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국제 무역을 원했다: Red Globalization (2)
달러에 목 말랐던 소련의 이야기, 오스카 산체스-시보니의 Red Globalization 서평 (2)
1953년, 소련을 20년 이상 철권으로 통치한 스탈린이 죽고, 소련에도 마침내 ‘호시절’이 찾아왔다. 한국전쟁을 질질 끌면서 전후 양대 진영 대치 구도를 최종적으로 확정시킨 스탈린이 죽고 그의 후계자들은 먼저 한국전쟁부터 마무리 지으면서 서방 진영과 협상을 하고자 했다. 차기 권력을 획득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평화공존’을 외치면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비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이 시기가 호시절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1950년대에 소련 경제가 매우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소련 경제는 연 8-10%라는 고성장을 이루면서 빠르게 발전해갔고, 국민들의 소비 수준도 그에 맞춰서 높아졌다. 이제는 ‘내일 전쟁이 온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핍 생활을 견디는 시대가 아니라, 사회주의 발전은 더 많은 소비와 편리한 도시 생활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리고 소련 경제의 이런 발전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195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의 확립과 국제 무역의 확대였다. 소련은 발전된 자본재를 사와서 자국의 생산을 늘리는 것은 물론이고, 오렌지나 바나나 같이 소련 국민들이 더욱 많이 소비하게 된 세계의 다채로운 소비재를 수입해왔다. 그리고 국제 무역에서 이익을 확실히 챙기기 시작한 소련의 경제 관료들은, 국제 무역을 더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한 경화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1950년대를 거치며, 소련은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등의 서유럽 주요 선진국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발전기, 엔진과 같은 기계류, 페놀과 같은 화학제품 등 수많은 서방의 고품질 제품이 소련 경제의 부족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보완해주기 시작했다. 민간, 소비재 기술이 열악했던 소련은 공항에 설치할 대형 에어컨도 구매했다.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은 젊은 아르메니아 볼셰비키로서 스탈린의 충복, 나중엔 흐루쇼프의 측근이 되는 대외무역부 장관 아나스타스 미코얀이었다. 소련은 국내 경제를 운영할 때 보여준 일반적인 방만함, 느린 속도, 관료주의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대외 무역을 주관할 때, 미코얀은 철저한 계약 이행과 빠른 업무 처리 속도를 보여주었고,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 등을 설득하며 대외무역을 경제의 최우선에 배치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련 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수입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세계 상품 시장에서 결제할 수단인 경화가 필요했다. 국제 무역이 막 복원되기 시작할 때는, 서유럽 국가도 달러가 부족했기 때문에 소련과 경화를 통하지 않고 물물거래로 서유럽 상품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와 무역이 회복되고 달러가 풍부해지면서, 물물거래보다는 경화를 통한 거래가 압도적으로 선호되기 시작했다. 소련도 이제는 경화를 얻기 위해서, 자본주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수출품을 판매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소련산 제품들이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이 매우 낮았다는 데 있었다. 스탈린 시기 소련은 자체적인 산업화를 통해서 트랙터나 각종 기계류를 제작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많은 국가가 소련의 제조업 상품들을 나름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했었다. 어쨌든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안적 경제 체제를 건설하며 나치 독일까지 무찌른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소련산 제품이 일단 항구에서 하역되어 수출국으로 인도되자, 기대는 빠르게 실망으로 변했다. 소련산 장비는 성능 면에서 서방산 장비에 밀렸고, 잦은 고장으로 인하여 신뢰하고 쓸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소련 측의 A/S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소련산 제품을 구매한 국가와 기업에서 소련의 대외무역부를 향해 계속해서 항의 서한을 보냈고, 소련은 자국 제품을 세계 시장에서 판매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련의 수출품 비중에서 제조업 상품이 갖는 지위는 갈수록 떨어졌고, 소련은 옛 러시아 시절과 마찬가지로 목재, 광물, 에너지 자원 등 1차 산업 수출에 더욱 집중하면서 경화를 획득해야만 했다.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산 제품에 대한 큰 불만이 있었다. 동유럽의 경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동구권 분업 체계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련에 자국산 제품을 판매하고, 소련산 제품을 수입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산 제품이 품질이 낮고, 인도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모스크바에 불평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련에 인도하는 자국 제품들을 일부러 낮은 품질들을 골라 보내면서 나름의 소극적 저항을 전개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이익을 보려고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원자재든 제조업 상품이든 간에, 소련과 동구의 모든 국가들은 가장 상급 제품들을 수출 시장에 판매하여 경화를 얻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심지어 소련산 제품의 낮은 품질은 소련의 원조와 지원을 요구했던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21세기 들어 유행하게 된 ‘글로벌 냉전사’의 기본적인 설명을 생각했을 때 이 역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고전적인 설명은 새롭게 독립한 탈식민 국가들이 소련식의 발전 모델에 호의를 느끼고, 소련이 이를 활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카 산체스-시보니는 이런 이야기가 실제 현실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한다.
첫째, 모스크바는 탈식민 국가들에서 일정한 기회를 보기는 하였으나, 이는 서유럽 제국을 통하지 않고 제3세계와 직거래를 할 수 있어서 발생하는 상업적 기회에 관한 것이었다. 모스크바는 자국의 발전 모델을 제3세계에 ‘수출’하려고 하는 의지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소련이 줄 수 있는 원조액은 많지도 않았고, 미국하고 비교하면 그 수준은 더욱 초라해진다. 제3세계 국가들의 상품 시장으로서 소련 시장도 크지가 않았다. 만성적인 경화 부족에 시달리는 소련이 제3세계 생산품들을 다 살 수도 없었고, 국내 소비에서 소화할 수도 없었다. 소련은 제3세계에서 경제적 규모 면에서 자국하고 비슷한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같은 국가들하고도 경쟁하기가 버거웠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 제국 시기부터 남겨 놓은 거대한 유산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둘째, 제3세계 국가들이 일종의 국가적인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것을 소련식 모델에 대한 선호로 해석한 것은 큰 과장이다. 1930년대에 국제 무역이 붕괴하였을 때 국가적 경제 계획은 이미 전세계적인 유행이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소련과 전혀 관련 없이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추진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자국 식민지에서 마찬가지 계획 기반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구 식민지 국가들은 제국에서 배우면서 자신들만의 계획 기반 근대화 모델을 추구했고, 소련에게서 받은 아이디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시보니는 소련과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의 관계에서 훨씬 주도적이었던 이들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에 불타올라서 모스크바로 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은 대신 미소 냉전의 양강 구도를 활용해서,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미국은 국제 자본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나라였기에, 원조, 차관, 무역 등의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고는 했다. 이전 식민지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질서에서 나름의 유리한 위치를 협상하려고 하거나, 혹은 질서 자체를 이탈하려고 했을 시에는 몹시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바로 그럴 때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미국 진영의 공포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국가들이 제3세계 특정 국가의 독자적 경제 정책을 방해한다면, 그 국가는 소련의 문을 두드려서 지원을 요청하면서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더 나은 조건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물론 소련식 발전 모델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숱한 나라들이 소련행 비행기를 타고 소련 각지의 산업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소련의 기술 수준과 생산 방식이 영국과 프랑스라는 자신들에게 훨씬 더 익숙한 식민 모국에 비해서 상당히 낙후된 수준이라는 것에 실망했다. 소련은 언제나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 세계와 마찰을 빚을 때 완충재로 고려되는 부차적인 행위자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소련은 자신들의 원조로 산업 기반을 쌓은 나라들이 세계 시장에서 소련과 경쟁을 하게 되자 원조가 소련을 위해서 옳은 일이 맞는지를 고민하기까지 했다. 소련이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 자립을 도와주는 동안에 소련은 가치사슬의 더 높은 위치로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채택한 해법 중 하나는 ‘서양으로부터 배우기’였다. 소련의 명령-통제 경제는 제품의 질에서 발생한 문제를 신속히 파악하고 해결할 정도로 기민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장은 달랐다. 세계 시장에서는 소련산 제품에서 발생한 문제가 빠르게 보고가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세계 시장에서 얻은 자국 제품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개선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소련보다 더 우수한 기술력과 생산 표준을 갖고 있는 서방의 기업들을 참조하고 학습하면서 개선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부적인 경쟁 시스템과 효율적인 개선 메커니즘이 없는 소련의 경제 기관들은, 저자가 비교하는 남한의 재벌만큼의 신속하고 빠른 개선과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게다가 소련은 남한이 누렸던 미국과의 절대적 우호 관계도 부재했다.
결국에는 미약한 소련의 기술적 수준과 무관하게도 소련 경제가 얻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경화 수입 원천은 에너지가 되었다. 서유럽 각국은 소련을 통해서 저렴한 에너지를 구매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소련의 문을 두드렸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국영 석유 회사 ENI를 시작으로, 서방 기업들이 소련의 에너지 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기업들과 소련이 주로 맺는 협정은 역시 소련의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금속 공학 능력이 부족했던 소련은 에너지 수송 인프라에 필수적인 대구경 파이프라인을 자체 조달할 수 없었다. 파이프라인은 가장 상징적이었지만 여타 장비도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소련은 서방제 제품을 구입하여 석유 및 천연가스 인프라를 확충하고, 그렇게 확충한 인프라로 서유럽에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유럽 횡단 에너지 거래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을 나라는 서독이었다. 라인 공업 지대의 가동률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독은 새로운 수출 시장을 필요로 했고, 거대한 파이프라인 수요를 갖춘 소련은 최적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오늘날 러시아와 서유럽을 잇는 파이프라인은 기본적으로 이 시기에 설치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유럽 자본의 소련 진출 시도는 냉전을 주도하는 미국의 심기에 크게 거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미 1960년대와 1970년대부터, 철의 장막을 유지하라고 압박을 넣고 금수 조치를 취하는 미국과, 철의 장막을 넘나들며 자본을 소련에 침투하고 에너지를 서유럽에 침투하고자 했던 서유럽과 소련의 긴장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탈식민 혁명 전쟁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구도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까지 거치면서, 소련은 이제 원자재 수출을 통해 자국 경제를 운영하는 경제로 거의 완전히 세계 시장에 편입되게 되었다.
미코얀은 또 다른 거대한 에너지 수요국인 일본을 향해서도 손짓을 내밀었다. 시베리아의 석유를 이르쿠츠크까지 파이프라인으로 수송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일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철도로 수송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종국적으로는 파이프라인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역시 파이프를 비롯한 관련 자재는 일본이 설치해주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유럽보다 일본에서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소련과 일본의 거래는 제대로 성사될 수 없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송유관이 태평양까지 확장된다는 것은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군사 기반이 대거 확충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독, 이탈리아, 프랑스 등 여러 국가들이 소련과 관계를 만들어나간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소련과 협력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일본밖에 없었다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도 일본은 목재, 석탄, 극동 가스 탐사 등 소련의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계속 함께하며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을 수 있었다.
1964년 1월에 대외 무역 관련 간행물 책임자인 로마노프는 미코얀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에코노미체스카야 가제타(경제 신문)에 21개 일본 기업이 소련 시민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하는 광고를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고, 광고료는 달러로 지급하겠다고 제안을 건냈다. 에코노미체스카야 가제타 편집진은, ‘공산당 기관지에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 기업의 광고가 게재될 수 있나’하면서 광고 수용을 거절하고자 했다.
하지만 로마노프는 미코얀에게 광고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공산당 기관지건 뭐건 어쨌든 이든 좋은 달러 수입이 될 것이었다. 외국 기업의 광고는 이미 소련의 짭짤한 경화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우리 정부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원천을 왜 차단해야 합니까?”라고 로마노프는 편지에 적었다. 로마노프는 광고를 게재하지 않을 시에 발생할 정치적 불이익도 지적했다. 이미 오고뇩(Ogonyok) 잡지에 샤넬의 광고 게재 계약이 무산된 바가 있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잡음이 발생하면 “소련은 서방과 무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외국 반동 언론이 나팔을 불기 좋아하는” 상황만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미코얀은 로마노프의 편지에 동의했고, 공산당의 신문 에코노미체스카야 가제타에는 일본 자본주의 무역 파트너들의 새해 인사가 실려 나오게 되었다.
Red Globalization은 정치적 비방과 핵미사일 대치라는 냉전의 어떠한 이미지를 벗겨내고, 경제 기관 사이의 실제 대화와, 무엇보다 ‘돈의 흐름’을 보면서 냉전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사실 냉전을 새롭게 이해한다기보다는 냉전이라는 렌즈를 벗겨내는 것에 가깝다. 산체스-시보니는 소련과 사회주의권이 결코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독립된, 1:1로 대응될 수 있는 권역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 역시 발전된 기술력과 수출 시장을 얻기 위해서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던 고객이었다. 또한 소련의 냉전이 탈식민 세계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는 신화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주의 발전의 비전을 가진 소련이 제3세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구 유럽 제국과 미국이 제기하는 엄정한 무역 조건으로부터 숨통을 찾기 위한 제3세계 지도자들이 소련을 찾아간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소련의 기술력과 생산력은 서방에 비해서 엄청난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낮은 품질, 부실한 A/S는 세계 시장에서 소련산이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럼에도 계속 수출을 통해 경화를 확보할 필요가 있던 소련은, 품질과 상관없이 돈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수출에 집중했다. 이 에너지 수출은 유럽을 반으로 가른 견고한 철의 장막을 침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196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 이미 경제적으로는 ‘냉전’이라는 두 세계의 존재론적 대립은 사라지고, 달러와 석유의 흐름이 소련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마침내 1980년대에 소련 경제를 유가 의존적으로 취약하게 만들 것이었고, 1990년대 올리가르히와 2000년대 푸틴 측근이 의지하는 경제 관행까지 만들 것이었다.