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해 (1)

1971년,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해 (1)

Srinath Raghavan의 1971: A Global History of the Creation of Bangladesh에 대한 서평

임명묵

1947년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인도 아대륙에서는 무굴 제국 말기부터 누적되어온 힌두교와 무슬림의 갈등이 폭발하게 되었다. 끔찍한 학살과 대규모 인구 교환이 발생했고, 아대륙은 힌두교 다수의 인도와 이슬람 다수의 파키스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귀속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40년간 세계를 규정할 지구적 질서인 냉전의 자장 아래에도 들어가게 된다. 평생을 반제국주의 운동에 몸 담았고, 독립 이후에는 사회주의적 개발을 추구했던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는 소련에 이끌렸고, 파키스탄은 자연히 미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편 1962년에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은 남아시아 냉전에 중국 변수를 더했다. 스탈린 격하 이후 중국과 관계가 소원해진 데다가 인도를 잃고 싶지 않았던 소련은 이 사안에 미온적으로 대응했고, 소련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키운 중국은 파키스탄에 접근했다. 미국, 중국, 파키스탄과 소련, 인도의 경쟁 구도가 자리 잡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동파키스탄에서 위기가 발생했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를 지원하는 가운데 카리스마적 지도자 인디라 간디는 파키스탄의 잔학 행위를 막고, 남아시아 지정학의 맹주로 자리 잡고자 하는 지정학적 야심을 드러내며 군사력을 동원해 파키스탄과 맞붙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 방글라데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스리나스 라가반의 책, <1971: 방글라데시 탄생의 치구사>. 2013년 하버드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됨.

위와 같은 서술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에 관한 가장 기초적이고 널리 알려진 설명이다. 하지만 인도의 역사가 스리나스 라가반은 그의 저서 1971: A Global History of the Creation of Bangladesh에서 사뭇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라가반은 1971년 방글라데시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이 사안을 둘러싼 수많은 행위자들의 인식과 행동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드러낸다. 1971년 1년 간 펼쳐진 이야기 속에 얼마나 많은 국제적 맥락과 외부 세력, 그리고 거시적 경향성이 맞물렸으며, 또 개별 의사 결정자의 편견과 실수, 혹은 결단이 사태를 어떻게 만들어나갔는지가 라가반이 보여주고자 하는 방글라데시 독립의 진짜 이야기다. 라가반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상식과 달리 방글라데시 독립은 결정된 것이 전혀 아니었으며, 개인의 선택과 우연이 겹치면서 드러난, 상당한 우발성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방대한 정부 문서와 회의록 등을 참고했다. 우선 인도에서는 네루 기념관과 각 문서고에 있는 민간 및 공식 문서를 참고하며 인도의 최고위급 의사결정 과정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 이 문제에서 가장 민감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파키스탄의 문서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이용하지 못했고, 방글라데시는 위기 당시 대다수 문서가 파키스탄 측에 의하여 파기되었기 때문에 역시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라가반은 회고록 및 다카에서의 구술 인터뷰를 통해서 방글라데시의 관점을 보강하고자 했다. 여기에 더하여, 라가반은 방글라데시 위기에 관여된 수많은 나라의 문서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전체적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책에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러시아, 호주, UN과 세계은행 등지의 자료가 동원되며 이 위기의 지구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일반적인 정치사와 외교사의 서술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1971년 한 해를 연대기적으로 훑으면서, 방글라데시 위기의 전개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1장에서는 1969년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와 정권의 위기 속에서 방글라데시 위기가 어떻게 발생했나를 이야기한다. 2장에서는 방글라데시의 자치 운동이 강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970년 선거의 결과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합의에 도출하지 못하고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경위를 보여준다. 3장 이후의 목차 구성은 연대기적 구성보다는 방글라데시 위기에 대한 각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3장, 4장, 5장은 각각 인도, 미국, 소련의 반응을 다루고, 6장, 7장, 8장에서는 지구적 공공 여론과 위기에 부차적으로 관여한 여타 국가들, 중국의 사태 인식과 대응을 보여준다. 9장과 10장에서는 다시 연대기적 서술로 전환하여 3차 파키스탄 전쟁과 그 경과를 이야기한다

독립 당시의 인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서론에서는 저자의 핵심 논지, 즉 방글라데시 독립은 결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우발성의 산물이었다는 주장의 배경이 주로 제시된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까지 방글라데시 독립에 관한 신화가 의심받지 않고 재생산되었던 것은 남아시아의 정치적, 학술적 맥락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 이는 인도의 음모로 벵갈이 무슬림 형제를 배신한 것으로 여겨지며, 방글라데시에서는 벵갈 민족주의의 필연적 귀결로 인식된다. 인도에서는 아대륙의 모든 무슬림을 대표한다는 파키스탄의 이데올로기가 파산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각 국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재현하고자 하는 기억과 서사가 제각각인 것이다. 남아시아 역사가들 또한 이런 문제 때문인지 인도 대분할이 이루어진 1947년 이전에 주로 집중하는 경향이 크고, 문화사와 사회사 연구가 우세한 가운데 정치사와 외교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약세인 흐름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재생산된 신화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거대한 지리적 이격과 언어적 차이, 경제적 격차와 왜곡된 권력구조로 인하여 부자연스러운 국가는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신화는 벵갈 엘리트들이 갖고 있던 중앙 정부에 대한 헌신과 파키스탄적 정체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방글라데시가 독립할 운명이 있었다면 왜 47년부터 독립까지 무려 25년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대신 집중하는 것은 지구적인 맥락이다. 방글라데시 위기는 느긋한 의사 결정이 불가능한 급박하고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이었으며, 이 우발성의 진로를 결정한 것이 바로 위기를 둘러싼 지구적 맥락이었다는 것이다. 이 지구적 맥락은 주로 냉전과 남아시아 지정학에 대한 통설을 따라 미국-중국-파키스탄과 소련-인도-방글라데시라는 대립구도로도 이해되나, 사실 이러한 구도조차도 전혀 사전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지구적 맥락 속에서 우연적 사건의 발생 여하, 발생 시점, 그리고 행위자들의 선택이 달라졌다면 얼마든지 다른 결말들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지구적 맥락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1970년대를 규정한 세 가지 흐름이다. 첫째는 탈식민화의 흐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제3세계에서 유행하는 주권론과 파키스탄을 포함한 다수 탈식민 국가가 경험한 경제적 실패가 강조된다. 둘째는 미국과 소련의 동서 냉전이다. 여기서도 양대 초강대국의 대립보다는 진영 내부 세력의 다원화가 더 주목받는다. 세 번째 흐름은 세계화다. 항공 교통이 일반화되고 지구적 통신이 활성화되면서 일종의 초국적 공공영역이 등장했고, 이 공공영역은 방글라데시 위기에서 앞의 두 요인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세 번째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남아시아,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의 의사 결정자들은 탈식민 세계의 분위기, 냉전 구도, 지구적 공공 영역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자신의 행동이 지구적 세력과 청중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계속해서 고민하며 결정을 내렸다.

탈식민화의 기수들, 반둥회의.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장에서는 쿠데타로 집권했던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이 퇴진한 1969년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유브 칸의 퇴진은 지구적 현상인 68 학생 시위가 파키스탄에도 상륙한 결과물이었다. 탈식민화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고등교육이 확대되면서, 파키스탄에는 정치적 의식화를 이룬 대학생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60년대에 파키스탄의 근대화 정책에 따른 불평등의 증대와 경제적 위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학생들은 1968년 서구에서 시작하여 지구적으로 확장된 60년대 반문화에 자극받아 행동에 나섰다. 락 음악으로 상징되는 지구적 반문화가 유입되었고, 제3세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급진 좌파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텔레비전으로 상징되는 통신 혁명의 영향이 컸다. 방글라데시 위기는 그 배경부터가 이미 지구적 맥락에 따라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학생 시위는 정권 퇴진을 강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68 시위와는 결이 달랐고, 그들은 아유브 칸을 실제 퇴진시킬 수 있었다.

1969년 동파키스탄의 시위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한편 1968년 서파키스탄의 시위는 동파키스탄으로 확산되었고, 학생 시위는 농촌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도시 청년 세대들이 여전히 촌락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촌향도 세대였기 때문이다. 동파키스탄의 요구사항은 교육 개혁과 정치 개혁, 자치권, 사회경제의 진보적 개혁, 친미 진영에서 비동맹으로의 선회 등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벵갈 지역의 정치 정당은 아와미 연맹과 그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부상했다. 신정부 수립을 둘러싼 혼란이 가시지 않자, 파키스탄 군부의 야히야 칸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거를 통한 민정 이양을 계획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 집권을 옹호하는 서파키스탄과,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장하는 동파키스탄의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서부와 동부를 통합하는 정당은 이슬람 정당을 제외하고는 부재했고, 이슬람주의 정당은 이때는 세가 약했다. 아와미 연맹은 벵갈 민족주의와 68 급진주의 덕택에 중산층 기반을 바탕으로 빈민층, 노동계급, 농민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선거의 승리를 직감한 아와미 연맹은 6개 조항의 자치 개혁안을 제시했고, 중앙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시 독립 시도까지 감수할지도 모른다는 여론도 등장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런 와중에 벵갈에서 발생한 대규모 사이클론과 엄청난 피해는 서파키스탄에 대한 분노를 더욱 키웠다. 서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의 피해를 무심하게 대했고 사실상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 사이클론을 계기로 동파키스탄의 대대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아와미 연맹과 그 지도자 무지부르가 독립을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사이클론으로 초토화된 파투아할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압도적 대승을 거둔 아와미 연맹.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2장에서 저자는 점차 심화되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갈등이 정치적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과정을 보여준다. 총선이 치러지면서 서부에서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파키스탄인민당(PPP)이 일부만 승리한 반면, 동부에서 아와미 연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 의석만으로도 단독 과반을 구성할 수 있었고, 야히야와 부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부토는 선거에 불복하면서, 다수당이 누구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펀자브와 신드라는 서파키스탄의 주요 지역이 누구를 지지하는지가 진짜 문제라고 반발했다. 무지부르는 의회를 일단 소집하면 거기서 아와미 연맹의 6개 조항 자치안을 논의하자고 제시했으나, 야히야와 부토는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파키스탄에서 의회 개원을 연기하며 시간을 벌려 했던 시도는 동파키스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 진영은 이렇게 된 거 당장 독립을 선언하자고 주장했지만, 무지부르는 무력 진압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개원이 최종적으로 연기되면서 대중 소요가 발생했고, 동파키스탄은 대대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수십 만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무지부르가 연설에 나서면서 독립 열기는 거세지고 있었다. 무지부르는 이런 에너지를 독립보다는 개헌을 통한 통치 구조 개혁과 자치권 확대에 쏟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치 개헌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야히야와 부토의 강경한 입장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야히야와 부토는 분리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와미 연맹을 불법화했으며, 군사 행동이 유일한 사태 해결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전체에 일시에 군사행동이 실시되었다. 파키스탄군이 수도 다카에서 무지부르를 생포하고 힌두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소수 벵갈 군대가 항전했으나 진압을 당했고, 그들은 인도 국경을 넘어서 생존을 도모하고 저항을 지속하고자 했다.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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