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마지막 거처, 레닌스키예 고르키
모스크바 근교의 레닌 별장
아스타나에서 셰레메티예보 공항으로 도착했다. 올해 내가 머물렀던 북서쪽 힘끼 지역에 있는 공항이다. 하지만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이때 이후로 써본 적이 없는 것 같고 전부 도모데도보 공항을 썼던 것 같다. 한국에서 보통 러시아를 들어갈 때는 세례메티예보 공항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진의 열차는 모스크바의 공항철도 아에로익스프레스. 무려 500루블의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데, 이 나라가 환율이 워낙 널뛰기를 하니까.. 대충 만원 정도 돈을 낸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2019년에 갔을 때는 체감상 만오천원 정도 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난다.
셰레메티예보 역에서 연결된 주요 기차역은 모스크바 벨라루스 역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철도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벨라루스의 민스크를 거쳐 폴란드의 바르샤바까지 이어졌던 철도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이 역에서 셰레메티예보 공항으로 향했다.
우선 일행을 만나기 전에 숙소 체크인부터... 2019년 3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도시 모스크바에 왔을 때 썼던 숙소를 다시 잡았다. 장소는 모스크바 북동쪽의 베데엔하(인민경제성과전시회장) 역 인근의 호텔 카츄샤. 역에서 나와서 숙소로 가는 사이에 조그마한 성당이 있다. 성당 뒤뜰에는 묘지도 있었다.
2019년 3월.. 한달의 여행을 끝마치고 신나서 술을 먹은 임명묵이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서 저혈압으로 쓰러져서 화장실 타일에 이마를 크게 찧고 피를 줄줄 흘렸던 곳... 그 뒤에 친구가 부른 구급대원들이 찾아와서 지혈해주고 드레싱해주고 친절히 붕대까지 감아주었던 곳... 다시 와버렸다..
일행과 본격적으로 카프카스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모스크바에서 하루 정도는 시간이 떠서 같이 둘러볼 곳을 정했다. 2019년 모스크바 여행의 핵심 장소는 남쪽으로 한참 가면 나오는 고르키 레닌스키예(레닌스키예 고르키). 원래 고르키라는 이름의, 모스크바 남쪽 교외에 있는 귀족 별장이었는데 혁명 이후에 레닌의 다차(별장)로 전환되었다. 말년에 사실상 몸을 제대로 못 가누던 레닌이 아내인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와 함께 요양했던 곳이다.
지도 상에 위치한 모스크바 남쪽의 도모데돕스카야 역에서 버스를 잡아타서 이동했다. 내리자마자 나오는 저 정겨운 소비에트식 아파트들...
무슨 시장 같은 게 열려 있어서 사람들이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대중교통을 타고 교외로, 시내로 바삐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놀이터인데... 아파트 모습도 저렇고 놀이터까지 무슨 한국에 온 줄로 착각했다. 역시 소련과 조선은 하나..
레닌스키예 고르키에는 두 가지 볼 거리가 있는데 하나는 1987년에 지어졌다는 레닌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레닌이 거주했다는 다차다. 일단 박물관이 먼저 우리를 맞이해준다.
1987년에 지어져서 그런가 무언가 현대적으로 디자인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굉장히 모던한 디자인에 내부 컨셉도 꽤나 멋졌던 기억이 난다.
레닌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인상적이라서 찍은 건데.. 고엘로(GOERLO)라고 하는 레닌 말년의 국가 전력화 계획을 전시한 것이었다. 왼쪽에는 "공산주의, 이것은 소비에트 권력 플러스 전국의 전기화이다. - 블라디미르 레닌"이라고 적혀 있다. 소련 전토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형상화한 지도와 전시 작품이 굉장히 멋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레닌의 저작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보고 나오면 전형적인 러시아의 교외 모습이 펼쳐진다. 푸르른 초지에 말들이 풀려 있고, 울창한 삼림이 둘러싸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곳이다. 정말 늙어서 몸이 골골할 때 요양하면 수명이 5년은 연장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흉상. 저 뒤에는 레닌 흉상도 있다.
병상의 레닌을 문병오러 많은 소련의 고위 인사들이 찾아온 곳이기도 했는데, 스탈린과 함께 찍은 이 유명한 사진이 고르키에서 찍은 것이다.
카톡 배경화면으로 여전히 쓰고 있는 레닌스키예 고르키의 평온한 풍경. 여름의 소나기가 한 번 시원하게 지나가고, 하늘이 맑게 갠 가운데 사이 좋은 커플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어디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하며 찍었다...
레닌스키예 고르키를 둘러보고 나와서는 모스크바 시내를 좀 더 둘러보기로. 이 건물은 무시무시한 KGB 본부이자 지금은 FSB(연방보안국) 본부인 루뱐카 건물이다. 저 앞에 KGB의 전신 체카의 창립자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이 있었는데,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분노한 소련 시민들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그러나 제르진스키의 후예가 여전히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이곳은 베데엔하 인근에 있는 우주 기념비. '우주정복자들에게'가 작품의 정식 제목이다. 100m짜리 티타늄으로 세워졌고, 길에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부터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유리 가가린을 비롯한 소련의 우주 영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어 있다. 저 디자인은 이후에도 우주 비행 기념물의 표준이 되어서 소련 여기 저기에 비슷하게 많이들 세워졌다.
저 가운데 보이는 널찍하게 우뚝 솟은 건물은 러시아 국가두마(연방 하원의회) 건물이다. 1935년에 완공되었는데, 원래는 경제 및 군수품 생산을 관리하는 '노동국방 위원회' 건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훗날 소련 각료회의 본부로 쓰이다가 최종적으로는 소련의 경제 계획을 관리하는 사령탑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건물로 쓰였었다. 1994년부터 러시아 연방 하원의회 건물로 변했다. 30년대 구축주의 양식으로 위엄 넘치게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마르크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 나라지만 잘 만들어진 마르크스 기념상은 여전히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밑에 글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소련의 국시다.
이 숲은... 레닌의 다차를 보았으니 스탈린의 다차도 보자고 해서 방문한 곳이다. 소련사나 외교사, 2차대전사를 보다보면 자주 나오는 '쿤체보 다차'가 이곳이다. 스탈린은 그루지야와 인근 압하지야에 여러 다차를 지어놓고 거기서 휴양도 보내고 집무도 보고는 했는데, 당연히 모스크바 근교에도 다차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쿤체보 다차였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이곳에서 업무를 많이 보았고 죽을 때도 이곳에서 죽었다. 처칠이나 모택동 같은 세계사적 인물들과 회담을 나누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 관광객들의 출입은 철저히 막고 있었다. 멀찍이서 벽만 찍고 아쉽게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예레반으로 떠나기 전, 금강산.. 아니 아라라트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을 먹기로 했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북한 식당 릉라도. 지금은 폐업한 상태였지만 당시에는 영업을 하고 있었고, 인민복을 입은 고위층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에 지하의 별실로 따로 안내를 받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중국식 요리 메뉴가 많이 나왔는데, 다른 분에게 듣자 하니 중국과의 교류가 많아져서 중국 식문화가 유입된 것도 있고, 아무래도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 식당을 많이 찾다보니 넣은 것도 있다고.
이런 건 진짜 중국 요리 아니겠는가..
그래도 역시 북한 식당에서 먹을 건 냉면이다. 물론 냉면은 서울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음..
스탈린의 웅장한 고딕 양식 건물들 중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작품들만 따서 '스탈린의 일곱 자매'라고 하는데 그중 맏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건물이다. 한 동안은 유럽 최고층 건물 중 하나였는데.. 여기가 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여름 해가 저물어가는 고요한 가운데 참으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나중에도 수없이 드나들게 될 파벨레츠키 역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도모데도보로 향하는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탄 다음에..
도모데도보에서 카프카스 예레반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탑승하기로 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카프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