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4)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4)

체첸,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리비아. 러시아가 다시 서방과 맞서기까지의 이야기

임명묵

푸틴이 서구 지도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러시아를 통치하지 않을 것임은 이미 집권 1기부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권하자마자 발생한 모스크바의 오스탄키노 TV 타워 화재는 새 정부가 올리가르히가 장악한 언론을 제압하기 위해 벌어진 사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푸틴이 원하는 것은 올리가르히의 언론을 시민들의 자유 언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가(푸틴의 정권)를 위한 언론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뒤 이어진 올리가르히 사냥 과정에서도 푸틴이 서방을 의식하고 있다는 신호가 종종 나타났다. 2003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석유 올리가르히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체포가 대표적이었다. 호도르콥스키와 그가 소유한 기업 유코스는 러시아 최대의 석유 기업이 되었고, 유가가 오르면서 러시아의 숱한 올리가르히 중에서 가장 정권에 위협적인 거물로 성장했다.

호도르콥스키는 여느 올리가르히와 마찬가지로 푸틴의 독재에 맞서고 러시아가 새로이 얻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정권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 또한 구신스키와 베레좁스키처럼 크렘린에 맞서면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음은 자명했다.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것은 푸틴으로서는 아직 감당하기 어려웠던 미국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호도르콥스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석유 기업 유코스를 미국 석유 메이저인 엑슨모빌과 합병할 것을 선언했다. 만약 유코스의 지배구조에 엑슨모빌이 깊숙하게 개입한다면, 미국 에너지 자본과 그 뒤의 미국 정부를 방패로 삼을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푸틴 입장에서 호도르콥스키의 이런 행동은 러시아의 전략 자산인 석유를 미국에 넘겨버리는 매판 행위나 다름없었다. 엑슨모빌의 유코스 주식 매입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2003년의 어느 날, FSB 요원들은 호도르콥스키가 노보시비르스크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고, 호도르콥스키는 수감되어 다른 올리가르히들을 위한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집권 2기부터 푸틴은 서방의 인권 단체나 서방 정부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한 러시아’라는 구호 아래에서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2006년에 일어난 언론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의 암살은 혼란하지만 자유로웠던 러시아가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신문인 노바야 가제타 소속의 기자였던 폴리트콥스카야는 체첸 전쟁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새로운 정권의 잔인함과 부도덕함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전장 속에 들어간 폴리트콥스카야는 러시아군과 러시아에 협조하는 체첸군이 반군 진압을 위하여 민간인 피해에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난민 캠프와 병원을 오가며 폴리트콥스카야는 체첸에서 푸틴의 새로운 협력자인 카디로프 부자(父子)가 자행하는 전횡, 러시아군 병사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인권 유린, 그로 인한 증오의 연쇄 작용, 민간인을 상대로 한 화학무기나 화염방사기의 사용을 꾸준히 고발했다. 그의 기사는 러시아의 비판적 지식인과 시민들,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를 감시하는 서구 관찰자들에게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폴리트콥스카야의 존재는 체첸의 지도자들과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모두 분개하게 만들었다. 체첸의 러시아군을 향해 빗발치는 비난은 체첸에서 새로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현지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모스크바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분리주의자들을 억압하고, 러시아를 서구의 투자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정상국가처럼 보이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폴리트콥스카야의 고발은 러시아의 ‘폭력적’이고 ‘야만적’ 본성은 어디로 가지 않았으며, 서방은 러시아를 결코 믿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것이 틀림없었다. 체첸인들과 러시아의 국가 기관이 폴리트콥스카야를 제거하고자 수차례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체첸의 군 당국은 폴리트콥스카야를 체포하기도 했고, 그에게 살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독극물에 중독시켜 활동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폴리트콥스카야는 굴하지 않고 책을 발표하고 칼럼을 기고했다. 최종적인 해결책은 결국에는 암살밖에 없었다. 2006년 10월 7일, 폴리트콥스카야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괴한들의 총격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푸틴의 러시아를 향한 비난을 촉발시켰지만, 크렘린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은 해 11월, 영국에 망명해 있던 전직 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독살된 채 발견되었다. 그의 몸에서는 희귀 물질인 폴로늄이 검출되었는데, ‘방사능 홍차’로 유명한 바로 그 사건이었다. 리트비넨코는 푸틴이 자신의 지지를 동원하기 위해 체첸의 전쟁을 사실상 자작극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고발로 유명해진 상태였다. 폴리트콥스카야와 리트비넨코의 암살은 푸틴이 러시아의 통합성과 자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이들을, 그들이 어디 있든 간에 제거할 수 있음을 알려준 경고였다.

언론 장악,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넘어서 암살마저 서슴지 않는 러시아 정부의 활동은 ‘주권’이라는 명분 하에서 정당화되었다. 이는 푸틴 정권의 이데올로그라고 할 수 있는 체첸 출신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에 의하여 만들어진 논리였다. 2006년 2월에 그는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러시아의 현실과 필요에 맞는 민주주의, 즉 ‘주권 민주주의(суверенная демократия)’라고 선언했다. 수르코프에 따르면 올리가르히와 그 배후에 있는 서구 정권의 이익에 움직이는 민주주의는 러시아 인민의 진짜 뜻을 대표할 수 없었다. 강력한 중앙 권력과 단일 지도자에 의하여 사회가 적절히 관리되고, 강한 국가가 국민들의 안정적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 1990년대의 재난을 겪은 러시아인들을 위해 정말 필요한 민주주의였다. 주권 민주주의의는 푸틴 정권이 2기에 들어 추진하던 중앙집권화와 사회 장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정부는 2004년에 선거제를 개편하고 지역구 선거를 전국 단위 정당 비례대표 선거로 바꾸었다. 정당의 의회 진출을 위한 최저선인 5% 득표 기준은 7%로 상향되었고, 7%를 채우지 못한 정당의 득표는 의회에 진출한 정당에 배분되었다. 이는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새로운 야당의 등장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푸틴 체제에서 90년대 옐친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던 공산당과 자유민주당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강한 국가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협조적 정당으로 변한 상태였다. 통합러시아당과 그 우당(友黨)들이 이제는 의회를 사실상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2005년에는 지방 정부 수장을 주민이 선출하던 기존 제도를 중앙정부에 의한 임명제로 바꾸었고, 친정부 성향의 청년 단체인 나시(Nashi, ‘우리의’라는 뜻)를 창설했다.

주권 민주주의는 명실상부 색깔 혁명, 그중에서도 2004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등장한 개념이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야기하는 주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러시아는 근외 지역에서 색깔 혁명을 통한 정권 전복도 러시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서구의 음모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 지도부를 불쾌하게 만든 위협적 사건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행보를 못 정하고 있는 나라였고, 이는 동서로 나뉘는 이 나라의 지리적 분열과 정체성 갈등을 반영하고 있었다. 2004년의 선거에서는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친서방 성향의 빅토르 유셴코의 대결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셴코가 수상한 다이옥신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친서방 성향이 강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격심한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친러시아적인 야누코비치와 동부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이어 부정선거 논란이 발생했고, 정부는 시위대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재선거를 치렀다. 이 재선거에서 유셴코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등장하게 된 사건이 바로 오렌지 혁명이었다.

유셴코 정부가 러시아의 영향력 개입을 차단하고 서구화를 추진하고자 하자 러시아 지도부는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형제 민족 국가인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2006년 새해,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천연가스의 밸브를 잠그면서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물론 이는 순전한 정치적 동기만으로 이루어진 사건은 아니었고, 러시아의 에너지 정책 구상과도 연관된 사건이었다. 러시아는 그동안 구소련 가맹국에게 특별히 저렴한 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가 자국을 지나가는 가스관에서 가스를 얼마간 빼돌리는 것을 묵인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허리케인 카트리나,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의 등장 같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유가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고, 푸틴은 고유가가 만들어준 현실에 맞게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러시아의 장악력을 더 확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러시아는 구소련 가맹국 전반에 가스 가격을 인상해서 받겠다고 공언했고, 가스를 빼돌리는 것 또한 이제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오렌지 혁명으로 러시아로부터의 이탈 조짐을 보이는 우크라이나에는 기존 가스 가격의 4배를 내라고 요구했다. 유셴코 정부가 가스프롬의 요구를 수용하기를 거절하자, 우크라이나를 거쳐 서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가 뚝 끊겼다. 엄동설한을 보내며 러시아 서쪽의 국가들은 러시아 가스가 얼마든지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음을 체감했다. 러시아는 값싼 에너지를 마음껏 사용하고 싶으면 러시아의 ‘주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루지야(조지아)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교훈을 주고자’ 결심한 나라였다. 소련 외무장관 출신이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통치하는 그루지야 정부는 2003년에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이끄는 반정부 시위대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소비에트권에서 발생한 최초의 색깔 혁명인 장미 혁명이었다. 사카슈빌리는 이후 그루지야가 나토와 유럽연합에 가입하여 발전한 서방 국가들의 세계에 합류해야 한다는 전망을 통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크렘린에게 이는 러시아의 남방 변경을 위협하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1월에 러시아에서 그루지야로 향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에 폭발이 일어나면서 가스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인근 전력선까지 마비되어 그루지야는 순식간에 난방과 전기가 없이 어둠 속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단순한 사고라고 이야기했지만,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그루지야가 여전히 러시아의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톡톡히 가르쳐주고자 한 푸틴의 의도라고 받아들였다. 2006년 3월에 러시아는 그루지야와 몰도바 와인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단행하였는데, 양국의 양조장이 제대로 된 품질과 위생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루지야와 몰도바는 과거 소련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리는 와인 생산지였고, 러시아로의 와인 수출은 독립 이후 큰 외화 수입원이 된 상황이었다. 몰도바 또한 자국 내의 러시아인 거주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야 문제로 러시아와 마찰을 빚고 있던 터였다. 한편 그루지야는 푸틴의 처벌을 한 번 더 받았다. 5월에는 러시아인들이 약수(藥水)로 애정하는 그루지야의 보르조미 생수도 금수조치의 대상이 되었다. 순식간에 주요 외화 공급지인 수출 시장을 상실하자 사카슈빌리는 푸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러시아의 조치는 탈소비에트 국가들의 주권을 러시아가 시장과 에너지를 무기로 좌지우지하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반감을 늘리는 효과를 초래했다.

그루지야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2008년에 러시아군이 전격적으로 남하하여 그루지야를 공격하였고, 당연하게도 그루지야는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루지야가 기대했던 미국과 나토의 지원은 결코 오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은 러시아의 단순한 침공은 아니었고, 소비에트 제국이 해체되면서 발생한 혼란과 모순의 누적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터키, 이란, 러시아의 경계에 있는 그루지야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여러 소수민족들이 공존하고 있는 나라였다. 남쪽 터키와의 경계 지역에는 아자르인들의 땅인 아자리야가 있었고,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북쪽에는 압하스인들이 거주하는 압하지야와 오세트인들이 거주하는 남오세티야가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강력한 지배력이 작동하는 소련 시절에 이런 소수민족들의 존재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수민족들은 소련 체제를 통해서 자치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러시아어를 배워서 연방 체제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생 국민국가로 독립한 그루지야와 그루지야인들의 비전은 이들 소수민족의 비전과 전혀 달랐다는 데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루지야 정체성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은 소수민족들은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압하스인이나 오세트인들은 그들에게 더 익숙하고, 더 넓은 세계와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러시아 정체성이 훨씬 편하고 유용했다. 친러시아적 태도를 유지한 채 광범위한 자치권을 요구하는 분리주의적 소수민족 지역을 러시아 영향력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국민국가인 그루지야가 방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생 정부와 소수민족 지역 간의 갈등은 1990년대에는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간신히 중재하고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카슈빌리의 정책은 1990년대의 갈등에 다시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민족 지역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남을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들이 그루지야에서 이탈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인접국의 친러적 소수민족들을 통해서 근외 지역에 대한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을 시도했다. 이런 여러 동기가 맞물려 그루지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서는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고, 사카슈빌리의 그루지야군이 남오세티야로 진입하면서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남오세티야 전쟁은 탈냉전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1990년대 미국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였지만,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앞마당에서까지 군사적 충돌을 감내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역외 군사 개입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브프라임 경제 위기는 미국 내부의 일에 더 집중하라는 요구에 불을 지폈다. 한편 러시아는 옐친 10년의 혼란을 끝내고 마침내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얼마든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임을 입증했다.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경제 성장과 그것이 견인하는 막대한 에너지 수요가 비틀거리는 러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러시아는 적어도 서방과 직접 맞설 수는 없을지라도,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수많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 적어도 그 국가들이 자기 뜻대로 운명을 결정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힘은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그럴 수 있다면, 세계 지도에서 막대한 존재감을 뽐내는 대국(大國)들도 얼마든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10년 전 프리마코프가 주장했던 ‘전략적 삼각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서유럽, 일본이 이끌어가는 서방의 단극체제가 그대로 지속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서방만큼이나 푸틴 체제도 잠시 주춤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위기와 남오세티야 전쟁이 불러일으킨 의구심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가장 먼저 푸틴 체제에 제동을 건 것은 서방에도 극심한 타격을 입혔던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였다. 전세계적 대침체는 고공행진하던 에너지 가격에 제동을 걸었고, 에너지 수출에 경제 대부분을 의존하던 러시아의 경제는 즉시 곤두박질쳤다. 에너지 의존 경제가 갑작스러운 유가 하락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1985년에 소련이 경험한 악몽이 보여준 바가 있었다.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줄어든 국가 수입과 갈수록 늘어가는 국내의 여러 요구를 조화시키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근외 지역에 대한 통제력 회복과 정치적 긴장의 증대보다 국내의 경제와 사회 문제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지난 8년간 러시아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발생한 정치적 불만이었다. 푸틴 시대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늘어난 중산층들은 처음에는 푸틴이 제공한 경제적 안정, 치안 확립, 국가적 자존심의 회복에 환호하며 열렬한 푸틴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푸틴 2기에 들어서 강해진 권위주의화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근외 지역이 러시아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불편했지만 그것을 서구와의 외교적 갈등과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러시아 중산층들은 이제 지중해로 휴가를 떠나고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고 독일에서 일자리를 잡으면서 서구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꿈 꾸었던 서구 세계와의 통합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중산층을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는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것이다. 새로운 러시아의 중산층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종국적으로는 서구와 같은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그런 바람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모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자 러시아의 기술관료들을 이끌고 있는 메드베데프는 무인(武人)에 가까워 보이는 푸틴보다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띠고 있었다. 메드베데프는 자유화(либерализация)나 현대화(модернизации) 같은 어휘를 즐겨 사용하면서,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적 의제를 제시하는 것만 같았다. 푸틴이 8년 동안 혼란을 잠재우고 강한 국가를 되살렸다면, 이제 메드베데프는 그 국가를 다시 온건하고 자유롭게 바꾸면서 서구 세계와 교류를 통한 러시아의 현대화를 추진할 것이었다. 만약 몇몇 관찰자들의 예상이 맞았다면 말이다. 실제는 전혀 달랐다. 푸틴은 메드베데프 집권기에도 총리로 재임하면서 국가적 사안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메드베데프가 푸틴과 생각이 다를지는 몰라도 그에 결정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은 크렘린 내부에 분열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했던 몇몇 관찰자들만 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자유화와 서구화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는 러시아의 신세대 중산층들은 메드베데프 시대가 되어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 실망했다. 그들의 실망은 2011년 러시아 국가두마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 정황이 발생하면서 직접적인 행동으로 전환되었다. 2012년의 메드베데프 임기 종료를 앞둔 상황에서, 반푸틴 성향이 강한 시민들은 푸틴이 다시 대선에 출마하여 푸틴 3기를 시작하면 어떻게 되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11년 선거에서 관이 주도한 대규모 부정선거 정황들이 등장하여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에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득표율을 총집계하였을 때 등장한 140%라는 황당한 숫자였다. 부정선거를 기폭제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러시아 대도시들에서 연속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2000년 이래로 그야말로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는 시위였다.

푸틴과 측근들에게 있어서 이 시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러시아의 근외 지역의 배후에서 정권을 항상 전복하려고 기도했던 서방이 마침내 러시아 본국에까지 그 마수를 뻗친 사건이었다. 만약 실제로 푸틴과 통합러시아당이 패배한다면 그들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이 완벽히 연동되어 있는 러시아의 현실상 막대한 이권을 손에서 내려놓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권력 기반을 상실한다면, 자신들이 집권 초기에 올리가르히들을 사냥할 때처럼 경쟁자들에 의해서 같은 대우를 받을 확률도 높았다. 크렘린의 엘리트들에게 정권의 생존은 목숨의 생존과도 같은 문제였다. 물론 계속 강조하다시피 이는 단순한 정권 생존과 정치경제적 이익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 권력 엘리트들은 만약 정권이 친서구 세력에 의하여 전복된다면 러시아가 다시 강력한 힘을 상실할 것이고, 분리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이며, 국가 자산은 외국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러시아 문화와 전통에 따른 법과 제도도 만들 수 없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러시아판 색깔 혁명의 결과는 그들에게 있어서 푸틴의 주도로 간신히 기워낸 러시아의 총체적인 붕괴였다.

같은 해 아랍 지역에서 발생한 연쇄적 봉기는 크렘린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처럼 다가왔다. 2010년 연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봉기는 순식간에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지로 번지면서 수십 년을 끌어온 아랍 독재자들의 정권 붕괴를 야기했다. 서방에서는 이 봉기를 둘러싸고 새로운 정보 기술과 미디어가 시민들의 민주적 열망을 실현시킨 역사적 순간이라면서 축배를 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랍 봉기, 혹은 ‘아랍의 봄’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훈풍이 이슬람교나 아랍 부족주의 등으로 인하여 도달할 수 없았던 중동 지역에도 마침내 닿은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모스크바나 베이징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랍 정권의 붕괴가 독재자들이 눌러온 여러 갈등을 폭발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랍 국가들은 극단주의가 발호하고 부족 갈등이 격화되면서 총체적 무질서를 향해 갈 것이었다. 그리고 서구인들로서는 안타깝게도 실제 역사의 전개는 뉴욕, 런던, 파리의 바람보다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그런 상황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리비아 상공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나토군이 카다피 정부군을 공습하는 것은 모스크바 입장에서는 ‘미친 짓’으로 여겨졌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은 서방이 중동에서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보기에는 서방의 활동이란 그 효용이 불확실한 민주주의를 확산한다는 명목으로 주권 국가를 공습하고, 뒷감당이 어려운 일을 벌리면서 세계적 불안정을 키우기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리비아를 공습할 수 있다는 것은 러시아 혹은 중국이 자신의 세력권이라고 생각하는 근외 지역, 나아가 자국 자체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로 다가왔다. 리비아의 경험에 충격을 받은 러시아는 자국의 해군 기지가 설치되어 있기도 한 시리아의 사태에서 서방이 개입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아사드 정권이 유지되는 것이 최선이며, 비록 아사드 정권이 자국민을 학살한 정권이라고 해도 그것이 총체적 무질서와 혼돈보다는 낫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시리아 내전은 서방의 세계적 지도력이 더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또 다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2011년에 시작된 리비아 공습과 러시아 본토로 다가온 색깔 혁명을 보면서 크렘린은 서방을 향하여 더욱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근외 지역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넘어서,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발산하는 서방 자체에 반격을 가하고 ‘복수’를 해야만 했다. 푸틴 입장에서는 그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나 리비아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서방과 제한적 협력을 통해서 러시아를 다시 발전시키려는 푸틴의 구상은 이제 적극적으로 서방에 대한 정치, 경제, 이념적 차원에서 전방위적 공세를 가하는 새로운 구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구상에 맞는 새로운 세계관, 역사와 세계를 완전히 재해석할 수 있는 다른 관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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