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제국의 고차원적 회복, <Making Uzbekistan> 서평

소비에트 제국의 고차원적 회복, <Making Uzbekistan> 서평

이슬람 모더니스트 자디드와 볼셰비키 혁명의 동상이몽을 추적하다

임명묵

저자 및 저작 소개

아딥 할리드는 1964년생의 파키스탄 학자로,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타슈켄트로 온 서구권 1세대 중앙아시아 연구자이다.

이미지 출처: 미국역사협회

그는 후기 제정 시기부터 소비에트 초기 시기까지 중앙아시아 이슬람 지성사를 연구하여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 Jadidism in Central Asia를 1998년에 저술하고 이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에는 20세기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 탈소비에트 독립 공화국 시기 중앙아시아의 국가와 이슬람의 관계를 서술한 Islam after Communism: Religion and Politics in Central Asia를 저술했다. 2015년에 본서 Making Uzbekistan을 저술하였고, 이는 20년 전에 출간한 첫 책인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의 후속작 격인 책이다. 2021년에는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 중앙아시아를 개괄하는 Central Asia. A New History from the Imperial Conquests to the Present를 출간했다.

자디드, 새롭다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 무슬림 근대주의자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아랍어 대신에 튀르크 민족어를 중심으로 유럽적 교육 방법론을 수용한 새로운 교육 방법(Usul-i Jadid)이라는 용어에서 출발한 근대 교육 운동이다. 

아딥 할리드의 주요 학술적 업적은 소비에트학/러시아학과 이슬람학을 학제적으로 수준 높게 통합해낸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소비에트 연구나 이슬람 연구에서 중앙아시아는 주변화되고, 제국-식민지 / 전통-근대 이분법 구도로 단순화되는 경향이 강했다. 중앙아시아 이슬람 전통이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혹은 근대화되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이질적이고 이식된 소비에트 체제는 현지 질서에 본질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그래서 전통은 온전히 보전되었거나, 혹은 소련은 중앙아시아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는 몹시 정치화된 연구 분야인 이슬람이나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에 따라 달라진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문서고 혁명, 구소련 가맹국들의 독립과 유라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증대되었고, 제국사 방법론이 수용되며 소련사 연구에 “제국적 전환(Imperial turn)”이 생겨났다. 소련의 비러시아 지역과 러시아 본토의 상호작용과 제국 구조를 소련사를 보는 기초적 틀로 설정하는 연구 경향성이 형성된 것이다. 다만, 소련사 연구자들의 맥락을 고려할 때 러시아어 자료 편중과 지역어로 소통한 행위자들의 자생적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덜 포착된 한계가 있었다.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 중앙아시아에서 자디드주의자와 전통주의자 간의 문화적 헤게모니 경쟁을 다룬 저작으로 러시아사, 중앙아시아사, 이슬람 근대사에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고, 우즈벡어와 러시아어 자료를 모두 이용한 점이 특히 높게 평가 받는다. ‘제국 러시아의 무슬림’ 공간의 풍경을 다뤄내고, 중앙아시아가 러시아 제국 통치로부터 받은 영향과 당대 중앙아시아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종합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자생적 움직임이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라는 이분법 대신에, 중앙아시아 사회 내부의 갈등과 동학, 전통적인 이슬람 세계 연결망의 중요성을 조명했다.

이로 인하여 ‘자디드 애호'와 그를 둘러싼 논쟁도 시작되었다. 할리드가 자디드 연구를 본격화한 이래로, 러시아 제국 무슬림 사회의 근대적 전환을 논할 때 자디드는 빠지지 않은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제국(러시아)으로부터 자율적인, 전통과 근대의 종합을 추구한 자디드의 서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자디드라는 용어가 학술적으로 남용된다는 지적이 등장했다. 추가적으로, 소수의 이슬람 모더니스트 지식인들과 행위자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비하여 지나치게 관심을 받고 애호의 대상이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제 중앙아시아에서 중요한 행위자는 러시아/소비에트 정부, 중앙아시아 현지 민족 출신의 공산당원처럼 아예 이슬람 전통과 관련이 없거나, 혹은 지역 사회에서 제국 체제를 무시하고 회피하면서 전통적 관념의 헤게모니를 지킨 울라마 집단이 아니냐는 것이 비판의 요체다.

책의 요점: Making Uzbekistan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에서 1917년 혁명과 함께 끝나는 중앙아시아 자디드의 여정을 혁명, 내전, 소비에트 체제 수립과 발전까지 확대한다. 우즈베키스탄의 형성기에 자디드의 위상, 역할, 활동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이 단순히 후대 학자의 사후적 애호에 의하여 과장된 것이 아니며 중앙아시아의 현대사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이론 및 방법론: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에서는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 개념을 이론적 틀로 사용했다. Making Uzbekistan에서는 이론적 서술은 많지 않지만 전작의 연장이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는 정치사와 지성사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소련 체제에서 생산된 당과 정부 문헌들과 자디드가 직접 남긴 우즈벡어로 된 논설문 및 문학에 주목한다.

Making Uzbekistan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1. Intelligentsia and Reform in Tsarist Central Asia

2. The Moment of Opportunity

3. Nationalizing the Revolution

4. The Muslim Republic of Bukhara

5. The Long Road to Soviet Power

6. A Revolution of the Mind

7. Islam between Reform and Revolution

8. The Making of Uzbekistan

9. Tajik as a Residual Category

10. The Ideological Front

11. The Assault

12. Toward a Soviet Order

Epilogue

1장에서 5장은 근대 중앙아시아의 자디드 운동 형성, 러시아 제국의 해체와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자디드의 급진화 및 볼셰비키와의 동맹, 중앙아시아에서 제국 권력의 회복 및 소비에트 체제의 수립을 다루는 정치사를 서술한다.

6장과 7장은 자디드가 발전시킨 급진적이고 혁명적 사상을, 8장과 9장은 우즈벡과 타지크라는 이 지역의 주요 민족 구분이 어떻게 자디드에 의하여 상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주제별 서술로 이어진다.

다시 10장부터 12장까지는 정치사 서술로 돌아와서, 자디드가 모스크바 중앙 권력과 우즈벡의 신세대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어떻게 공격을 받아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책에서 주목하는 개념 및 요소

러시아 정착민, 이슬람 모더니즘, 이슬람 전통주의라는 세 행위자의 상호작용: 정착민 사회와 식민지 사회는 유리되었고, 정착민과 전통주의자는 이런 분리 상태를 유지하는 데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자디드(이슬람 모더니스트)들은 이슬람 신앙의 현대화와 문화적 개혁을 통해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근대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에는 정착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전통주의자와 갈등이 심화됨.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국 해체로 자디드가 제국 권력에 적극 참여하려 한 시도는 타슈켄트의 ‘정착민 사회주의자’와 전통주의자 양측의 공격을 받으며 분쇄된다. 중앙아시아 사회 내부의 반발에 분개한 자디드는 러시아 내전을 수습하고 중앙아시아에서 권력을 공고히한 볼셰비키라는 동맹자를 발견해냈다. 볼셰비키와 자디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집단이었지만, 급진적인 사회, 문화 혁명의 이상을 공유했다.

오스만-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의 국제적 맥락: 크림-카잔-바쿠-부하라라는 제국적 맥락에 더하여 중앙아시아 자디드는 러시아 제국 바깥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유일하게 주권을 행사하는 이슬람 국가였으며, 칼리프가 통치하는 권위의 원천이자 성공적인 이슬람 근대화의 모델로 인식된다(청년 튀르크와 청년 부하라). 자디드 사상가들은 오스만과 페르시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그곳의 지식인들과 소통하며 이슬람 모더니즘을 발전시켰다(하미디안 시대). 하미디안 시대 이후에는 튀르크주의가 오스만에서 확산되면서 중앙아시아에도 튀르크주의의 영향이 지대해진다. 튀르크주의는 후술할 차가타이주의로 발전. 끝으로 강력한 반제국주의 정서가 공유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패배와 협상국의 간섭, 아타튀르크의 독립 전쟁 승리는 이슬람 세계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감과, 반제국주의 반격이 가능하다는 고양감을 동시에 제공함. 중앙아시아에 잔류한 오스만 제국 포로들의 영향도 컸다. 반면 중앙아시아 전통 문화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한 페르시아는 후진성의 상징으로 새롭게 상상되었다. 후진 민족의 발전을 향한 열망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격이라는 점에서 혁명적 자디드주의는 볼셰비즘과 정서적으로 매우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후 볼셰비키의 반제국주의 세계혁명에서 자신들이 동방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자디드의 차가타이주의: 중앙아시아 5개국의 형성은 외부 행위자인 소비에트 제국이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인가? 할리드는 전혀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공동체와 정체성에 대한 상상이 있었고, 자디드 사상가들과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식인들이 혁명기에 확립시킨 정체성이 거꾸로 소련 공산당의 민족 분류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북부 초원의 유목민(카자흐, 키르기즈), 중앙아시아 정주민(우즈벡, 타지크), 남부 유목민(투르크멘)이라는 다섯 개의 분류가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의 내적 동학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스만의 튀르크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디드의 차가타이주의는 중앙아시아를 튀르크와 이슬람의 공간으로 상상했고, 그 상징으로 티무르를 제시했다. 카자흐, 키르기즈, 투르크멘 지식인들은 차가타이주의 프로젝트와 티무르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고 다른 정체성을 발전시키며 소련의 SSR을 형성했다. 차가타이주의의 영향으로 투르키스탄(타슈켄트)-코칸드-부하라-호라즘이라는 상이한 행정 구역은 ‘우즈베키스탄’으로 통합되었다. 이 통합의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어 사용 인구인 ‘타지크인’이라는 정체성이 등장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정주민 지역은 우즈벡어와 타지크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이중 언어 지역이었으며, 오스만과 터키 공화국이 선진적 미래로, 페르시아가 후진적 전통으로 상상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지식인들 또한 차가타이주의에 열렬히 참여했다. 타지크인은 얼마든지 우즈벡인으로 전환될 수 있었고 이는 사마르칸트와 같이 타지크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이 우즈베키스탄에 포함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도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은 파미르의 시골 지역에는 우즈벡어 화자 자체가 거의 없었고, 자디드의 차가타이주의는 이 지역만을 ‘타지키스탄’으로 분리시키는 안을 지지했다. 이 지역은 너무 낙후하고 가난해서 타지크 민족주의나 타지크 민족 지식인도 없었고, 소련이 행정 구역을 만들면서 민족 형성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단 타지키스탄이 만들어지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우즈벡과 경쟁을 시작한다.

소련 체제의 공고화와 자디드의 몰락: 사회에 대한 급진주의, 반제국주의와 동방 혁명에 대한 감수성으로 볼셰비키와 자디드는 동맹을 맺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급진적 자디드는 공산당에 가입한다. 여기에 더해서 자민족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던 자디드와, 각 민족이 각자의 영토 경계 내에서 문화적 자치권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볼셰비키의 민족정책은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발탁(비드비제니예)과 토착화(코레니자치야)를 통해 공산당은 혁명과 내전기에 소비에트 체제에 참여할 충성스러운 현지 민족 당원을 계속 충원했다. 그러나 동방 혁명의 문이 닫히고, 소비에트 권력이 중앙아시아에서 공고해지면서 자디드와 볼셰비키의 차이가 계속해서 노출되었다. 자디드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시킨 급진주의의 언어를 구사한 반면, 볼셰비키는 어쨌든 외부자인 러시아의 맥락에서, 또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급진주의의 언어를 구사했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계급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중앙아시아에서 볼셰비키는 계속해서 계급의 언어를 사용하라고 강조했다. 중앙이 소련 경제의 지역적 분업을 추구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목화 기지로 발전시키려 했던 것과 달리 자디드 출신은 중앙아시아의 빠른 산업 투자를 요구. 하지만 전통의 언어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볼셰비키를 말하는(Speaking Bolsheviks)’ 젊은 신규 당원들이 유입되고 중앙아시아에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는 확신과 함께, 현지 통치를 위해 자디드와 협력할 이유가 사라졌다. 확고한 공산주의자 당원들은 혁명적 열정, 승진에 대한 열망, 개인적 원한 등 여러 이유로 자디드를 ‘구태 지식인’으로 맹렬히 공격하고 비밀경찰 OGPU는 이를 숙청의 빌미로 삼았다. 1926년 ‘이념 전선’ 개막, 1927년 ‘후줌’ 시작, 1929년-1931년 자디드 출당 및 숙청. 최종적으로는 1937년-1938년 대숙청으로 자디드가 처형당하면서 자디드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자디드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러시아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은 자디드가 러시아 식민주의의 영향으로 탄생한 소수의 지식인이었으며, 사회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할리드의 자디드 연구를 비판했다. 반면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스탈린 시기 러시아인의 우즈벡 민족 탄압의 희생양으로서 기억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시각 모두 근대 중앙아시아 사회 내에서 경합했던 다양한 시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며, 중앙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으로서 러시아 메트로폴 및 외부 이슬람 세계와 계속해서 교류하며 자체적인 발전을 이룬 과정을 무시하는 일이다. 특히, 전통에 대한 대대적인 혁명 시도, 우즈벡어의 표준화와 문자 개혁, 우즈벡과 타지크를 비롯한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 경계 획정 등 혁명기는 소련이라는 제국적 조건 하에서 제약이 있긴 했지만 활발한 국가 건설기이기도 했다. 자디드의 영향과 유산은 꽤 컸고, 그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여 현지의 전통주의자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민족의 희생자’로 단순화될 수도 없다.

본서의 의의 및 평가

2010년대에 들어 러시아 혁명을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과 노동계급의 지지와 같은 전통적 시선 대신에 제국의 해체와 복원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시도가 유행했다. Liliana Riga(2012)의 The Bolsheviks and the Russian Empire는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계급과 제국 주변부의 소수민족 엘리트의 연합 세력으로 보고 그 덕에 볼셰비키가 제국을 재통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Joshua Sanborn(2013)의 Imperial Apocalypse: The Great War and the Destruction of the Russian Empire는 러시아의 제1차세계대전을 국가 실패, 제국 해체, 탈식민화의 흐름으로 분석한다. Jonathan Smele(2016)의 The 'Russian' Civil Wars, 1916-1926: Ten Years That Shook the World 또한 러시아 내전과 볼셰비키의 승리를 기존의 적백(赤白) 구도 대신에 제국의 해체와 복원이라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Ilya Gerasimov(2017, Ab Imeprio)의 The Great Imperial Revolution 역시 같은 관점으로, 제국 해체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변경 지역의 인구가 제국을 복원하는 과정으로서 ‘제국 혁명’을 수행했다고 이야기한다.

소련 해체의 트라우마를 해결해야 하는 러시아 국내 학계 또한 볼셰비즘의 이념적 지향은 거부하지만 그들이 제국을 통합했다는 공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탈소비에트 독립국들도 역시 러시아 제국의 해체와 독립, 소련으로의 재편입을 민족사 관점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제국사 연구 경향,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러시아 학계, 탈소 독립국 학계 모두가 러시아 혁명에서 이념과 혁명적 비전을 주변화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런 경향이 러시아사 및 소련사에 참신한 구도를 제공해주며 혁명과 내전에 대한 이해를 크게 증진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볼셰비키를 혁명기와 내전기의 다른 주체와 구분시켜주고, 그 이전 역사의 다른 혁명들과도 차별화하는 ‘이념 요소’가 탈각되는 것이 이 시대의 온전한 이해를 막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제1차세계대전의 여파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모두 해체되어 국민국가들로 쪼개졌는데 어떻게 러시아만 다시 제국을 복원할 수 있었을까?

본서는 러시아 중앙 권력을 쥔 볼셰비키와 중앙아시아 주변부의 자디드가 결합하여 이 지역에서 파괴되었던 러시아 제국 질서를 복원하고, 소비에트 제국 질서로 전환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제국사 연구 경향의 주요 성과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이 책의 큰 미덕 중 하나는, 볼셰비키와 자디드가 일시적으로나마 결합할 수 있던 것이 그 둘의 혁명 이념이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회 혁명을 통해 후진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고, 그를 통해 동방/아시아의 다른 민족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비전을 공유했기 때문에 볼셰비키와 자디드는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념이 부재하거나 빈약했던 정착민 사회주의자/울라마 전통주의자는 이 과정에서 제압되었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아제르바이잔에서도 거의 유사한 구도를 통해서 소비에트 체제의 수립이 이루어진다. 반제국주의 이념이 소련의 아시아 지역에서 작용하는 양상은 대외 환경이 유사하게 형성되는 냉전기에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부터 냉전을 지구적인 탈식민화 과정 속에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모든 책이 그렇듯 본서도 완벽한 책일 수는 없다. 특히 자디드의 비중을 과장한다는 비판은 여전히 가능하다. 제국 해체와 복원의 과정, 그리고 우즈벡과 타지크 민족 정체성과 경계 획정이라는 차원에서는 자디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쉽게 설득이 된다. 하지만 그 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나타난 혁명적인 변화는 1930년대 스탈린 혁명에 따른 집단화, 산업화, 그리고 대조국전쟁에서 중앙아시아인들의 대대적 참여라는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스탈린 혁명의 시작과 함께 숙청되고 언급 자체도 금기시된 자디드의 유산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디드를 몰아낸 후배 세대인 우즈벡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스탈린 이후에 자디드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당과 사회에서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추가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에서 우즈벡 공산당원들이 덜 조명되었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사실 책의 분량 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선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자디드의 경제관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자디드는 혁명을 통한 민족의 근대적 발전을 추구했고,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경제적 전환을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로 생각했던 이들이다. 실제 1920년대에도 볼셰비키의 혁명 이념에는 국가 전력화(電力化) 비전이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NEP와 농업 문제, 중공업 투자를 둘러싼 다양한 비전의 경합도 중요했다. 자디드는 볼셰비키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즈베키스탄, 나아가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개발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을까? 본서에서는 목화 재배를 강제하고자 하는 볼셰비키와 종합적 경제 발전을 원하는 자디드의 구도로 다소 단순화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칼리놉스키가 그의 저서에서 타지크 경제학 전문가들이 대조국전쟁과 냉전의 맥락에서 형성되고 타지키스탄에 최적화된 개발 전략을 고안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듯, 기초적이나마 자디드가 상상한 발전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경제관을 드러내는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면 1920년대 중앙아시아에 대한 더욱 온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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