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K씨와의 대화: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의 귀환?

이 글은 존경하는 친우인 K씨와 주고받은 글 중의 일부로 제가 작성한 글입니다.

2월과 3월에 논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컨텐츠 작성에 소홀했습니다. 불성실하고 부족한 사이트를 계속 구독해주시며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죄송하고 늘 감사합니다.

87체제를 그런 식, 한국인과 동아시아인의 내적 동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더 생각해볼 점이 많아지네요. 다만 저는 역시 한국인이 서구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의식에 조금 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X세대가 끔찍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과 미국, 서유럽으로 상징되는 소위 ‘G7 선진국’에 대해 느끼는 그 이해 불가능한 열망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비서구인의 정체성을 깊숙하게 받아들이게 된 이후 6공화국의 역사 전반을 이룰 수 없는 서구화를 향한 고뇌로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관점은 K씨의 관점에 비해서는 조금 깊이가 얕은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 넓은 세계를 알겠다고 떠난 배낭여행 1세대인 X세대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과 동원을 통해 건설한 신화적 위업을 그렇게까지 의심하지 않으며 청소년기까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학적 천하관 속에서 언제나 스스로가 중화에 버금가는 존재라고 내면화하는 조선인들의 놀라운 오만함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떠드는 위업이, 한국인들이 마침내 21세기의 중화인 G7 선진국에 닿게 만든 무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참한 원화의 구매력으로 일본과 유럽연합, 미국에 갔을 때 느끼는 그 낙담은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로 다가왔겠죠. “대체 저 꼰대들이 떠드는 1인당 GNP 1만 달러라는 게 뭐람? 코리아를 얘기하면 노스냐 사우스냐부터 나오는데?” 반면에 우리는 아일랜드에 가서 ‘이 황량한 아시아의 느낌은 뭐지?’를 묻고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가서 ‘선진국 시민’을 향한 선망에 내심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위치에 오게 되었나를, 배신감 대신 자부심으로 이해하고 탐구하기 시작하면 요체는 6공화국의 실패한 서구화가 아니라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에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요. 이 경험이 지금 우리 세대가 87년 이전의 과거, 아니 탈정치화가 시작된 5공이 아니라 거대한 의지와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79년 이전의 과거를 끝없이 소환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해요.

6공과 서구화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얼마 전 K씨가 옛날에 얘기주신 테마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이야말로 양대 사건이라고 하신 적이 있으셨죠. 둘 모두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의 폭발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주체가 열광하여 폭력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게 만들었고, 일종의 반성이 있었지만 그 경험을 한 이들은 여전히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고. 거칠게 정리하면, 대동아전쟁-국체교-국권파-일본-우파라는 하나의 화산이, 반대편에는 문화대혁명-마오주의-민권파-중국-좌파라는 다른 화산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중 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인들은 결국에는 이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의 자장 속에서 역사를 살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좌파는 한국 우파를 향해서 끝없이 너희들은 친일파이며, 국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국가의 폭력을 누구에게나 잔인하게 사용하는 황군이라고 비난하는 것이겠죠. 반대로 한국 우파는 한국 좌파를 향해서, 너희들은 친중파이며, 민중의 해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문가를 구타하고, 국가를 파괴하는 홍군의 야만성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비난에는 모두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천황제 파시즘과 장개석 파시즘을 모두 수용한 남한 우파는 반공을 통한 민족의 초월을 국체로 이해했고, 실제로 국가의 폭력을 잔인하게 사용했습니다. 비국민을 교화하여 국민으로 만들고, 그조차 따르지 않은 이를 ‘처단’하고 싶은 욕망은 모든 한국 우파 민중의 무의식에 있을 겁니다. 또 역시 남한 좌파에게는 홍군 정신이 살아있죠. 말씀하신 김지하가 듣던 중국으로부터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유입되기도 하고, 문혁 정신에 대응하고자 창안한 평양의 주체사상을 통해서 유입되기도 하고. 홍전논쟁에서 전 대신 홍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욕구, 그것을 따르지 않는 전의 옹호자들은 인민의 파도를 불러일으켜 조리돌림하고 구타해야 마땅하다는 확고한 믿음. 그 역시 한국 좌파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좌파에서는 언제나 다카키 마사오를 이야기하고 우파에서는 언제나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를 소환하죠. 그런 차원에서 1979년까지 이어진 황군의 통치가, 홍군을 갈망하는 에너지를 키우고, 탈정치화된 5공 치하에서 황군 정신이 느슨해질 때 홍군 정신이 ‘전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깨어나는 것은 서사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관전기(transwar) 이데올로기는 1979년을 끝으로 세계적으로 퇴조하고 있었고, 탈냉전의 훈풍이 시작되는 1980년대에 홍군 정신도 느슨해지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많은 민주화 세대의 논자들이 5공 트라우마라고 기억하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에 대한 저희 어머니의 회고를 좋아합니다. 그 어떤 국권파 황군 정신의 국가 예찬이나 민권파 홍군 정신의 민중 항쟁에도 불구하고 저희 어머니는 그 노래를 다 함께 청주의 어떤 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신나게 춤을 출 수 있게 해주는 탈이념의 상징으로 기억합니다(그래서인지 1987년에 22살의 저희 어머니가 최초로 얻은 대통령 직선제 투표권을 행사할 때 노태우를 찍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군의 자세로 시위대를 진압할까 고민한 신군부를 막아세우고, 홍군이 이끄는 전민항쟁을 통해 새로운 민중 헌법을 쓰겠다는 운동권을 막아세운 것이 결국 국가와 민중이 일치하여 건설한 수출 자본주의의 역군인 넥타이 부대라는 사실도 매우 상징적이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것은 한국 좌우파를 형성한 양대 사건인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황군적 주체와 홍군적 주체가 싸운 적이 누구였냐는 것입니다. 황군과 홍군과 모두 싸운 세력은 전세계에서 미국 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아시아 해방을 외치며 대동아성전에서 굶어 죽어가며 자살 공격을 한 황군을 분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해방을 외치며 항미원조를 한 홍군을 폭격기로 쓸어버린 것이 미군입니다. 자연히 미국화를 지향하는 6공화국은 여러 의미에서 황군과 홍군의 기억을 억압해야만 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황군과 문화대혁명의 홍군은 대신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 이데올로기적 열정과 폭력은 국가의 공식 서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일본, 중국과 함께 호흡해온 과거를 지워버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 체제의 우등생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87의 주요 당사자들이 여기에 모두 불완전하게나마 만족했고, 일본화나 중국화를 넘어서는 미국화(내지는 유럽화까지 포함하는 서구화)를 향한 꿈은 좌우가 모두 공유했기에, 87의 합의는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중화인 미국을 모시게 된 6공의 좌우파는 상대방을 향해 황군적 흔적, 혹은 홍군적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너희를 믿을 수 없다고 몰아세우게 됩니다. 좌파는 끝없이 그들을 친일파, 국가주의자라고 공격했는데, 이정희씨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다카키 마사오’를 질러버렸을 때 다들 환호를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면을 벗어라! 본색을 드러내라!’인 것이죠. 그 즈음은 우파가 좌파를 향해 ‘종북’ ‘간첩’ 공세를 시작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문재인 당시에 ‘주사파 운동권 정당인 민주당의 친중 행각’이라는 서사로 완성됩니다. 역시 이것도 너희는 문혁의 꿈을 버리지 않는 홍군이니 ‘가면을 벗어라! 본색을 드러내라!’라고 외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공격은 단순히 6공 질서의 미국적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너희는 애초에 뿌리부터 6공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정당성 자체가 없다는 존재론적 공격입니다. 이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모두 겪고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간의 재미 없는 합의 정치를 시작한 전후 유럽 정치와는 다른 무언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를 황군의 후예라고 비난하는 쪽에서는 홍전논쟁을 끝내고자 하는 욕망이, 상대를 홍군의 후예라고 비난하는 쪽에서는 국체의 본의를 밝히고자 하는 욕망이 넘실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영삼의 후예로서 더 충실한 미국화를 지향한 보수당 정치인들은 국체의 본의를 밝히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참여국에서 홍군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모종의 ‘등소평주의’가 느껴집니다. 반대로 김대중의 후예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통해 충실한 미국화를 지향한 민주당(한민당) 정치인들은 홍전논쟁을 끝내기보다는 지역 토호들의 합의 정치를 민주적 문명국의 표준으로서 완성하고 싶어하는 모종의 ‘자민당주의’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우파의 등소평주의와 좌파의 자민당주의는, 좌우를 지지하는 민중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理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2002년의 반미 시위, 2008년의 광우병 시위, 2016년의 박근혜 탄핵 시위는 우파에서 모두 민권파의 폭주이자 홍군의 재림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반대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의 민간인 사찰 논란과 국정교과서, 국가보안법 등과 같은 이슈를 보며 좌파에서는 일본 제국의 헌병대와 특고의 그림자를 느꼈겠죠.

그리고 좌우 양쪽에서 이 불안을 억누르는 가장 큰 힘은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이었습니다. 어쨌든 미국은 홍군과 황군을 모두 이 한반도 남쪽에서 쓸어버린 강대한 제국 아닙니까? 그러나 민권파의 홍군 정신을 억누르고 한국과 일본의 국권파 정신을 익힌 중국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미국에서 세계체제를 작동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 세계이념을 거부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국체를 지킬 수 없겠다는 불안감, 이대로 가면 홍군은 연안 해방구를 잃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 불안감과 상호 불신이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사태를 만든 것이겠죠.

저는 윤석열의 계엄 담화문을 들었을 때, 당연히 처음에 피식 웃게 된 단어는 ‘정상화’였습니다만, 이것은 2024년을 빛낸 신창섭씨의 공헌 때문이고, 살짝 오싹함을 느끼게 한 단어는 ‘자유민주주의 국체’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죠. 서구에서 national polity 따위의 재미없는 단어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국체가 동아시아에서는 엄청난 광기의 살육을 만들어냈으니까요. 국체는 실로 좌파에서 무의식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하며, 동시에 저들이 6공화국의 미국주의 합의로 가리고 있었던 본색을 드러냈구나, 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국가는 민족 정신의 발현이고, 그것이 취해야 할 마땅한 몸의 형태가 있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그 어떤 국가 폭력도 정당화된다는 천황제 파시즘의 상징이니까요.

그런데 그 뒤에 광장에서 깨어난 힘은 무엇일까? 여의도에 나타난 응원봉은 모주석 어록집을 들고 뛰쳐나온 홍위병들일까? 저는 여의도에 가지 않았지만 화면 너머로 나타나는 모습에서 문혁의 무시무시함을 도저히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6공화국의 미국주의와 자유주의 합의를 지키고자 하는 발랄한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6공화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가 공기처럼 느껴온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부지법 집회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제가 거기서 목도한 대중의 에너지에는 문화대혁명의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법관이라는 ‘전’의 정점을 자신들이 갖춘 이념적 순수함과 열정, 즉 ‘홍’으로 공격합니다. 입법부와 사법부, 선관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대통령 담화문은 ‘사령부’를 향한 포격 지시 같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천리는 국체에 있고, 그 국체를 향한 믿음을 지닌 인민 대중이 깨어나 저 수정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이들을 징치해야 한다는 열의가 느껴졌습니다. 트럼프 깃발을 본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부지법 집회에 나간 이들을 윤석열이라는 모택동의 지시를 따르는 홍군이라고 생각했을 때, 역시 세계사적 사명을 발산하는 미국을 소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죠. 자기 멋대로 미국의 정신을 오독해서 형제국에게 내정 간섭을 자행하는 바이든과 해리스는 그들에게 수정주의와 사회제국주의, 패권주의를 행하는 흐루쇼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트럼프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문화대혁명 당시에 레닌이나 스탈린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흐루쇼프의 엉덩이를 걷어차 크렘린의 옥좌에 복귀했다면, 문혁이 얼마나 더 크게 폭발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한국 우파의 황군적 무의식을 생각하면, 이들이 홍군보다는 전시 일본 신민이 국체교를 자발적으로 따랐던 ‘풀뿌리 파시즘’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부가 짧아서 명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전문성을 향한 불신과 타격, 인민과 지도자의 의지 숭배라는 점에서 홍군의 정신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윤석열이 어떤 인물이든 간에 그는 6공화국 자유주의자들의 양대 악몽인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 황군과 홍군을 결합해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조선인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윤석열이라는 천황이 구치소에서 나와서 친정을 시작하기를, 홍위병이 된 군중들이 외치는 것.. 1936년과 1966년이 만나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2025년 한국에서 대동아전쟁과 문화대혁명의 희극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가? 앞으로의 사태 전개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문제이겠고, 또 관점에 따라서 영원히 달라질 문제이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지향점으로 생각하는 현재의 기성 정치인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다루어내지는 못할 것은 확실합니다. 그들이 따르는 미국은 각각 홍군과 황군을 막아냈지만, 홍군과 황군이 결합한 그 무언가는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IDF와 하마스가 각각 황군과 홍군에 대응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주신 적이 있었죠. 시온주의라는 국체를 지키고자, 전사적 명예를 쟁취하고자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황군과, 인민을 물로 삼고 자신들이 물고기가 되어 끝까지 가자 지구에서 지구전을 이어가는 홍군의 싸움. 당장 미국이 이들의 싸움마저 제대로 중재해내거나 다루지 못하는데, 미국도 아니라 한국의 미국화된 정치인들이 이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 민주당이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할까도, 제가 그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닿습니다. 윤석열이 홍군과 황군을 결합시킨 것처럼 민주당도 같은 작업을 해야하는가. 확실히 홍군의 경우에는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남태령에서 연출된 ‘응원봉과 트랙터’는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홍군의 로망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줍니다. 농민이야말로 홍군의 심장이며, 한 명의 케이팝 팬으로서 저는 모든 케이팝 팬들은 그 자체로 홍위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들의 홍군적 열정은 상당 부분 소진된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관리 정치를 거치며 수도권 아파트를 지닌 X세대 중산층이 보수화, 미국화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들에게는 노무현에 비견할 충분한 마오 주석이 존재하지 않고, 미국의 리버럴 제국이 소비에트 연방처럼 해체되고 있기 때문일까요? 또한 저 태극기 운동가들이 지닌 ‘황군성’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더 거센 홍군의 파도를 일으켜야만 하는가. 아니면 왼쪽에서도 국체를 어떻게든 호지해내야 한다는 2.26의 정신을 개발해내야 하는가. 그렇다면 민주당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이 대한민국의 성스러운 국체는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이 황군과 홍군을 초극해내는 길을 위해서 참조해야 할 선례는 황군과 홍군이 갈라지기 전 시대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국민 국가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 천하의 일원으로 여겨지던 때. 보신전쟁과 서남전쟁, 의화단과 신해혁명에서 국체를 둘러싸고 관민의 전쟁(civil war와는 다른 동아시아적 무언가)을 일으키던 때 말이죠. 저는 이 시기에 대해서는 무지하니 앞으로도 계속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개신교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는 또 다른 문제가 될텐데, 다른 글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