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5): 시대의 전선

여행을 준비하며 (5): 시대의 전선

종교의 부활, 신의 반격: 탈냉전 시대에 새롭게 펼쳐진 전선

임명묵

과거를 바라보기 전에, 그렇다면 30년에 걸친 탈냉전 시대가 끝난 뒤에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역사는 어느 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세계 어딘가에서 맹렬히 전개되어서 후대에서나 그 전모와 의의가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객관적인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입장에서 평가한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하기 때문에, 모든 전망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공격의 대상이 된 역사의 종언은, 사실 텍스트 자체로만 보면 3세기에 걸친 계몽주의의 역사를 바라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망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여기서 이 전망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맞지 않게 될 것임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계에는 지금 두 가지 전선이 있다. 하나는 이 사회를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인지, 사회가 삼아야 할 지향점은 무엇인지를 놓고 싸우는 이념 전선이다. 다른 하나는 이념과 무관하게, 행성의 패권, 나아가 대륙과 대양의 패권을 놓고 국가 간에 벌이는 지정학의 전선이다. 이 두 전선은 때로는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국경을 가로질러 벌어지기도 한다. 냉전 시대에도 물론 이념 전선은 때로는 지정학 전선을 가로지르곤 했다. 소련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을 지원했고, 서방 세계 안에서는 공산당이나 급진 좌익 단체들이 활동을 했고, 소련 안에서는 미국이 팝과 락을 통해서 균열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이념 전선과 지정학 전선은 일치했다. 자유주의는 북미와 서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해안 지대를 따라 분포하고 있었고, 공산주의는 동유럽과 소련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거대한 대륙부에 성채를 건설하고 있었다.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지정학 전선은 매우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제3세계에서 그 경계는 매우 모호했고, 냉전의 지정학적 충돌은 대체로 제3세계 국가들의 행보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전선이 단순했던 시절. 1962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작금의 이념 전선은 크게는 두 이념, 좀 더 세분화하자면 세 이념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역사의 종언을 계승한, 주로 서구 세계의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자유주의 신념이다. 이 이념은 개인성의 만개를 최선의 가치로 생각한다. 차별과 혐오를 제거하여 모두가 평등하게 개인성을 만개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비전과, 사회나 국가의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어 모두가 자유롭게 개인성을 만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지만, 어쨌든 둘은 전제와 목표를 공유한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는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개인이 어떠한 외부적인 부당한 압력에 굴하는 일이 없는 사회가 최선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에 반하는 이념은 집단주의 이념이다. 이 이념은 사회가 개인이 아니라 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그 골자로 한다. 개인은 절대 전통과 그 가치, 의미 체계 밖에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전통과 문명의 생존과 번영에 복무해야만 한다. 집단주의가 보기에는 개인이 전통에서 탈출하여 미아가 되는 것이 오히려 예속이고, 물고기가 물 속에 사는 것처럼 전통 속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 오히려 진짜 자유다. 물론 이런 개인주의/자유주의와 집단주의/전통주의의 대립은 그 자체로 새로울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이미 그 투쟁의 역사를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공부했다. 17세기의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18세기와 19세기의 프랑스 혁명, 혹은 미국의 남북전쟁, 20세기 아시아 사회에서 근대화를 이루고자 벌어진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앞선 시대에 펼쳐진 대립의 역사는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전자가 후자를 계속해서 밀어내고 있었고, 나아가 압도하는 방향성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보수적 왕정에 의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자유주의 투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평생 편안히 성당의 미사를 집전하다 눈을 감은 성직자는 그런 흐름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간 축으로 보았을 때, 대서양의 상업 세계에서 탄생한 자유주의가 전통에 근거한 집단주의보다 더 사회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전통의 자의적인 의미 체계는 사람들을 사실상 허상을 좇는 꿈속에 가두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계몽사상과 과학 혁명은 인류의 빛을 밝힐 등불이었다. 사실 20세기의 공산주의조차도 17세기에 등장하였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비전이 변형된 일종의 사생아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는 계몽주의의 진정한 이상을 실행하는 방식이 오히려 집단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집단주의는 비이성적인 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명백한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계몽주의의 적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종의 적서투쟁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벌어진 전통주의와의 투쟁은 20세기가 되었을 때 이미 흘러간 옛 시대의 흔적으로나 보는 것이 마땅했다. 냉전기 근대화 이론은 그 자신감의 절정이었다.

공산주의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시각은 그것이 계몽주의와 발전의 서사의 적법한 계승자를 표방했다는 걸 놓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1932년에 등장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기관차'.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물론 절정이었다는 말은 그 뒤에 내리막을 전제한 이야기다. 세계를 계몽하고자 미국과 소련이 막대한 돈과 자원, 인력을 투입하고 20여 년이 지난 1970년대가 되었을 때, 계몽주의자들은 더는 과거와 같은 자신감을 내비칠 수가 없게 되었다. 비단 서구 사회가 탈산업화에 접어들고, 전후 사회 합의가 흔들리며 노사 분규가 격심해지고 IRA나 적군파와 같은 테러 조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청년들인 68세대라면 1970년대의 혼란을 엄청난 것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1930년대를 겪은 노년들에게 1970년대는 태평성세나 다름없었다. 서구 사회의 불안감은 오히려 비서구 사회의 실패에서 나타났다. 천문학적 원조 금액을 흡수한 제3세계 어디에서도 근대화 이론이 가정했던 급속한 발전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제한적 성과가 있기는 하였으나, 기대했던 바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반발도 함께,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은 서구식 계몽주의를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력한 정치적 운동의 산물이었고, 전통주의로서는 최초로 거둔 국가적 규모의 승리였다. 모두가 서구 사회처럼 될 수 없다면, 세계를 계몽하라는 지상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은 헛된 노력이 아닐까?

1980년대에 서구 사회는 이런 의구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으로 2차 냉전이 시작되면서, 우선은 당면한 소련의 위협을 해결하는 게 최우선시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가 이룬 눈부신 경제성장은 자유주의적 근대화의 비전이 굳건한 진리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 소련은 오히려 이 시기에 근대화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기였다. 소련이 투여한 해외 원조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되었고, 그 의구심은 소련 내부에서까지 퍼지게 되었다. 후진적 이슬람 전통에 메여 있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 러시아가 너무 많은 자원을 쏟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미디어를 통해 확인되는 서구와 동구의 격차는 공산주의식 근대화가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문화적 자유의 결여, 기초적 생필품의 부족, 뒤쳐진 소비사회는 동구 체제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들의 실패는 특히 서구에 새로이 포함되어 서구식 근대화의 우수함을 입증해준 동아시아와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계몽주의의 적자를 둘러싼 투쟁은 마무리 되었으며, 서구인들은 당당히 역사의 종언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제 동구권마저 서구에 포함되겠다고 달려드는데, 제3세계는 하물며 말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베를린 장벽은 물리적 실체로 구현된 어떠한 상징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 독재의 상징을 넘어 후진성, 예속 상태, 전통의 압제 등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의 상징으로도 여겨질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집단주의와 그 바탕이 되는 전통주의는 1980년대에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다만 서구 사회 내지는 동구 사회 같은 이미 발전된 지역의 시선이 그곳까지 닿지 않았을 따름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종교의 부활’, 혹은 ‘신의 복수’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발흥한 때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의 율법대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확산되었다. 인도에서는 세속적 인도 민족주의 대신에 힌두교에 근거한 힌두 민족주의, 힌두트바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사실 서구와 동구 양편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은 남부를 중심으로 4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칭해지는 종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그들은 히피 문화에 의한 미국의 정신적 타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레이건의 보수주의에 문화적 차원을 더했다. 소련에서는 러시아 정교회가 암암리에 다시금 신도를 끌어들이고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스탈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이슬람 전통 문화들이 소생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종교의 부활을 설명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는 사람들을 유기적 전통 사회에서 파편화된 대중 사회, 나아가 개인으로 전환하게 유도하며 심리적 스트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또한 도시와 농촌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을 인지했다. 거기에 시장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라 국가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민간의 다양한 사회적 기반들이 영향력을 확장했는데, 종교와 결합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는 많은 사회에서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근대적인 형태로 재구성되고 새로운 도전들에 나름의 정답을 제시하는 이념들의 등장과 지도자들의 호소는 전통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동원을 가능하게 했다.

역사의 종언의 분위기가 지배하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 새로운 전통주의는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정치 권력을 접수하고 있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훨씬 온건한 형태로 다른 사회들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다. 서구식 근대화, 세속주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이식된 대표적인 성과로 선전되었던 터키와 인도의 사례를 보자. 1996년에 터키는 이슬람주의 정당의 선거 승리와 그를 저지하려는 세속주의 군부의 쿠데타로 내홍을 겪었다. 1995년에는 인도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무굴 제국 시기에 건설된 유서 깊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다음 해인 1996년에,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인민당은 터키의 네즈메틴 에르바칸이 이끄는 복지당과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002년에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폭력 사태인 구자라트 학살이 있었고, 터키에서는 지금까지도 집권하고 있는 레젭 타입 에르도안의 승리가 있었다. 얼마 안 가 인도에서는 인도인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여 세속주의 성향의 인도 국민회의가 10년 간 정권을 탈환하였으나, 인도의 에르도안이라고 할 수 있는 나렌드라 모디가 2014년에 선거에 승리하며 지난 10년이 ‘예외’임을 입증했다. 이란의 통치 체제인 성직자들의 통치(Velayat-e Faqih)만큼 독특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터키와 인도의 지도자들은 분명 서구식 자유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사회를 통치할 수 있음을 세계에 설파했다.

이런 움직임이 근대화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는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이기도 하다. 모디와 에르도안 재임 기간에 인도와 터키는 가파른 경제 성장을 경험했고, 더 진전된 인프라를 공급했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을 도시의 중산층으로 포함시켰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근대화의 성적표로만 보자면 모디와 에르도안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서구화, 즉 서구식 가치 체계를 내재화하는 것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종교(이슬람교/힌두교)를 더 적극적으로 표시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종교나 전통의 언어로 정당화하는 것은 분명 서구가 상정한 세속적 근대화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정확히 유사한 일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을 잇는 남방 불교 세계에서도 벌어졌다. 헌팅턴은 이를 두고 문명의 부상하고 있는 사회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이지 서구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근대화와 서구화는 오랜 시간 동안, 심지어 이 글에서조차 종종 혼용되어서 사용되었지만 분명 별개의 현상인 것이다.

세계화, 서구화, 근대화는 같은가? 인도의 세계화는 근대화에 추진력을 제공했으나 전통은 더욱 크게 부활했고, 인도와 서구의 문화적 거리는 더 멀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서구화’로 상정되는 어떤 정치, 사회적 청사진에 대한 반발이 서구 사회 내부에서도 폭발하였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종교가 부활하는 것은 서구인들의 인식 체계를 크게 위협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내집단이라 생각하는, 대서양을 중심으로 양편에 위치한 서구 사회에서 종교가 부활하고, 전통의 언어가 힘을 얻고, 개인주의와 합리성이 위협 받는 것은 그들이 딱히 상상한 미래가 아니었다. 시작은 서구 사회의 변경이었다. 헝가리와 폴란드로 대표되는 동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서유럽은 전통과 종교가 존중받는 서유럽이었다면서 브뤼셀의 자유주의적 사회문화 정책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동유럽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은 서유럽에서도 반복되었다. 동유럽과 달리 안정적 권력 구조를 갖고 있는 서유럽에서는 아직은 전통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체적인 문화적 토착주의 운동이 정치적 비전으로 연결되는 흐름은 분명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자유주의 근대화의 수도인 미국에서 전통주의의 부활이 더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무척 역설적이다. 사실 미국은 그 두 집단의 대립이 가장 격렬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나라다. 어떻게 보면 이미 레이건은 신자유주의나 레이거노믹스 같은 경제 문제로 집권했다기보다는, 냉전 전사로서의 강렬한 이미지와 기독교에 근거한 문화적 보수주의를 새로이 내걸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열성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 보수주의는 그 이후 클린턴과 오바마 시대에 미국의 양쪽 해안 도시에 집결한 진보주의자들의 대공세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어내었고, 진보주의자들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기 위한 나름의 혁명적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했다. 보수주의 혁명은 얼마 전 서구 사회의 이목을 쏠리게 한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마침내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냈다.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명시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하고 낙태죄와 낙태권의 문제를 개별 주(state)의 일로 돌리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낙태가 미국에서 이토록 치열한 논란이 되는 이유는 결국에는 종교 때문이다. 미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기독교 원칙에 따라서 법을 구성하고 싶어했고, 그 열망이 정치적 압력으로 조직되어 표출되지 않았다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2022년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1979년 테헤란의 혁명의 연장 선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1979년의 미국인들, 특히나 엘리트들은 자국이 이란처럼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모욕으로 느끼거나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과 종교에 근거한 집단주의적 청사진은 서구에서 더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고, 이미 당면한 현실이다.

로 대 웨이드, 그리고 종교의 승리. 2009년에 열린 생명을 위한 행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따라서 현재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세속적 합리주의와 종교적 전통주의 사이에 놓인 이념 전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지도 위에서 국가들 간에 놓인 전선이다. 앞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러시아는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자신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방황에 휩쓸렸었고, 21세기에 들어서 자국의 정체성을 새로이 일신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새로이 개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는 터키, 인도, 이란이 이끄는 전통과 종교의 부활이라는 흐름에 열렬히 참여한 나라였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기독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공유하는 러시아 버전의 신전통주의는 서구 사회에도 매끄럽게 전달될 수 있는 상당한 매력을 갖추었고, 이는 러시아가 자신의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서유럽과 미국에 대대적인 정치, 이념, 사상적 공세를 펼치게 되는 좋은 조건을 형성했다. 한편 반대편에는 합리성, 세속주의, 개인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 미국, 유럽연합, 나토, 혹은 ‘자유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진영은 시민권, 개인, 자유, 평등 등의 가치에 우호적이며, 이러한 가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즉, 이들은 역사를 종언시키려는 이들이다. 1945년에 만들어지고 1991년에 세계의 ‘문법’이 된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그 이념부터 서구적 근대성의 지구적 확장과 보편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지향점은 유라시아의 새로이 부상하는 국가들에서, 특히 집권 엘리트를 위주로 강하게 가로막히고 있다.

그 다음에는 내부 전선이 있다. 익히 설명했던 것처럼, 서구 사회 내부는 현재 두 세력 간의 치열한 갈등이 일상인 상황이다. 두 진영의 갈등은 점차적으로 사회를 양극화시켜서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서구 사회의 마니교적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끝없는 전투가 되고 있다. 이 전선은 지리적으로는 주로 세계 도시에 연결된 이들과 그 배후의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반대편, 즉 전통주의 진영이라고 해서 전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서구 사회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하는 전통주의 세력인 러시아와 이란, 혹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터키와 인도는 서구보다 상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배후에 깔려있는 긴장을 은폐한다. 최근에 일어난 전통의 부활이 근대 사회를 거꾸로 돌려 과거로 돌아가는 운동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구 근대성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창조성과 역동성, 매력을 전면적으로 포용하거나 혹은 그것보다 경쟁력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운동 또한 아니다. 이런 점은 세계화된 도시에 살며 세계화된 경제 영역에 종사하는 유능한 청년층들은 상당수가 전통과 공동체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속박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이동성이 보장되는 세계에서 능력을 마음껏 떨치며 자신들이 원하는 문화를 소비하고 싶어한다. 이런 점에서 모스크바나 테헤란의 세계화된 중산층은 대륙과 바다 건너편 뉴욕, 런던, LA의 중산층과 매우 유사하다. 사실 서구의 근대 사회가 전통 사회를 압도하고 세계적인 패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유능한 인적 자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게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들을 흡수한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그 이야기의 시작점에 위치한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힘을 위해 이런 고급 인적 자원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전통적 윤리와 가치를 사회에 부과할 것인가는 여전히 전통주의 세력이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전통의 윤리와 도덕을 외치는 그 사회의 엘리트들의 자녀부터가 그런 전통의 구호에 가장 냉소적이며, 서구의 세계도시 네트워크에 가장 열렬히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전통주의가 지닌 내재적 취약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집단주의, 전통주의 세력의 지지자들은 주로 서구와 마찬가지로 세계도시와 연결이 적은 지방, 혹은 이제 갓 도시로 올라와 사회적 하위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다. 종교, 종교와 연계된 정당 조직은 이런 사회 집단에게 생존과 사회적 상향 이동을 위한 네트워크를 제공해줄 때가 많다. 세계도시와 배후지의 분기, 세계도시 내에서 계속 첨예해지는 사회적 단층선이라는 면에서 전통주의, 집단주의 세력은 서구식 자유주의 세력과 거울쌍을 이루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두 세력 중 어느 쪽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냐는 데 있다.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 누구보다 신실한 무슬림들이라는 성직자들의 자녀들은 이란의 평범한 사람들은 누리지도 못하는 문화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서구적 근대성에 '투항'했다. 이미지 출처: thetimesofisrael

그렇다면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은 국가인 중국은 어떨까? 중국은 일단은 분류 하자면 확실히 전통주의와 집단주의 세력일 것이다. 적어도 서구식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국가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78년에 개혁개방을 시작하고 1992년에 본격적으로 세계화 경제에 참여하면서 잠시 공산주의 비전을 내려놓고, 그 대신 통치 정당성의 원천을 경제성장과 민족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역사의 종언을 믿었던 서구의 정책 결정자들과 지식인들은 중국이 이 과정에서 그들의 이웃이자 사촌인 남한, 대만이 겪은 길을 따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역시나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깨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심은 불안감, 서구가 어떤 방식으로 중국에 협력적으로 관여해도 공산당은 단 한치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2013년 시진핑 정권이 집권하면서 당당하게 현실화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발전 모델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이 알아서 정치, 사회적 제도를 구축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서구식 근대의 포교를 정면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신에 중국은 유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사상을 발굴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에서도 분명 전통은 부활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공산당 통치는 여전히 뉴델리, 테헤란, 모스크바에서 보이는 바와는 구별되는 모습을 띤다. 우선 공산당의 통치 제도는 과거의 모스크바에서 빌려온 레닌주의 정당 모델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것을 중국의 관료제 전통과 결합시키고 정교하게 개선하여 소련 공산당의 통치 모델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들긴 했어도, 그 근간은 여전히 레닌주의에 있지, 왕조시대 유교적 통치론에 있지 않다. 게다가 중국은 소련이 공유했던 계몽주의의 변형된 신념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신념은 제임스 스콧이 ‘고도 근대(high modernism)’라고 표현했던 사상 조류와 통하는 것이다. 고도 근대는 과학적 합리성을 지닌 강력한 국가가 공학적인 방식으로 개인, 사회, 자연, 공간에 개입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사상이다. 중국 공산당은 레닌주의 정당답게, 조직된 집권 세력이 과학적 방식과 기술적 합리성으로 사회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재조직하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목표 하에서 행동한다. 분명 중국 공산당은 집단주의이며, 중화 문명의 전통을 내걸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전통도 언제든 내팽개칠 수 있는 테크 국가를 지향한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을 모스크바나 테헤란에서 복제할 수 없으며, 중국 공산당도 종교와 초월적인 민족 신화의 논리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히 서구식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근거한 정치 사회 모델에 반대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전통, 문화, 역사에 근거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통치 정당성의 근원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동맹을 맺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행복한 감시국가에서 전통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하지만 역시 냉전 시대와 구분되는 지금 시대의 특징이라면, 이 같은 이념 전선이 명확한 지정학적 전선으로 바로 연계되지 않는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념 전선부터 이미 국경이라는 명확한 경계를 따라 그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또 다른 전선인 지정학 전선과 이념 전선을 포개서 생각할 때야, 우리는 지금의 시대상을 조금이나마 더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점차 복수의 지역들이 이합집산하고 초국가적인 이념들이 힘을 얻던 1930년대, 혹은 19세기 말과 닮아지고 있는 듯하다. 로버트 케이건이 그의 저서 <밀림의 귀환>에서 주장했던 바대로, 미국이라는 정원사가 세심하게 관리하는 정원이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정글로 다시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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