은 분명 세계사적 분기점을 형성하는 사건이 되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개전 바로 직전까지도 ‘설마 전쟁이 나겠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상황이 사뭇 다르게 돌아갔다. 러시아가 키예프를 3일 만에 함락할 것이라는 공포는 전선에서 들려오는 우크라이나군의 승전보,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인들이 보여주는 결연한 항전 의지로 인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뉴스를 채우기 시작한 것은 키예프, 체르니고프, 수미, 하리코프 등 북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추태와 졸전 소식들이었다. 사람들은 한때 세계의 절반을 호령했던 초강대국 소련군의 후예가 저렇게 어이없는 모습만 보이는 것에 반대로 놀라면서, 러시아군, 나아가 러시아 국가와 사회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서방이 개전과 동시에 번개와 같이 가하기 시작한 전방위적인 제재는 새로운 기대감까지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자유주의 질서를 계속해서 교란하는, 침략자 러시아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전히 건재함을 세계가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웅은 죽지 않는다' 2019년 우크라이나 중부의 소도시 드네프르카먄스크의 박물관. 돈바스 전쟁의 전몰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출처: 본인 촬영.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의 주력은 헤르손에서 마리우폴에 이르는 흑해 연안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했다. 아조프 연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마리우폴이 러시아군의 손에 완전히 장악된 순간은 전쟁의 작은 분기점이었다. 그 이후 초반의 졸전은 언제 저질렀냐는 듯이 전열을 정비하여 돈바스 지역에 단단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포탄의 비를 쏟아가며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전선 바깥에서도 예상치 못한 반전들이 속속들이 벌어졌다. 전쟁 초에 나타났던 러시아의 반전 운동은 그보다 훨씬 강한 전쟁 지지 여론에 밀려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방은 인플레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러시아의 에너지를 도저히 ‘캔슬’할 수가 없었다. 서방이 대중국 견제를 위해 육성한 인도는 냉전 시대부터 구축한 러시아와의 유대 관계를 가동하면서 러시아 에너지를 흡수하여 세계 시장에 내뱉는 거대한 뒷문이 되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은 러시아산 곡물을 최대한 많이 사서 식량 위기에 대응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조업 상품들을 러시아에 공급해주고 있다. 식량과 에너지라는 무기를 벼린 러시아는 전방위적 제재로부터 버틸 수 있는 내구성을 입증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러시아가 금세 고꾸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서방측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듯하다.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저렴한 대체 공급원을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서방 사회는 다가올 인플레이션의 충격에 대비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자유주의 질서를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을 막는 데 서방의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광범위한 합의를 이룬 반면, 그 엘리트를 결정할 유권자들이 마찬가지 수준의 합의와 의지를 보여줄지가 의문이 되었다는 점이다. 5월과 6월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보다는 조니 뎁과 엠버 허드의 스캔들이 온라인에서는 더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하기까지 했다. 우크라이나를 위해서 세금을 더 내고 에너지 요금에 돈을 더 지불하겠다는 여론을 서방 각국이 조성할 수 있을지는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반적인 그림에서 러시아가 우세를 확보했음은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소련처럼 갑작스럽게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4월부터 7월까지 보여준 모습만 본다면 러시아의 견고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푸틴의 자신감의 원천, 러시아 가스 파이프라인 네트워크.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러시아가 전쟁에서 원하는 바가 어디까지인지, 전쟁 이후의 거취를 두고 서방과 어떤 협상을 할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침략, 혹은 ‘특별군사작전’이 어떻게든 성공한다면, 1991년 이래로 펼쳐진 탈냉전 체제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될 것임은 명백하다. 신냉전 체제라고 부르든 다극 체제라고 부르든 러시아라는 존재는 그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는 힘 중 하나가 될 것이고, 자국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으로서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의 번영을 만들어준 우호적인 조건들이 하나씩 사라져 간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으로서 미국의 안보적 지원, 경제적 지원을 통해 최빈국에서 탈출하고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산업화된 한국은 1990년대부터 열린 세계화 시대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재벌들은 일국 차원의 기업을 넘어 세계 차원의 기업으로서, 지구적 가치 사슬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냉전 질서가 산업화 시대의 한국에 우호적인 조건을 마련해준 것처럼, 탈냉전 세계화 시대의 질서 또한 한국의 도약을 위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패권 위에서 펼쳐진 자원, 기술, 자본,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은 한국이라는 무역 국가가 날아다닐 수 있는 연료와도 같았다. 세계 시장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한 한국으로 이제 이전보다 한 차원 더 많은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해 흡수한 자본은 한국의 왕성한 문화 콘텐츠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아시아와 서구를 잇는 문화적 허브 국가로서 위상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세계화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세계화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위협하는 부산물을 양산했다. 그 이야기를 쓰자면 책이 여러 권 더 필요할 것이다. 여하간 30년에 걸친 세계화 시대는, 세계도시와 배후의 지방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적 간극과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주도하는 지정학적 영향권 확보 경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이 세계화의 종말을 불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국경을 넘는 지구적 교류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세계화는 더욱 진전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1990년대와 2000년대, 밀레니엄 전환기를 풍미했던 세계화의 모습이 가까운 시일 내에 반복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해보인다.

이는 한국으로서는 위험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냉전 시대든 탈냉전 시대든 한국은 미국이라는 절대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패권 국가가 제공해주는 우산 속에서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미국이 만들어준 세계 시장 덕택에 한국은 어떤 자원이든 접근할 수 있었고, 미국의 플랫폼을 통해서 세계 구석구석에 콘텐츠를 팔았다. 미국이 구축한 규칙 기반 세계 질서 속에서 계약과 거래와 생산과 유통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질서가 흔들리면? 한국이 누리는 번영, 자유, 권리, 문화적 위상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가 돈을 아무리 싸 들고 가도 자원을 팔지 않는 나라들이 나온다면?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가 자신들의 문화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단번에 차단하는 나라들이 나온다면? 탈냉전과 세계화 질서의 위기는 이런 질문들, 혹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여기느라 생각지도 못한 질문과 고민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 여행기는 그런 질문과 고민들에 언젠가는 작게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지식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물론 러시아의 도시들을 단순히 돌아보는 것이 저런 거대하고 거창한 문제 의식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도 직접적인 도움은 거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통해 경험한 생생한 느낌과, 그 풍경을 구성하는 깊고 넓은 역사적 맥락을 함께 생각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감각을 키워올 수가 있었다. 이 여행기가 내 자신의 시선을 구성하는 경험을 얼마나 잘 전달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독자들에게 그런 경험을 어느 정도는 공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러시아, 유라시아, 나아가 이 세계의 지역 구석구석에 대한 지식이 한국에서 더 널리 유통되고, 더 많은 사람의 관심사 속에서 논해지기를 바라며 말이다.

세계화의 공간인가 지정학의 공간인가? 블라디보스토크는 냉전 시대 태평양 함대의 모항으로 접근이 거부된 '폐쇄 도시'였으나 탈냉전 시대 동아시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세계화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앞으로 이 도시는 세계화의 힘과 지정학의 힘이 모두 작용하는 공간이 될 것 같다.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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