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바라보기 전에, 그렇다면 30년에 걸친 탈냉전 시대가 끝난 뒤에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역사는 어느 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세계 어딘가에서 맹렬히 전개되어서 후대에서나 그 전모와 의의가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객관적인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입장에서 평가한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하기 때문에, 모든 전망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공격의 대상이 된 역사의 종언은, 사실 텍스트 자체로만 보면 3세기에 걸친 계몽주의의 역사를 바라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망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여기서 이 전망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맞지 않게 될 것임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계에는 지금 두 가지 전선이 있다. 하나는 이 사회를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인지, 사회가 삼아야 할 지향점은 무엇인지를 놓고 싸우는 이념 전선이다. 다른 하나는 이념과 무관하게, 행성의 패권, 나아가 대륙과 대양의 패권을 놓고 국가 간에 벌이는 지정학의 전선이다. 이 두 전선은 때로는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국경을 가로질러 벌어지기도 한다. 냉전 시대에도 물론 이념 전선은 때로는 지정학 전선을 가로지르곤 했다. 소련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을 지원했고, 서방 세계 안에서는 공산당이나 급진 좌익 단체들이 활동을 했고, 소련 안에서는 미국이 팝과 락을 통해서 균열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이념 전선과 지정학 전선은 일치했다. 자유주의는 북미와 서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해안 지대를 따라 분포하고 있었고, 공산주의는 동유럽과 소련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거대한 대륙부에 성채를 건설하고 있었다.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지정학 전선은 매우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제3세계에서 그 경계는 매우 모호했고, 냉전의 지정학적 충돌은 대체로 제3세계 국가들의 행보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전선이 단순했던 시절. 1962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작금의 이념 전선은 크게는 두 이념, 좀 더 세분화하자면 세 이념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역사의 종언을 계승한, 주로 서구 세계의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자유주의 신념이다. 이 이념은 개인성의 만개를 최선의 가치로 생각한다. 차별과 혐오를 제거하여 모두가 평등하게 개인성을 만개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비전과, 사회나 국가의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어 모두가 자유롭게 개인성을 만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지만, 어쨌든 둘은 전제와 목표를 공유한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는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개인이 어떠한 외부적인 부당한 압력에 굴하는 일이 없는 사회가 최선의 사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