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4): '역사의 종언'의 종언?

여행을 준비하며 (4): '역사의 종언'의 종언?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역사의 종언'은 끝난 것일까?

임명묵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 문장에서 특별한 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제 관계가 급변하고, 우리에게 익숙하던 조건이 점점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 혹은 먼 과거에 잠들었다 사라진 무언가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분기점으로서 전쟁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실제 단독 사건에만 주목하면 흐름을 놓칠 수가 있다. 사실, 한 시대가 끝났다라는 말은 몇 년 전부터도 계속 있어 온 이야기였다. 특히 이 경우에는 한 시대의 시작을 선포한 사람이 매번 소환되어 포화를 맞기 마련이다. 우리 시대에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역사가 끝났다’라고 선언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였다. 제국들 간의 혈투, 처절한 이념 전쟁으로 대변되던 20세기의 역사는 이제 소비주의, 중산층 대중 사회, 갈등을 흡수하는 민주 정치의 제도들로 변모했고,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역사’를 형성하는 장엄한 비극 대신에 일상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기술 관료적 합리성에 기대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의 장엄한 선언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전사들이 가행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로 인하여 10년 만에 흔들리고 말았다. 그 뒤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을 때, 아랍 정권들이 연쇄적으로 전복되고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했을 때, 중국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세계에서 발언권을 내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세계화를 거스르는 토착주의자(nativist) 지도자들이 집권했을 때, 코로나19로 100년 만에 팬데믹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역사의 종언은 끝났다’라는 말이 울려퍼졌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한 세대가 가까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진짜로 ‘역사의 종언의 종언’이 찾아온 시점은 언제일까? 아니 그 전에, 1989년 시점에서 역사가 종언한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가 잠깐이나마 진입하기는 했던 것일까? 실제로 언론인 로버트 카플란은 1992년에 ‘다가오는 아나키’라는 글을 통해 일찌감치 서방 세계에서 감돌고 있는 탈냉전의 낙관주의라는 것이 사실상 환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1989년의 유럽에서 주목해야 했던 곳은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이 아니었다. 대신 미래를 보여주는 곳은 세르비아와 코소보에서 시작되고 있던 민족과 종교,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나아가 지구적 환경 위기, 난민의 발생, 세계화된 엘리트 계층과 대중의 가속화되는 분리, 유라시아 옛 제국들에서 부활하기 시작한 과거의 전통과 영광스러운 역사에 대한 재평가는 소비에트 연방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형태로 서구 사회에 도전을 가할 것이라고 평했다.

아나키가 다가오는가? 카플란은 1992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있을 때, 나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들 사이의 폭력사태를 취재하러 코소보에 가 있었다. 미래는 베를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소보에 있는 것이라고 그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같은 해, 후쿠야마의 스승인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 기업 연구소에서 강연 하나를 진행하였다. 그는 다음 해에 강연 내용을 기반으로 논문을 하나 발표하였고, 이후에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논란을 몰고 온 문제작, <문명의 충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은 흔히들 후쿠야마와 함께 1990년대 서구 사회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저서로 인용되고는 한다. 하지만 저자인 헌팅턴의 학술적 배경을 고려하고 <문명의 충돌>을 실제로 읽어보면 이 책이 왜 당혹스러운 책인지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다. 헌팅턴은 냉전 시대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의 전제 위에서, 개발도상국들이 겪는 정치적 불안정과 빈번하게 나타나는 군사 쿠데타 등을 분석하면서 명망 있는 학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는 1991년에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통해서 70년대부터 시작되는 민주화의 세 번째 물결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그런 점에서 비교정치학의 고전적인 탐구 대상, 즉 국가 구조, 관료제, 정당, 군부, 사회 제세력 간의 세력 역학 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세계는 종교에 기반한 문명 간의 충돌로 접어들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종언’과 ‘문명의 충돌’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다소 부적절할 수가 있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발표할 때부터 이것이 역사의 종언에 대한 답변이라고 밝혔다. 역사의 종언은 어떤 면에서 냉전 시대에 본격화된 근대화 이론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 상이한 전통 위에 서 있는 전근대 사회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문화, 분업화, 세속화 등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근대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는 전망을, 지구적 차원에서 필연적인 역사 철학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면 ‘역사의 종언’이 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헌팅턴은, 어찌 보면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는 선언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저작인 <제3의 물결>에서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인 확산을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세계는 갈등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것도 근대화 이론에서는 이제 흘러간 과거의 유물로 간주하는 종교를 통해서 갈등이 분출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이 언제 최종적으로 유통기한을 다 했는지 정확하게 짚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구적 근대성이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낙관주의와 별개로, 그에 대한 경고는 1990년대가 시작할 때부터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종언이 아예 적용된 적도 없는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선언이 상징하는 어떠한 시대의 분위기는 1990년대, 나아가 9.11 테러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에도 상당히 지속된 것이었다. 개혁개방에 따른 중국의 필연적인 서구화와 민주화, 유럽연합 프로젝트의 확장과 미국보다 더 윤리적인 판본의 서구적 근대성으로서 ‘유로피안 드림’, 아랍의 봄 이후에 나타날 무슬림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에는 모두 역사의 종언 특유의 낙관주의가 묻어있다.

2011년을 불태운 아랍 봉기, 혹은 '아랍의 봄' 때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낙관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스마트폰과 SNS의 보급이 민주주의 확산의 무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튼 공상이었는지는 서구에서는 5년 만에 밝혀졌다. 사실 고도로 정보화되어 있던 한국인들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카플란이 경고한 ‘다가오는 아나키’와 헌팅턴이 전망한 ‘문명의 충돌’은 물 밑에서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쌓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9.11 이전부터 시작된 알 카에다의 연쇄적 테러,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집권,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것으로 드러난 중국 공산당의 지배 체제, 태국과 베네수엘라의 포퓰리즘, 아랍 봉기 이후에 터져나온 이슬람주의에 대한 열망, 터키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신오스만주의’, 인도에 부는 힌두민족주의 바람, 아프리카와 중동의 생태, 사회적 위기로 초래되는 난민의 대량 유입, 서유럽과 동유럽 간의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간극. 이런 사건들의 누적은 처음에는 서구인들은 이제 신경도 쓰지 않게 된 머나먼 곳의 이야기, 즉 아직은 역사를 떨쳐내지 못 했지만 곧 ‘우리의 도움’으로 역사의 종언에 합류하게 될 나라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연쇄적인 상승효과를 일으키자 서구 사회는 더는 역사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게 되었다. 서구에서 역사의 종언을 끝내고 다시 역사를 시작한 사람들은 서구의 엘리트들이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과거에 묶여 있는’ 대중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작부터 의심 속에서 시작된 선언이었던 ‘역사의 종언’이 최종적으로 무릎을 꿇게 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는 사건은, 그 선언이 출발했던 미국에서도 역사의 종언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사건, 즉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에도 역사의 종언을 믿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구 사회의 세계화된 엘리트들은 여전히 역사의 종언을 믿는다. 언젠가 세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세속화된 중산층 시민들이 민주적 투표로 정부를 결정하고, 국경을 넘어서는 교류가 끝없이 활성화되고,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개인들의 역량이 만개하는 시대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1990년대에 공유되던 자신감과는 매우 다른 무언가이다. 이제 역사의 종언은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당당한 선언이 아니다. 대신에 야만에 맞서 문명의 방어선을 사수하다 보면 언젠가는 찾아올 천년왕국이다. 종교, 민족주의, 전쟁, 환경 위기, 차별, 혐오 같은 ‘역사적인’ 요소들이 문명 세계를 위협하고, 다시 역사의 세계로 서구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하는 이들은 이미 역사의 종언에서 벗어나서, 다시 새로운 역사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냉전 시대는 역사를 끝내고자 하는 두 세력의 투쟁의 시대였다. 이제는 역사를 끝내려는 이들과 역사를 영구히 간직하고자 하는 이들이 투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역사의 종언에 종언을 가한 일격이 아니다. 역사의 종언은 시작할 때부터 종막을 내재하고 있었고, 못해도 2016년에는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역사를 다시 시작한 사건이 아니라 아직도 역사의 종언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공격한 사건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하였듯, 그 공격은 소련이 해체될 무렵부터 무수히 가해지고 있었고, 세상을 빠르게 읽은 이들은 이미 그 신호를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다. 카플란과 헌팅턴 같은 이들은 1992년부터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헌팅턴은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이 소련을 무찌른 것을 보면서, 냉전의 지정학이 아니라 문명의 충돌이 사태를 이끌어간 동력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해체된 소련 내부에 놓인 가장 위험한 지정학적 단층선 가운데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 강을 꼽았다. 이 강을 기점으로 갈라지는 정체성의 전쟁이 향후 역사의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었다.

드네프르와 문명의 단층선. 2012년 야누코비치의 승리를 만든 선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실제 그 드네프르의 단층선은 훗날 푸틴에 의하여 활성화되었다. 그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이 과도한 낙관주의로 가득한 무리한 선언이었다는 비판을 넘어서, 그 선언 자체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분개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갖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래서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서구와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서구 안에서도 역사를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러시아 안에서도 역사에 진절머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전선은 대체로 국경을 따라 그어지지만 그렇다고 국경 안에 전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 전쟁은 탈냉전 세계 질서를 놓고 벌어진 안정과 혼돈 사이의 투쟁, 역사를 계속 끝낸 채로 남겨두고 싶은 이들과 역사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이들의 30년에 걸친 투쟁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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