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3): 러시아의 대동맥, 볼가강

여행을 준비하며 (3): 러시아의 대동맥, 볼가강

임명묵

러시아는 거대한 국가다. 한국의 170배에 달하는 1700만㎢의 영토를 지니고 있고, 소련 시절에는 그보다 훨씬 큰 2200만㎢에 달했다. 이 나라는 서쪽으로는 발트해와 흑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인 태평양까지 뻗어 있다. 미국의 알래스카, 일본의 홋카이도, 그리고 한반도와 마주하면서도 동시에 핀란드나 발트 3국 같은 유럽 국가들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해외 식민지 없이 본토로만 이루어진 이 거대한 국토에 11개의 시간대가 들어가 있을 정도다. 물론 이렇게 줄줄이 읊는다고 실감 나는 것은 아니긴 하다. 지도로 봐도 모자라다. 이 거대한 크기는 항공편이 아니라 육로로 경험해 봐야지만 감을 잡을 수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그런 러시아의 광활함을 상징한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자바이칼의 이르쿠츠크를 거쳐 시베리아의 수도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우랄의 예카테린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이어주는 이 철도는 러시아를 하나의 단일한 국가로 묶어주는 일종의 척추다. 나는 한 달 가까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11개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과거 코사크들이 무역을 위해 건설한 요새에서 출발한 소읍들이었다. 이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기후가 괜찮고 교역할 이웃이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이 요새 마을들 중에서 중요한 곳들을 가로질러 철도가 놓였고, 마을들은 러시아 서쪽으로부터 정착민을 빨아들이며 도시로 성장했다. 이 도시들은 훗날 소련의 거대한 제조업 시설인 콤비나트가 들어서거나, 멀리 떨어진 자원 채굴지를 위한 거점이 되기도 했으며, 첨단 군사 장비를 들여놓는 군사적 요충지로 선택되어 외부로부터 접근이 ‘폐쇄’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상징 시베리아 횡단 철도.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하지만 시베리아 횡단 철도라는 ‘압도적 시설’에만 집중하다보면 러시아라는 국가를 잇는 다른 중요한 연결망을 놓칠 때가 많다. 오늘날의 시베리아와 극동이 러시아 영토에 추가된 때는 17세기지만, 이 지역들 다수는 러시아 본토와 사실상 분리된 격지나 다름 없었다. 이 지역을 본토와 본격적으로 통합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1891년에 착공되었고, 그 연선 도시들의 대대적 성장은 대부분 20세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러시아 국가의 시원이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본격적으로 지금의 러시아 국가가 형성된 것이 15세기임을 생각한다면, 시베리아의 부상은 러시아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러시아는 어떤 공간적인 축을 통해서 발전했을까? 철도 이전에 러시아 땅을 이어준 길은 수많은 내륙 하천들이었다. 이 하천들은 겨울에는 얼어붙어 육로로 사용할 수 있었고, 여름에는 수운의 통로로 쓸 수가 있었다. 하천을 따라서 삼림 지대의 여러 산물들, 특히 모피나 꿀, 혹은 노예들이 부유한 동지중해로 이동했다. 이 지역의 상인과 군사 지도자들은 대신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생산되는 화려한 공예품을 비롯한 문명 세계의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번창하는 교역로는 자연스럽게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도 촉발시켰다. 북쪽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승자가 되며 드네프르강 유역을 통제할 수 있었고, 그들은 키예프 공국을 건설했다. 키예프 공국의 동슬라브인들은 ‘루시’라고 불리면서 오늘날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민족의 모태를 형성했다. 이후에도 이 하천 교역망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오늘날 동슬라브 문화의 중핵을 이루는 문화적 요소를 실어 나르는 길이 되었는데, ‘뒤집힌 알파벳’으로 유명한 키릴 문자와 가톨릭과는 구분되는 동방 정교회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다.

루시는 키예프 공국을 철저히 파괴한 몽골의 침략 이후에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킵차크 칸국은 키예프 공국 남쪽의 초원 지대를 직접 통치했고, 키예프 공국의 루시인들은 크게 세 지역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오늘날의 폴란드와 헝가리 접경지대인 남서쪽의 갈리치야, 볼린에 거주하는 루시인은 우크라이나인으로, 조금 더 북쪽에서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접경하고 있는 루시인은 벨라루스인이 되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키예프 공국의 중심지에서 북동쪽 삼림지대에 위치한 지역의 루시인들은 오늘날의 러시아인이 되게 된다.

동슬라브 세 민족의 분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생태 지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유럽, 특히 폴란드와 발칸 반도를 넘어서 동슬라브인이 사는 지역은 크게 두 종류의 생태 환경이 나타난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남러시아를 거쳐 카자흐스탄까지 이어지는 스텝 지역이다. 폰틱-카스피 스텝이라고도 하는 이 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매우 건조하고, 키 큰 풀이 무성한 지역이다. 북쪽은 더 춥지만 습윤하기에, 나무가 무성한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머나먼 고대에는 이 두 지역에 사는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갈등과 교류가 아주 빈번했고, 그 단층선을 따라 역사가 형성되고는 했다.

폰틱-카스피 스텝과 북부 삼림 지대의 지리.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폰틱-카스피 스텝은 유목 문화라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장소였다. 발칸 반도에서 전래된 목축 문화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지대에서 들어온 바퀴의 조합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에 걸쳐 살던 사람들에게 막대한 이동성을 안겨주었다. 이제 그들은 스텝을 돌아다니며 거대한 풀의 바다를 식량이나 의복의 원천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일을 해주는 것은 생물 기계라고 할 수 있는 가축들이었다. 이 생물 기계들은 군사적 우위까지 보장해주었는데, 특히 말은 문명 세계를 수천 년 간 괴롭힐 전사들의 동반자가 되었다. 최초의 유목민들을 상징하는 ‘얌나야 문화’는 유목민을 따라서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그들을 우리는 원시 인도유럽인이라고도 부른다.

인도유럽인의 발흥으로 초래된 대대적인 인구 이동은 이 지역의 언어, 문화 지리에 역설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 초원의 인도유럽인들은 북쪽으로도 팽창하여 러시아의 삼림지대를 점차 장악해 들어갔다. 이 지역은 오늘날 핀란드, 헝가리와 이어지는 우랄어족의 땅이었지만 어느샌가 도끼로 숲을 베며 농지를 만들기 시작한 슬라브인이 지배적인 민족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초원에서 일어난 인도유럽인의 후예인 슬라브인들은 농민이 되어 정착 생활을 이어나간 지 오래였고, 이제 더 멀리 동쪽의 초원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유목민들과 투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인도유럽인이 만든 유목이라는 생활 양식은 시베리아와 몽골 초원의 다양한 민족들에게도 새로운 혁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폰틱-카스피 초원보다 더 거대한 몽골 초원 지대에서 동쪽의 대제국인 중국과 교류와 투쟁을 이어오며 강력한 유목민으로 발돋움했다. 키예프 공국의 초기 역사는 페체네그인, 폴로베츠인과 같은 동쪽 스텝의 유목민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고, 훗날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유목 제국인 몽골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 것이다.

북동쪽 삼림지대의 러시아인들이 그나마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역의 생태적 단층선 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원의 유목 국가인 킵차크 칸국은 남부 러시아의 사라이에 수도를 정했고, 삼림지대에서는 조공 사절단과 공물을 받는 식으로 간접 통치를 수행했다. 바로 이 시기가 삼림지대의 러시아 공국들의 국가 건설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삼림지대의 공국들은 킵차크 칸국과 교류하면서 몽골의 법, 제도, 언어를 활발하게 수용했고 개인적 카리스마를 통해 수하를 복속시키고 그 권력을 또 제도를 통해 조직하는 유목민 나름의 정치적 기술을 습득했다. 이렇게 성장한 공국들의 쟁패를 거쳐 성장한 국가가 있었으니 그 국가가 바로 모스크바 공국이었다.

알렉산드르 페레스베트와 타타르인 첼류베이의 결투를 다룬 미하일 아빌로프의 그림. 1380년의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인과 몽골-타타르인의 대격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미지 출처: Soviet art

모스크바는 킵차크 칸국이 약화되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을 메우면서 사방으로 팽창했다. 북쪽의 삼림지대와 서쪽의 발트해로 나아갔다. 고대 러시아 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의 정복은 모스크바의 패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역시 주된 진출 방면은 남쪽이었다. 킵차크 칸국은 이 시기 흑사병과 티무르의 침공으로 몰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세 칸국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각각 크림 칸국,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이었다. 이 세 칸국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 지대의 패권, 즉 누가 킵차크 칸국의 정당한 후예인지를 둘러싸고 분열했다. 하지만 초원의 분열은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던 삼림의 모스크바에는 놀라운 호재였다. 러시아를 통일한 이반 3세의 뒤를 이어서, 이반 4세, 혹은 이반 ‘뇌제’는 화약무기를 쓰는 스트렐치(사격수)와 초원의 자유인 집단인 코사크를 통해 동쪽과 남쪽의 강력한 이웃들을 정복해 나갔다.

북서 유라시아 제민족의 공간은 내륙 수계망을 따라 펼쳐져 있다. 각각 서쪽부터 드네프르강, 돈강, 볼가강, 우랄강이다. 출처: 카잔 역사 박물관, 본인 촬영

이반 뇌제의 팽창은 볼가강이라는 축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볼가강은 유럽 러시아 삼림지대의 수많은 하천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유럽의 최장 하천이다. 모스크바를 흐르는 모스크바강도 볼가강의 지류 중 하나이며, 그 외에도 수많은 강들이 볼가강의 수계망을 구성하는 일부로 유럽 러시아 곳곳을 흐른다. 모스크바에서 한참을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볼가강 본류는 그대로 세계 최대의 호수인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간다.

볼가강 수계망은 과거 키예프 공국 시대에 드네프르를 비롯한 하천들이 수행했던 역할을, 더 동쪽에서, 그리고 더 큰 규모로 수행하였다. 북쪽의 삼림부터 남쪽의 스텝을 관통하는 하천 위에는 유라시아 북부의 다양한 생태 환경과 문화 지역들의 물산을 집결시키는 러시아의 권력 네트워크가 겹쳐졌다. 볼가강 변에 위치한 여러 정착지들은 내륙 교역의 중심지로서 큰 도시들로 성장했다. 볼가강의 수자원은 인근 지역에 정착할 농민들의 경제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자원이 되었다. 16세기를 거치며 볼가 지역을 장악한 이반 뇌제는 말년에 더 동쪽에 자리한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며 우랄 지역으로 가는 통로를 열었다. 볼가 지역은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훗날에 정복할 남쪽의 캅카스와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으로 향하는 거점이자 길목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 국가의 기원과 함께 한 볼가강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전통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흔히 ‘어머니 볼가강’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볼가강변 리빈스크의 '어머니 볼가' 기념상. 소비에트 시대에 건설되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볼가강은 러시아인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동서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볼가강에는 기후적, 생태적 다양성이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를 지닌 여러 민족들이 볼가강을 터전으로 삶을 꾸려갔다. 키예프 공국보다 먼저 세워진, 무슬림 튀르크인들의 국가 볼가-불가르 이래로 이 지역에는 국가의 역사도 꽤나 오래된 상태였다. 러시아의 정복 사업은 그런 민족들을 러시아라는 제국의 틀 속에 넣는 작업을 의미하기도 했다. 러시아 동방 정복의 시작을 알린 카잔 칸국 정복이 대표적이다. 튀르크계 민족인 타타르인이 사는 카잔은 자신들이 칸국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이슬람 신앙을 통해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했고, 오늘날에도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을 이루며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타타르인들은 단순히 자치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러시아 엘리트에 적극적으로 포섭되면서 제국의 정복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타타르인 이외에도 추바시인, 바시키르인과 같은 튀르크계 민족들, 우드무르트인, 마리인, 모르드바인 같은 우랄계 민족들이 모여 살고 이들은 소련에 의해서 각기 자치 공화국을 구성하는 민족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치 공화국을 이루지 못한 더 소규모의 민족들도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의 대표적 민족 건축물, 쿨-샤리프 모스크.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전통 의상을 입은 바시키르족.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 의미에서 볼가강은 유럽 러시아를 잇는 대동맥이기도 하면서, 여러 민족을 통할하는 ‘제국’으로서 러시아를 최초로 형성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후 제국 정체성은 러시아와 분리가 거의 불가능한 정체성이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그렇다. 제국은 단순히 힘으로 여러 민족을 겁박하는 것을 넘어서, 반드시 차이와 다양성을 다루어야만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즉, 러시아는 강압으로 여러 민족을 지배해야 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제국 체제에 포섭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정교회를 믿는 동슬라브계 러시아인을 넘어서 더 다양한 민족을 품을 수 있는 그릇으로 변형해야만 했다. 그 변형의 과정이 러시아의 역사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파급 효과와 부산물들은 오늘날에도 이 지역, 그리고 세계의 역사를 조형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제국’으로서 유럽과 아시아 양쪽의 문화를 모두 통합하는 국가이기도 했고, 혹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극심한 정체성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제국 체제는 러시아가 여러 소수민족들에도 어느 정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게끔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상징과도 같이 된 전제정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게 했다. 러시아 제국 자체는 1917년에 혁명으로 무너졌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과 민족 자치 원칙, 나아가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지는 현대사 속에는 여전히 제국의 경험, 유산, 혹은 폐허가 남아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공간을 경험하며 러시아의 제국성, 나아가 그것이 이 시대 유라시아에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모스크바 공국의 카잔 칸국 정복은 러시아가 본격적인 유라시아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시발점이었다. 출처: 카잔 역사 박물관, 본인 촬영.

러시아의 제국 질서는 20세기에 소련으로 계승되었다. 다민족 국가, 혹은 제국으로서 소련이 그 자신의 이념적 기획을 어떻게 마련하고 나아가 실질적인 정치, 사회적인 비전으로 이끌어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문헌이 있다. 하지만 소련의 프로젝트는 동시에 대대적인 경제 개발, 즉 근대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노동력과 자원이 풍부한 도시들이 선택되어 소련의 장기인 중화학 공업 단지로 변모했다. 모스크바는 동부 우크라이나 공업지대와 볼가 공업 지대, 우랄 공업 지대라는 세 개의 거대한 중공업 단지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현대 도시와 산업의 역사는 단순히 경제적인 역사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적, 문화적, 어쩌면 문명사적인 영향까지 남겼는데, 볼가강을 따라 들어선 댐과 수력 발전소, 제련소와 기계, 차량, 항공기 제작소는 서구를 따라잡고 서구보다 더 우월한 근대성을 통해 사회를 단숨에 변모시킬 수 있다는 볼셰비키의 자존심을 대변했다. 그 자존심은 무참히 꺾였고 소비에트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소련의 산업적 유산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살아있는, 국가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징들이다. 스탈린의 5개년 계획 하에 집중적인 투자를 받은 ‘스탈린그라드’는 나아가 제2차세계대전 최대, 최악의 격전을 치룬 장소로 거대한 국가적 기념비의 지위를 얻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 서 있는 사회주의 건설 모자이크. 이미지 출처: 마피오넷

스탈린의 소련이 오늘날의 러시아에 남긴 유산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볼가강을 따라가는 여행에서는 주로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요소들을 주목해서 관찰하고자 한다. 다양한 민족이 좋든 싫든 공존해야만 하는 러시아의 다민족적, 혹은 제국적 특성. 그리고 그 위에서 건설된 소련의 ‘고도 근대(high modernism)’를 향한 비전. 이 두 요소는 대조국전쟁 시기에 결합하여 현대 러시아, 나아가 탈소비에트 공간 전체에 지금까지도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물론 이 메아리는 작아지고, 소리 자체도 많이 변형되었다. 러시아는 제국과 국민 국가 사이에서 방황했고, 무산 계급 혁명과 반제국주의, 탈식민화의 선봉 자리는 일찌감치 내려놨으며, 고도 근대성은 고사하고 근대성 자체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도 가장 앞장 서서 회의하는 나라가 되었다. 푸틴의 러시아는 그 기나긴 방황 속에서 등장한, 역사적인 결과물이지, 초역사적인 악마라고 할 수 없다. 푸틴의 러시아는 여전히 소비에트의 여러 유산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하고자 했다. 고도 근대성, 제국성, 탈식민화,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분리주의, 제국주의는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뒤섞여서 현대 러시아의 경관을 구성하고 있다. 푸틴의 독재와 계속되는 지정학적 위기는 소련 해체 이후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은 러시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그 재규정 과정이 향하는 바가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세계적인 시장 통합에 대한 반격이었고,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이었다는 점은 탈냉전 역사의 커다란 비극이다. 하지만 푸틴, 그리고 푸틴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외부인(혹은 서구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감히 메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다만 그 간극이 어떤지라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 볼가강을 따라가 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러시아를 상징하는 세찬 눈발을 맞고 있는 누룰라 모스크의 미나렛(첨탑). 눈을 맞는 모스크는 카잔이 갖고 있는 문화 접촉 지대로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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