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 문장에서 특별한 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제 관계가 급변하고, 우리에게 익숙하던 조건이 점점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 혹은 먼 과거에 잠들었다 사라진 무언가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분기점으로서 전쟁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실제 단독 사건에만 주목하면 흐름을 놓칠 수가 있다. 사실, 한 시대가 끝났다라는 말은 몇 년 전부터도 계속 있어 온 이야기였다. 특히 이 경우에는 한 시대의 시작을 선포한 사람이 매번 소환되어 포화를 맞기 마련이다. 우리 시대에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역사가 끝났다’라고 선언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였다. 제국들 간의 혈투, 처절한 이념 전쟁으로 대변되던 20세기의 역사는 이제 소비주의, 중산층 대중 사회, 갈등을 흡수하는 민주 정치의 제도들로 변모했고,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역사’를 형성하는 장엄한 비극 대신에 일상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기술 관료적 합리성에 기대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의 장엄한 선언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전사들이 가행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로 인하여 10년 만에 흔들리고 말았다. 그 뒤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을 때, 아랍 정권들이 연쇄적으로 전복되고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했을 때, 중국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세계에서 발언권을 내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세계화를 거스르는 토착주의자(nativist) 지도자들이 집권했을 때, 코로나19로 100년 만에 팬데믹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역사의 종언은 끝났다’라는 말이 울려퍼졌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한 세대가 가까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진짜로 ‘역사의 종언의 종언’이 찾아온 시점은 언제일까? 아니 그 전에, 1989년 시점에서 역사가 종언한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가 잠깐이나마 진입하기는 했던 것일까? 실제로 언론인 로버트 카플란은 1992년에 ‘다가오는 아나키’라는 글을 통해 일찌감치 서방 세계에서 감돌고 있는 탈냉전의 낙관주의라는 것이 사실상 환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1989년의 유럽에서 주목해야 했던 곳은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이 아니었다. 대신 미래를 보여주는 곳은 세르비아와 코소보에서 시작되고 있던 민족과 종교,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나아가 지구적 환경 위기, 난민의 발생, 세계화된 엘리트 계층과 대중의 가속화되는 분리, 유라시아 옛 제국들에서 부활하기 시작한 과거의 전통과 영광스러운 역사에 대한 재평가는 소비에트 연방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형태로 서구 사회에 도전을 가할 것이라고 평했다.

아나키가 다가오는가? 카플란은 1992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있을 때, 나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들 사이의 폭력사태를 취재하러 코소보에 가 있었다. 미래는 베를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소보에 있는 것이라고 그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