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은 무엇인가 (4): 종교의 이상한 부활

K-POP은 무엇인가 (4): 종교의 이상한 부활

1980년대, 죽어가던 신이 부활하다.

임명묵

사실 많은 종류의 격변이 그렇듯이, 탈냉전은 의미의 위기를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었다. 의미의 위기는 이미 계몽주의 투쟁의 마지막 장이던 냉전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의미의 위기에 따른 세계 각지의 대응들은 냉전 체제 자체를 공격하면서 탈냉전을 열어젖혔다. 따라서 탈냉전은 이미 존재하던 의미의 위기가 만들어낸 현상이자, 그 위기를 한껏 증폭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듯 전후 사회는 본질적으로 풍요와 발전의 시대로 표상되었다. 1945년을 기점으로 19세기의 ‘좋았던 시절(Belle Epoque)’을 산산조각 냈던 거대한 세계대전과 학살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미국과 서유럽 일각의 소수 지배층만 독점하던 산업 기술의 혜택이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2차 산업혁명과 포디즘, 내연기관과 전기를 받아들이면서 1930년대의 대중사회는 총력전을 대비하기 위한 동원체제와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 기획을 수용하는 사회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20세기의 남은 50년 동안 대중사회를 특징 짓는 가장 큰 상징은 소비였다. 특히나 과거의 기억이 없이, 전후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였고, 전통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유의 문화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을 정의했다.

문제는 모두가 풍요 속에서 소비와 대중문화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는 없었다는 데 있었다. ‘68혁명’을 전형적인 형태, 즉 전후 세대가 표출한 사회문화적 자유의 외침으로 경험한 국가들은 제1세계라고 불리는 선진 산업 국가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 전후 세대는 상당히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2세계에서 전후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준군사적 동원체제를 강요하고 있는 공산당 정권에 때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때로는 소극적인 일탈을 즐겼다. 이들은 사회와 문화적 자유화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자유화와 풍족한 생필품 공급 등의 정치경제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제3세계에서 상황은 더욱 달랐는데,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의 새로운 세계, 즉 탈식민적 세계를 건설하고자 고군분투했다. 어떤 국가에서 그 노력은 미국이 후원하는 현지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드러났고, 다른 국가에서는 민족주의적 정부의 지도 하에 열렬히 근대화를 위한 동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대의는 자체적인 힘으로 산업화와 도시화를 달성하여 더는 서구에 뒤처지지 않는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2세계에서의 68은 공산당 체제의 개혁을 얘기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었고, 제3세계에서의 68은 미국에 맞서는 민족 해방 운동의 기지로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전쟁으로 상징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파리나 프랑크푸르트의 대학생들이 이야기하는 68과는 전혀 다른 요구를 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를 막론하고 전후 세대의 요구는 냉전 질서의 틀에서 어느 정도 봉합될 수는 있었다. 물론 소위 ‘위기의 1970년대’로 불리는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이를 ‘봉합’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른 바르샤바 조약기구군 투입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제3세계의 동란은 세계 질서의 전체적 차원에서 본다면 제한적 영향력만을 행사하였고, 대부분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강대국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1세계의 68운동은 유의미한 정치경제적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고사했으며, 결과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의 강한 결집을 불러오면서 좌파 정치의 급속한 퇴조로 이어졌다. 오일쇼크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동아시아 경제의 급속한 성장이 경제적 차원에서 1970년대와 그 이후를 뒤흔들 것이었으나,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정치적 결속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1970년대를 상징하는 미소 데탕트는 양 진영이 이제는 서로를 존재론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평화공존을 모색하자는 목소리가 실현된 결과물이었다. 이는 상대 진영의 안정성이 견고하다는 판단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1979년이 되었을 때, 서방과 동구를 각각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 냉전 체제를 뒤흔들었다. 이 위기는 1968년과 달리 냉전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로 심화되었다. 사실 그 여진은 지금까지도 지속된다는 점에서, 냉전 이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사건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중동 동맹국인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련이 불신하는, 그렇기에 열심히 감시했던 동유럽 위성국인 폴란드에 바티칸의 교황이 찾아온 일이었다.

여전히 저발전 상태인 이란에서 신정 체제가 설립된 일과, 어느 정도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룬 폴란드에서 공산당 독재로부터의 해방, 서구로의 복귀를 외친 일은 그다지 공통점이 없어보인다. 미국과 소련의 동맹 체제를 흔들었다는 파급효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면에서의 움직임을 본다면 두 사건은 상당히 흡사한 조건 위에서 벌어진 일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첫째 유사성은 두 사회가 처한 정치적 조건이었다. 팔레비 왕조와 폴란드 공산당은 모두 권위주의적 정권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후원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이란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1953년에 민족주의적인 모사데그 총리가 쿠데타로 제거되는 일이 있었고, 소련은 공산당 체제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찍어누르고 있었다. 둘째 유사성은 두 국가가 국민들의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란과 폴란드는 모두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급속한 현대화를 시도했지만, 팔레비 정권은 석유 산업의 불균형한 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노동 계급의 사회주의 운동, 농촌의 위기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이란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이웃한 서유럽과 비교하였을 때 만족스럽게 생필품과 소비재를 공급하는 데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가 침체하자 서유럽으로부터 도입하는 외자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란과 폴란드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정당성의 부족과 경제적 위기에 따라 누적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통해 등장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의미심장한 것은 세 번째인 사회적, 문화적 요소였다. 폴란드의 교황 방문과 이란에서 신정 체제의 수립이 갖는 가장 특징적인 공통점은 두 국가의 인민이 모두 종교를 통해서 운집하여 조직화되었으며, 종교의 언어를 통해서 정치, 경제적 요구를 전개했다는 데 있었다. 사실, 종교적 요구는 폴란드와 이란에서 정치, 경제적 요구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찌 보면 정권에 대한 강한 반감을 형성하는 데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제공했다고까지 볼 수 있었다. 이란에서는 신정 체제가 수립된 것을 통해 이것이 충분히 입증된다. 후진성의 상징이라며 금지된 히잡과 차도르가 신체제에서 여성들의 의무가 된 것은 이란 혁명이 이전의 혁명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순간 중 하나였다. 폴란드에서 사람들은 공산 정권이 억압하는 가톨릭 정체성의 표현을 자유롭게 허락하라고 소리쳤다. 폴란드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등장은 공산당이 봉건주의적인 미신이라고 깔보았던 가톨릭이 폴란드 민족을 이루는 근원적 요소임을 새삼스럽게 자각시키게 만들었다. 폴란드인들은 서유럽으로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자신들의 가톨릭 정체성을 다시 소생시키고 수행하기를 원했다. 에릭 홉스봄은 이란 이슬람 혁명을 두고 1789년의 파리도 아니고 1917년의 페트로그라드도 아닌 1979년 테헤란의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평한 바가 있었다. 1989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날 혁명은 분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를 거부하는 것이었으나, 거기에는 1789년의 파리와 1979년의 테헤란이 섞여 있던 셈이다.

“1979년 테헤란 전통”의 재현은 폴란드에서만 그치지 않았고, 미국과 소련의 위성국이나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1980년대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한 종교 전통이 정치화되어 계몽주의에 입각한 정부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압박하는 시대였고, 사실 이런 종교의 부활은 1970년대부터 이미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68년에 좌파적 지향과 가톨릭을 결합시켜 해방신학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안했고, 미국이 지원하는 권위주의 정권과 투쟁하는 데 동력을 제공했다. 테헤란의 혁명을 가능하게 한 사상인 이슬람주의는 1960년대 이집트의 사이드 쿠틉이라는 사상가를 통해서 일대 전기를 맞이했고, 1970년대에는 이미 다르 알 이슬람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이란 혁명의 파급효과가 자국의 무슬림 지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맞서는 지구적 성전에 참여하게 된다. 남한에서는 1980년을 기점으로 북한을 사라진 민족적 가치가 구현된 곳이라고 이상화하는 주체사상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유럽에서는 공산당의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부활했다. 동구권에서 종교 정체성의 재확인은 공산당 통치를 종식시키기도 했고, 때로는 민족 간의 격렬한 내전을 부추겨 잔혹한 학살극과 인종 청소가 펼쳐지게 만들기도 했다. 이 모든 위기로부터 비껴가는 것처럼 보였던 미국마저도, 1980년대가 되자 경제적 자유주의와 기독교에 근거한 문화적 보수주의를 조합한 ‘레이건 혁명’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모든 나라들은 처해 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고, 경제적 발전단계도 상이했고, 문화 전통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경험했고, 부활한 종교를 바탕으로 자국의 정치적 공간에 침입하여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요컨대, 정치, 경제적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지구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문화와 정체성 문제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불만이 진정으로 지구적인 문제였으며,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요구로 시작한 운동이 정치, 경제적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1980년대의 종교의 부활은 물 밑에서 일어나고 있던 거대한 변화가 드디어 수면 위로 부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의 움직임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당대 미국과 소련의 당국자들은 이토록 ‘갑작스러운’ 종교의 부상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두 초강대국 모두 자신들이 열렬히 권장하는 근대화 프로젝트 덕택에 종교라는 과거 인류가 무지몽매하던 시대의 유산이 퇴조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무신론을 사실상의 국시로 표방한 국가였고, 종교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아예 대체하기를 원했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격적 무신론 정책을 비난하며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전통을 옹호하기는 하였으나, 근대화 이론가들 대다수가 딱히 종교를 더 선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물로 종교의 영향력은 적어도 공적 차원에서는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요컨대 종교는 개인 내면에만 하나의 믿음으로만 남게 되고, 그것이 사회와 공공의 문제를 결정 짓는 준거로 활용될 일은 앞으로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역사의 고고한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바로 ‘세속화’라는 이름의 힘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역사는 세속화를 더욱 앞당기려는 계몽주의자들과, 종교를 공적 영역의 준거로 계속해서 남기고자 하는 전통주의자들 간의 투쟁이었다. 20세기에 들어 계몽주의자들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나니, 이제 전통주의자들은 사라질 일만 기다리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란과 폴란드,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회가 보여준 것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단순히 종교가 부활한 것만이 두 초강대국의 근대화론자들의 전망을 뒤집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종교가 ‘왜’ 부활했냐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미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지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각은 특히 이슬람 세계를 바라볼 때 아주 일반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성과 속을 구분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근대화에 따른 세속화에 강력하게 저항을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저항이 정치적 운동으로 촉발되어 사회를 ‘퇴보’시키는 게 이슬람주의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주의를 억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슬람주의자들의 도전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로 상징되는 물질적 근대화를 더욱 뚝심 있게 추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슬람을 무언가 특별한 예외로 간주하려는 시각은 이슬람도, 이슬람 바깥의 세계도 설명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첫째로, 이슬람주의가 대중 운동으로서 가장 강렬하게 폭발한 곳은 20세기 내내 도시화를 경험한 국가들이었다. 이란은 1970년대까지 중동 지역 전체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국가였다. 물론 수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그러한 발전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이슬람주의 정권이 등장하고는 했지만, 이란 혁명 이후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 도시에서 탄생하여 도시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는 했다. 즉, 달리 말하자면 이슬람주의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부활시키겠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몇몇 이슬람 사회가 ‘근대화를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둘째로, ‘성과 속의 통일성’을 신봉하는 이슬람을 이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으로는 1980년대에 그야말로 지구적 차원에서 종교가 부활하여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낸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종교의 부활은 이슬람 세계에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고, 다신교 신앙인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서도 힌두트바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개신교가, 폴란드는 가톨릭이,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정교회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성과 속의 철저한 분리는 과거 다른 종교에서도 상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세 유럽의 권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성직자들이 해석하는 계율은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 개입하고 있었다. 성속 분리와 뒤이은 세속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세계는 성속을 분리하는 것이 딱히 의미가 없는 세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부활은 하나의 거대한 시대로서 냉전이 본질적 차원에서 해체되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냉전 체제에 균열을 낸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과 정보통신 혁명이 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다. 하지만 ‘근대화로 인한 종교의 부활’은 냉전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웅변하고 있던 계몽주의의 기관차가 무언가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정지하고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중요했다. 미국의 자유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는 계몽을 통하여 인간 이성으로 작동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사명감을 통해 스스로의 위상을 정립했다. 계몽주의의 이상이 아니었다면 두 초강대국이 유럽과 동아시아를 각각 반으로 가르고, 나머지 세계를 얻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 개입과 정보 공작을 펼칠 이유가 없었으며, 인간을 우주에 먼저 보내겠다고 그렇게 처절한 싸움을 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1980년대가 되자 그 계몽의 목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도리어 종교를 부활시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의 프로젝트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물론 1980년대, 나아가 1990년대에도 종교의 부활이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결코 주류는 아니었다. 적어도 종교의 부활은 제1세계보다는 제2세계의 기획에 훨씬 더 치명적인 것처럼 보였고, 그 결과 제2세계와 대치하고 있던 제1세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통과 종교의 수행을 그래도 큰 폭으로 보장해주었던 제1세계와 달리 제2세계는 종교와 사실상 전쟁을 벌였던 공간이었다. 정권에 대한 반발이 극대화된, 종교성을 요구하는 인민의 행렬은 곧이어 수많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요구와 함께 합쳐지며 체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종교를 향한 요구는 계몽주의의 후예로서 사회주의로 정체성을 조형하려는 시도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발이었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정치경제의 부조리함과 비효율성, 독재와 만성적 물자 부족을 비난하는 흐름과 합쳐질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 제국이 그들이 죽였다고 생각한 신의 복수로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미국이 열렬히 환영하며 신의 전사들에 축복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계몽주의의 두 자식이라는 점에서, 소련의 위기는 다른 의미에서 미국의 위기이기도 하였다는 것은 곧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부활한 종교는 단순히 러시아에 세워진 무신론의 제국만을 공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무신론자들보다는 관대했지만, 종교를 좁은 사적 영역으로 한정 지은 자유주의자들도 공격하고자 했다. 이 역시 종교성을 향한 집단적 움직임이 여러 다른 불만과 결부되어 함께 폭발하는 패턴을 보여주었다. 이란 혁명으로 촉발된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세계를 제국주의의 무력과 문화적 방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이 지역의 열망을 담아 명확한 반서구주의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그들의 요구는 부정의한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불만을 개혁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국내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도 향했으며, 대안적 질서는 종교적 가치를 국가에 부과하면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 특히 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갈수록 강해졌다.

부활한 신이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주의에게도 복수를 감행하게 된 것은,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듯 탈냉전이라는 시대가 계몽주의가 제공해주던 목적성과 의미를 상실한 것과 매우 강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렇기에 냉전의 종식은 시대의 단절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한 시대의 장구한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산업화, 도시화, 국민교육과 보건의 확대, 전후 세대의 등장, 그로 인해 초래된 의미의 위기. 이 거대한 흐름은 냉전 체제에서 심화되면서 냉전 체제 자체를 무너뜨렸고,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는 더욱 더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계몽주의를 사수하고자 노력하는 이들과, 개인과 합리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대투쟁이 지금의 ‘시대의 전선’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라면, K-POP 얘기를 하는데 왜 대체 냉전 시대와 종교의 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종교가 부활하고 그 결과 냉전 체제가 무너졌다는 이 이야기는 앞선 글과 꽤 모순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앞선 글에서는 풍요 속의 전후 세대가 소비 문화를 좇기 시작했으며, 공산권은 서구 소비 문화의 역동성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줄곧 얘기한 ‘종교의 부활’ 이야기는 풍요 속의 전후 세대들과 68로 상징되는 문화적 자유가 만들어낸 대중음악이 동구권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와 정반대되지 않는가? 전후의 근대화 속에서 한쪽에서는 세속적 자유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종교가 부활했고, 한쪽에서는 그 세속적 자유를 문화적인 면에서 끝까지 추구하는 대중문화의 힘이 가공해졌다면, 대체 이렇게 상반되는 힘들이 동시에 커진 어떤 시대인가? 정확히는 종교와 대중문화 중 적어도 한쪽은 터무니 없이 그 영향력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아닐까?

물론 얼핏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두 현상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서로 다른 모습의 현상이라면 어떨까? 전후의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대중사회의 형성이 종교도, 그리고 대중문화도 같이 밀어 올렸다면?

어쩌면 이 질문이 K-POP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답부터 말해보겠다. K-POP은, 나아가 현대 대중음악은 그 자체로 종교적 현상이다. K-POP은 ‘가장 종교적인’ 음악이기에, 종교가 부활하는 지금의 시대에 정확히 부합하는 음악, 아니 일종의 생활양식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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